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게시물은 2020년 6월, 영화 개봉 기념 다산북스 출판사 <브릿마리 여기있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다산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다산북스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브릿마리 여기있다>는 그의 첫번째와 두번째 소설인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 연작, <일생일대의 거래>와 같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2020년 6월, 2016년에 출간된 책이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했다. (해외에서는 2019년에 이미 개봉되었다.)
기실 <오베라는 남자> 이후 <베어타운> 사전 서평단을 먼저 참여했으며 최근 함께하고 있는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에서 <우리와 당신들>을 읽어온 만큼, <오베라는 남자>의 출간 후 <베어타운>에 이르러 상당부분 문체가 정돈되고 인물서사와 시의성 면에서 다양한 메세지를 함의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최근작을 먼저 읽어온 바 있다.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경우 이미 전자책으로 도서를 소장해 온바 있으나, 이번 사전 서평단을 통해 종이책과 전자책을 교대로 읽어오면서 완독하게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느낀 바로 그 감정처럼, 나 또한 책의 도입부를 일독할 때만 해도 브릿마리라는 인물에 대해 결코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수동공격성이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할 정도의 강박적 성격, 결벽증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고용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직원을 힘들게 하거나 퇴근조차 시키지 않는 모습들에서 , 브릿마리를 '꼰대'와 같은 인물로 바라보고 젊은 고용센터 직원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릿마리라는 인물의 서사가 소개되고 작품이 전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모되어갔다. 도입부에 너무 쉽게 낙인을 찍어버린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녀가 새삼스럽게 꼭두새벽부터 고용센터에 찾아가고 그토록 직원을 귀찮게 하며 간절히 구직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녀가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 , 그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언니 잉그리드의 사후 부모님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에 대해 인정받으려 부단히 애썼던 브릿마리는 어머니의 장례 이후 사무친 슬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켄트에게 기대며, 처음에는 켄트의 형인 알프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알프와 이별하고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브릿마리를 선택한 켄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집안에서 켄트의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독립시킨 이후 그녀 나이 60대 -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목도한 것은 '켄트의 불륜'이며, 그녀는 결국 크나큰 무망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집을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즉 브릿마리는 일평생을 자신의 욕구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성장시켰으며 또한 남편 '켄트'로부터 수많은 무시 (가령 브릿마리가 일을 하고자 하면 그만한 급여에 해당하는 자금을 자신이 준다며 가사일에 충실하라고 하는 등)를 감내해오며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왔는데, 켄트의 불륜은 그러한 그녀의 노력과 책임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브릿마리 씨, 40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거기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40년 동안 일을 했어요. 살림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제와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한 때는 신경 썼다는 건 안다. 그가 그녀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켄트의 아이들은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라고, 성인들은 브릿마리 같은 여자들을 가리켜 '잔소리꾼'이라고 한다. 가끔 같은 블록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 이사 올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면 브릿마리가 어쩌다 한 번씩 저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나 할머니가 등장하기 마련이었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 브릿마리는 '잔소리꾼'이 되었다. 켄트에게 계속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오니 그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겼다. 그의 인생이 그녀의 인생이 되었다. 그녀는 그런 데 재주가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누구라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법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읽은《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상작인 강화길 작가님의 <음복(飮福)>이나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 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릿마리 역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남편'이나 '자녀'들을 더 우선시하며 자신의 진정한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르그'라는 -거의 폐허와도 같은- 작은 도시의 레크레이션센터 관리직에 취직되는 순간 , 그녀의 삶에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데, 그녀가 켄트와 함께 살며 느꼈던 무망감이나 좌절, 허무함과는 달리 보르그에서는 그녀를 필요로하는 어린아이들이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브릿마리는 오롯한 '존재 가치'를 느끼게 된다. 자기 내면의 고유한 원리원칙과 도덕관념에 의해 행동하는 브릿마리를 혹자는 '강박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르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특히 브릿마리가 '새미, 베가, 오마르' 3남매에 대한 애정을 가꾸어 나가는 부분은 작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서사였는데, '사이코'와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반사회적인 청소년으로 인식되는 새미를 주변의 평가에 의해 바라보지 않고, 커트러리(테이블에 쓰이는 은기류의 총칭, 식사용 기구로서 나이프 세트(Knife Set), 포크(Fork), 스푼(Spoon)을 이름.) 를 바르게 정리하는 면모나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새미의 사연을 듣고 그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바로 브릿마리였다. 그녀가 비록 자신의 기준에 의해 완고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는, 직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내면에는 진정성이 자리해 있었다.
도입부 고용센터 직원에게 연필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표현과 전달에 서툴지언정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어린 마음과 따뜻한 시선이 드러난다.
"이거 받아요." 브릿마리는 연필을 건넨다. 아가씨가 당황스러워하며 연필을 받자 연필깎이 한 쌍도 마저 건넨다. 하나는 파란색이고 하나는 분홍색이다. 그녀는 연필깎이를 턱으로 가리킨 다음 전혀 편견이 없는 태도로 아가씨의 사내 같은 헤어스타일을 턱으로 가리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두 색 다 샀어요."
"당신은 편견이 없잖아요. 날 인간으로 대하잖아요. 어쩌다보니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인간. 어쩌다보니 인간을 태우게 된 휠체어로 대하지 않고." 그녀는 브릿마리의 팔을 토닥이며 덧붙인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브릿. 같은 인간이라서."
"그 사람들한테 커트러리 서랍을 보여주면 되잖아! 너도 신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면 되잖아!"
"고맙습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러한 브릿마리의 진정성에 대해 아이들은 편견 없는 순수한 시선으로 그녀를 수용하는 것으로 답하는데, 아이들은 그녀의 부족한 면모를 채워주며 브릿마리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파이어릿의 동성애에 대해 염려하며 배려하려는 브릿마리에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하는 파이어릿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편견없고 순수한 시각이 브릿마리의 닫혀있고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씩 열여주지 않았나 싶다.
한편 아이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켄트'의 귀환에 따라 , 남편 켄트를 따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따뜻하고 진정어린 사랑을 전해주는 경찰관 '스벤'과 새로운 사랑을 함께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브릿마리의 심리묘사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스벤과의 사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결국 브릿마리가 그 어느집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결말(켄트와도, 스벤과도 함께하지 않는 결말)이 그려진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브릿마리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친언니 잉그리드의 그늘 밑에서, 잉그리드의 사후에는 부모님의 기대를 위해, 결혼 이후에는 켄트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보르그에서는 축구팀 아이들을 위해 늘 누군가를 위하는 삶만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뒤로해 온 삶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적이 없는 것이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 본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반문은 작중 브릿마리에게도, 그리고 이를 읽는 그 너머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축구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한 브릿마리는, 이제 작품 도입부 무망감과 허무함에 휘감겨있는 그녀도 아니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왔던 어린아이도 아니다. 직접 그녀가 나아갈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보르그의 아이들로부터 받은 진정한 '선물'이라 여겨진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브릿마리는 운동복에 과탄산소다를 뿌리고 맹렬하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쏘아붙인다.
