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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04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17.
- 2016.11.27 금태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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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 책읽는당 『아몬드』 사전 서평단활동의 일환으로,
창비 출판사에서 출간 전 비매품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17. *본문의 인용구 페이지는 출간된 도서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위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손원평, 『아몬드』, 29쪽. 이 작품에는 편도체-아미그달라의 이상으로 감정-특히 공포나 불안,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조금 특별한 17세 소년 윤재(선윤재)의 성장과정이 그려져 있다. 유년 시절 눈앞에서 한 아이의 죽음을 보고도,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의 열일곱 생일날 한 남자의 무차별 살인으로 인해 갑작스레 닥친 할멈(할머니)의 죽음과 칼에 찔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도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윤재를, 사람들은 마치 이상한 ‘괴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대한다.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인해 학교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윤재의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윤재가 ‘정상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감정과 감정의 반응에 대해 교육시켜왔다. ‘-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범주에 속할 거야.
- 손원평, 『아몬드』, 38쪽. - 엄마도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걸 원하시지는 않았을 거다. - 엄만 제가정상적으로 살길 원하셨어요 – 그게 무슨 뜻인지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 바꾸어 말하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 평범…….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 - 손원평, 『아몬드』, 89-90쪽.
한편 곤이(윤이수) 또한 윤재와 같이 사람들에게서 ‘괴물’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곤이는 유년 시절 놀이동산에서 부모님과 헤어져 이후 보호시설에서 지내다 입양 후 다시 파양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여러번 사고를 쳐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살아가 부모님을 다시 만난다. 걸핏하면 폭력을 휘드르고, 교사들의 수업 진행을 방해하거나 잦은 욕설을 사용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곤이는 소위 ‘문제아’로 불리며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윤재는 비록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할지언정 그 누구보다도 타인과 소통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독서량이 풍부해 지식이 많을뿐더러 성장과정에서 할멈과 엄마로부터 받은 충만한 ‘사랑’을 늘 추억하고 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 손원평, 『아몬드』, 171-172쪽. 곤이 또한 그가 정말 천성이 ‘나쁜’아이라서, 폭력을 행사하고 반항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한 후 곤이는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파양당하며 버려진 경험이 있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부모님을 찾았지만 친어머니의 임종도 떳떳하게 보지 못했고 , 아버지는 자신과 소통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버려지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내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곤이는 다시 고통 받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버려지지 않기 위해 강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강함’을 어른들이 규정해 둔 세계에 반항하고 질서를 위반하는 ‘과시적 욕구’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곤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들에게, 혹은 학교/청소년상담사와 상담을 받으며 ‘유기되는 것에 대한 불안’, ‘이해와 소통의 욕구’를 해소한다면 곤이의 문제행동 또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고통’이라는 감정에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나비의 날개를 찢으면서까지 윤재와 소통하고자 하는 장면을 통해 곤이의 진실성과 순수성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윤재의 내면을 이해하며 곤이를 ‘좋은 아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윤재뿐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곤이는 윤재와 단 둘이 있을 때만은 다른 누구에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깊이 터놓을 수 있었다. - 그 남자는 말이야……. 곤이가 말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이 날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강남에 있는 학교에 날 처넣은 거였어. 거기 가면 내가 모범적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라도 갈 줄 알았나봐. 근데 첫날 가보니까 나 같은 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인거야. 날 보는 눈빛 하나하나에 그렇게 써있더라고. 그래서 깽판을 좀 쳐 줬지. 거긴 얄짤 없더라. 하루 만에 쫓겨났어. 곤이가 콧바람을 불었다. 간신히 전학시킨 게 여기야. 그나마 인문계라 체면은 섰겠지.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그런 애가 아닌데…….
- 손원평, 『아몬드』, 166-167쪽.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이 아련하게 머릿속을 오갔다.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 아무런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싶어. 눈물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기엔 넌 너무 감정이 풍부하거든. 넌 차라리 화가나 음악가가 되는 편이 더 어울릴걸. 곤이가 웃었다. 물기 어린 웃음을.
- 손원평, 『아몬드』, 248쪽.
