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정, 『너와 나의 점심시간』,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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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문학동네북클럽 ‘『너와 나의 점심시간』’ 가제본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김선정 선생님과, 문학동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전에 문학동네북클럽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우연히 접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김선정 선생님의 에세이, <너와 나의 점심시간>이었다.
 마침 얼마 전 여러 작가님들께서 앤솔로지 형식으로 집필하신 <나와 너의 야자시간>을 구입하고 읽고 있던 참이라 고등학교가 아닌 초등학교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나는 현재 상담 기간제교사이지만, 국어로 근무를 처음 시작했기에 내가 있는 곳은 중등(중,고등을 통칭)학교였고 특히 왜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채용되는 곳은 고등학교들이었다. (딱히 중학교와 중학교를 배제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력이 적지만, 이제는 교사의 입장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장단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고등학교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점잖은 대신 생기부와 출제로 허덕이게 되고 중학교는..그 에너지에 기가 빨리는 곳 ^^
 그러나 초등학교는 내게 다소간 미지의 영역이다. 대학원 시절 교육봉사 시간을 받고 2주/간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수업을 하기도 힘들고 진땀이 났던 기억만 난다. 

주변에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들이 많기도 하고, 전문상담교사인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상 초등학교로 임용을 응시하거나 발령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바 초등학교에 대한 궁금증을 지니고 책을 펼쳤다.

<너와 나의 야자시간>에서 저자분들이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한 소회를 풀어내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수험생 시절에 대한 기억, 야자시간에 지도해 주신 선생님을 떠올리는 등 청소년기에 겪을 법한 정체성의 문제와 감정선이 잘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김선정 선생님의 <너와 나의 점심시간>은 '김영하북클럽' 선정도서였던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라는 세계』 를 떠오르게 했다.
 초등 교사의 입장에서,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모든 학년을 다 지도하면서 어린이들을 마주하고 경험한 선생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게 그려져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에세이 속 에피소드들이 있는데,특히 체육시간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체육시간의 서열화문제는 너무나도 공감되었는데, 영화 <우리들> 에서도 피구를 통한 묘한 관계의 서열화와 아이들의 우정이 잘 그려져있다.
 또한 어린이들의 채무관계 정리방법이 참 인상적이었다.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규칙을 정하고, 어른들보다 더 따뜻하면서도 정의로운 존재가 어린이들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짧지만 울림이 깊은 책이었는데, 특히 책을 읽으며 곳곳에서 나의 학창시절(초중등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육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운동신경이 1도 없는 어린이였고, 지금보다도 더욱 더 극 내향적이라 친구들 무리에 끼기 보다는 교실 한쪽에서 조용히 독서에 매진하며 학교 도서관을 자신만의 도피처로 삼던 아이..
급식을 먹을 때도 혼자 앉아 밥을 먹으며 책읽기에 열중하던 그 아이는, 자칫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아이구나라는 시선 이면에 외로움을 감추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리에 끼고싶고, 반장이란 걸 해보고 싶은 어린아이 이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선정 선생님의 에세이 곳곳에도 어릴 적의 나 자신과 같은 아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급을 막론하고 지금도 자리하고 있을 또다른 나에게 가장 따뜻한 것은 믿음직하고 따뜻한 어른의 존재이다.


위클래스가 부재하던 시절 내가 만난 초중고의 은사님들께서 내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셨고 덕분에 학교생활을 버텨올 수 있었음이다.
위클래스, 위센터에서 중고등학생을 만나고 또 초등학생들을 만나게 될 나 자신이, 내가 만나게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존재로 자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다시금 떠올렸다.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아 마땅한 그 작은 존재들이 사랑과 행복을 듬뿍 받아 자라나길 소망한다.

비록 성장하며 제도권에 편입되어 가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기를. 좁디 좁은 운동장, 학교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를.

