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차에 책 내용을 모두 완독했으므로 이번 주차는 ‘추천의 말’ 을 읽으며 조남주 작가님의 소설『사하맨션』 에 대해 다시한 번 정리하고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2주차 쯤 영화 <기생충>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 은 분명히 ‘자본’에 의한 계급 차별과 갈등이 주가 되는 소설이다. 신샛별 평론가님이 ‘추천의 말’에서 표현하신 것 처럼, 주거와 의료,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하’의 삶은 그 자체로 차별이 될 수 밖에 없다.
타운 주민/L2/사하 라는 뿌리깊은 계급차별을 공고화한 것도 결국 실체없는 권력, 자본의 흐름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당연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품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세계에는 균열이 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균열, 건강한 균열을 바탕에 둔 사하와 L2의 연대와 저항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마치 담쟁이 넝굴이 하나되어 함께 넘어갈 때 강하듯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주었듯 약자들 간의 연대를 통한 한 목소리의 외침이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들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선을 비로소 허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산학협력 회사 현장에서 희생당하는 학생이 없기를, 한 개인이 자본과 맞바꿀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길, 그리고...... 자본의 유무로 여러 혜택들이 더 주어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이기를 .. 이 책을 읽고 진실로 바란다.
여러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유를 추구했던 우미,
총리관에 들어가 권력의 실체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겨눈 진경,
사하인 도경의 신분이 아닌 내면을 보고 관계를 맺었던 의사 수,
진경의 총리관 출입을 은근히 도왔던, 조용한 방식으로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던 사하맨션의 관리실 영감과 소개소 소장,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기존 사회의 질서가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향하던 사하맨션의 수많은 개인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늘어나기를 진실로 소망해본다.
한 동안 사하맨션의 주민들이 많이 그리울 듯 하다.
사상의 논리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인간은 셋 중 하나가 된다. 핵심 부품, 소모품, 폐기물. 『사하맨션』 은 소모품 또는 폐기물로 전락한 절대 다수의 인간이 경험하게 될 총체적 박탈의 상황을, 주거,노동,교육,보건,의료 시스템의 바깥에서 지옥을 견디는 난민들의 공동체를 상상한다. 아니, 그들이 단지 견디고 있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차별과 배제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에는 단호히 맞서고, 상처 입은 방문자들에게는 절대적 환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항과 돌봄의 공동체이기도 한 것이다.
- 신샛별(문학평론가), 「추천의 말」 중에서
미스터리한 죽음으로 시작한 소설이 장르적 쾌감 대신 서늘한 응축의 힘을 밀고 나가 마침내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선언할 때 나도 모르게 그 다음을 기다렸다. 이 소설은 미래를 바꾸게 될 한 여성 전사의 탄생에 관한 긴 쿠키영상이다. 설레지 않는가.
이번 4주차에는 지난 3주차에 이어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311호, 우미」 , 「701호, 진경」, 그리고 마지막 「총리관」까지 모두 읽으며 작품의 결말을 보고 말았다. 원래 마지막 한, 두장을 남겨두고 일독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인물 각각의,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의 서사에 몰입되어 후반부를 달렸다.
『사하맨션』 이라는 작품 전체를 읽고 난 후 전체적인 느낌은 무언가 짧고도 굵은 울림을 주는 듯 하다. 지난 주 영화 <기생충>과 더불어 이 소설의 서사에 대해 다룬 바 있는데,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있다고 믿는 어떤 '운명', '굴레'라는 것을 당연하게,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해야만 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 할 수 있었다.
나비 폭동이 희미해질 즈음이 되자 원주민이던 L2보다 그 2세와 3세들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애초에 L2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의문도 저항도 없었다. 당위나 의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운명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원래 그런 삶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함께 자란 아이들의 진로를 궁금해하지 않고, 2년마다 체류권을 갱신하며 살다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아기를 남기고 나오는 삶.
- 조남주,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사하맨션』, 245쪽.
원래 그렇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원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조남주, 「311호, 우미」, 『사하맨션』, 273쪽.