윤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과 곤이의 마음 깊은 곳 진실한 내면을 바라보면서, 한 개인이 지닌 외적인 부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해 그 내면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성급히 낙인찍는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특히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타인의 고통, 타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나서서 돕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범인凡人들과 달리 윤재는 곤이가 위험에 마주했을 때 진심을 전하고 곤이를 구해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직접 위험과 대면하는 용기를 보인다. 즉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편도체의 크기’와 같은 장애나 질환, 혹은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실천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음을 되새기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나 실직(해고)된 노동자 등 사회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문제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공감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에만 품고 있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 나 또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행인 중 한명이 아니었던가 싶은 마음에 부끄러워진다.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략)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뻔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것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기세가 너무나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손원평, 『아몬드』, 244-245쪽.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가 칼에 찔린 그 사건 뒤로 심박사에게 삶의 조언을 얻고, 곤이와 소통하며 진실한 ‘우정’을 배우고 고통과 두려움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으며 도라(이도라)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특별한 존재가 된 도라에게는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내밀한 마음을 고백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누군가가 가게로 들어왔다. 도라였다.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말하고 싶었다. 마음에 떠오른 불씨가 꺼지기 전에. - 나 언젠간 글을 쓸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 도라의 눈망을이 뺨을 간질였다. - 나도 이해 못하는 나를,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 이해.
- 손원평, 『아몬드』, 206-207쪽.
즉 기존의 세계에서 가족을 상실한 후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도 기적적으로 회복되며 마무리된다. 편도체의 문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의사들의 확정적 진단을 넘어서 윤재의 소통하고 이해하며 진심을 다하고자 하는 ‘내면’의 노력이 결국 뇌(편도체)의 문제를 극복해낸 것이다.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사가 웃었다.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나는 곤이와 도라와 함께 보낸 지난 몇 개월을 짧게 회상했다. 그리고 곤이가 후자로 자라고 변하기를 바랐다. 그 전에 ‘좋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 손원평, 『아몬드』, 252-253쪽. 책장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너무나 마음을 울리는 문구들이 많았던 이 소설은 인간관계를 통해 사랑, 우정, 고통과 두려움, 불안 등 감정들을 다룰 뿐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란 실천적 행동의 수반에 있음을, 그리고 삶의 ‘좋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찾은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을 위해 노력해 나갈 때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좋은 방향’을 고민하며 그저 달리는 개개인 모두의 삶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청소년들, 새로운 관계를 마주하며 청소년기에 마주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변화와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청년들, 외적인 문제행동만으로 학습자(청소년)들을 쉽게 낙인찍으려하는 일부 교사들을 비롯해 선입견을 지니고 타인을 바라보는 어른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 그들 모두와 함께 읽고 소통하며 성장해나가고 싶다. 삶을 살아가며 그 삶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는 만큼, 자신이 느끼는 것 그대로 행동하는 만큼 어느 새 한 발짝 나아가 있을 것이다. ‘누워있는 동안 같은 꿈을 자주 꿨다.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이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태양 아래 나와 곤이가 서 있다. 무척 뜨겁다. 앞에서 달리기 시합이 펼쳐지고 있다. 곤이가 씩 웃으며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을 펼치자, 반투명한 구슬이 손바닥 위를 또르르 구른다. 중간에 웃는 표정 같은 둥근 선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구슬을 굴리자 붉은 선이 방향을 바꾸며 울었다 웃었다 한다. 자두 맛 사탕이다. 사탕을 입안에 넣는다. 달콤하고 새콤하다. 침이 고인다. 혀로 사탕을 굴린다. 이따금씩 사탕이 이빨과 부딪혀 딱딱 소리를 낸다. 갑자기 혀가 저릿하다. 짭짜름하고 시큰하다. 비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 사이로 다디단 향이 올라와 나는 정신없이 코를 킁킁댄다.
- 손원평, 『아몬드』, 249-250쪽. 여기서부터는 아주 다른 얘기다. 새롭고, 알 수 없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일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 손원평, 『아몬드』, 258-259쪽.