 

 

 

아주 오랫동안 아이들의 집을 생각하면 두렵고 무서웠다. 
'어서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어라. 그리고 그 집에서 나와라.' 
나는 속으로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함께 사는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에게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아이가 밖에서 힘든 일,
슬픈 일을 겪고 들어왔을 때 "어서 와라"하며 맞이해주는 것이다.
그런 어른이 한 명만 있다면 아이는 살아갈 수 있다던
선배의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사소함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86쪽)

 

학원 차를 타느라 바쁘게 뛰어가는 아이들 뒤로 남겨진 운동장이 쓸쓸하다.
밥을 입안에 쓸어넣으면서까지 차지하고 싶었던 운동장은 다음날이 올 때까지 오래오래 비어 있다.
수업이 끝난 오후나 휴일, 그리고 방학에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

(52쪽)

 

 


어른에 의해 자신의 의도가 나빴다고 규정당하고 미래까지 점쳐져서는 안 된다.
너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며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더 좋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끝까지 믿어주는 어른이 있을 때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60쪽)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외로운 아이는 반드시 있었다.
무리에서 겉도는 아이가 없도록 살피고 감시해도 어느새 혼자인 아이들이 생겼다.
마음이 따뜻한 아이에게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내가 나서서 같이 밥을 먹거나 놀아주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이미 쌓인 상처 때문에 달아나버리거나 차라리 혼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여럿이 뭔가를 조정하고 맞춰가는 것보다 혼자가 편하다는 아이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거나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68쪽)

 

 


(전략) 전처럼 안달을 해가면서 아이를 빨리 누군가와 연결시키려고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조심스럽게 알려줄 것이다.
사람은 혼자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무리 속에 있어야 할 때도 있고,
혼자이기 싫어서 애를 써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69쪽)

 

 

아이들은 계속 자란다. 어떤 아이도 계속 혼자 있거나 계속 같이 있지는 않는다.
무리 안에서 신난 아이도 살다보면 혼자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늘 혼자인
아이도 어느새 친구를 만난다. 그렇게 관계의 쓴맛과 단맛, 허무함을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뒤에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얕은 인간관계를 넓게 갖기도 하고 좁은 범위의 인간관계를 깊게 갖긷 한다.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가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이 경험 없이 저절로 자리잡지는 않으며
이 모든 경험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70쪽)









by papyros 2022. 12. 29. 23:48

차홍, 『모락모락』,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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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모락모락 블라인드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문학동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블라인드북 서평단 모집을 안내하면서 <모락모락>이라는 책에 대해 ‘어디에서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의 어디에서도 본적 없는 사랑스러운 책’ 이라는 수식어로 작품을 형용한 바 있어 어떤 책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이 표현하듯 무언가 자라나는 성장의 이야기인가? 라는 궁금증을 안고 서평단에 지원한 바 있다.
사실 이 책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완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무척 짧은 책이다. 하지만 그 길이 이상으로 주는 깊은 여운이 작품에 깃들어 있었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 애독가라면 한번쯤 접해봤을 법한 ‘하이케 팔러’의 <100 인생 그림책> 처럼 이 작품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쪽 수대신 작품 안에서 성장하는 한 개인의 나이가 등장한다. 또한 유년기에서부터 100세 노인이 될 때 까지의 주요한 인생 여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 점 또한 유사하다(사춘기, 독립, 사랑, 결혼, 출산 등..)
다만 <모락모락>이 <100 인생 그림책>과 구별될 만한 특별한 점은, 다소 독특한 화자(발화자)를 내세운 데 있다. 책의 화자는 성장하는 주인공 자신도 , 그녀의(주인공이 여성이기에 편의상 그녀로 지칭) 부모님도 자녀도 아닌 다름 아닌 그녀의 머리카락이다. 출생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랜 세월 그녀의 뒤에서 함께하는 머리카락이 성장과정을 옆에서 온전히 바라보며 성장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왜 하필 머리카락이 발화자였을까, 책을 읽고 나름대로 그 답을 고민해 보았다. 작품에서 성장하는 주인공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일평생을 자신의 미를 가꾸는데 치중한다. 누군가와 비교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평가되는 사회 속에서 ‘아름다움’, 즉 외모를 가꾸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이 아닐 수 없다. 늘 미용실에 가서 새로 펌을 하거나 염색을 하는 등 외모를 관리하는 것의 중요한 부분이 머리카락에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청소년기에 여드름을 가리려고 앞머리를 내리기도 하고, 스무살 언저리 즈음에는 파격적인 염색을 시도하거나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머리를 따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물아홉에는 머리 스타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마흔둘에는 온전히 자신에 대해 깊이 고민해주고 신경써주는 헤어디자이너를 만나기도 한다.