"할머니, 나는 중요해. 나는 우리 아기가 아래층 아기보다 늦는 게 속상해. 아래층 아저씨가 쟤는 왜 저렇게 누워만 있냐고 그러는 것도 싫어. 우리 아기 걱정해 주는 척 자기 애 자랑하는 거잖아. 싫고 좋고, 속상하고 기쁘고, 그런 마음들이 어떻게 안 중요해."
- 조남주,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사하맨션』, 249쪽.
그런 점에서 우미가 유년시절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 아무 의문없이ㅡ 그냥 당연히 그래야만 해서 정기적으로 출석하던 연구소의 조직검사에 불응하고 도망치고자 했던 시도, 그리고 그런 우미의 도망을 도왔던 연구소의 몇몇 구성원들, 아랫집 아이와 다른 '우연'의 성장에 속상해하고 슬퍼했던 우미, 그리고 총리관에 들어가 그곳의 실체를 목격한 진경과 진경 이전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모두들 죽지 않기 위해, 사장되지 않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라 여긴다.
비록 수십년 전 타운에서 벌어진 '나비폭동'이 물대포를 통해 비극적으로 진압되었을지언정,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싶었던 모든 개인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그러한 작은 개인들 ,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긴다.
죽었으리라 여겼던 한 여인의 사하맨션에서 소개소 소장으로 살아있으며, 연구원에서 연구소의 기밀을 지니고 도망나간 한 연구원이 사하맨션의 관리실 영감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진경이 총리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진정한 삶'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작은 불씨를 가진 개개인의 행동이 결국은 변화를 만들어내리라 여긴다.
부당입학(비리)에 대한 예민성이 결국 사회 변화로 이어졌듯이, 그리고 지금도 정치, 경제 등 수많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듯이...
조남주 작가님의 신작, 『사하맨션』 은 그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를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묘사하여 독자들의 타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조남주, 「311호, 우미」, 『사하맨션』, 283-284쪽.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
바람이 불었다. 총리관을 지키듯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무섭게 흔들렸다. 미처 노랗게 물들지도 못한 초록빛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떨어진 잎사귀에 날개를 펴고 앉았다.
『보라색 히비스커스』.2019년 5월 민음북클럽 첫 번째 독자 프로그램으로 올라온 선정 도서들 중 가장 아름다운 제목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고등학생 캄빌리가 드넓은 세계와 분명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성장기' 라는 이벤트 페이지 소개문구에 이끌렸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는 교사가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성장'이란 화두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유독 청소년을 다룬 성장소설, 교양소설, 입사소설 등의 서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라색 히비스커스』 라는 책을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서 읽고 싶은 도서로 지망해 신청링크를 제출한 다음, 별다른 안내문자나 연락이 없어 잊고 있던 찰나 ...... 한 달이 넘게 흐른 6월 말, 집으로 책 한 권이 배송왔다.
그제서야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 당첨된 사실을 확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숨가삐 2019년의 반년을 보낸 ㄴ내게 주어진 민음사의 선물 같아서 책을 펴며 행복했다. 이 아름다운 책의 제목에는 과연 어떤 내용과 의미가 담겨있을 까.
