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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조운선 침몰사건-을 읽고

 

겸애(兼愛)! 서로 사랑하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서로 미워하면 천하가 어지러운 법이지.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 할 때, 상대가 빈자인가 부자인가, 양반인가 천인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중략)

그렇네. 하지만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네. 뺨에 닿는 이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하늘의 구름은 또 어디서 왔고? 공맹만이 오직 진리를 말한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게.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시저에 저마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몇 개의 단어나 몇 개의 문장 혹은 몇 권의 서책으로 정리했다네. 선입견 없이 두루 깨달음들을 살펴야 해. 공관병수(公觀倂受), 즉 공평한 눈으로 여러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네. 묵자도 무작정 배척부터 하지 말고 읽어 보도록 하게. 내게 도움을 준 문장이 제법 많았다네. 자네에게도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불러일으킬 걸세. 나는 지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다하고 있음도 알아주었으면 하네.” (1353-355)

 

청전과 화광. 그들과 8년 만에 조우를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중학시절이다. 중학 시절 처음 백탑 서생들과 만난 후, 고등학생 시절 열하광인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것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물론 목격자들의 출간소식을 들은 후, 화광과 청전을 다시 맞이할 준비에 설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것이, 작년 봄의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목격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조우는 참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픈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조운선이 침몰한 때문에 청전이 급하게 밀양으로 민심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얽히고 얽힌 일련의 사건들 소운 조택수의 사망, 혀가 잘린 채 발견된 악공 고후, 차돌이의 죽음과 그를 밝히기 위해 밀양에서 한양까지 먼 길을 달려와 신문고를 친 어미 선영 , 향교의 밤쇠, 그리고 사건을 파헤치던 과정에서 살해당한 두명의 참상도사 이순구와 정수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죽음 뒤에는 마치 관행처럼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위로는 영의정부터 아래로 목수 선풍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책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작금의 시대 현실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경쟁으로 인한 비리와 부정부패. 특히 차돌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끓는 심정을 가지고 상경하여 어렵게 신문고를 치는 선영의 모습에서 근 1년이 다 되도록 아니 평생 동안 아픔을 짊어져야만 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그 눈물이 떠올라 진실로 울컥했다. 저자인 김탁환 선생님께서도 사고 후 근 한 달 동안이나 작품을 쓰지 못하다 시작한 소설이라 하시니 아마 집필기간 내내 이런 심정을 지니셨으리라.

목격자들을 읽으며 느낀 감정과 생각, 지식들을 모두 글로 정리하는 데 한계가 있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 하나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다. 아마 유미주의- 즉 철저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금동 김동인이었다면 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겠으나 나는 문학이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에 적절한 목소리를 낼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약 10 년 주기의 사건들로 인해 각 문학작품이 시대마다 다른 사회를 반영할 수 있었다. 현진건, 최인훈, 박태원, 이상, 김승옥 등의 주요 작가들과 그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문학이 당대 사회와 그 현실을 적절히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목격자들도 추후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당대 사회를 제대로 반영한 한편, 다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관한 것이다.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조운선 침몰은 여러 관원들의 협잡과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하오나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다른 이들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침몰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람보다 배를 중히 여기고 배보다 쌀을 중히 여기는 담당 관원들의 마음가짐 때문이옵니다. 왕실과 조정도 조운선에 실린 세곡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그 세곡을 실어 나른 배와 그 배를 조정하는 조군들 그리고 그 세곡을 나라에 바친 농부들의 피와 땀을 하찮게 여기옵니다. 서강 광흥창에 도착한 세곡만 목적이 되고 나머지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법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조운선은 또다시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고, 관원들은 사사롭게 배를 채울 것이고, 이 땅의 백성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쏟을 것이옵니다. 벼슬아치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세곡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벼슬아치가 할 일은 결국 1년 동안 공들여 농사를 지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백성이 불행하면 아무리 세곡이 많이 걷힌다 해도 그 나라가 어찌 행복하겠사옵니까? 세곡보다는 그 배를 아껴야 하고, 그 배보다는 조군을 챙겨야 하고, 조군보다는 1년 꼬박 농사를 지어 바친 이 나라의 백성을 널리 사랑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박애의 마음만이 지금의 불행과 절망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2363-364.)

 

저자 김탁환 선생님께서 작품을 집필하시면서 던진 세 가지 질문이 있는데, 생명에 대한 문제와 인간존엄의 회복 그리고 고통을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데 대한 문제라고 한다. 담헌의 위 대사야 말로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우위에 두고 자체로 가치 있는 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일진대, ‘’, ‘권력’, ‘명예등 수단이 되어야 할 가치가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즉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비단 담헌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방식을 향유와 사용을 통해 설명한 바 있고 칸트 또한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경계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빈번히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은 인격교육의 부재로 인한 가치질서의 전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학교교육에서는 협력과 상호존중, 배려보다는 경쟁과 학벌주의가 팽배하고 있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경쟁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전반 및 교육의 경쟁적 문화가 협력과 존중의 문화로 바뀌어야 하며 특히 교사들은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가치관의 질서를 바로 세워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여 타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충분히 갖춘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격교육을 우선해야 한다.

