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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조운선 침몰사건-』을 읽고
“겸애(兼愛)! 서로 사랑하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서로 미워하면 천하가 어지러운 법이지.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 할 때, 상대가 빈자인가 부자인가, 양반인가 천인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중략)
“그렇네. 하지만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네. 뺨에 닿는 이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하늘의 구름은 또 어디서 왔고? 공맹만이 오직 진리를 말한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게.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시저에 저마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몇 개의 단어나 몇 개의 문장 혹은 몇 권의 서책으로 정리했다네. 선입견 없이 두루 깨달음들을 살펴야 해. 공관병수(公觀倂受), 즉 공평한 눈으로 여러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네. 묵자도 무작정 배척부터 하지 말고 읽어 보도록 하게. 내게 도움을 준 문장이 제법 많았다네. 자네에게도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불러일으킬 걸세. 나는 지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다하고 있음도 알아주었으면 하네.” (1권 353-355쪽)
청전과 화광. 그들과 8년 만에 조우를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중학시절이다. 중학 시절 처음 백탑 서생들과 만난 후, 고등학생 시절 『열하광인』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것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물론 『목격자들』의 출간소식을 들은 후, 화광과 청전을 다시 맞이할 준비에 설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것이, 작년 봄의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목격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조우는 참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픈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조운선이 침몰한 때문에 청전이 급하게 밀양으로 민심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얽히고 얽힌 일련의 사건들 – 소운 조택수의 사망, 혀가 잘린 채 발견된 악공 고후, 차돌이의 죽음과 그를 밝히기 위해 밀양에서 한양까지 먼 길을 달려와 신문고를 친 어미 선영 , 향교의 밤쇠, 그리고 사건을 파헤치던 과정에서 살해당한 두명의 참상도사 이순구와 정수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죽음 뒤에는 마치 관행처럼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위로는 영의정부터 아래로 목수 선풍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책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작금의 시대 현실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경쟁으로 인한 비리와 부정부패. 특히 차돌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끓는 심정을 가지고 상경하여 어렵게 신문고를 치는 선영의 모습에서 근 1년이 다 되도록 – 아니 평생 동안 아픔을 짊어져야만 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그 눈물이 떠올라 진실로 울컥했다. 저자인 김탁환 선생님께서도 사고 후 근 한 달 동안이나 작품을 쓰지 못하다 시작한 소설이라 하시니 아마 집필기간 내내 이런 심정을 지니셨으리라.
『목격자들』을 읽으며 느낀 감정과 생각, 지식들을 모두 글로 정리하는 데 한계가 있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 하나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다. 아마 유미주의- 즉 철저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금동 김동인이었다면 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겠으나 나는 문학이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에 적절한 목소리를 낼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약 10 년 주기의 사건들로 인해 각 문학작품이 시대마다 다른 사회를 반영할 수 있었다. 현진건, 최인훈, 박태원, 이상, 김승옥 등의 주요 작가들과 그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문학이 당대 사회와 그 현실을 적절히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목격자들』도 추후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당대 사회를 제대로 반영한 한편, 다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관한 것이다.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조운선 침몰은 여러 관원들의 협잡과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하오나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다른 이들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침몰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람보다 배를 중히 여기고 배보다 쌀을 중히 여기는 담당 관원들의 마음가짐 때문이옵니다. 왕실과 조정도 조운선에 실린 세곡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그 세곡을 실어 나른 배와 그 배를 조정하는 조군들 그리고 그 세곡을 나라에 바친 농부들의 피와 땀을 하찮게 여기옵니다. 서강 광흥창에 도착한 세곡만 목적이 되고 나머지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법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조운선은 또다시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고, 관원들은 사사롭게 배를 채울 것이고, 이 땅의 백성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쏟을 것이옵니다. 벼슬아치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세곡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벼슬아치가 할 일은 결국 1년 동안 공들여 농사를 지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백성이 불행하면 아무리 세곡이 많이 걷힌다 해도 그 나라가 어찌 행복하겠사옵니까? 세곡보다는 그 배를 아껴야 하고, 그 배보다는 조군을 챙겨야 하고, 조군보다는 1년 꼬박 농사를 지어 바친 이 나라의 백성을 널리 사랑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박애의 마음만이 지금의 불행과 절망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2권 363-364쪽.)
저자 김탁환 선생님께서 작품을 집필하시면서 던진 세 가지 질문이 있는데, 생명에 대한 문제와 인간존엄의 회복 그리고 고통을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데 대한 문제라고 한다. 담헌의 위 대사야 말로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우위에 두고 자체로 가치 있는 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일진대, ‘돈’, ‘권력’, ‘명예’ 등 수단이 되어야 할 가치가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즉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비단 담헌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방식을 ‘향유와 사용’을 통해 설명한 바 있고 칸트 또한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경계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빈번히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은 인격교육의 부재로 인한 가치질서의 전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학교교육에서는 협력과 상호존중, 배려보다는 경쟁과 학벌주의가 팽배하고 있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경쟁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전반 및 교육의 경쟁적 문화가 협력과 존중의 문화로 바뀌어야 하며 특히 교사들은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가치관의 질서를 바로 세워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여 타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충분히 갖춘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격교육을 우선해야 한다.
76년 후, 다시 우리에게 헬리혜성(빛자루별)이 돌아 올 때 즈음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하기를. 화광과 주혜가, 청전과 옥화가 웃으며 함께 혜성을 바라보며 영원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마지막으로, 『목격자들』이라는 멋진 작품으로 귀환하시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안겨주시고, 언제나 혜성같이 자리하고 계신 – 오래도록 존경하는 작가이자 내 마음 속 스승 김탁환 선생님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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