프로그램 신청 당시 이벤트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던 문구처럼, 작품의 내용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교육 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들에 정서에 주목한다. 주인공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는 나이지리아 지역 사회에서 굉장한 부를 갖추고 독재정부에 대항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유진'의 자녀이다. 유진은 유년 시절 선교사들을 따라가 신학교의 교육을 통해 성장한 가톨릭 신자인데, 그의 종교에 대한 집착과 과도한 신봉은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신앙을 갖고 태어나 성당에 다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불편할 정도였다. 작품을 읽으며 '유진'의 언행이 등장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라는 불편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이 올라왔다. 가톨릭 신앙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자비, 자애를 중점에 두는 신앙인 데 반해 캄빌리와 자자의 아버지 '유진'은 가톨릭 종교를 마치 집안에서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종교의 교리를 지키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진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시키고 있었다. 식전기도를 지나치게 길게 해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생리통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해 불가피하게 씨리얼을 먹은 캄빌리가 미사 전 공복재를 지키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 (* 실제로 공복재는 미사 1시간 전이 아닌, 영성체를 하기 전으로부터 1시간 전 음식을먹지 않는 규정인데 작품 속 유진은 그것을 미사 1시간 전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오인인지, 지나친 신앙이 나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 이교도인 아버지(할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심지어 함께하는 것도 꺼려하며 억지로 개종시키려는 모습, 할아버지의 그림을 지니고 있던 딸에 대한 한 폭력, 아들 자자의 유년시절 첫영성체 교리문답에 1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망가뜨린 일화 등..... 유진 자신의 입장에서는 신앙을 지키려는 자랑스러운 행동일지 몰라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곧 폭력일 뿐이었다. 심지어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적 관점에서도 사랑이신 주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폭력을 저질렀을 뿐더러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처벌자로서의 하느님만을 알아야만 했던 가족들.)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지 않고 그의 부친이 가톨릭 신앙을 믿지 않고 나이지리아 전통을 따른다고 하여 이교도로 간주하여 냉소적으로 대하며 효의 예를 다하지 않기까지 했다.
가톨릭 신학교를 뛰쳐나갔던 헤르만 헤세가 받은 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유진의 자녀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리가 앞으로 열여섯 가지 구 일 기도를 암송할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리고 일요일, 첫 번째 기도일이었던 삼위일체 주일에 우리는 미사 후에 남아서 구일 기도를 시작했다. 베네딕트 신부가 우리에게 성수를 뿌려 줬다. 일부가 내 입술에 떨어져서 기도할 때 텁텁한 짠맛을 느꼈다. 아버지는 오빠나 내가 성 다대오를 향한 열세번째 간구에서 졸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는지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0-51쪽.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또다시 들리는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아까보다 더 사납고 시끄러웠다.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4쪽.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기도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이십 분을 넘긴 후에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로 마무리 짓자 이페오마 고모가 혼자 튀도록 목소리를 높여서 "아멘."이라고 말했다. "밥 식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오빠?" 고모가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냅킨 펴는 동작을 계속했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5쪽.
종교적인 내용 뿐 아니라 학업 면에서도 유진은 그의 자녀들에게 엄격했다. 집서는 물론이고 이페오마 고모가 거하는 은수카에 처음 놀러갈 때 조차도 빽빽한 일과표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자녀들은 '1등'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가 자녀들에게 학업 등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강요하는 모습은 올해 초 방영되었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이나 영조의 '사도세자' 에 대한 양육을 쉽게 연상시킨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만 했던 나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 너는 왜 모든 환경이 주어져 있는데 하지 못하냐는 자신과의 비교, 자신의 과거환경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유진이 지닌 출생과 가족환경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졌으며 강박적 집착 또한 드러났다. 사랑과 칭찬, 존중 없는 채찍질, 과도하고 비뚤린 부모의 욕망과 열등감이 자녀를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을, 유진의 언행과 캄빌리의 표현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와 내게, 다른 애들이 1등하는 걸 볼고 성심여학교와 성 니콜라오 학교에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곤 햇다. 아버지의 학업에 돈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 특히 그의 불신자 아버지, 우리 파파은누쿠는 말할 것도 없고 - 아버지는 늘 1등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나를 꼭 끌어안고, 많은 것을 받은 자에게는 많은 기대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내 안의 뭔가를 따뜻하게 만드는 표정으로 내게 미소 짓는 것을 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4쪽.
"거울을 봐."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거울을 보라니까." 거울을 받아서 들여다봤다.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보어를 섞어서 물었다. "하나요."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가벼운 먼지 이쿠쿠가 스프링이 풀리듯 갈색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불어왔다. 입술에 앉은 모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오 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63-64쪽.