제 3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2주차 - 필사1회차 (0) | 2017.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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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1주차 - 배송인증샷 (0) | 2017.04.05 |
[리디북스 9주년] 전자책계의 리더(Reader), 리디북스 RIDIBOOKS (2) | 2017.03.31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민음사, 2017. (0) | 2017.03.30 |
밑줄긋고 생각잇기 5주차 - 『거대한 뿌리』 , 『행복의 형이상학』 (0) | 2017.02.15 |
금태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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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신간평가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도 하프야. 아버지가 한국인이었어. 하프란 중간, 혹은 반반이란 뜻은 아닌 거 같아. 샌드위치 두 개 중 하나는 치즈, 하나는 야채 하는 식으로 구별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벽에 가만히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 행동이나 생각 같은 걸 하프로 나눌 수 있을까?“
-P149. 신부 한 사람은 시눌룩축제 기간에 들어와 몇 년간 정착했다. 신부는 대학 바로 옆에 붙은 빌리지에 살았다. 우리는 대학 정문 건너편 나무집을 본부로 두고 있었다.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가 신부의 꾐에 넘어갔다. 공짜로 밥도 주고 한글도 가르쳐준다고 했다. 젠장, 우리 같은 코피노는 아주 불쌍하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다. 신부는 나를 처음 보던 날, 성당에 가면 먹을 게 많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몇 끼 먹니?” 웃음을 참아야 했다. 나는 십대에 참치맛을 알았다. -P11.
혼혈인, 특히 미국이나 유럽계 등 백인혼혈이 아닌 동아시아계나 흑인과의 혼혈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작품 속 신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단일민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미디어의 영향이 더해져 코피노와 같은 동아시아계 혼혈아들은 버림받은 존재로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들이라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인에게 그들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비동일성’을 지닌 존재로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틀 내부에서 소외/배제되어 있다. 작품 중반 ‘누나’의 집에 한인회 구성원들이 초대되었을 때 잠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인 블로그 및 여러 사회단체에서 코피노 아빠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하며 ‘코피노 아빠 찾기’ 운동을 벌이는 것 또한 배제/소외된 타자를 양산하고 방치한 데 대한 책임을 묻는 일환으로 여겨진다. 기실 한국문학사에서 ‘혼혈인’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1930-1940년대 한국 문학에서도 ‘혼혈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그린 소설이 있는데, 혼혈인을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시킨 작가가 바로 염상섭이다. 염상섭은 그의 소설 『해방의 아들』(1946)에서 준식/마쓰노와 같은 혼혈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짐)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순수한 혈통의 조선인을 찾는 데 두고 있다. 염상섭의 여타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양옥집, 『만세전』의 혼혈소녀 일녀 정자, 『사랑과 죄』, 『숙박기』 등 다수의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혼혈인’의 문제가 드러나는데, 혼혈인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한 자성을 소설 속에 담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실패한 까닭은 『해방의 아들』에서 홍규로 인해 준식/마쓰노가 결국 아버지 쪽을 따르는 것으로 떳떳함을 추구하며 가부장적 논리를 선택하는 등 ‘혈통적 민족주의’ 에 국한하여 혼혈인을 바라본 바, 민족주의적 ‘동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같은 ‘혼혈’과 ‘혼종’의 문제에 천착한 김남천이나 김사량은 염상섭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1939)는 트랜스내셔널의 위치에서 주체성을 회복하여 민족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혼혈인 하루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를 부인하고 있는데, 아버지 한베에가 조선인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나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인하는 것은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에서 준식/마쓰노가 그러했듯 한쪽을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하루오가 조선인인 ‘나’(남선생/미나미)을 조센징이라고 놀리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그러나 내(남선생/미나미)가 하루오에게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이며 내면의 사랑을 끌어내고자 하며 ‘선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자, 하루오는 자신이 부정하고 지워내고자 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또한 그 역시 ‘나’(남선생/미나미)의 애정에 ‘남선생’이라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화답하게 된다. 즉 남선생(미나미)과 하루오는 염상섭의 소설에서 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혼혈인의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극복하는데, 이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를 드러내며 ‘타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남선생이 자신을 ‘미나미’로 소개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던 것도,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정해 왔던 것도 결국 자기 내부에서 겪는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의 ‘차이’를 통합하고 수용하기 어려웠던 까닭인데, 결국 하루오가 남선생에 의해 ‘혼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남선생이 지니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차이 또한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이자적(二者的) 관계 하에서 상호간의 울림과 사랑을 통해 윤리적, 인격적 관계를 모색해 나가는 모습이 남선생과 하루오의 관계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나병철,「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현대문학이론연구』제54권, 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참조.)
