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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6 손끝으로 문장읽기 3주차 - 「밀살密殺」, 「야근夜勤」, 「탑塔」
손끝으로 문장읽기 3주차 - 「밀살密殺」, 「야근夜勤」, 「탑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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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셋째 주, 단편집『돼지꿈』 중 「밀살密殺」, 「야근夜勤」, 「탑塔」 세편의 수록작을 읽어 내려갔다. 세 작품 모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는데, 「밀살密殺」에서는 생존을 위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가축(소)을 도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시민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으며, 「야근夜勤」에서는 노동3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1970년대 공장노동자들의 소작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 간의 문제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또한 「탑塔」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수행해야만 했던 군인들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밀살密殺」의 경우 야밤을 틈타 소를 키울 정도로 제법 살림이 넉넉한 집의 소를 훔쳐내어 도축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소를 기둥에 묶고, 도망치고자 발버둥치는 소를 도축하는 모습이 소설 안에 끔찍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암소를 도축한 후 보니 그 안에 미처 세상 빛을 보지 못한 한 생명(송아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비록 동물이지만 아내의 해산이 코앞인데도 어린 생명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산등성이를 올라가는데, 기실 새끼를 밴 암소를 도축하는 과정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방도가 없다는 그들을 둘러싼 현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이구, 이런 등신 좀 보소. 얀마, 읍내선 고기가 필요하다니께, 고기가.”
칼잡이도 신마이를 달랬다.
“이 사람아, 워쩔 거여? 대처로 나갈 터일즉슨 쐬가 있겠어, 양식이 있는가. 이삭이나 영글면 헹편 필래나 했더니만…… 요 짓으로 이력이 났지만, 자넨 딱 한 번뿐여, 알겄나?”
“여편네 배때지를 봐서라두…… 허긴 그럴 도리밖에 없구만이라우.”
「밀살密殺」, P129.
세 사람은 몇 번이나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잠 깬 참새들이 아직은 어두운 숲 속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늘에 새벽빛이 가득했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칼잡이가 불쑥 말했다.
“자네 대처엘 가서 살아보면 안다니께.”
칼잡이는 지게 멜빵을 추켜올리고서 신마이 쪽을 바라보았다.
“예서야 사는 게 그저 해 뜨고, 해 지면 하루지마는…… 게서는 하루에 억만 겁을 사는 셈인디.”
조수가 끼어들었다.
“살 방도가 많다는 얘기라우? 아니면 당최 없응께 질다는 말이오?”
“쌀려면 못할 짓이 없고 잉? 못 헐 짓 허자니 목숨이 질다는 이약이랑게.”
「밀살密殺」, P139.
“거 꼴사나운 놈, 버리고 가더라고.”
“송아지 말여요? 냅두슈. 지집아덜처럼 왜 그런다요?”
조수의 말에 칼잡이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래두 재수가 없을 거 같어.”
“재수가 이 판국에 워딨대여. 염라대왕도 먹어야 대왕인디.”
“갑시다 얼릉. 워쩐지 상스런 생각이 드누먼요. 마누라가 몸을 풀었을지도 모르겠네.”
신마이의 말에 조수가 발끈했다.
“이런 지미 붙을…… 어떤 놈, 새끼 없는 중 아나. 줄줄이 딸린 게 새끼여. 낳고 먹고 죽고 하는 것이 자그마치 일곱이다 말여.”
「밀살密殺」, P139-140.
한편 「야근夜勤」(1973)의 경우 공장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직공들은 공장의 부당한 근로조건과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기계를 동시에 멈추는 ‘노동쟁의’를 계획하게 된다. 노동쟁의 과정에서 한 사내가 죽게 되는데, 공장 측은 이 죽음을 쟁의와 관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기도 하고, 십오 번 기계의 공원이 공장의 임직원에게 많은 도움을 얻고 있는 터라 혼자 기계를 멈추지 않고 쟁의 사실을 공장 측에 보고하는 등 다른 직공들을 배반하는 등 쟁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중요한 점은 한 개인의 배반을 귀책하기보다는 한명의 직공의 죽음 – 즉 쟁의과정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나약해진 공원(배반한 직공)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하며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그들의 기계적인 삶, 부당한 노동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낸다.
(나선욱, 「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6-60쪽 참조.)
결국 이 작품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부당한 근로기준법의 변화를 요구하며 분신한 이후 이 작품이 발표된 1973년까지도 부당한 근로기준법이 제시되고 공장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현실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연대의식을 기반으로 한 포용과 용서,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부조리하고 어려운 현실을 변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며, 실제로 파업에 승리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여자는 아교칠을 마치고 일어났다. 어떤 여공은 못 세게 박는 일을 그쳤고, 또 다른 여공은 페이퍼질을 그쳤다. 여자는 이 년 동안이나 합판의 네 귀퉁이에 아교칠을 하는 똑같은 일만 해왔었다. 그 여자가 자기의 뜻대로 일손을 멈추고 일어섰을 때, 그제야 여자는 그 풀칠의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야근夜勤」, P149.
“가족을 만나자구 그런다며?”
“죽은 사람과 쟁의를 관련시키지 말자는 거야.”납품반장이 침울하게 말했고, 기능공이 거들었다.
“가족을 꼬이려는 수작일걸.”
“틀림없어. 무슨 얘기 할 게 있으면 우릴 통해서 전하라구 그래.”