베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머뭇거린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브릿마리가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어른들과 달리 온몸으로 손을 흔든다. 아침이 보르그에 찾아오지만 태양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시간, 난생 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자제하며 지평선 위에서 공손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햇살이 지붕 위로 쏟아지자 파란 문이 달린 하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칼 구스타프 융(Carl J. Jung)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self)'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방향성이며 최종 목적지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실현과정' , '개성화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특히 중년기에 '자기'의 변화 국면을 맞이하며, 자기 내부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작품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추구하는 개성화과정과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지는데, 브릿마리의 자기실현(개성화)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한편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통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이나, 끈끈한 가족애의 경우는 <브릿마리 여기있다>를 발판으로 하여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더욱 확대된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이 작품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세계를 더욱 확대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오베라는 남자>부터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일생일대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고 다시금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브릿마리의 이후 행보는 어떠할지, 프레드릭 베크만은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인물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게 된다.
특히 영화가 개봉된 만큼,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영화로는 어떻게 구현했는가를 비교하며 작품의 여운을 오래 지니고 싶다.
약 470 페이지에 걸친 브릿마리의 서사를 통해 그녀의 내면에 더욱 깊이 다가가 브릿마리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될 인물들 역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서사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 본 게시물은 창비사전서평단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유원> 가제본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창비 측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성장소설. ‘성장’이란 내게 어떤것일까. 입사식 소설, 이니에이션 소설, 통과제의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성장소설’에는 흔히 소년/소녀나 청년 초기의 인물들이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내가 중학시절부터 애착을 지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데미안』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스쳐지나가듯 『데미안』이 언급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으며 또한 유원에게도 『데미안』은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 아마 작가님에게도 그러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는 ‘성장’과 관련된 작품서사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년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애정을 지니고 있는『해리포터』 외에도,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은 내 삶에 진정한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 사전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미 서른이 된 마당에 20대의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지만, 아직도 ‘성장’의 화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나의 내면이,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 같은 작품과 유사하게, 『유원』의 주인공인 유원도 언뜻 평범해 보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인 유원이 고작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12년 전, 집에 불이났을 때 언니가 유원을 구하기 위해 11층 아래로 던진 덕에 길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유원을 구한 덕에 유원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열일곱이던 언니‘예정’은 동생을 구하고서 본인은 결국 불길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언니와 같은 나이의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유원의 뒤에는 늘 그 사건이 맴돌았다.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서 나온 언니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거실을 보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현관 쪽으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욕실로 들어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이불에 물을 부어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내 방 창문을 열어 베란다 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와 얇은 합판으로 분리되어 있던 내 방의 베란다까지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신고한 것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파트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11층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을 것이다. 언니는 수건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사람들은 검게 치솟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생존자를 보고 탄식했다. 불길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까지 덮쳐 오고 있었을 것이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31쪽.
특히 집에 불이났던 그 사건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유원이 성장한 이후에도 늘 유원이 12년 전 겪은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유원은 암묵적으로 ‘불쌍한 아이’이자,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유원의 삶에 ‘당위성’으로 작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책임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픔을,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슬퍼해야 한다는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또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통해 평생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인데, 유원에게는 그러한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의무’와 ‘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심지어 진로마저도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길 등이 제시되는데,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나는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우친 것처럼. 나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눈빛과 목소리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도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83쪽.
중학교 때부터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학원에 갔다. 엄마 아빠가 강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기 주도 학습이 불가능한 나 같은 애는 엄격한 학원에 가야 성적이 오른다는 것을 좀 일찍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00쪽.
이처럼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워야 마땅할 청소년기에 유원에게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감은 결국 유원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예정의 오랜 친구인 ‘신아언니’인데, 기실 유원은 신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며 무엇보다 유원에 대한 신아의 지나친 걱정과 과보호가 관계를 지배하다보니, 유원과 신아의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바람직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유원은 아직까지도 사고 당시에 대한 반복적인 꿈을 꾸는 등 유년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PTSD를 겪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유원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과 더불어 진정한 관계가 결여 되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마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서 나를 움켜쥐려는 불길이 돋아나고 있었다. 화염 너머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지펴지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 방에서 엄마 아빠가 잠든 방으로, 혹은 내 꿈에서 십이 년 전 나와 언니가 잠든 거실로 아무렇게나 옮겨붙는 불길을 나는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아는 꿈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서야 꺼지는 꿈.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14쪽.
특히 유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원에게는 자신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숨지고 말았던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친 ‘신씨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늘 무언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신씨 아저씨의 모습이 유원에게는 불편하게 비추어진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6쪽.
작품 속에서 유원의 삶과 내면을 변화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수현’인데, 수현은 학급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친구이며 동시에 옥상 마스터키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서글서글한 학생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또한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한 면면이 드러나는데, 수현과의 관계속에서 유원은 삶에서 최초로 ‘평범한 우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유원과 유원의 가족을 포함하여, 외상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이 ‘평범성’에 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평범치 않은 고통을 맞이했기에, 옆에서 건네주는 말 한 마디,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너무 붉어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넋을 잃게 만들었다. 만약 상처를 받아 취약해져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위로를 받거나, 혹은 이걸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69-70쪽.
내 방에는 정말 별게 없었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덮자마자 잠이 몰려오는 마법 같은 푹신한 극세사 이불, 정도. 수현은 많은 아이들의 방을 구경했겠지. 내 방은 평균은 될까. 그 이하일까. 다른 애들은 친구 방에서 뭘 하고 놀지. 커다란 앨범에 있는 유치원 졸업 사진 같은 걸 보면서 깔깔 웃나. 너는 이런 책을 읽고 컸구나. 우리 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 있어. 너도 『데미안』 읽었니, 그러면서? 아니면 새로 나온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세상에 똑같은 색깔의 립은 없어. 이것저것 발라 보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거나.
나도 수현의 집을, 수현의 방을 보고 싶었다. 왠지 수현의 방에는 구경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릴 때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잔뜩 있고, 서랍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이, 책상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수현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캘린더에는 친구 누구의 생일, 특별한 모임 날짜들이 체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94-95쪽.
주목할 만한 점은, 수현의 서사가 드러난 이후부터인데, 수현이 사실 유원을 구한 금정동의 호인이자 용감한 시민으로 평가받는 신의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유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수현과 유원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가온다.
전술한 바 있듯 사실 유원과는 대조적으로 학교 내에서 반장을 맡으며 학급 아이들의 신망을 받기도 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그 어떤 구김살이나 그늘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수현에게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리한다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년이 넘게 유원의 가정에 기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도 했으니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 등이 교차하는 수현의 내면은 열일곱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결코 통합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그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그러나 수현이 결국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유원에게 공언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은 유원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Blos(1979)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이차적 개별화 과정 (secondary ndividuation process)’으로서, 유아기 시절 경험한 일차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나아가 부모와의 의존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심리적·정서적 독립을 이루는 데 발달 과제가 있는데, 수현은 이를 충분히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 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2-183쪽.
아버지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선언한 수현의 모습을 통해 유원의 내면에도 변화의 씨앗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 준 댓가로 지나치게 부모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언행이 부담스러움을 용기있게 고백하는 한편, 신아언니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직접 이야기하고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으로 인해, 유원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니 예정과 유원은 다른 인격체이며,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유원의 내부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진솔성과 용기가 유원에게도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그늘이, 그 불행한 사건이 ‘내 탓’, ‘내 잘못’이 아님을, 그것은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아주는 신뢰로운 관계 안에서,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통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24쪽.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5-196쪽.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9쪽.