76년 후, 다시 우리에게 헬리혜성(빛자루별)이 돌아 올 때 즈음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하기를. 화광과 주혜가, 청전과 옥화가 웃으며 함께 혜성을 바라보며 영원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마지막으로, 목격자들이라는 멋진 작품으로 귀환하시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안겨주시고, 언제나 혜성같이 자리하고 계신 오래도록 존경하는 작가이자 내 마음 속 스승 김탁환 선생님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by papyros 2015. 3. 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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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민음사, P331)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은 언뜻 낭만적으로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선상 여행이 어찌 행복하고 달콤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이고 행복한 결말일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사랑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만은 못한 것 같다.

사실, 플로렌티노 수십년의 세월 동안 페르미나 한 사람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그가 페르미나와의 사랑을 이루기 전에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가 페르미나에 대한 사랑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지켰다고 할지 몰라도 그의 행동으로 인해 페르미나 다사가 느낄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숙고한다면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페르미나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은 단지 플로렌티노의 애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여인들로서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되고 힘든 삶을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서 위로받고 자존감을 얻었을 터인데, 플로렌티노는 여인들을 단지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았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올림피아 술레타와의 관계였는데, 플로렌티노가 그녀의 배에 남긴 ‘This is Mine’이라는 표식 때문에 술래타는 남편으로부터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살해되고 마는 사건이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다른 여인들은 모두 수단으로서만 바라보는 것 두 측면 모두 과연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페르미나 다사 또한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했음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애초에 젊은 시절 한 때 나마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결별을 선언한 이유는, 아버지 로렌소 다사로부터의 압력을 제외한다면 단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순간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자기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와 처음으로 가까이 있었던 자정미사의 군중 틈에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와는 달리 사랑의 감동이 아닌 환멸의 심연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런 망상을 키워왔는지 모르겠다고 놀란 마음으로 자문했다.’ (민음사, P181)

 

물론 아버지가 둘의 사랑에 미치는 압력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결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단지 순간적인 느낌만으로 사랑을 저버린다는 것은 플로렌티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또한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그림자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결국 페르미나를 사랑하지만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며 기다리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한 것도 진실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사로서 상류층의 지위를 누리는 데다인,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플로렌티노 아리사,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 모두 진실하고 건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남녀 주인공 모두의 가치관이나 감정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물론 저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에 담아내고자 했던 부분이 19세기 말 사회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사상에 의한 제도적 억압, 결혼제도에 의해 개인의 욕망이 억압되는 측면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나 사회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제도와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구운몽> 또한 유교 윤리의 억압적 측면과 사대부의 욕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이 단적인 예이다. 페르미나 다사를 둘러싼 그리스도교 사상 하의 결혼제도, 그리고 상류계급의 욕망. 결국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제도적 억압을 심화시키는 것은 사회에 속한 인간들 자신인 것 같다. 플로렌티노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관계를 맺는 여인들을 배려하고 신중했더라면 술래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가 사회적 권력이나 신분에 예속되지 않았더라면 우르비노와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진실로 중요한 것은 종교나 사회 제도로부터의 억압보다도,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아닌가 싶다. 감각적 쾌락이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제도의 억압을 심화시키고 다시 자신을 예속 시킬 뿐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인 것 같다. 작품 안에서 노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온갖 시련과 갈등 속에서도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레라의 위험이 닥치고 있는 혼돈의 시대에서, 지나치게 빨리 전염되는 콜레라 같은 사랑. 이는 결국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없는 사랑은 그 위험이 치명적인 콜레라와 같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똑같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함께 살 수도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민음사, P110)

 

-콜레라 시대의 사랑. 명작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으면서 크게 공감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아직 내 자신이 경험적으로 미숙한 바가 큰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공감되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물론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겠고, 필자의 부족함 탓에 작품에 대해 오독을 했을 여지가 있으니 널리 이해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by papyros 2013. 9. 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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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영화 <그랑블루>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민음사, 104)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해(2012)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풀린 이후 노인과 바다의 번역본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노인과 바다소설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문구였다. 패배와 파멸, 파멸은 육체와 물질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패배는 정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아픔을 겪을지라도 정신적 가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강인함과 인내인데, 산티아고야 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과 인내, 의지, 도전정신을 보여준 인물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생태계의 일부에 속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대자연 안에 속한 생명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노인과 바다가 쓰인 시대에, 많은 어부들이 최신식 기계장치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으려 했다는 것은 대자연 위에 올라서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이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그 어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낚싯대에 미끼를 걸어 고기를 건져올리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서 대자연의 광활한 바다를 가능한 훼손시키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 파도와 청새치, 상어와의 사투에 동등한 생명체로 그 스스로가 직접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 앞에서 한계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모습, 산티아고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의 많은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자연을 끝없이 지배하고 정복하고 개발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많은 비극들 -원전비리 사태로 인한 전력부족,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지구 온난화 등-이 수없이 많은 이 때, 대자연 속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지닌 산티아고의 태도를 타산지석 삼아야 함은 명백한 것 같다.