직장은 초록색 운동모자를 벗어서 바닥에 깔고 앉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그 친구가 우리하구 관련이 없나. 그리구, 우리에게 노조가 어디있어?”
노조는 언제나 말끔한 사무실 저 높다란 곳에 있었다.
뭐라구, 가족이 늘었어? 너무 많이 낳았단 말이지. 우리두 실력을 행사할 체면이 서는가. 자네, 우리가 위에 있었다는 걸 언제 알았나. 그럼 그전대루 모른 척하든지, 자네 자신들이 노력해 보는 길밖에 없네. 우리는 자네들 같은 노무자는 이미 아니니까. 허어 살기가 어떻다구…… 그건 여기 모든 기업의 전반적인 조건이야. 그러면 우리들의 노조는 어디 있습니까. 이봐, 자네는 집이 좀 헐었다구 그걸 두드려 부수구야 새 집을 짓는다구 생각하나. 시간가는 대루 수리를 해야지.
그건 집이구…… 이건 사람 얘깁니다.
「야근夜勤」, P153.
애초에 원자재부터 파손될 위험이 있는 물건이 작업 과정에서 상한 것이 어째서 공원들의 책임인가 하는 게 그들의 최초의 물음이었다. 당연히 원자재를 들여온 쪽일 것이었다. 아니면 바다 건너편의 책임이었다. 도급제에 관한 물음도 그랬다. 법정 노동 시간은 여덟 시간인데,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배가 임금에 의해서 두 시간을 추가할 수 있다는 선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본 노임은 싸고, 도급제로 바꿔놓으니까 실상은 몇 푼을 더 벌어보려고 남은 시간을 뺏기는 셈이었다.
“우리두 잠을 자구 쉬어야 다시 일을 하지. 그러니 시간 계산을 하구 휴일두 노임을 붙여달란 거지. 기계에두 기름을 쳐주는데 말이야. 여기, 일요일에 놀아본 사람 있어?”
「야근夜勤」, P155.
직장은 주먹을 쥐고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여럿이 모이면 책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친구의 죽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동등한 이익, 불행을 함께 나눠서 감수하는 용기, 하는 모든 것들은 비겁하고 나약해진 친구에게까지도 끝까지 책임을 요구하고 보여주어야만 했다.
「야근夜勤」, P16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탑塔」(1970)은 베트남전에서 미국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신체적 훼손(죽음)을 전제로 미국의 전쟁을 ‘대리’하는 한국군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듯이, 한국군은 이념(이데올로기)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베트남전에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기실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위치는 미국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위치인 동시에, 베트남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월남인들에게 한국군은 월남인들의 자연스런 삶과 일상을 파괴하는 파괴자이자 가해자이다.
우리는 산개해서 마을을 지나갔다. 주민들이 뒷문을 살짝 열어젖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적의가 깃든 시선을 던졌다. 노인들은 음흉스러워 보였고, 아이들은 교활해 보였으며, 여인네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고, 남자들은 모두들 밤에는 게릴라로 변하는 적인 것 같았다. 그들의 고요한 마을에 침입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여긴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탑塔」, P197-198.
땀구멍들이 모두 막혀버릴 것 같았다. 남의 땅, 남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는 뭐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냐. 도피로 차단된 일곱 마리의 쥐새끼였다.
「탑塔」, P205.
그러나 월남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적대자이자 이방인인 한국군은 미군에게도 환영받는 존재로 자리하지는 못한다. 한국군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사수한 ‘탑’을 손쉽게 파괴하고 마는 미합중국 군대의,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모습과 ‘세계의 도처에서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중위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미군에게 있어 한국군은 그저 미군이 수행해야 할 군사노동을 대리해 주며,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쉽게 져버려도 되는 대상일 뿐이다. 결국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탑’은 이러한 한국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 소설은 베트남이라는 타국에서, 타국의 전쟁을 대신해 싸워야 하는 중간국으로서의 한국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위치에 있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소외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뭐 하는 겁니까?”
장교가 얼구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바나나 숲을 밀어내야겠어. 짐프와 토치커를 지을 걸세. 저 해병이 막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우리는 작전 명령에 따라서 저 탑을 지켰습니다.”
나는 초라하게 서 있는 작은 석탑을 가리켰다.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탑이라구? 나는 저런 물건에 관해서 명령받은 일이 없는데.”
“아직 통고되지 않은 겁니다. 아군은 월남군에게 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인민해방전선은 저것을 빼앗아 옮겨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으나, 불교와 주민들의 관계참모들의 심리적인 판단이며 마을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말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깨끗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누구의 것인가. 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불교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단순한 서양 친구는 으흥,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가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버려야지. 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네. 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장교는 자기가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전형임을 내세우고, 탑에 대한 견해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안다.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탑塔」, P212-213.
(안남일,「황석영 소설과 베트남전쟁」,『한국학연구』 제11집,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268-273쪽 참조.)
(이승우, 「황석영 중ㆍ단편 소설 연구 : 소설집 『客地』를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30-33쪽 참조.)
(김명희,「황석영의 베트남 전쟁 소설 연구」,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0-16쪽 참조.)
결국 앞서 「돼지꿈」, 「몰개월의 새」, 「종노」,「철길」 이 그러했듯이 이번 11월 셋째 주에 읽은 세 편의 작품 또한 결국 1970년대 현실 속에서 노동자, 농민(소시민), 군인들이 겪었던 삶의 비극과 애환을 잘 형상화해내고 있었다. 황석영 문학이 지닌 ‘리얼리즘’의 강력한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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