문득 세월호 유가족분들, 4.3 및 5.18 희생자의 가족분들 및 여타 사고와 국가적 문제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분들께‘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이를 직면하여,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PTSD와 관련해 지나친 죄책감을 직면한 유원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당위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인식하였으며 이제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원이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진실한 개인’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바,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자신이 선택한 삶만을 지향하며, 유원이 그 자체의 빛깔을 드러내기를 진실로 바란다.
영화 <작은아씨들>이 개봉한 덕분에,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을 통해 함께 읽기로 했던, 『메이블 이야기』를 후순위로 잠시 미루고, 영화를 관람한 뒤 『작은 아씨들』을 읽고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특히 감사하게도 RHK 출판사에서 받은 종이책은 원작의 표지를 그대로 구현해 정말 1860년대 출간된 작은아씨들을 읽는 느낌이었고, 흡입력있는 서사 덕분에 금방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기실, 베스와 로런스 할아버지의 신뢰관계, 에이미의 스케이트 사건, 메그의 무도회, 브룩선생님의 장갑 이야기 , 베스의 성홍열 등 주요서사는 유년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던 능인출판사의 세계고전 만화책 덕분에(박종관 화백 作)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어린이를 위한 만화책이나 동화책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베스의 죽음과 에이미와 로리의 결혼은 이번 영화와 책을 통해 새로이 접해 매우 놀랍고 마치 새로운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기실 나는 유년시절부터 베스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원작소설을 제대로 읽으며, 베스에 대한 애정에 더해 '조'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베스는 작품 곳곳에서 네 자매 중, 아니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선한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부상 소식에 아버지를 돌보러 떠났을 때, 유일하게 훔멜 씨 가족을 돌보다 성홍열에 걸리기까지 한 정도로 이타적이었으며 로런스 할아버지의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아마도 유년시절의 내가 베스와 동일시 했던 것은 '인정욕구'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베스처럼 내향적인 아이였으며 선생님들께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나는 당연히 베스가 지닌 선(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던 것 같다. 아마도 교사를 꿈꾸게 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특히 베스와 로런스 할아버지의 신뢰로운 관계는 참으로 애틋하고 다정한데, 가족 외의 타인을 대하기를 어려워하는 베스가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로런스 씨의 애정어린 시선과 배려 덕분이었다. 나 또한 은사님들의 애정 속에 성장해 온 만큼 베스와 로런스 씨의 관계에 많은 이입이 되었다.
"난 매일 갔어. 하지만 아이가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훔멜 부인은 일하러 나가고 로트첸이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 내 생각엔 언니나 해나 아주머니가 가봐야 할 것 같아." 베스가 진지하게 말하자, 메그는 내일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메그와 조는 각자의 일에 다시 파묻혀 훔멜 씨네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에이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베스는 할 수 없이 조용히 일어나 두건을 두르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여러 가지 물건을 바구니에 담은 뒤 참을성 있는 눈동자에 슬픔을 가득 담고서 차디찬 밖으로 나갔다.
"엄마, 로런스 할아버지께 실내화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제게 그토록 잘 대해 주시는데 저도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달리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고요. 그래도 돼요?" (중략) 베스는 메그와 조와 여러 차례 진지한 논의를 거쳐 모양을 정하고 재료를 산 다음 실내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진한 보라색 바탕에 점잖으면서도 화사한 분위기의 삼색제비꽃 무늬를 보고 다들 아주 예쁘다며 한마디했다.
(중략)
"지금까지 많은 실내화를 신어보았지만, 이처럼 나에게 꼭 맞는 실내화는 이번이 처음이오." 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계속해서 읽었다. "삼색제비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오. 이 꽃들을 볼 때마다 이걸 준 친절한 사람이 생각날 거요. 신세를 갚고 싶어 그러니 '이 늙은이'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손녀딸의 물건을 아가씨께 보내는 걸 허락해 주구려. 진심 어린 감사와 축복을 보내며. 당신의 좋은 친구이자 충실한 하인, 제임스 로런스."
그러나 로런스씨가 너무나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는 바람에 할 말을 잊어버려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베스는 노인이 사랑하는 손녀딸을 잃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노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했다. 자기 집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해도 이보다 더 놀라진 않았겠지만, 노인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정말 그랬다! 노인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신뢰가 담뿍 담긴 키스에 감동한 나머지 체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베스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앚혔다. 그러고는 주름살투성이 뺨을 베스의 분홍빛 뺨에 대고 비비며 손녀딸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 순간 이후로 베스는 노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노인의 무릎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감사하는 마음은 자존심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베스가 집으로 돌아갈 때 노인은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걸어가 따스한 마음이 담긴 악수를 건넸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1부 내용에 이어 2부가 포함된 원작소설을 정독하면서, 마치가문의 둘째, '조'에게 깊은 애정이 더해졌다. 조에게는 다른 자매들과는 다른 '강인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스케이트 사건은 조의 원고를 불태운 에이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음에도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를 낸 자신을 자책하는가하면, 자신의 슬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위급한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칼을 자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가족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특히 2부 결말부에서는 마치 대고모로부터 물려받은 저택을 소년들을 위한 학교로 활용하며 보살핌과 애정이 필요한 소년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맡은 만큼 '조'는 다른 어떤 자매들보다 가장 강인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믿고 옳은 선택을 하면서, '성장하는 인물'이었다. 조가 완벽한 인물이 아닌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더욱 와 닿았다. 해리 포터가 처음부터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 '성장하는 인물'이었던 것처럼, '조' 역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인물이었다. 기실 성인기의 주요과제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믿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인데, 이 점을 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유년시절의 내가 베스와 같았다면, 이제는 조와 같이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내 고약한 성질 때문이에요!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돼요. 이제 됐다 싶으면 전보다 더 악화돼 있어요. 엄마! 어쩌면 좋아요, 난?"
불쌍한 조가 자포자기한 채 외쳤다.
"늘 주의하면서 기도하렴. 그리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거야. 혹시라도 네 결점을 극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마치 부인은 헝클어진 머리를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기대게 한 뒤 축축한 뺨에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어디서 났니? 25달러나 되잖아! 조, 난 네가 경솔한 짓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런 돈 아니에요. 이건 내가 정직하게 번 돈이에요. 구걸하거나 빌리거나 훔친 게 아니라고요. 내가 번 거예요. 내 걸 팔았을 뿐이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조가 보닛을 벗자 다들 놀라서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털이 짧게 잘려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글쎄, 난 정말 아빠를 위해 뭔가 해드리고 싶었어." 자매들은 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탁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창 때의 젊은이들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만큼이나 돈을 빌리는 게 싫었어. 그리고 마치 대고모님이 잔소리를 해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9펜스를 빌려도 잔소리를 하실 분이니까. 게다가 메그 언니는 석 달 치 봉급을 집세로 내놓았는데 난 내 옷만 사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거든. 돈을 구할 수 있다면 코라도 베어 팔았을 거야."
