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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조선마술사>

 

마술사는 마술을 통해 관객들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옵니다. 가난이 없는 세계, 아픔이 없는 세계, 전쟁이 없는 세계, 원통함이 없는 세계, 분노가 없는 세계이옵니다.”

그 세계는 거짓이 아니더냐? 환상일 뿐이지 않느냐?”

고통 가득한 현실보다 행복 넘치는 거짓이 때론 삶을 버티게 하옵니다.”

(<조선마술사> 155-156.)

 

부자들은 마술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즐길 기회가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가난하고 미천한 백성들에게 물랑루 공연은 정말 큰맘 먹고 오는 자리이옵니다. 빈궁한 이들에게까지 비싼 입장료를 받아 배를 채우고 싶진 않사옵니다. (중략) 마술 앞에선 만인이 평등하옵니다.”

(<조선마술사> 156.)

 

내일이 오늘보다 밝다면, 배성들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옵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어둡고, 내일이 오늘보다 어둡다면 그건 곧 하루하루 죽음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특히 작년부터는 조운선 침몰에 돌림병에 가뭄이 이어져 더욱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저는 그들이 잃어버린 그 내일을 제 부족한 마술로나마 찾아 주고 싶사옵니다.

(<조선마술사> 157.)

 

현실을 견디기 힘든 사람은 저마다 황당한 꿈을 꾸옵니다. 이뤄지기 힘들지만 그 꿈을 꾸는 동안엔 위로를 받사옵니다. 마술은 그들의 꿈을 판 위에 잠시 옮겨 보여주옵니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마술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마술을 만드는 것이옵니다.”

(<조선마술사> 158.)

 

 

 작품 속 (정조로 추정되는) 임금과 물랑루의 마술사 환희의 대화 중 일부이다. 위의 인용구절에 볼 수 있듯 환희는 마술사로서 남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다. 마술 공연은 부자富者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빈자貧者들을 위한 자리라는 것, 그리고 물랑루 공연에서 마술이 펼쳐지는 그 순간만큼은 반상班常의 구분이 없는 것. 이는 분명 조선이라는 당대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가치관이다. 특히 환희에 따르면 마술의 의미는 마술을 관람하는 관객들, 바로 그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마술을 보는 이 자신이 마술이라는 환상을 통해 삶의 고통과 시름이 덜어진다고 믿는 순간 마술은 사실이 된다.

 그런데, 이는 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환희가 이야기한 마술의 의미와 동일한 역할을 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다. 작중 배경인 조선 후기 당대 사회 속에서 민중들, 심지어 규방 여성들의 삶에 시름을 잊게 해주는 것이자 유일한 낙은 바로 소설 읽기였다. 이덕무의 저서를 보면, 전기수가 <임장군전>을 낭독하던 도중 이에 청자가 이에 몰입하고 심취해 담배 써는 칼로 전기수를 살해했을 정도이니 이는 당시 소설이 민중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부녀자들은 세책(소설 대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비녀나 팔찌를 팔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빚을 내어 이를 감당하느라고 가산을 기울인 자도 있을 정도였으며, 작품 속에서 청명옹주가 부왕父王을 위로하기 위해 심청전 필사본을 별당에 두고 온 것처럼, 조선 후기 어느 아비도 시집가는 딸을 위해 임경업전을 밤새 필사해 아비 그리울 때 보라며 딸의 손에 넘겨준다.

 이처럼 당대 조선에서 소설은 시름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환희의 마술과 교차되어 청명옹주의 소설쓰기(소설 필사)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작품 자체도 마술을 소재로 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청명과 마술을 하는 환희의 만남, 이들의 만남과 사랑이 의미가 있는 것은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늘 응달에서 그림자처럼 어둠속에 숨어 살아온 청명옹주는 소설로서 무료함을 달래 왔다. 그리고 환희를 통해 궁궐 담장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마주하며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오래도록 시달리며 성장해 온 환희는 청명이라는 여인을 만나며 혼자 지니고 있던 자신의 서사를 풀어 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청명과 환희의 만남은 소설과 마술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지 않을까. 분명 우리 삶은 소설이나 마술처럼 모든 것이 환상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내 삶에 소설이나 마술이 들어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사랑이라는 환상또한 실현되리라 믿는다.

지금도 유럽 어딘가를 떠돌며 마술 공연을 펼치고 있을 카타리나와 그녀의 조수 이븐 폴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다.

 

 

    

 

2. 영화 <조선마술사> & 시네마토크


 20151230. 2015년 한 해 동안 많은 영화들을 보았지만 해를 장식하는 마지막 영화가 된 <조선마술사>. 소설을 먼저 읽었고, 그 때문인지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각색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고 시사회를 관람했다.

영화에 등장한 물랑루의 화려한 모습. 7억짜리 세트를 지은 만큼 영화로 구현된 마술 공연장, 물랑루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원작과 비교해 삭제되거나 달라진 점이 많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영화 도입부에서 여왕의 대관식 장면을 제거하고, 정조임금의 청명에 대한 부친의 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 등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앞선 배경이나 상황이 제거되고 청나라로 떠날 위기에 처한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은 작품의 초반 내용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배경설명이 불친절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환희가 마술이라는 것을 대하는 자세(귀족만을 위한 마술이 아닌, 시름 있는 백성들이 잠시라도 현실을 잊기 위한 그러한 마술)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소설 전체에서 누누이 마술은 그 환상을 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핵심 메시지를 삭제한 것이기에 영화 스스로 추구할 가치를 제거해 버린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특히 사랑이야기의 핵심이 되자, 두 사람 간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마술 장면인 낙분술과 오작교 신을 왜 삭제했는지 퍽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두 장면이 존재했더라면 영화의 장면구현으로서도 충분히 관객들을 사로잡았으리라 보는데, 이 장면을 삭제한 것은 매우 아쉽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환희와 귀몰의 마술대결을 삭제 해 버린 점, 그리고 환희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마술사적?) 존중을 한 귀몰을 영화에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지키지 않는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그려냈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 매우 아쉬웠다.