29.
“머리 스타일은 단지 누구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일이자
소중한 자신을 가꾸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거야.”


42.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고 싶으세요?”
이렇게 너를 위해 진심어리게 고민하는 사람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된 걸까?
늘 유행하는 머리에 필요한 시술만 말하던 사람들과 정말 달랐지.
너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이해한 후 만들어낸 스타일은 오직 너만을 위한 것 같았어.
그건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웠지. 나도 내가 특별해진 느낌이었다고.




유년기, 청소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우리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하며 삶을 영위해가지만, 결국 한 개인으로서의 성장이란 ‘자기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품에서처럼 그 자기 정체성이란 자신만의 고유한(잘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을 찾는 것 뿐 아니라 생의 과정에서 부모로부터의 독립, 대학 진학, 취업, 결혼 후 자신의 자녀를 낳고 부모가 되는 것, 심지어는 집에서 떠나 요양원에 들어가는 어느날에 이르기까지 삶의 순간순간 한 개인으로서 독립할 때 / 삶을 마주할 때 확립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이 책의 첫 표지가 어린 아이였으나 마지막, 책의 뒷표지는 노년기를 그리고 있는 만큼 .. 책을 읽어 내려가며 성장하는 그녀의 일생에 함께 마음을 보탤 수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이 화자이긴 하지만, 그 여느 누군가보다도 더 가까이서 그녀의 삶의 여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 그 머리카락이 숱이 많고 검은 머리에서, 백발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많은 불안과 걱정, 고민을 뒤로하고 행복한 개인으로서 온전히 독립할 수 있어 진실로 기뻤다.

현재는 내 한 몸 건사하기에도 부족하기만 한, 서른한살의 끝을 지나고 있는 나 역시 노년기에는 고양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카페에서 책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그런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정말 짧은 책이었으나, 사랑과 행복, 그리고 그 이상의 ‘가치관’를 선물해 준 귀한 책으로 , 청소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가 함께 읽고 자신의 삶에 대해 나눌 수 있기를 권하고 싶다.




13.
도서관 안으로 숨어들었어.
책장 사이사이 길 위에는 손이 닿는 곳마다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들이 있어.
누굴 만나든 아무도 너에게 뭐라 하지 않는 곳.
아무도 너에게 말을 걸지 않고, 오직 창가의 햇살 아래 하얀 먼지들만이 주목받는 곳.
넌 책장 그림자 위에 앉아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드리우고 책을 읽고 있지.


14.
집 앞 앵두나무를 보면서 엄마가 말했어.
“지난 사 년 동안은 많이 안 자라더니 올해 갑자기 커버렸네.”
너도 꼭 그렇잖아. 신기하지, 나무도 너도 어느 순간 쑥 자라버린다는 게 말야. 그리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너는 그대로인데 몸만 어른이 되려고 한다니 말이야.
엄마는 햇살 아래 빨간 앵두를 하나하나 따서 노란 소쿠리에 담았어.
그러고는 흐르는 찬물에 씻어 너의 입에 쏙 넣어줬지.
“엄마, 쓴데 달콤해.”
엄마는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웃으며 너에게 얘기해.
“나중에 신기한 걸 더 많이 알게 될 거야.”