"초 좀 치지 마, 테디. 물론 부자 학생도 받을 거야.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 일단 시작하고 나면 시험 삼아 사정이 딱한 아이 한두 명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사실 부잣집 아이들도 가난한 집 아이들만큼 보살핌과 위로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 하인들의 손에 내맡겨지거나 타고난 성향과 정반대의 길로 내몰리는 불행한 꼬마들이 한둘이 아니야. 정말 잔인한 일이지. 잘못된 교육을 받거나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해 비뚤어진 아이들도 있고, 엄마를 잃은 아이들도 있어. 게다가 아무 문제 없는 아이들도 사춘기 시절은 겪고 넘어가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인내와 배려가 가장 많이 필요할 때가 바로 이 시기거든. 사람들은 이 시기 아이들을 비웃고, 다그치고,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하면서 예쁜 아이에서 하루아침에 훌륭한 청년으로 바뀌질 바라지. 자존심이 있어서 불평은 잘 안 하지만 애들도 다 느껴. (후략)"
한편 전체적인 서사 면에서, 영화만으로는 로리와 에이미의 결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에이미가 그저 얄미워보였고 타이밍을 놓친 조가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나 원작소설을 읽으며 로리와 에이미, 그리고 조와 프리드리히가 이어진 것에 대한 감정선이나 상황이 영화에 비해 더욱 이해되었는데, 조에게 로리는 그저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 온 '친구',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반면, 에이미에게 로리는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조가 프리드리히를 대하는 감정도 그가 지닌 '지식'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메그와 브룩, 조와 프리드리히, 에이미와 로리의 애정과 결혼관계를 통해 작품에 드러나는 당시 여성에 대한 관점이나 결혼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 결혼해야 출세한다는 인식들이 작품 곳곳에 깔려 있다. 그러나 세 자매 모두 '돈'이나 여타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인격, 지식, 신뢰로운 관계 등을 더욱 중시했으며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이 네 자매의 선택을 통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천로역정 놀이 (순례자 놀이) 등의 챕터에서 드러나듯이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경에 따라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며 네 자매 모두가 각자의 짐이 있고 그 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이 점이 작은아씨들이 진정한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라 여겨진다. 자매들의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그 나이대 청소년/청년이라면 한번쯤 지녔을 고민을 다루고, 각자 짊어진 짐을 자신의 방식대로 극복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메그는 당대 사회상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책임감을 지니고 여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조는 마치 대고모를 보살피는 등 그저 삶을 충실히 살아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과 선택들 안에서 깊은 가치와 깨달음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소하지만 거대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작은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 자신이 실제로 네 자매 중 장녀였고, 둘째였던 동생 리지를 떠내보내는 상실을 겪어낸 바 있으며 실제로 '조'와 같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젊은 시절 신문과 잡지에 단편소설을 싣기도 했고, 간호사로 종군한 경험이 있는 등 작가의 삶이 작품 곳곳에 여러모로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삶을 풀어낸 여러 자전적 소설(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 등)들과 마찬가지로 <작은아씨들> 또한 독자들에게 있어 작가의 자기고백을 통한 강렬한 몰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160년의 세월을 넘은 고전소설 <작은아씨들>의 강렬한 힘은 작가의 경험을 통한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확신한다. 최근에 인상깊게 관람하여 인생작이 된 뮤지컬 <Story Of My Life>에서도 이 점이 드러나는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한 갈래들이 하나하나 모두 소중히 들여댜보아야 할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이 점이 바로 어느 시대의 어느 누가 읽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는 중요한 단초라고 여긴다.
유년시절에는 네 자매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과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고 성인이 된 지금에는 실제적인 '선택'과 '책임',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금 정리하게 해 준 책 <작은아씨들>에 깊은 감사함과 애정을 느끼며, 평생 옆에 두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다.
푸른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 우리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는 돼지, 마당을 돌아다니며 모이를 쪼는 닭, 밀짚모자를 쓴 농부. 우리가 어릴 적봤던 그림책들을 앙들에게도 보여주며 여전히 소와 돼지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제 이런 농장은 거의 없다. 우리가 먹는 99.9%의 돼지고기는 농장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된다.
(중략)
농장을 보여주고자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공장식 축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키우는 대안을 찾고 싶었고, 돼지가 돼지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돼지가 실제로 어떤 동물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황윤, 『사랑할까 먹을까』, 휴출판사, 2018, 24-25쪽.
돼지들이 ‘편안하게’ 잘 있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딱딱한 콘크리트, 햇빛 한 점, 바람 한 점 안 들어오는 축사, 몸 크기와 똑같은 철제 스톤 속에 갇힌 어미 돼지들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어미 돼지들이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멍하니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편안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할 일이 업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반쯤 뜬 그들의 눈에서 어떤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익숙한 눈동자였다. 그렇다. 바로 동물원에서 이런 눈동자를 보았다. 철창에 갇힌 호랑이, 침팬지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눈동자를 갖고 있었는데, 돼지들이 똑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 황윤, 『사랑할까 먹을까』, 휴출판사, 2018, 87쪽.
무언가 서정적인 제목의 표지.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자고 이야기한 친구의 추천에 이 책이 어떤 책인지도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별 기대없이, 책장을 넘겼다.
가독성 좋은 문장이 술술 읽혔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한 달음에 다 읽은 책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책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책의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가 다루고 있는 불편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에 대해 깊이 공감과 몰입이 더해져갔다.
저자가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진실을 함께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마음에 시리게 남는 장면은 스톨에 갇힌 어미돼지에 대한 부분과 도살장과 살처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년시절부터 돼지들은 농장에서 한가로이 풀 뜯고 뒹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저 동화같은 상상일 뿐이었다. 내가 침대에서 편하게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 어미 돼지들은 감옥같은 스톨에 갇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새끼들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분리되어 젖을 내주는 참담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이건 돼지건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는 매한가지인데, 모성애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아무 죄도 없는 돼지가 그처럼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심지어 도살장에서 동물들을 전기충격으로 기절시킴에도 불구하고 고기의 질을 위해 약한 전기충격을 가해서 의식이 회복된 상태에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이 최소 10프로 이상이라는 사실은 경악스럽기까지했다. 또한 도살장 근무자나 국가적 명령에 의해 동물들을 살처분해야만 하는 공무원이나 군인들의 이야기...
결국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는 우리의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 동물 모두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공존하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그리고 나는 동물들을 위해 최소한의 무엇을 할 수 있나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책을 읽기 전 육류(고기) 음식이라면 무조건 환영이던 나는 책을 읽은 후, 육류를 가능한 한 줄여보자는 최소한의 다짐을 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82년생 김지영이 있는 것처럼 , 사람에게 각각 고유한 자기서사가 존재하듯이 동물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빛과 색이 있고 스토리를 지니는 법이다.
책 한권을 통해 나 한사람부터 생각과 태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최소한의 실천이라도 행해간다면 조금 더, 아주 한 발짝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칠흙 같은 어둠이 깔린 축사 한쪽에 따뜻한 노란 전등이 하나 켜 있고, 볏짚 위에 어미 돼지 십순이가 누워 갓 태어난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먹였다.
아기를 낳은 사람 엄마, 갓난아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아름답다, 평화롭다는 느낌을 넘어서 신비롭고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가톨릭 신자들의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찌 감히 돼지를 성모마리아에 비하느냐고 하겠지만, 성녀와 인간 엄마와 돼지 엄마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의 힘, 사랑의 힘이다. 모든 탄생의 순간은 경이롭다. 온 우주가 도와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순간.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하며, 동등하다.
누구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점에서. 고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난 주차에 책 내용을 모두 완독했으므로 이번 주차는 ‘추천의 말’ 을 읽으며 조남주 작가님의 소설『사하맨션』 에 대해 다시한 번 정리하고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2주차 쯤 영화 <기생충>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 은 분명히 ‘자본’에 의한 계급 차별과 갈등이 주가 되는 소설이다. 신샛별 평론가님이 ‘추천의 말’에서 표현하신 것 처럼, 주거와 의료,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하’의 삶은 그 자체로 차별이 될 수 밖에 없다.