금태현의『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이라는 소설 또한 혼혈 문제에 있어 김사량이 추구한 바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하퍼 킴(Harper Kim)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새아버지와 결혼해 살고 있어 부모님 모두와 이별한 코피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혈통적 민족주의’ 의 논리 안에서 하퍼 킴(Harper Kim)과 같은 코피노들을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하퍼는 그저 부모님 모두와 단절되었을 뿐이다. 가장 소중한 건 뭐지. 다리를 책상 위에 얹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선풍기가 회전하며 미지근한 바람을 흩뿌렸다.
구글 계정에서 수익을 뽑아내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돈. 남들이 말하는 가족, 일본에 사는 엄마도 생각났다. 엄마치곤 참 정이 안 가는 존재다. 비자도 문제없고 일년간 유효하다는 항공권도 이메일로 도착해 있다. 일주일 동안 엄마를 만나서 뭐하겠나. 아들의 목표를 듣고 나면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황당하고 소박해서. -P61.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나는 또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어쩌다 사진 몇장, 메시지 몇 번 보내는 걸 자식과의 유대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엄마를. 더는 찾을 필요 없는 나의 엄마를.
-P80. SNS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지만 하퍼의 성장과정에서 그를 진정으로 지원하고 격려해 주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이는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하퍼와 같은 코피노 아동들 곁에서 함께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방을 구했으며,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대했고, JTV 박사장은 그에게 샤부(마약) 배달을 시키는 등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시킨 ‘샤부(마약) 운반’ 건을 약점 삼아 그를 협박까지 한다. ‘돈’을 벌어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숙식을 해결하고 몰래 돈을 훔쳐내는가 하면, 유투브 계정에 올릴 만한 자극적인 영상을 훔쳐 자신이 찍은 영상처럼 포장해 가능한 많은 조회수를 얻어야만 한다. 즉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이해관계 하에서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해 온 것으로서, 하퍼는 박사장에게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하퍼 또한 ‘돈’을 벌기 위해 타자/대상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습관대로 영상을 훔치는 데 주력했다. 훔치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에 당장 돈이 되는 흐름을 만들 수 없었다. 망고스퀘어에 남녀가 모여 불놀이를 하는 모습을 찍어 내 계정에 올리고 일주일동안 들락거려봤다. 서른명 정도가 불놀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년 내내 30도가 넘는 망고스퀘어에서 횃불을 목덜미 뒤로 돌리다 입에서 뿜어내는 불놀이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훨씬 더 뜨겁고 재미있는 게 필요했다. 사이트를 떠도는 뜨거운 작품들을 뒤져야 했다. 이따금 마르코 폴로 누나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접속을 차단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막아버리면 외롭고, 열어두면 귀찮은 상황에 부딪혔다.
-P17-18. 나는 박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예의 바른 사람이 어째서 나한테는 하인 대하듯 했던 걸까. 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잘못한 것 같았다.
-P86 블로그에 아침 풍경을 담고 글을 올렸다. 나의 일상은 돈으로 연결하기 힘들었다. 유명한 사람의 움직임은 곧 돈이었다. 호날두가 변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공을 찬 뒤 가면을 벗으면 200만명이 금세 모여든다. 필리핀의 섬을 하루 한군데씩 여행하면 20년이 걸린다. 내가 만일 20년이 걸리는 여행을 하면서 보홀섬에 초콜릿 힐이 있다는 등, 카가얀 데오로에 델몬트 농장이 있다는 등 글과 사진을 올린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거지로 전락할지 모른다. 다시 과거처럼 망고스퀘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명운을 건 뜀박질을 더는 원치 않는다.
-P90. “아, 이제 생각났어. 숨겨둔 담배 얘기 말인데, 그런 건 천천히 찾을수록 더 값어치가 있는 거야. 필요할 때 딱 끄집어내면 더욱 좋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공유한, 숨겨둔 담배 같은 거 말이야.” 박사장은 귀엣말로 ‘샤부’라고 속삭였다. 박사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망고스퀘어를 오고 가는 여자애들을 박사장의 가게인 JTV로 안내하는가 하면, 시키는 대로 샤부를 배달했다. 나는 박사장의 부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짧은 기간 박사장과 거래한 일들이 나의 십대 시절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P165. 세부의 화려한 밤문화를 형성하는 중심에 놓인 ‘망고스퀘어’를 활보해 왔으면서도, 하퍼는 그곳에 소속되고 있지 못했다. 늘 그를 동정하거나, 이용하는 사람, 혹은 일시적인 쾌락의 대상이 되는 이들과 ‘잘못된 관계’를 맺어왔으며, 하퍼와 사랑과 신뢰 하에 진실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누나만이 내 몸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콘도로 반찬 재료를 가져와 요리해주었다. 동태도 구워 먹나요? 하고 물었더니 한참 동안 웃었다. 이건 메로구이라는 거야, 누나가 말했다.