그러나 캄빌리와 오빠 자자가 함께 이페오마 고모 댁인 은수카에 머무르는 경험을 한 이후 그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일방적인 폭력 하에서 성장해 온 세계가 이상하며 비정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느끼고 변화, 성장하게 된다. 단적으로 주어진 일과표 대로 기도하고 공부해오는 행위 외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의 집안 일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캄빌리가 처음으로 아마카를 통해 집안일을 배워나가는 모습, 감정표현이 없는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아마카의 말을 곱씹는 모습, 파파은누쿠(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나누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싶다는 욕망.... 집에서 그들이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 하에 '죽어있었다'면, 은수카에서는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더욱이 그 나이대 청소년들이 충분히 지닐 수 있는 욕망(아마카의 음악을 함께 듣는 것, 신부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지니는 '청소년 다운 청소년'일 수 있었다. 특히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이 얼마나 자녀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개성을 인정하는지가 아마카의 직설적인 표현들에서 잘 드러났다. 처음 사촌인 캄빌리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며 경계하는 모습들도 그러했고 견진성사 직전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는 아마카의 용기가 캄빌리와 자자의 성장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작품의 서두 자자의 언행이 매우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여긴다. 기실 작품의 서두를 읽을 때만 해도 가톨릭 신자인 나는 성체를 모독하는 자자의 언행에 충격을 받았다. 굉장히 버릇없는 사춘기 청소년이네! 라며 혀를 휘두를 정도로.
그러나 작품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들의 성장과정과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서두에 등장했던 - 그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 자자의 행동이 너무도 당연히, 해야만 했던 행동이고 진정으로 용기있는 변화의 시도였다고 여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그 폭력의 굴레에서 자자와 캄빌리, 그리고 어머니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부장적인, 구습적인, 폭력적인 , 잘못된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비판적 사고와 표현이 용인되어야 진정으로 건강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다. 은수카에서 그들이 비로소 접한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처럼.
유진은 분명 나이지리아 정부에 대해서는 <써라운드>라는 신문을 간행하면서 지하운동을 펼쳐갈 정도로 독재정부의 부정함과 부당함을 비판하는 용기있는 자이다. 작품에도 , 등장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어쨌든 비용을 부담했으며 싫은 소리를 조금 했을지언정 여동생 이페오마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의 가정에서는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독재자였으니 이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앙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배웠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의 열등감이 가족들에게 군림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그가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부당한 폭력임을 자인하는 순간, 그는 그의 삶 전체를 잃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 작품 후반부 그가 파파은누쿠(할아버지) 그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웅크리는 그의 딸 캄빌리를 향해 발길질을 하고 벨트를 휘두르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른 것 이후, 그리고 그가 자자의 행동에 크게 화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또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아내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으리라 여긴다.
"자자, 너 영성체 안 했지." 아버지가 조용히, 질문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오빠가 식탁 위의 미사 경본에게 말하듯 그것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 웨이퍼 먹으면 입내 나서요."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 나사라도 빠졌나? 아버지는 평소에 그것을 꼭 성체라 부르라고 했다. '성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이 가진 본질과 성스러움에 근접하기 때문이었다. '웨이퍼'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웨이퍼는 아버지의 공장들 중 하나에서 생산하는 것 - 초콜릿 웨이퍼, 바나나 웨이퍼 - 이자 사람들이 비스킷보다 좋은 걸 자식에게 주고 싶을 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부님이 자꾸 제 입을 만져서 구역질 나요." 오빠가 말했다. 내가 자길 쳐다보고 있음을, 충격받은 내 눈이 입 다물라고 애원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 쪽은 보지 않았다.
"그건 주님의 몸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아주 낮았다. 하얀 고름이 찬 두드러기가 구석구석 퍼진 아버지의 어굴은 아까부터 부어 보였지만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님의 몸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받지 않을 순 없다. 그건 곧 죽음이야, 너도 알잖니."
"그럼 죽을게요." 오빠는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가 콜타르색으로 변했으면서도 이제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죽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높은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 절대로 떨어지리라 생각지 않았던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를 찾듯 식당을 휙 둘러봤다. 그러고는 미사 경본을 집어 그것이 식당을 가로지르게끔 오빠를 향해 던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5-16쪽.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마카가 엄마 말을 못 들은 양 아마디 신부에게 말했다.
