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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7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가제본도서)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다산북스 출판사 <베어타운>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다산북스 출판사' 에서 도서(가제본)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다산북스측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슨 상품을 개발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무슨 제조업체도 아니고. 우리는 인간을 육성하고 있어요. 그 아이들은 사업 계획이나 투자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에요. 몇몇 후원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청소년 육성 프로그램은 공장이 아닙니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92쪽.
“그럼 우리가 그 아이들한테 바라는 게 뭘까요, 라모나? 그 스포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뭘까요? 거기에 평생을 바쳐서 얻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뭘까요? 찰나의 순간들……몇 번의 승리, 우리가 실제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몇 초의 시간,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중략)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건 찰나의 순간들뿐이지. 하지만 페테르, 그런 순간들이 없으면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153쪽.
베어타운, (구체적인 지역은 작품에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어느 작은 소도시로, 숲속 한 가운데 자리해 숲속마을로 불리는 이 곳에는 ‘베어타운 – 아무리 즐겨도 부족한 도시’ 라는 문구가 적힌 과거의 유행어가 담긴, 세월의 흔적에 빛바랜 표지판이 남겨져있다. 과거만 해도 마을에 학교가 세 개씩 있었으나 이제는 단 한 학교가 남았으며, 일자리가 줄어 실업률이 늘고 인구도 점점 줄고 있으며, 해마다 숲이 폐가 한 두 채씩을 삼켜버리는 곳이다.
그런 이 숲속마을 베어타운에서 도시를 다시 일으킬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하키’다. 베어타운은 유소년, 청소년, A팀(성인팀) 의 하키팀이 있고, 그들은 이번 청소년팀 리그에서 우승하기를 소망한다. 하키스쿨이 들어오면 아이스링크가 새로 마련되고 대도시 못지않은 쇼핑몰과 컨퍼런스센터가 건립될지 모른다. 베어타운이 단순히 여러 스포츠 중 하나에 불과한, 그리고 그저 시합이지만 목숨을 걸게 만드는 이 하키라는 스포츠에는 도시를 다시 번영시키려는 희망을 넘어, 베어타운 사람들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것이다.
때문에 베어타운 청소년팀에서 뛰고 있는 아이들은 우승하기 위해, 수많은 연습량을 감내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며 성장하곤 한다.
이 작품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그것은 하키라는 연관성으로 얽혀 등장하는 베어타운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각기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어타운이 배출한 프로선수로서 다시 고향에 돌아와 베어타운 하키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페테르, 페테르의 부인으로 능력있는 변호사지만 큰아들을 읽은 상처, 그리고 늘 아이들(마야와 레오)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미라, 페테르와 미라의 딸로서 기타와 친구 아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인한 성품을 지닌 마야, 마야의 친구로 사냥꾼인 아버지와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아나, 열일곱 살의 천재 하키선수로, 베어타운 하키팀의 주력선수이자 장래를 짊어진 케빈, 청소년팀의 공격수이자 케빈의 절친한 친구로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벤이, 열다섯 살이지만 열일곱 살 그 어느 선수보다 스케이팅 속도가 빠른 아맛, 베어타운 하키 A팀 코치로, 승리보다 선수들의 성장에 초점을 두는 수네, 청소년팀 코치로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지만 그 이면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지닌 다비드…….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
하키를 왜 좋아하느냐고?
하키에는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57쪽.
이야기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가족사와 내면묘사, 그리고 하키팀의 준결승 시합을 둘러싼 여러 상황과 갈등들 안에서 전개된다. 저자가 심리학을 전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만큼,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인물들 개개인의 가족사와 , 그들이 지닌 내면의 상처가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특히 청소년팀의 가장 유망한 선수로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는 '케빈'은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완벽'을 요구받으며 자라왔다. 하키 뿐 아니라 학업, 일상 그 모든 면에서 '완벽'을 요구받으며 심지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시간약속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자기 키만한 눈밭 속을 걸어와야 했던 케빈 - 탄탄대로의 장래가 펼쳐져 있으며 단 한번도 좌절을 겪지 않았을 법한 이 아이에게는 '완벽'에의 부담감이 자리한다.
“우리 부모님은 하키에 관심 없어.” 벤이가 그럼 두 분은 뭐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자 케빈은 “성공”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열 살 때 나눈 대화였다.
케빈이 거의 항상 그렇듯이 반 역사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집에서 50점 만점에 49점을 받았다고 하면 케빈의 아빠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뭘 틀렸니?”라고 묻고는 그만이다. 에르달 집안에서는 완벽이 목표가 아니다. 표준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68쪽.