타운 주민/L2/사하 라는 뿌리깊은 계급차별을 공고화한 것도 결국 실체없는 권력, 자본의 흐름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당연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품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세계에는 균열이 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균열, 건강한 균열을 바탕에 둔 사하와 L2의 연대와 저항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마치 담쟁이 넝굴이 하나되어 함께 넘어갈 때 강하듯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주었듯 약자들 간의 연대를 통한 한 목소리의 외침이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들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선을 비로소 허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산학협력 회사 현장에서 희생당하는 학생이 없기를, 한 개인이 자본과 맞바꿀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길, 그리고...... 자본의 유무로 여러 혜택들이 더 주어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이기를 .. 이 책을 읽고 진실로 바란다.
여러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유를 추구했던 우미,
총리관에 들어가 권력의 실체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겨눈 진경,
사하인 도경의 신분이 아닌 내면을 보고 관계를 맺었던 의사 수,
진경의 총리관 출입을 은근히 도왔던, 조용한 방식으로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던 사하맨션의 관리실 영감과 소개소 소장,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기존 사회의 질서가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향하던 사하맨션의 수많은 개인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늘어나기를 진실로 소망해본다.
한 동안 사하맨션의 주민들이 많이 그리울 듯 하다.
사상의 논리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인간은 셋 중 하나가 된다. 핵심 부품, 소모품, 폐기물. 『사하맨션』 은 소모품 또는 폐기물로 전락한 절대 다수의 인간이 경험하게 될 총체적 박탈의 상황을, 주거,노동,교육,보건,의료 시스템의 바깥에서 지옥을 견디는 난민들의 공동체를 상상한다. 아니, 그들이 단지 견디고 있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차별과 배제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에는 단호히 맞서고, 상처 입은 방문자들에게는 절대적 환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항과 돌봄의 공동체이기도 한 것이다.
- 신샛별(문학평론가), 「추천의 말」 중에서
미스터리한 죽음으로 시작한 소설이 장르적 쾌감 대신 서늘한 응축의 힘을 밀고 나가 마침내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선언할 때 나도 모르게 그 다음을 기다렸다. 이 소설은 미래를 바꾸게 될 한 여성 전사의 탄생에 관한 긴 쿠키영상이다. 설레지 않는가.
이번 4주차에는 지난 3주차에 이어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311호, 우미」 , 「701호, 진경」, 그리고 마지막 「총리관」까지 모두 읽으며 작품의 결말을 보고 말았다. 원래 마지막 한, 두장을 남겨두고 일독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인물 각각의,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의 서사에 몰입되어 후반부를 달렸다.
『사하맨션』 이라는 작품 전체를 읽고 난 후 전체적인 느낌은 무언가 짧고도 굵은 울림을 주는 듯 하다. 지난 주 영화 <기생충>과 더불어 이 소설의 서사에 대해 다룬 바 있는데,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있다고 믿는 어떤 '운명', '굴레'라는 것을 당연하게,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해야만 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 할 수 있었다.
나비 폭동이 희미해질 즈음이 되자 원주민이던 L2보다 그 2세와 3세들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애초에 L2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의문도 저항도 없었다. 당위나 의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운명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원래 그런 삶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함께 자란 아이들의 진로를 궁금해하지 않고, 2년마다 체류권을 갱신하며 살다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아기를 남기고 나오는 삶.
- 조남주,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사하맨션』, 245쪽.
원래 그렇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원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조남주, 「311호, 우미」, 『사하맨션』, 273쪽.
"할머니, 나는 중요해. 나는 우리 아기가 아래층 아기보다 늦는 게 속상해. 아래층 아저씨가 쟤는 왜 저렇게 누워만 있냐고 그러는 것도 싫어. 우리 아기 걱정해 주는 척 자기 애 자랑하는 거잖아. 싫고 좋고, 속상하고 기쁘고, 그런 마음들이 어떻게 안 중요해."
- 조남주,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 『사하맨션』, 249쪽.
그런 점에서 우미가 유년시절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 아무 의문없이ㅡ 그냥 당연히 그래야만 해서 정기적으로 출석하던 연구소의 조직검사에 불응하고 도망치고자 했던 시도, 그리고 그런 우미의 도망을 도왔던 연구소의 몇몇 구성원들, 아랫집 아이와 다른 '우연'의 성장에 속상해하고 슬퍼했던 우미, 그리고 총리관에 들어가 그곳의 실체를 목격한 진경과 진경 이전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모두들 죽지 않기 위해, 사장되지 않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라 여긴다.
비록 수십년 전 타운에서 벌어진 '나비폭동'이 물대포를 통해 비극적으로 진압되었을지언정,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싶었던 모든 개인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그러한 작은 개인들 ,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긴다.
죽었으리라 여겼던 한 여인의 사하맨션에서 소개소 소장으로 살아있으며, 연구원에서 연구소의 기밀을 지니고 도망나간 한 연구원이 사하맨션의 관리실 영감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진경이 총리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진정한 삶'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작은 불씨를 가진 개개인의 행동이 결국은 변화를 만들어내리라 여긴다.
부당입학(비리)에 대한 예민성이 결국 사회 변화로 이어졌듯이, 그리고 지금도 정치, 경제 등 수많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듯이...
조남주 작가님의 신작, 『사하맨션』 은 그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를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묘사하여 독자들의 타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조남주, 「311호, 우미」, 『사하맨션』, 283-284쪽.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
바람이 불었다. 총리관을 지키듯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무섭게 흔들렸다. 미처 노랗게 물들지도 못한 초록빛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떨어진 잎사귀에 날개를 펴고 앉았다.
『보라색 히비스커스』.2019년 5월 민음북클럽 첫 번째 독자 프로그램으로 올라온 선정 도서들 중 가장 아름다운 제목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고등학생 캄빌리가 드넓은 세계와 분명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성장기' 라는 이벤트 페이지 소개문구에 이끌렸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는 교사가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성장'이란 화두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유독 청소년을 다룬 성장소설, 교양소설, 입사소설 등의 서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라색 히비스커스』 라는 책을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서 읽고 싶은 도서로 지망해 신청링크를 제출한 다음, 별다른 안내문자나 연락이 없어 잊고 있던 찰나 ...... 한 달이 넘게 흐른 6월 말, 집으로 책 한 권이 배송왔다.
그제서야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 당첨된 사실을 확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숨가삐 2019년의 반년을 보낸 ㄴ내게 주어진 민음사의 선물 같아서 책을 펴며 행복했다. 이 아름다운 책의 제목에는 과연 어떤 내용과 의미가 담겨있을 까.