"교회의 주장은 서양식 이름이 있어야만 견진 성사가 유효하다는 거잖아요. '치아마카'는 하느님이 아름다우시다는 뜻이에요. '치마'는 하느님이 제일 잘 아신다는 뜻이고요. '치에부카'는 하느님이 가장 훌륭하시다는 뜻이죠. 이 이름들이 '바오로'나 '베드로'나 '시몬'만큼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나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326쪽.
한편 3년 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출간한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이번 작품에서 사회속에 만연히 자리하고 있는 성 불평등(차별적 요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비록 나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이슈에 대해 깊이있게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으며 더욱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해당 내용들은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많이 사라진 내용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 드러난, 그리고 우리도 수십년 전까지는 분명 존재했던 여성에 대한 성 불평등의 내용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여성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들, '여성은 치마를 입고 남성은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편견, 그리고 성당 안에서 여성 만이 미사보를 필수로 써야 한다는 인식들... 이런 사회 속 만연히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일상 속의 의문을 해결해 나갈 때 성 차별의 문제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상을 바꾼 변호인> 이라는 실화 바탕의 영화를 관람한 바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얼마 안되는 여성 변호인 긴즈버그가 성에 대한 불평등한 법률에 의문을 지니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려진다.
여러 진통들이 많긴 하지만, 한국사회도 남녀를 막론하고 불평등한 것들에 모든 합리적인 개인들이 비합리적인 사소한 것들에 대해 자그마한 의문을 가지는 데서 시작하기를 바란다.
이미 변화되기 시작했지만 소소한 예시들로는, '왜 가사노동과 육아는 여성의 것들인가?' '왜 결혼 시에 남성이 집을 장만해 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가?' 등을 들 수 있겠다.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이론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다만 우리가 모두 어느 순간에는 약자, 소수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권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다.
"누가 누굴 돌보게 될지는 모르죠. 1학년 토론 수업의 여학생 여섯 명이 결혼했는데 주말마다 남편들이 벤츠나 렉서스를 타고 와서 오디오랑 교과서랑 냉장고를 사 줘요. 학생들이 졸업하면 걔들도, 걔들 학위도 남편 소유가 되죠. 모르겠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99쪽.
"은나, 아니."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다. "선교사들 탓이 아니에요. 저는 미션스쿨 안 나왔나요?"
"너는 여자잖아. 여자는 자식이 아니야."
"에? 자식이 아니라고요? 오빠가 언제 아버지 다리 아프시냐고 물어본 적 있어요? 제가 자식이 아니면 앞으로는 아침에 잘 일어나셨냐고 안 물어볼게요."
파파은누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내가 조상님 곁에 있게 됐을 때 내 영혼이 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09쪽.
성 베드로 예배당에는 성 아녜스 성당에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촛대나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도 없었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가능한 한 많이 묶게끔 두건을 묶지도 않았다. 봉헌 행렬을 위해 나올 때 보니 어떤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기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지를,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느님의 집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되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되지, 특히 하느님의 집에서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91쪽.
서평을 마무리하며 ...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보라색 히비스커스'인지를 다시금 고찰해본다. 이페오마 고모의 집 마당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보기 전까지, 캄빌리와 자자에게 '히비스커스'라는 꽃은 '빨강색'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162쪽) 그러나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존재는 새로운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전에는 보도 듣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아이들은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자가 히비스커스 꽃을 그들의 집 앞마당에 심으며 이를 소중히 가꾸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었을까. 은수카에서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지니고 싶다는 그 소망...
그런 점에서 자자의 저항과 어머니의 결단은 그들이 진정으로 희귀하고 향기로운 히비스커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많이 아픈 만큼 희귀하고 향기로운 책이라 여러 번 재독하고 음미하고 싶은, 다채로운 색의 소설이었다.
(책 후반의 번역가 해설을 통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7쪽.
"일단 오빠를 은수카에 데려갔다가 이페오마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거예요." 내가 마한다. "아바에 돌아가면 오렌지나무도 새로 심고, 오빠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심고, 저는 익소라꽃을 심어서 나중에 꿀을 빨아 먹을 거예요."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너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물기를 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