열다섯 살로, 유소년팀 하키선수로 훈련받고 있는 ‘아맛’은 타국에서 건너와 아이스링크를 청소하는 어머니를 늘 생각하는 아들이다. 그는 가장 처음 아이스링크를 쓰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매일 아침 혼자 스케이팅을 연습하곤 한다. 프로 선수로 성장하여 어머니가 고생하게끔 하지 않고 싶은 아맛에게는 하키에 대한 간절함과 절실함이 자리하고, 그는 남다른 연습량으로 빚어진 그의 가장 재빠른 스케이팅 속도 덕분에 청소년팀에 합류해 함께 시합에 나갈 수 있게 된다. 베어타운 임대 아파트 지역의 할로에서 자란 난민이자 가장 왜소하고 작은 아이 ‘아맛’은 늘 그렇게 노력하고 분투하며 자라왔다.
그는 아이스하키장으로 간다. 팀원들과 합류한다. 그는 말을 배우기도 전에 전쟁으로 짓밟힌 모국을 떠났을지 몰라도 난민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오로지 하키를 통해서만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아이가 된 기분, 뭐든 잘하는 게 생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479쪽.
하키를 접어야 한다는 소리를,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아이가 빙판 위에 서 있다. 이번 기회를 잡으려고 그 아이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선수가 없을 텐데, 다비드가 많고 많은 날 중에 바로 오늘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작은 소망에 불과하지만 오늘 같은 날 페테르에게는 작은 소망이 절실하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135쪽.
“이 아이를 보세요! 어머님의 아들이 이 아이보다 더 많은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둘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똑같은 길을 걸었을까요? 어머님의 가족이 이 아이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아이를 보세요!”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186쪽.
베어타운 아이스하키 청소년팀 케빈, 벤이, 아맛 , 단장과 코치인 페테르, 수네, 다비드…… 베어타운과 아이스하키팀에서 청소년들과 성인이 하키를 통해 함께 갈등 안에서 이를 극복해나가며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릴 것이라 예상했던 소설은, 중반부에 들어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준결승에서 우승 직후 케빈이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연 파티에서, 페테르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하며, 이 장면을 아맛이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후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베어타운의 모습은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다. 피해자인 ‘마야’가 이야기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마을의 자랑, 하키팀의 촉망받는 선수인 케빈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키팀을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심지어 마야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하며 제대로 처신을 못한 탓으로 간주되곤 한다. 저자 프레드릭 베크만은 놀라우리만큼 성폭행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2차 피해의 실상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피해자인 마야의 가족과 마야가 겪는 베어타운 마을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가해자인 케빈 가족에 대한 의견들은 현실에서 논의되는 성폭력 사건의 논의를 너무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더욱 아리다. 작년 한 해, 화제의 도서로 주목받았던 소설 『82년생 김지영』, 최근 ‘미투 운동’이 확산된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베어타운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이 공동체는 성 역할에 대해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가.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는가. 자성하게 된다.
최근 방영된 TVN 드라마 라이브 10-12회의 장면에서도 성폭력에 대한 문제를 다룬 바 있는데, 과연 여성이 ‘싫다’고 외치는 하는 한 마디를 존중하고 있는 사회인가. 부당함에 대해 외치는 목소리를 충분히 수용하고 있는 사회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된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미 우리 사회가 ‘미투 운동’의 확산을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성폭력 사건에서 ‘후광효과’와 ‘낙인’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케빈과 마야 역시 그렇다. 가해자로 지목된 케빈에게는 베어타운의 유지이며 하키타운의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산가인 케빈의 부친(父親), 그리고 베어타운을 다시 일으킬 청소년 하키팀의 유망주인 케빈에 대한 ‘후광효과’가 여전히 남아있는 반면, 마야에게는 마야가 여성으로서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것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후광효과와 낙인은 진실을 추구하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다.
혹여, 가해자가 케빈이 아닌 가난한 할로 출신 아이 ‘아맛’이거나, 하키팀에 중요한 선수라고 여겨지지 않는 ‘필리프’ 같은 아이였다면 과연 케빈과 같이 후광효과가 적용될 수 있었을까. 오히려 가해자라는 사실을 더 확신하게끔 하는 ‘낙인’이 찍히지는 않았을까 우려되기조차 한다. 마지막 순간에 결국 하키 팀에서 프로 선수로 성공해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보다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 옳은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목격한 그 날의 진실을 고백한 ‘아맛’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증거부족으로 케빈이 처벌받지 않은 것은 바로 이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역으로 묻겠네, 다비드. 경찰에 고발당한 아이가 케빈이 아니었다면? 다른 아이였다면? 할로 출신이었다면? 그래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할까?”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494쪽.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닌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514쪽.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245쪽.