프로그램 신청 당시 이벤트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던 문구처럼, 작품의 내용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교육 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들에 정서에 주목한다. 주인공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는 나이지리아 지역 사회에서 굉장한 부를 갖추고 독재정부에 대항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유진'의 자녀이다. 유진은 유년 시절 선교사들을 따라가 신학교의 교육을 통해 성장한 가톨릭 신자인데, 그의 종교에 대한 집착과 과도한 신봉은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신앙을 갖고 태어나 성당에 다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불편할 정도였다. 작품을 읽으며 '유진'의 언행이 등장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라는 불편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이 올라왔다. 가톨릭 신앙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자비, 자애를 중점에 두는 신앙인 데 반해 캄빌리와 자자의 아버지 '유진'은 가톨릭 종교를 마치 집안에서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종교의 교리를 지키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진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시키고 있었다. 식전기도를 지나치게 길게 해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생리통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해 불가피하게 씨리얼을 먹은 캄빌리가 미사 전 공복재를 지키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 (* 실제로 공복재는 미사 1시간 전이 아닌, 영성체를 하기 전으로부터 1시간 전 음식을먹지 않는 규정인데 작품 속 유진은 그것을 미사 1시간 전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오인인지, 지나친 신앙이 나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 이교도인 아버지(할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심지어 함께하는 것도 꺼려하며 억지로 개종시키려는 모습, 할아버지의 그림을 지니고 있던 딸에 대한 한 폭력, 아들 자자의 유년시절 첫영성체 교리문답에 1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망가뜨린 일화 등..... 유진 자신의 입장에서는 신앙을 지키려는 자랑스러운 행동일지 몰라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곧 폭력일 뿐이었다. 심지어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적 관점에서도 사랑이신 주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폭력을 저질렀을 뿐더러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처벌자로서의 하느님만을 알아야만 했던 가족들.)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지 않고 그의 부친이 가톨릭 신앙을 믿지 않고 나이지리아 전통을 따른다고 하여 이교도로 간주하여 냉소적으로 대하며 효의 예를 다하지 않기까지 했다.
가톨릭 신학교를 뛰쳐나갔던 헤르만 헤세가 받은 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유진의 자녀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리가 앞으로 열여섯 가지 구 일 기도를 암송할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리고 일요일, 첫 번째 기도일이었던 삼위일체 주일에 우리는 미사 후에 남아서 구일 기도를 시작했다. 베네딕트 신부가 우리에게 성수를 뿌려 줬다. 일부가 내 입술에 떨어져서 기도할 때 텁텁한 짠맛을 느꼈다. 아버지는 오빠나 내가 성 다대오를 향한 열세번째 간구에서 졸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는지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0-51쪽.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또다시 들리는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아까보다 더 사납고 시끄러웠다.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4쪽.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기도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이십 분을 넘긴 후에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로 마무리 짓자 이페오마 고모가 혼자 튀도록 목소리를 높여서 "아멘."이라고 말했다. "밥 식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오빠?" 고모가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냅킨 펴는 동작을 계속했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5쪽.
종교적인 내용 뿐 아니라 학업 면에서도 유진은 그의 자녀들에게 엄격했다. 집서는 물론이고 이페오마 고모가 거하는 은수카에 처음 놀러갈 때 조차도 빽빽한 일과표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자녀들은 '1등'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가 자녀들에게 학업 등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강요하는 모습은 올해 초 방영되었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이나 영조의 '사도세자' 에 대한 양육을 쉽게 연상시킨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만 했던 나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 너는 왜 모든 환경이 주어져 있는데 하지 못하냐는 자신과의 비교, 자신의 과거환경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유진이 지닌 출생과 가족환경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졌으며 강박적 집착 또한 드러났다. 사랑과 칭찬, 존중 없는 채찍질, 과도하고 비뚤린 부모의 욕망과 열등감이 자녀를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을, 유진의 언행과 캄빌리의 표현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와 내게, 다른 애들이 1등하는 걸 볼고 성심여학교와 성 니콜라오 학교에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곤 햇다. 아버지의 학업에 돈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 특히 그의 불신자 아버지, 우리 파파은누쿠는 말할 것도 없고 - 아버지는 늘 1등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나를 꼭 끌어안고, 많은 것을 받은 자에게는 많은 기대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내 안의 뭔가를 따뜻하게 만드는 표정으로 내게 미소 짓는 것을 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4쪽.
"거울을 봐."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거울을 보라니까." 거울을 받아서 들여다봤다.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보어를 섞어서 물었다. "하나요."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가벼운 먼지 이쿠쿠가 스프링이 풀리듯 갈색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불어왔다. 입술에 앉은 모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오 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63-64쪽.
그러나 캄빌리와 오빠 자자가 함께 이페오마 고모 댁인 은수카에 머무르는 경험을 한 이후 그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일방적인 폭력 하에서 성장해 온 세계가 이상하며 비정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느끼고 변화, 성장하게 된다. 단적으로 주어진 일과표 대로 기도하고 공부해오는 행위 외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의 집안 일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캄빌리가 처음으로 아마카를 통해 집안일을 배워나가는 모습, 감정표현이 없는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아마카의 말을 곱씹는 모습, 파파은누쿠(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나누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싶다는 욕망.... 집에서 그들이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 하에 '죽어있었다'면, 은수카에서는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더욱이 그 나이대 청소년들이 충분히 지닐 수 있는 욕망(아마카의 음악을 함께 듣는 것, 신부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지니는 '청소년 다운 청소년'일 수 있었다. 특히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이 얼마나 자녀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개성을 인정하는지가 아마카의 직설적인 표현들에서 잘 드러났다. 처음 사촌인 캄빌리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며 경계하는 모습들도 그러했고 견진성사 직전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는 아마카의 용기가 캄빌리와 자자의 성장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작품의 서두 자자의 언행이 매우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여긴다. 기실 작품의 서두를 읽을 때만 해도 가톨릭 신자인 나는 성체를 모독하는 자자의 언행에 충격을 받았다. 굉장히 버릇없는 사춘기 청소년이네! 라며 혀를 휘두를 정도로.
그러나 작품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들의 성장과정과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서두에 등장했던 - 그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 자자의 행동이 너무도 당연히, 해야만 했던 행동이고 진정으로 용기있는 변화의 시도였다고 여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그 폭력의 굴레에서 자자와 캄빌리, 그리고 어머니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부장적인, 구습적인, 폭력적인 , 잘못된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비판적 사고와 표현이 용인되어야 진정으로 건강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다. 은수카에서 그들이 비로소 접한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처럼.
유진은 분명 나이지리아 정부에 대해서는 <써라운드>라는 신문을 간행하면서 지하운동을 펼쳐갈 정도로 독재정부의 부정함과 부당함을 비판하는 용기있는 자이다. 작품에도 , 등장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어쨌든 비용을 부담했으며 싫은 소리를 조금 했을지언정 여동생 이페오마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의 가정에서는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독재자였으니 이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앙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배웠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의 열등감이 가족들에게 군림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그가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부당한 폭력임을 자인하는 순간, 그는 그의 삶 전체를 잃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 작품 후반부 그가 파파은누쿠(할아버지) 그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웅크리는 그의 딸 캄빌리를 향해 발길질을 하고 벨트를 휘두르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른 것 이후, 그리고 그가 자자의 행동에 크게 화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또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아내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으리라 여긴다.
"자자, 너 영성체 안 했지." 아버지가 조용히, 질문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오빠가 식탁 위의 미사 경본에게 말하듯 그것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 웨이퍼 먹으면 입내 나서요."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 나사라도 빠졌나? 아버지는 평소에 그것을 꼭 성체라 부르라고 했다. '성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이 가진 본질과 성스러움에 근접하기 때문이었다. '웨이퍼'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웨이퍼는 아버지의 공장들 중 하나에서 생산하는 것 - 초콜릿 웨이퍼, 바나나 웨이퍼 - 이자 사람들이 비스킷보다 좋은 걸 자식에게 주고 싶을 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부님이 자꾸 제 입을 만져서 구역질 나요." 오빠가 말했다. 내가 자길 쳐다보고 있음을, 충격받은 내 눈이 입 다물라고 애원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 쪽은 보지 않았다.
