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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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책의 제목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라니. 프로이트의 꿈분석에 관한 내용일까? 아니면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할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가 부정적이라는 걸까. 후자겠지? 하며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기실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지나친 가부장적인 면(아마 그 연배의 대부분 분들이 그러하겠지만)은 부정적으로 지각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내용이 좀 더 궁금해졌다.

 마치 『안네의 일기』나 『징비록』과 같이 이 책은 작가 본인의 일기장이었다. 작가는 몇 년동안 꾸준히 일기를 써내려갔는데, 저자의 일기가 기쁘고 즐거운 일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언젠가 법정에서 쓰일 날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가족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는 알콜중독자 아버지로 인해 저자(해열)의 가정은 늘 살얼음판만 같다. 저자는 삼남매의 맏이인데, 행여 동생들이 아버지의 주취와 폭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를 저자 본인도 어렸던 청소년기부터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치워야 해. 깨뜨릴지도 몰라.” 덜덜 떠는 손으로 제일 먼저 어항을 치우던 엄마. 그 모습을 본 내가 받은 충격이란. 엄마는 그때 내가 깨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우리 집은 무너진 모래성이라는 걸.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아빠를 믿는, 아빠가 변화되리라 믿으며 주님께 간구하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참으로 많이 속이 탔다. 가정해체를 야기한 당사자는 그대로인데 고통받는 것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족들이라니. 가해자-피해자의 불합리한 힘의 관계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혈연이라는 끈으로 맺어졌기에......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저자의 마음이 너무 절실했다.

 폭력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가족이기에, 아빠이기에 더 괴로웠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부친이 보이는 폭력과 그 가족들의 대응에 대해 이해와 공감과 더불어 답답함과 분노가 함께 느껴지곤 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을, 가족 구성원들을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주님, 제가 함부로 아빠를 판단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는 모르잖아요, 아빠를 통해 주님이 무엇을 행하실지. 제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좀 도와주세요. 주님, 또다시 반복되는 밤들을 통해 제가 느껴야 하는 것들이 뭐죠? 아니면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나요?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게 두렵다. 아빠가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면 좋겠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만약 액자를 부수다가 갑자기 어딘가에 꽂혀 우리에게 돌진하면.. 우린 속수무책으로 그냥 맞는 거다. 아빠 몸짓 하나에 모든 사람이 자는 척 숨죽여 떨고 있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람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두렵고 무서울 땐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그 대상의 약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미워하는 마음은 사그라진다. 아빠의 풀이 죽은 모습은 내 약점이다. 그저 아빠도 불쌍한 한 인간이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몇 주 전,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면서 언젠가 일이 터질 거란 걸 예감하고 침대 밑에 야구 배트를 갖다 놓은 내가, 더 이상 비극이 시작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야구 배트를 챙겨 놓은 내가 밉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특정 분위기 특히, 성인 남성이 언성을 높이면 그게 어디가 됐든, 누구든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우리 가게는 시장 입구에 있어서 ‘저녁’엔 술 취한 아저씨들이 자주 온다. 하지만 오늘같이 대낮은 예외다.

  게다가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취객이라니. 초점 없이 풀린 그의 동공에서, 아무렇게나 질러대는 목청과 따로 노는 손짓에서 나는 아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무섭다. 또 가슴이 뛴다. 그리고 측은하다.

 저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 아빠. 그럼 누군가는 집에서 도어락 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을 텐데.

 들의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내가 측은하다. 결국 나나 당신네나 우리 모두는 다 측은한 존재일까.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와 가족들이 분리된 이후 저자가 20대에 이르러 대학에 들어가 영화를 전공하면서 나타나는 저자의 생각이나 감정의 결은 더욱 섬세하다. 대학에 진학해 영화를 전공하는데 자신의 작품에 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 걱정하는 저자의 모습.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감독인 나 자신이고, 나의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라고,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주 친한 사람들 소수 외에는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모습들… 저자가 느끼는 만성적인 우울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일기 속에 엿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한켠으로 나는 저자의 20대를 읽어 내려가며 안도했다.

 비록 가정폭력의 PTSD로 내재된 심리적 문제가 자주 신체화 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주체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주어서,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사실 20대에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 않나. 그런 마음을 품으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저자의 취향이 엿보일 때는 나도 함께 기뻐했다. 치유와 안정감을 야기하는 반 고흐의 그림이라든가, 김애란 작가를 좋아하는 저자의 취향들. 그래 이 작가 나도 좋아해! 하는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나도 신뢰하는 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게 많을수록 그게 그만큼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저자의 취향에 대해, 저자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특히 저자가 만든 영화가 궁금해졌다. 주제가 반복되면 어떤가. 저자가 언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처럼- 가족에 대한 주제로 계속 영화를 만들어도 각각의 영화가 모두 다른것처럼, 해열작가님 또한 ‘아버지’라는 한 주제를 통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그만큼 진솔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겠지. 글도 이렇게 호소력이 있는데 영화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반 고흐 전> 보러 혼자 서울에 갔다 왔다. 이제 혼자서도 잘 돌아다닌다.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빈센트의 그림들은 정말이지 끝장났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마음밖에 안 들었다. 고흐 그림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자주 봐서 그런가? 게다가 그의 일생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내 평생의 스승이자 동료이고 하나뿐인 연인이다. 나는 빈센트만 편식한다. 그의 그림이 내 활력이 되어주니 이보다 더 좋은 영양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빈센트만 편식한다. 동경한다. 편애한다.  그의 푸르고 노란 그림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겐 위로고 안정제다. 빈센트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그의 마음이 그림에도 스며들어있는 거 같아 놀랍다. 서울에 갔다 온 뒤로 내 책상엔 빈센트가 더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지는 건 취향뿐 이다. 난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신기하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졸업 작품은 좀 다르게 찍고 싶었다. 1학년 때의 그 첫 작품이 또 나올까 봐 두려웠다. 이건 지금도 여전하다. 유명한 감독이 ‘감독은 평생 하나의 작품만을 만들 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갈수록 그 말에 공감한다. 내 마지막 작품은 곧 내 첫 번째 작품의 모방이 될 것이며 결국 나는 일생동안 하나의 영화만을 찍어낼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자기 복제만 끊임없이 하다 죽을까 봐 겁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어. 아직 내 안에 아빠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게 많은가 본데.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기실 이 숨기고만 싶은, 누군가에게 공개하기에는 슬픔과 고통으로 채워져있는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편집의 과정을 거친 작가님의 그 용기가, 계속해 나아가고 성장해가는 작가님의 모습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빠른)92년생 독자 한 사람이 95년생 해열작가님의 행보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앞으로 세상에 나올 작가님의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한편, 나도 머지않은 시일 내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어 그 때는 해열작가님이 나의 독자가 되고 나는 해열작가님의 관객이 되기를 깊이 소망해 본다.

 


  나는 자꾸 시도한다. 생각하고, 공부하고, 느끼고, 표현하고 흔적을 남긴다. 자꾸 남긴다. 아직 미완인 것들이 많다. 내 작품이지만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도, 또 반대로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싶은 것도 있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난 왜 이런 걸까? 사실 성장이나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시간 같은 것들은 애초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고, 일어나야만 했기에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뿐 결국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건 인간이다. 그러니까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파국으로 누군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장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장 할 것인가? 파멸할 것인가?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by papyros 2020. 10. 26.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