마야는 두 팔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다.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창밖의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그녀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아나는 지쳐 쓰러져서 마야의 침대에서 자고 있다. 두툼한 이불 밑에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작고 연약하게 느껴진다. 마야가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보호하기 위해 케빈의 진실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날 아침 창가에 서 있었을 때부터 이 마을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과 이 날의 실상을 보여주는 끔찍한 단면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315쪽.
갈등이 벌어지면 우리는 제일 먼저 편을 정한다. 양쪽의 생각을 같이 하는 것보다 그러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는다. 평범한 일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위안이 될 만한 증거를 찾는다. 그런 다음에는 적에게서 인간성을 거세한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374쪽.
그녀는 이 마을의 모든 나이 먹은 남자들이 그들을 가리켜 ‘투지가 넘치’고 ‘물러설 줄 모른다’고 칭찬할 뿐, 여자아이가 싫다고 할 때는 정말로 싫은 거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았느냐고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 마을의 문제는 어떤 남자아이가 어떤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수준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은 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남자아이들까지 그의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450-451쪽.
결국 케빈은 법적 처벌의 대상에서는 풀려나지만, 결국 아맛의 주장 덕분에 마야의 아버지 페테르 단장은 해임되지 않게 되며, 여전히 베어타운의 하키팀 단장 자리를 맡게 된다. 그러나 팀의 주요 멤버들은 헤드의 아이스하키팀으로 팀을 옮기게 된다.
아무 소득 없이 수사가 종결되어 버려 삭막하기만 한 이 베어타운에서 역설적이게도 페테르가 단장 자리에서 해임되지 않은 이유, 마야의 가족이 버티어낼 수 있었던 점에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가치였다. 열 다섯 살이라는 점 빼고는 너무도 다른 성향을 지닌 마야와 아나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둘의 우정(친구로서의 사랑)덕분이었고, 일곱 살 시절 케빈과 벤이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어 벤이가 케빈으로부터 떠난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이었다.
특히 이미 수년 전, 큰아들 이삭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마야의 부모님 미라와 페테르가 느끼는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절망감, 그리고 아이를 위해 그 어떤 것이든 해 보이겠다는 고군분투 속에서 전해져 오는 그들의 굳건한 신뢰와 사랑은 책을 읽는 저 너머, 한 사람의 독자에게까지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따뜻하고도 아린 감정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부모이기에, 마야와 레오를 지켜내야겠다는, 마야를 그 이상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사랑’으로 그들 가족이 겪는 시련을 함께 견디어 올 수 있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자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충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어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487쪽.
어른이면 누구나 완전히 진이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을 겪는다. 뭐 하러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싸웠는지 알 수 없을 때, 현실과 일상의 근심에 압도당할 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그런 날들을 생각보다 더 많이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사실이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이 견딜 수 있을지 정확하게는 모른다는 것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88쪽.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아빠?”
“그래, 말랭아.”
“저도 하키 좋아해요.”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도 그래, 말랭아. 나도 그래.”
“제가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뭐든.”
“더 훌륭한 아이스하키단을 만들어주세요. 그 자리에 남아서 하키의 발전을 이끌어주세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525-526쪽.
결국 저자 프레드릭 베크만이 그의 신작 『베어타운』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심스럽지만, 나는 그것을 공동체가 지닌 ‘가치관’에서 발견했다. 사회의 문화는 결국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그 가치관을 어떻게 후대들에게 심어주는가에서 기인한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베어타운 사람들이 하키를 목숨처럼 생각하며 청소년팀의 시합에 모든 것을 건 이유는 바로 ‘결과’, ‘우승’, ‘성공’ 뒤에 따르는 ‘경제적인 이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이라는 그 공동체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아이들이 자라나며 아이로서의 모습을 상실한다면
, 향유해야 할 가치와 수단으로서 사용해야 할 가치가 전도된다면, 아무리 하키팀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 해도 과연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들은 진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야의 가족이 겪은 시련도, 케빈과 벤이의 우정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베어타운 공동체의 어른들이 그들의 욕심을 아이들에게 전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베어타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라났다면 케빈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을지 모르며, 벤이는 자유롭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페테르와 미라는 마야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끔 지켜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베어타운의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베어타운의 어른들이 하키에 대한 개개인의 열정과 사랑을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 변질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벚나무 냄새가 나야 할 자리에서 왜 벚나무 냄새가 나지 않겠는가.