"그건 주님의 몸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아주 낮았다. 하얀 고름이 찬 두드러기가 구석구석 퍼진 아버지의 어굴은 아까부터 부어 보였지만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님의 몸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받지 않을 순 없다. 그건 곧 죽음이야, 너도 알잖니."
"그럼 죽을게요." 오빠는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가 콜타르색으로 변했으면서도 이제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죽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높은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 절대로 떨어지리라 생각지 않았던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를 찾듯 식당을 휙 둘러봤다. 그러고는 미사 경본을 집어 그것이 식당을 가로지르게끔 오빠를 향해 던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5-16쪽.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마카가 엄마 말을 못 들은 양 아마디 신부에게 말했다.
"교회의 주장은 서양식 이름이 있어야만 견진 성사가 유효하다는 거잖아요. '치아마카'는 하느님이 아름다우시다는 뜻이에요. '치마'는 하느님이 제일 잘 아신다는 뜻이고요. '치에부카'는 하느님이 가장 훌륭하시다는 뜻이죠. 이 이름들이 '바오로'나 '베드로'나 '시몬'만큼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나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326쪽.
한편 3년 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출간한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이번 작품에서 사회속에 만연히 자리하고 있는 성 불평등(차별적 요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비록 나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이슈에 대해 깊이있게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으며 더욱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해당 내용들은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많이 사라진 내용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 드러난, 그리고 우리도 수십년 전까지는 분명 존재했던 여성에 대한 성 불평등의 내용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여성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들, '여성은 치마를 입고 남성은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편견, 그리고 성당 안에서 여성 만이 미사보를 필수로 써야 한다는 인식들... 이런 사회 속 만연히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일상 속의 의문을 해결해 나갈 때 성 차별의 문제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상을 바꾼 변호인> 이라는 실화 바탕의 영화를 관람한 바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얼마 안되는 여성 변호인 긴즈버그가 성에 대한 불평등한 법률에 의문을 지니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려진다.
여러 진통들이 많긴 하지만, 한국사회도 남녀를 막론하고 불평등한 것들에 모든 합리적인 개인들이 비합리적인 사소한 것들에 대해 자그마한 의문을 가지는 데서 시작하기를 바란다.
이미 변화되기 시작했지만 소소한 예시들로는, '왜 가사노동과 육아는 여성의 것들인가?' '왜 결혼 시에 남성이 집을 장만해 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가?' 등을 들 수 있겠다.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이론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다만 우리가 모두 어느 순간에는 약자, 소수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권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다.
"누가 누굴 돌보게 될지는 모르죠. 1학년 토론 수업의 여학생 여섯 명이 결혼했는데 주말마다 남편들이 벤츠나 렉서스를 타고 와서 오디오랑 교과서랑 냉장고를 사 줘요. 학생들이 졸업하면 걔들도, 걔들 학위도 남편 소유가 되죠. 모르겠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99쪽.
"은나, 아니."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다. "선교사들 탓이 아니에요. 저는 미션스쿨 안 나왔나요?"
"너는 여자잖아. 여자는 자식이 아니야."
"에? 자식이 아니라고요? 오빠가 언제 아버지 다리 아프시냐고 물어본 적 있어요? 제가 자식이 아니면 앞으로는 아침에 잘 일어나셨냐고 안 물어볼게요."
파파은누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내가 조상님 곁에 있게 됐을 때 내 영혼이 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09쪽.
성 베드로 예배당에는 성 아녜스 성당에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촛대나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도 없었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가능한 한 많이 묶게끔 두건을 묶지도 않았다. 봉헌 행렬을 위해 나올 때 보니 어떤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기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지를,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느님의 집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되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되지, 특히 하느님의 집에서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91쪽.
서평을 마무리하며 ...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보라색 히비스커스'인지를 다시금 고찰해본다. 이페오마 고모의 집 마당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보기 전까지, 캄빌리와 자자에게 '히비스커스'라는 꽃은 '빨강색'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162쪽) 그러나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존재는 새로운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전에는 보도 듣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아이들은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자가 히비스커스 꽃을 그들의 집 앞마당에 심으며 이를 소중히 가꾸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었을까. 은수카에서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지니고 싶다는 그 소망...
그런 점에서 자자의 저항과 어머니의 결단은 그들이 진정으로 희귀하고 향기로운 히비스커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많이 아픈 만큼 희귀하고 향기로운 책이라 여러 번 재독하고 음미하고 싶은, 다채로운 색의 소설이었다.
(책 후반의 번역가 해설을 통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7쪽.
"일단 오빠를 은수카에 데려갔다가 이페오마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거예요." 내가 마한다. "아바에 돌아가면 오렌지나무도 새로 심고, 오빠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심고, 저는 익소라꽃을 심어서 나중에 꿀을 빨아 먹을 거예요."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너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물기를 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 도서 사하맨션과 영화 기생충을 함께 다루고 있으니 영화 스포에 주의 바랍니다. (스포 多)
이번 3주차에는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 중에서 「201호, 이아」, 「714호, 수와 도경」 그리고 「305호, 은진, 30년 전」총 세 장을 읽고 해당 장의 내용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품 전체 내용 중에서도 특히 이번 주에 읽은 세 챕터에서 시사하고 있는 내용이 최근 상영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많이 유사하다고 느꼈다. 특히 「714호, 수와 도경」 에서 수와 도경은 의사의 신분과 사하의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간의 애정, 사랑을 키워나가고 함께 의지하며 사하맨션에 살게 되는데, 신분에 관계없는 그들의 진정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수가 죽자 일방적으로 도경이 수의 살인범으로 몰리며 급기야 도망을 쳐야 하고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는 도경의 처지는 그가 사하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운명이다. 그가 사하가 아닌 주민, 아니 적어도 L2였다면 도경이 그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남의 집 냉장고에 숨어 있다가 몰래 도망가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했을까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L2도 나은 신분이 아닌 것이 「305호, 은진, 30년 전」 이야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보육원에서 자란 L2 계급의 은진은 유년 시절 "너는 커서 보육사 해야 되겠다" 라고 말한 주임 보육사의 한 마디에 꿈을 지니게 되지만 L2가 보육사의 자격을 지닌다는 것은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여러 심사에 의해 계약직 보육사의 자리를 따내지만 감염병이 돌자 다른 L1(타운의 진정한 주민) 계급 보육사들이 모두 출근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보육원에 출근했다가 결국 그 젊은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은진은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난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성화고에 입학해 산학협력 기관에 취업해 일하다가 안전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무리하게 업무를 맡아야만 했던 ,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진 고등학생 청춘들.