메로는 기름기가 많았다. 살이 두툼하면서 잘 갈라졌다. 잔뼈라곤 없어서 토막 난 메로의 원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름이 빠져나오면서 기운을 잃은 내 몸을 메로구이가 보충해준다고 누나가 말했다.
-P27.
누나는 국수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았다. 잘게 썬 김치, 볶은 양파는 기본으로 들어갔다. 호박, 상추, 김, 깨소금, 참기름을 국수에 섞었다. 뭐가 빠졌지, 하며 냉장고에서 다진 소고기를 듬뿍 넣었다.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겸손을 행사할 줄도 알았다. “별로 맛없지. 초장을 좀 더 넣을까?” 뭐 하나 더 넣지 않아도 먹어본 국수 중에 가장 맛있었다. 칭찬을 휘둘러 주고 싶을 정도로.
-P60.
한편 박사장이 ‘돈을 받아내야 한다’며 잡아오라고 명령한 ‘베렌’에게는 ‘누나’에게 느낀 모성애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박사장이 보여 준 미인대회 영상을 통해 처음 이성적 매력을 느끼고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여자와 사귀고 싶다는 ‘욕망’을 떠올리게 된다면, 막탈리사이에서 베렌의 어머니를 만나고 일본에서 베렌과 함께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과 존중, 연대에 기초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하퍼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면, 일본에서 만나 들려준 베렌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기고백은 이성에 대한 욕망에서 나아가 상호 환경과 차이에 대한 공감과 존중으로 변모한다. 하퍼가 ‘하프’, 즉 혼혈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비동일적’ 존재로 여겨지며 한국인들에 ‘단절’되었고 부모님 두분과 모두 헤어짐을 겪어 단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렌 또한 부모님 사이가 틀어져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부친의 단절을 겪었으며, 줄곧 농장을 운영하며 집안을 유지해 왔으나 엄마가 염소나 돼지 등 가축들을 팔아 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가축들이 사라지자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한 바 있다. 더욱이 베렌이 JTV에서 일하다 한 손님에게 돈을 받은 일 때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의 의혹을 받게 되어 구금상태에 처한 적이 있는데 , 의혹을 벗고 풀려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일을 도와준 댓가로 재판에서 승소해 받은 돈의 50%를 요구하는 박사장으로 인해 곤란에 처하게 된다. 하퍼가 베렌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또한 결국 돈 때문이다. 베렌 역시 하퍼 만큼이나 ‘내몰려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비록 베렌이 하퍼가 박사장과 맺은 관계로 인해 의혹을 품고 그를 거부하려 하지만, 베렌은 결국 하퍼가 보이는 진심에 화답해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의 일본 여행이 중요한 점은 베렌 뿐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 또한 회복되기 때문인데, 하퍼는 비로소 자신 뿐 아니라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리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새아버지(할아버지)와 단절되어 있었고 힘겹게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김사량의 소설에서 남선생과 하루오가 선물의 관계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일본 여행을 기점으로 하퍼와 베렌의 관계가 재설정된다. 혼혈인으로서 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지며 배제되어왔고 ‘단절’되어 누군가와 진실한 교류를 나누어 보지 못한 하퍼가 마찬가지로 ‘단절’과 ‘상실’을 경험했으나 이로부터 도망치고 저항하고자 하는 베렌의 삶을 통해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이제 누군가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용당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타인의 것을 훔쳐 돈을 버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아야 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진실로 삶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하퍼는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시켜 준 베렌에게 ‘사랑해’라고 고백하며, 그녀와 미래를 함께하고 가족을 구성해 이제는 신뢰와 유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지니게 된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소리, 물안개가 가득한 호수의 입김, 조용히 서 있는 숲속의 나무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이 모습이 무람없는 내 삶의 출발이다. 나를 투영한 영상이다. 베끼지 않은 진짜 계정이다. 내 채널이다.
