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고 생각잇기 3주차 - 『거대한 뿌리』 ,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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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밑줄긋고 생각잇기 모임도 중반부인 3주차에 접어들었다. 이번 3주차에 독서를 진행하면서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에서는 세 편의 시 -「플란넬 저고리」, 「우리들의 웃음」, 「거대한 뿌리」- 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
본디 ‘플란넬’은 양복의 원료로 사용되는 옷감이라 한다. 노동자에게는 이질적인 것임에도 화자는 ‘플란넬 저고리’라는 대상이 노동의 상징이라고 표현한다. 연필쪽을 호주머니에 넣고 ‘글을 쓰는 노동’을 하며 업을 삼고 있는 화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빈곤이 함께 자리한다.
김수영은 실제로 자신의 플란넬 저고리에 대해, ‘부끄러운 노동복’이라 고백한 바 있다고 한다. (박대현,「1960년대 참여시와 경제 균등의 사상 –4월혁명 직후 경제민주주의 담론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제61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273-275쪽. 참조)
이를 고려한다면 시인은 ‘연필쪽’을 호주머니에 넣고, 노동복을 입고 글을 쓰는 자, 어쩌면 지식인이라는 한계를 과감히 벗어던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안고 이 시를 써내려갔을 수 있다고 여긴다. 김수영이 늘 자신을 성찰하고, 자아를 부끄러이 여긴 것은 어쩌면 그가 시인이기에, 가장 양심적인 삶을 살며 이를 노래하려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저놈은 나의 노동의 상징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든
물뿌리와 담배 부스러기의 오랜 친근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든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중략)
아무 것도 집어넣어 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이다...
-「플란넬 저고리」중에서, P88-89.
김수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고 한다. 바로 첫째 준과 둘째 우인데, 김수영은 장남 김준을 1960년대 당대의 명문학교인 덕수국민학교에 전학시켰으나, 준은 그의 기대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준은 요리를 잘 했고 ‘종교’처럼 아들을 사랑하는 열성아버지가 바로 김수영이었다고 한다. 시에서는 유독 ‘종교’, ‘종교국’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종교=시=아이들/ 비종교=비시=아이 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어쩌면 시인(화자)는 이 시를 통해,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종교를 지니고 그릇된 신앙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사회현실과 같이 교육의 문제도 그저 ‘아이들’을 획일화 시키는 데 있다고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 개별적 존재 자체로 고유한 개성과 가능성을 지닌 한 명의 ‘아이’를 길러내는 것임을 , 화자는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교육자를 목표로 하는 내게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했던 시이다.
(김응교, 「문학 속의 숨은 신」, 『한국문학연구』제48집, 동국대학교 한구문학연구소, 2015, 239-249쪽. 참조)
1960년대에서 벌써 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저히 거꾸로 흘러가고 있는 ‘교육’ 현실에 대해 냉소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웃음’을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진실된 웃음으로 변화시키는 데 더욱 깊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여긴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가 종교국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을 갖는다
마당에 서리가 내린 것은 나에게 상상을 그치라는 신호다
그 대신 새벽의 꿈은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꿈은 상상이 아니지만 꿈을 그리는 것은 상상이다
술이 상상이 아니지만 술에 취하는 것이 상상인 것처럼
오늘부터는 상상이 나를 상상한다
이제는 선생이 무섭지 않다
모두가 거꾸로다
선생과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비종교, 詩와 非詩의 차이가 아이들과 아이의 차이이다
그러니까 종교도 종교 이전에 있다 우리나라가
종교국인 것처럼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이 없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모두가 거꾸로다
---태연할 수밖에 없다 웃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조용히 우리들의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웃음」중에서, P95-96.
1964년 5월 발표된 「거대한 뿌리」는 김수영 시 세계의 극적인 변화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시가 시선집의 표제가 된 것을 고려한다면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시를 읽을 때 상당히 난해하다고 느껴졌으나 연구논문을 통해 시대적 배경과 상황, 시인의 창작동기, 인물관계 등을 인지하고 나니 난해하던 시의 내용이 다소간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결국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한 개인, 인간 존재는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실생활을 살아갈 따름이며, 이 땅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정치적 이념적 의미가 아닌, 과거부터 이 땅에 발붙이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생생한 과거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는 광화문 네거리라는 지금-여기의 자리에서, 현재의 땅으로 뿌리내려가는 것이다. (오연경, 「김수영의 사랑과 도래할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인권』제13집,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3. 참조)
결국 이 질퍽한 현실 속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하에 개인의 생활을 억압하는 과거의 잘못된 전통을 비판하는 시로, 이 시는 현 시대에도 유의미한 시라 하겠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거대한 뿌리」중에서, P98-100.
알랭 바디우의『행복의 형이상학』 중 이번 주에는 제 3장을 읽었는데, 결국 주체의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려면 특정한 정체성에 갇히지 않으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가능성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창조’할 때 가능하다. 주체의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실존적 선택과 더불어 변화와 창조의 노력이 수반된다면,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김수영의 시들에서 살펴보았듯 ‘뿌리’의 근원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이 아닌 ‘아이’ 한 명을 교육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결국 특정 이데올로기나 이념에서 규정짓고 획일화 하는 데에서 벗어나 선택과 창조를 통해 변화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 여긴다.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자유와 규율의 등가성을 만들어냄으로써, 만족의 독재와 죽음 충동의 힘에 대한 승리가 될 새로운 형식의 행복을 발명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변화의 과정에 예정된 대상성[객관성]이 아니라 이 과정 자체의 창조겆 주체화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 무언가가가 세계 속에서 변화하는 중이라는 것을 안다.
-『행복의 형이상학』, P92.
행복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주체성이다. 시간의 귀결과 화해하고, 세계 속 우리의 무미건조하고 침울한 실존 속에서, 단정적인 실재로부터 주어진, 빛나는 가능성들을 찾아내는 과제이자, 이 세계의 법칙이 은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행복, 그것은 세계의 관점에서 불가능했던 무언가의 강력하고 창조적인 실존을 향유하는 것이다.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진실로 유쾌한 것이다. 행복해짐으로써,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이는 때로 정말 불만족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하나의 서택, 우리 삶의 참된 선택. 그것은 진정한 삶에 관한 진정한 선택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