누군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학에 가고 너무도 당연하게 의식주를 누릴 때 사하맨션의 거주자들은 전기 하나, 수도하나 쓰는것도 열악한 상황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도 기택(송강호)과 동익(이선균)의 두 가정형편을 통해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기택보다도 더 낮은,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에 문광(이정은) 내외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차등을 심각히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조선시대까지 신분차별의 기준이 양반(귀족)과 상민, 노예 등 '태생적 출신'에 따라 분류되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차별의 기준이 경제적 문제로 변화되어 계승된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혹자는 경제력의 경우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조남주 작가의 『사하맨션』 에서도 ,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도 경제력의 차이가 개인의 노력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형성된 사회적 차별 속에서 학업(교육)의 기회, 양육의 기회, 그리고 선택의 기회 면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더욱 공고화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사하맨션』 에서 은주의 계급으로 인해 보육사라는 직업에 취직하는 일에 애초에 제한이 걸리는 일이나, 수가 타운의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사하맨션에 거주하는 의사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당하며 결국 병원에서 짤리는 일이 그러하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공고화된 경제적 차이에 따른 취업문제와 의식주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2019년을 다루고 있는 책과 영화에서 모두 빈부격차에 따른 차별, 사회적 문제를 꼬집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주가 사하맨션에 면접을 보러간 후 은주에게 전해진 201호 왕할머니의 한 마디 대사가 깊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시험 보는 게 아니야. 너를 점수 매기겠다는 것도 아니야. 네가 뭘 할 줄 아는지 무슨 자격증이 있는지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같이 살아도 탈은 없을까, 이미 살던 사람들이랑 잘 맞춰 갈 수 있을까 서로 인사나 하자는 거야."
- 조남주, 「305호, 은진, 30년 전」, 『사하맨션』, 209쪽.
진정한 경계의 허뭄은 바로 이렇듯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평가'와 '판단'을 제거해 나가는 데에 있다고 여긴다. 너는 몇 점 짜리 사람인가, 너는 몇 평에 사는가, 너는 무슨 향수를 쓰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닌 '당신은 무슨 꿈이 있나요', '당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나요',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를 물어보고 더 큰 의미를 두는 사회로 변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 장에서는 메르스 이야기를 비유하는 듯 한데, 남은 서사들도 깊이 고대되며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져 빨리 독파하고 싶다.
어느덧 조남주 작가님의 신작소설『사하맨션』 의 ‘밑줄긋고 생각잇기’ 2주차가 되었다. 1주일 사이, 지난 6월 22일(토요일)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조남주 작가님께 직접 책에 사인을 받았고 사인본이 된 책 덕분일까, 책을 더 깊이있게, 즐겁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올라왔다.
지난 주차이 이어「701호, 진경」 과 「214호, 사라」, 「201호, 만, 30년 전」까지 세 챕터를 읽으며 진경과 사라의 성장기와 가족사 등 주요 인물들의 서사에 대해 읽어내려갔다. 진경과 도경, 그리고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 연화, 30년 전 201호에 머무르며 어른이 된 ‘만’까지 사하맨션에 입주해 있는 이들은 그 누구 하나 쉽거나 편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 안에서 그들을 둘러싼 차별(구직활동에서의 차별, 의료혜택에서의 차별)과 불합리함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서사를 읽어내려가며 그저 타운 소속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L2로서, 사하로서 차별받는 삶을 당연하게 내재해 온 그 수많은 이들의 아픔에 , 그들의 고통에 깊은 연민과 아픔이 내 마음속에도 자리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라가 그 전까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며 ,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짐으로 여기며 감내해왔던 것에 비해 이제는 저 너머 세상이 보이며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불합리한 것에, 부당한 것에, 목소리를 내고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이기에.
예전의 사라였다면 여기서 끝나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괜찮고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다. 왼쪽 눈이 없는 채로 태어났고 열두 살에 엄마가 죽었고 열일곱 살부터 술을 파는 바에서 일했다. 사라는 그 고단한 삶을 이상할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심지어 때로는 감사하며 살았다.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 크기, 그 만큼의 빛과 질감, 그 정도의 난이도였다. 그런데 요즘 사라에게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했다.
(중략)
”괜찮아?”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 조남주, 「214호, 사라」, 『사하맨션』, 111-112쪽.
그런데 이 사하맨션에서도 30년 전, 소위 ‘나비폭동’이라고 하는 - 목소리를 내고 부당함에 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분명 있었다. 한국 사회의 7-80년대 민주화운동과 무서울 정도로 닮아있는 나비 폭동의 과정. 30년 전 벌어진 이 시위가 타운 권력자들(총리단)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지금 사하맨션에 사는 이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당함을 자각하고 억울함을 느끼기 시작한 사라는, 사라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진경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 답답함과 한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는 수위영감은, 어떤 일을 계기로 , 어떤 방식을 통해 타운의 부당함과 불합리함, 차별에 저항할지 앞으로의 서사가 궁금해진다.
그들의 연대는 아마 사하맨션의 주민들에서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사하맨션의 주민들 뿐 아니라 L2와 L1까지 모두, 타운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자각하는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해결 방식이 매우 기대되는 작품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지난 과오와 연대의 과정을 소설 속에서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어, 이 전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매우 기대가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사하맨션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통해 다시금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번 제 7회 밑줄긋고 생각잇기의 테마주제는 다름 아닌, '디스토피아 소설 ' (*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나타내고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이었다. 선정된 여러 소설들 중 조남주 작가의 화제작 『82년생, 김지영』 을 이미 일전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도 했고, 이번에는 어떻게 사회를 묘사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있을까 궁금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을 이번 도서로 택했다. 검은 배경에 다소 차가워보이는 회색빛 맨션이 그려져 있는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면서도 정돈되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주까지 워낙 일이 바빴던지라 많은 분량을 읽지는 못했으나 「남매」와 「사하맨션」 까지 읽으며 그 짧은 두 개의 장에서도 많은 메세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 비슷한 주제여서인지- 작년에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은 최인석 작가님의『강철 무지개』 가 언뜻 떠오르기도 했다.
기업이 부지를 구입해 총리를 설정하고 심지어 회장조차도 총리단에 소속된 인물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을 통해 흔히 S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 자본이, 기업이 운영하고 지배하는 국가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고 7-80년대의 독재정권을 묘사하는 장면, 주민들의 계급화를 통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 사하맨션의 초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벌써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묘사하는 듯한 암시를 풍기고 있었다.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인데 이렇듯 수많은 한국사회의 묘사가 떠오르고 있으니,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고 어떤 서사가 펼쳐질지 기대가 크다.
특히 역시 『82년생, 김지영』 을 쓰신, 작가답게 깔끔하고 흡입력있는 문장에... 이제 바쁜 일들이 지나갔으니 단숨에 책을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책 속에 깊이 몰입하며 책 속에 담긴 작가님의 문제의식을 함께 생각하고 나누고 싶다.
특히, 주민 자격을 얻지 못한 L2계급보다도 더욱 못한, 양육자들에 의해 포기되고 버려진 '사하'라는 계층의 거주자들이 사는 '사하맨션'에 사는 '우미' 에 대한 한 대목이 마음에 참 많이 남았고 경종을 울렸다.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아 안정적인 , 아니 사실 우리 사회의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하며 아둥바둥대는 우리의 삶..
그렇게 쌓아나가는 제도권 교육에서의 '지식'보다, 우미가 지닌 사랑과 관심을 통한 '지혜'가 더욱 의미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기에.. 제도권에 속한 것 자체가 바로 곧 그 사람의 가치를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적 표현을 통해 되새기개 해 준 좋은 문장이었다고 여긴다.
노란 나비, 혹은 나방은 다시 색종이 조각처럼 팔락이며 날아가 버렸다.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미는 제도권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머릿속에 온갖 지식들이 가득했다. 병적으로 책을 읽었다. 역사와 철학에 특히 해박했고 유명한 소설이나 시구들도 줄줄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