세부로 돌아가 내 삶과 부딪히며 살고 싶다.
-P213.
다다미 방에 앉아,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P169.
베렌과 나는 열차 안에서 점심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나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얼마나 정성어리게 싸뒀는지 아직 밥에서 김이 올라왔다. 백미 속에 숨을 쉬는 사람이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찬통에 빨간 김치가 들어 있었다. 젓갈 냄새를 풍기는 바구옹 소스도 주름 잡힌 호일 속에 쌓여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 옆에서 맡았던 젓갈 냄새와 똑같았다. 소금과 올리브유가 발라진 까만 김을 먹으며 베렌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이제껏 길거리에서 먹었던 음식은 모두 사료가 아닌지, 이런 기분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나도 한번쯤 가족이라는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P206.
아떼와 로시오는 대문 옆의 약국 아에 쌀자루를 놓고 동네사람들에게 한공기씩 나눠줬다. 약국에서 아이들 손에 사탕을 쥐여주고 있었다. 사탕을 얻어먹던 시절이 생각났다. 얻어먹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P98.
“사람은 태어나서 젖꼭지부터 물고 인생을 시작하지. 그리고 밥그릇, 술잔, 꽃병 같은 것들을 간직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분청사기를 보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변화무쌍하며 대담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 그릇에 소나무를 음각으로 새겨 넣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P204.
처음으로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베렌을 박사장에게 결코 넘겨줄 수 없는 하퍼는 결국 베렌과 함께 일본에서 세부로 귀국한다. 귀국 직후 마지막 장에서 그가 ‘누나’의 집에서 거주하던 시절 ‘가이드’일을 했듯이 ‘가이드’로서 하퍼의 새로운 삶이 펼쳐진 줄로 알았으나, 기실 그것은 감옥에 있는 하퍼에게 베렌의 동생이 보낸 편지였다.
‘필요한 순간에 숨겨둔 담배를 꺼낸다’고 했던 박사장의 협박대로, ‘마약운반책’이라는 죄목으로 입국심사 중 공항에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부 지방 교정·갱생 센터’(CPDRC)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하퍼는 박사장의 조작으로 인해 체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억울해 하며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베렌과 베렌의 가족이 면회를 오고, 베렌의 남동생이 편지를 써 준다. 교도소에서 열리는 댄스 공연에서 베렌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Dance Again」의 ‘춤을 추고 싶어, 사랑도, 그리고 다시 춤을’ 이라는 노래 가사는 하퍼의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 박 사장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와 같은 사람이 한인회 대표가 되어 교도소에 방문해 연단에 올라 위압적인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하고 서러워 할 법 한데,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기다림’을 말하는 태도, 연단에 손을 짚고 서 있는 박사장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는 것은 하퍼의 변화와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뢰와 유대에 기초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희망이 실현될 날을, 다시 자유가 찾아올 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부 시내 망고스퀘어에서 외곽 언덕으로 밀려난 셈이었다. 갱생의 강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갱생하려면 주는 대로 먹고, 춤을 추며 웃고 난 뒤 돌아서서 울어야 했다. 자식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적게 울었다.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기다림을 익혔다. 지난해 성탄절에 레천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운동장에 시식대를 진열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회적 배려가 찾아왔다. 동료 죄수들이 밥과 레천을 서로 입에 던지며 헐떡거릴 정도로 먹었다. 나는 기다리다 맨 마지막에 먹었다. 기다림이 후천적 천성으로 자리잡아가는 것 같았다. 베렌을 기다렸고, 프러포즈 춤을 기다렸다. 엄마를 기다렸고, 내가 자유를 찾을 날을 기다렸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P251-252.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구가 문득 떠오른다. 베렌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그에게 닥친 시련을 감내하고 겪어낸 이후에는, 유투브에서 영상을 훔쳐 돈을 벌기 급급했던, 동정과 연민의 ‘차별적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어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을 이루어 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퍼가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자신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목적 그 자체로서 자리해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아닐까.
나는 벌써부터 부활절을 기다렸다.
관례대로 누군가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가길 간절히 희망했다.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P25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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