 

착한 놈들이지. 놈들은 함께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저 돌고래들도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들이지.” (민음사, P49)

 

그러나 이러한 산티아고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 그리고 강인함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는 결국 상어 떼와의 싸움에서 파멸한다. 패배는 하지 않았으나 결국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상어 떼와의 전투를 통해 남은 것은 애써 잡은 청새치의 뼈대뿐이었고 늙은 산티아고의 기력은 소진되어 녹초가 되었고 결국 육체적으로는 파멸한 것이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와 공허(空虛)함만을 남긴 상어와의 전투. 파멸을 부른 원인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 인 채움에 대한 욕심(욕망)’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산티아고가 만선을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청새치라는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이 또한 생존을 위한, 채움의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범인(凡人)들과 산티아고의 차이점을 들자면, 범인(凡人)들은 채움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반면, 산티아고는 채움의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낚시를 하지만 어부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양심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고기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며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고기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대한 미안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으로서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어부라는 직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낚시를 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바탕으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자세, 그리고 비록 채움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고기를 잡고자 갈구하고 있지만 정당하게 맞서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그의 자세가, 비록 파멸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진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산페드로도 저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의 아버지처럼 어부였지. 그러나 노인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모든 걸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읽을 책도 없었고 들을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했고, 또한 죄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네가 그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죽인거야. 너는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또 녀석이 죽은 뒤에도 사랑했지. 만약 네가 그놈을 사랑하고 있다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걸까? (민음사, P106)

 

결국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통해 비움의 자세를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에 채움의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조급함과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를 내맡기는 것.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행복을 쟁취하려 하기보다는 욕망과 행복에 대한 생각을 내려둘 때, 이와 멀어질 때 진정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 단 한 마리의 청새치를 잡으려 했던 산티아고에게도 채움의 욕망은 존재했고 그 욕망 때문에 고기와 산티아고 모두에게 파멸을 불러왔다.

 

차라리 이 일이 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또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고기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던 거야.” (민음사, P111)

노인과 바다가 주는 이러한 메시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최근에 감독 판으로 재개봉한 영화인 <그랑블루>가 있다. 노인과 바다<그랑블루>가 주는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잠수사고로 잃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대자연인 바다와 바다의 소중한 생명체 돌고래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작크와, 작크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엔조. 작크가 잠수를 했던 것이 바다와 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향연이었다면 엔조에게 바다는 생존을 위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기록을 내야만 하는, 넘어서야 할 극복과 갈구의 대상이었다. 물론 엔조 또한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바다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의 차이가 작크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아니었을까. 결국 엔조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야 기록을 위한 잠수가 아닌, 바다 속 깊은 공간에 대한 향연과 사랑을 느끼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작크도 결말부분에서, 바다 밑의 더 깊은 공간과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 향연을 이기지 못하고 잠수를 결심하게 된다. 남겨진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남긴 작크의 태도가 모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작크의 입장에서는 인간으로서 영위하고 누릴 수 있는 채움의 욕망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바다 앞에서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채움의 욕망을 버리고 비움의 자세,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은 행복에 취해 있다가 상어 떼로부터 화를 당한 것이나 작크가 잠수사고로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지만 결국 그로 인해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 향연이 더 깊어지는 것 등이 이 속담에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 결국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채우기 위한 욕심을 가지고 조급하게 달려 나가는 일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채움의 자세보단 비움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누릴 수 있는 현재의 작은 행복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소중한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천천히 나아갈 때 비록 파멸할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라 믿는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그리고 참, 침대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는 내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참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P121)

 

소년은 테라스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뜨겁게 해 주세요. 우유랑 설탕도 듬뿍 넣어 주시고요.” (중략)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이거 드세요.” 소년은 유리자에 커피를 조금 따랐다. (민음사, P124)

 

그는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민음사, P125)

 

산티아고가 사랑해 마지않는 귀여운 소년 마놀린과 같이, 정말 힘겹고 외로울 때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힘을 낼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이의 따뜻함이 있다면, 작크와 엔조같이 서로 간에 위안이면서 동시에 자극이 되는 소중한 이가 있다면,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느낀다면 분명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없을지언정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 믿는다. 인생의 굴곡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소중한 이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행복에, 그 따뜻함에 감사하면서 비움의 자세로, 쉼의 여유를 가질 때 그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더욱 강인한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민음사, 128)

 

by papyros 2013. 8. 23.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