 김탁환 선생님과 이원태 감독님께서 시네마토크에서 말씀하셨듯이, 정말 소설 전체를 제대로 구현해 낸 뮤지컬로 작품이다시금 재개봉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결국 영화로서의 각색에서 가장 큰 패착요인은 마술의 외적인 것에 치중해 마술이 지니는 가치와 내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두 제외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스크린 및 여타 자본의 한계가 있기에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구현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행 요인은 외적인 것 단 하나보다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가치를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공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by papyros 2016. 1. 1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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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읽고

 

교회 안에서도 때로는 자신의 사욕을 탐하는 사람들이 있고, 국가 안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지에 따라서 두 나라 중에서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가 정해집니다.’ (280.)

 

 

 위 구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신국론의 핵심 내용이다.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나라가 곧 교회이고 땅의 나라가 바빌론, 국가라고 동일시하는 세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있다. 즉 몸이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어도 땅의 나라에 마음이 가 있는 이들이 있고, 몸이 땅의 나라에 있어도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가 있는 이들이 있는데 물론 전자보다는 후자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을 만하다.

 기실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에서, 그리고 세계사 전체 - 아니, 우리 사회의 단면만 보더라도 세상의 많은 문제는 마음을 땅의 나라, 세속적인 것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한다. 보에티우스를 모함한 이들이 그러했으며 베네딕투스를 독살하고자 하던 이들이 그러했다. 또 굳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재 일부 대형 교회의 사목자들, 혹은 정치인들이 마땅히 사용해야 할 대상을 향유하려고 하는 바, 그들의 목적,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하고 분명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나 적어도 박승찬 교수님의 책,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은 이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신격과 인격의 대립과정 속에서 발달해온 철학과 신학의 완성은 그리스도교가 오랜 논리와 고민 끝에 만들어진 종교라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삶을 통해 낡은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변화, 회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으며 향유사용을 통해 가치의 질서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에티우스 성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모습은 고난에 쉽게 좌절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더욱이 높은 학문적 위치에 올랐음에도 늘 한결같았던 예로니모 성인의 자기성찰, 베네딕투스 성인의 겸손함, 그리고 수도 공동체 안에서 고행을 자처하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헌신하여 세상에 한 줄기 빛이자 소금이 되었던 여러 수도회들의 모습은 진정한 가치가 세속과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 국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이 이어진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이 책은 이러한 신앙의 유산 그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이 유산을 잘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 줄 수 있 을지, 그 실천적 방향을 포함하고 있다.

 전 세계가 그릇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로 인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유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신앙, 그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닿아 있는가에 대해 반추하는 자세라 하겠다. 그 지점에서 바로 절망 한편의 희망이 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좌절하지 마세요. 신국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에티우스도 사형수로 갇혀 있으면서도 끝까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그 문을 붙잡으며 매달릴 때, 하느님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 문이 아닌 다른 문을 열어 놓고 준비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에 그 문을 발견할 수 있나요? 지금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붙잡은 것들을 놓아 버릴 때만 하느님이 열어 놓으신 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10-311.)

 

 

by papyros 2015. 11. 30. 00:54

졸업

            졸업

      

                         김사인

 

 

선생님 저는 작은 지팡이나 구해서

호그와트로 갈까 해요.

아 좋은 생각.

그것도 좋겠구나.

 

 

서울역 플랫폼 3과 1/4 홈에서 옛 기차를 타렴.

가방에는 장난감과 잠옷과 시집을 담고

부지런한 부엉이와 안짱다리 고양이를 데리고

호그와트로 가거라 울지 말고

가서 마법을 배워라.

나이가 좀 많겠다만 입학이야 안되겠니.

 

 

이곳은 모두 머글들

숨 막히는 이모와 이모부들

고시원 볕 안 드는 쪽방 뒤로

한 블록만 삐끗하면 달려드는 '죽음을 먹는 자들'.

그래 가거라

인자한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과 주근깨 친구들

목이 달랑달랑거리지만 늘 유쾌한 유령들이 사는 곳.

 

 

빗자루 타는 법과 초급 변신술을 떼고 나면, 배고프지 않

는 약초 욕먹어도 슬퍼지지 않는 약초 분노에 눈 뒤집히지

않는 약초를 배우거라. 학자금 융자 없애는 마법 알바 시급

올리는 마법 오르는 보증금 막는 마법을 익히거라. 투명 망

또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그곳이라고 먹고살 걱정 없을까마는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저 흑마술을 잘 막아야 한다.

  그때마다 선량한 사냥터지기 해그리드 아저씨를 생각

 하렴.

  나도 따라가 약초밭 돌보는 심술 첨지라도 되고 싶구나.

 

 

머리 셋 달린 괴물의 방을 지나

현자의 돌에 닿을 때까지,

부디 건투를 빈다

불사조기사단 만세!

 

 

 

김사인 / 『어린 당나귀 곁에서』中 ,  詩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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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yros 2015. 10. 2.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