수네는 빙판을 내다보며 코로 몇 차례 심호흡을 한다. 상대 팀 선수 몇 명이 몸을 풀러 나온다. 원래 겁에 질린 사람들이 일찌감치 준비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불안감은 여전하다. 수네는 거기서 위안을 느낀다. 사장실에 모인 남자들이 어떤 식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는지 몰라도 이건 여전히 운동경기일 뿐이다. 한 개의 배, 두 개의 골대, 열정으로 가득한 심장. 하키를 종교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하키는 믿음과 같다. 종교는 나와 타인들 간의 문제고 해석과 이론과 견해도 가득하다. 하지만 믿음은…… 나와 신 사이의 문제다. 심판이 센터 서클로 미끄러지듯 나와서 두 선수 사이에 설 때, 스틱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까만 원판이 그 사이로 떨어지는 게 보일 때 느껴지는 무엇이다. 바로 그 때 그것은 나와 하키만의 문제가 된다. 돈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반면, 벚나무에서는 항상 벚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가.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178쪽.
프레드릭 베크만의 전작인『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브릿마리 여기있다』중에서는『오베라는 남자』를 완독했으며 아직 나머지 두 권은 미처 완독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의 책 중에서 두 번째로 읽는 작품이었는데, 『오베라는 남자』를 읽으며 오베의 까칠한 행동 속에 숨어있는 내면의 따뜻한 심성을 읽어낼 수 있어 마음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베어타운』을 읽으며, 책의 행간 사이로 계속 봄과 겨울을 넘나들었다. 베어타운이라는 숲속 마을은 정지용 시인의 시(詩) 「유리창」에 등장하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구절을 연상시키는 마을이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운, 황홀함마저 깃드는 숲속마을이지만 그 깊은 곳에는 마을 사람들 개개인의 외로움과 슬픔이 깃들어있는 마음.
결말부가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베어타운에, 베어타운 하키팀에 여전히 남아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선택이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 마음 속에 곰을 한 마리씩 지니고 있는 베어타운 사람들. 베어타운이라는 도시와 하키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애정을 가진) 그들이 베어타운의 새로운 지향을 새로이 지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엄청난 두께의 장편소설이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작품의 화두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도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이 소설을, 마음 깊이 되새기며, 처음 읽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여러 메시지와 복선들을 따라가며 몇 번이고 재독하고 싶다.
『베어타운』은 단순히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교양소설)에서 그치지 않고 성폭력, 동성애 등 사회적 이슈에 화두를 던지는 한편 가족 간의 사랑, 청소년들 사이의 우정에 대한 내면 묘사를 탁월하게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문장의 행간 속에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애정을 담은 수작이었다.
카시아는 해가 바뀌고 벤이가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이 다른 삶을 살 수 있길 바랐다. 다른 곳,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동생은 다르게 자랐을지 모른다. 좀 더 순하고 불안하지 않은 아이로 자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베어타운에서는 그럴 수 없다. 여기에서는 그 아이가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짐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있고 거기다 하키가 있다. 팀, 동료들, 케빈. 그들이 그 아이의 모든 것이기에 그 아이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끔찍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241쪽.
“케브, 네가 그걸 찾을 수 있길 바랄게.”
케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다. 바람이 케빈의 눈꺼풀을 간질인다.
“뭘?”
벤이는 목발로 눈을 짚는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친했던 단짝 친구를 두고 한 발로 천천히 바위를 뛰어 넘어가며 숲속으로 멀어진다. 그들의 섬에서 멀어진다.
“그거라니? 뭘 찾을 수 있길 바란다는 거야?” 케빈이 벤이의 뒤통수에 대고 외친다.
벤이의 목소리가 어찌나 고요한지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서 그의 대답을 호수 저편으로 실어 나르는 듯이 느껴질 정도다.
“네가 찾는 네 모습.”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528쪽.
“공동체는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서로의 역할을 존중한다는 뜻이지. 가치는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는 뜻이고. 서로 사랑한다는 뜻.” 다비드는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하고 난 뒤에 다시 물었다. “그럼 문화는요?” 수네는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문화에선 어떤 걸 허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어떤 걸 권장하는가라고 본다.”
다비드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수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사회에서 허용하는 대로 하지.”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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