 

27.
너는 독립을 하기로 했어.
마지막 날, 짐을 정리할 때 엄마는 서랍 속에 간직해둔 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여주었어.
거기엔 네가 처음 입은 옷, 제일 좋아했던 장난감, 처음 부모님께 쓴 카드, 유치원 복…… 잊었지만 다시금 기억이 되살아나는 물건들이 가득 모여 있었지 (중략)
너, 언제 이렇게 큰 거니?
28.
어느 날 모든 걸 정지시켰어. 그리고 짐을 꾸렸지. 나는 정말 불안했어.
아직도 너를 다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작은 짐처럼 웅크리고, 낯선 사람들이 있는 서랍장 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또 버스를 탔지.
그리고 겨울나무가 듬성듬성 보이는 꽁꽁 언 눈밭에 앉아 있어. 나는 오들오들 추워서 얼어버렸지.
왜 이렇게 추운 먼 곳까지 온 거니? 네가 정말 걱정이 된다고. 그때였어. 겨울 숲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왔지.
세상에, 번쩍 일어나 하늘을 바라봤어. 우와, 지금 우리 우주에 있는 거니? 오로라야!
아름다운 초록 커튼들이 하늘 가득 별빛과 함께 우리에게 쏟아질 듯 넘실거리고 있어.
지금 이건 현실이니? 이런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다니. 너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어.
오로라를 보고 싶어했던 그 꼬마가 아직 네 안에 있었구나.
그래, 넌 변한 게 아니었어.
30.
밤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어. 새벽녘까지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지.
라디오에서는 오십 년 만의 폭설이래.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런 눈이 내렸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너는 얼굴도 씻지도 않고 새집이 된 나를 모자에 급하게 밀어넣고 밖으로 나갔지. 뽀드득뽀드득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어.
눈에 묻힌 마을은 정말 고요했고. 폭설도 서른이란 나이도 아름답고 낯설지.
50.
머리카락은 꼭 나뭇가지 같아.
봄처럼 여리게 자라 여름처럼 쑥 컸다 겨울처럼 잠시 쉬기도,
가을 낙엽처럼 떨어지기도 해.
그리고 다시 봄이 온 것처럼 또 자라나지.
나무와 네가 함께 계절을 보내듯 우리도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
56.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하늘의 미세먼지, 짧아지는 봄과 가을, 사라지거나 전에 없던 먹거리. 너는 부쩍 환경에 더 관심이 많아졌지.
너는 페트병 대신 물을 끓여 텀블러를 사용하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기로 했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너의 존재가 세상과 자연에 해가 되는 일을 줄이겠다는 결심은 네게 잔잔하고도 깊은 기쁨을 주었어.
근데 아니? 수분 보충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라는 걸.




58.
너는 알게 되었구나.
이제 너의 아이는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네가 독립할 때 부모님께 들었던 말을 아이에게도 똑같이 해주어야 했어.
“잘해낼 거야. 응원할게.”
너는 그 말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버린 후에야 나온 것인지를 알게 되었네.
이제 너는 추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말야.



59.
햇빛이 유리알 같은 날.
짙은 산빛이 드리운 물위에 손을 담갔지 시원한 물줄기가 몸안으로 밀려들어오고.
꺄르르 웃으며 물위를 첨벙거렸어.
너는 아직도 웃음소리가 여름처럼 크고 풀어진 마음은 어디든 닿을 것 같아.




85.
“엄마, 도서관 갈 때 무릎담요 챙겨가세요.”
이제 너는 누구라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러.
너는 익숙한 공간이 조금은 낡아 편안해진 코트처럼 아늑하지.
(중략)
오늘은 가을 햇살이 가득하네.
너는 담요에 손을 올리고 꾸벅꾸벅 졸았지.
발밑에 길고양이 한마리가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100.
밤하늘 가득 별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별빛이 느껴지지?
여름밤 공기도 나긋하고 좋아.
정말 좋은 순간이야.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궁금하지 않니? 





by papyros 2022. 10. 1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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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마 월리스, 『새소녀』, 이봄출판사, 2021.




 문학동네북클럽을 통해 가제본 도서를 수령해 먼저 읽게 된, ‘벨마 월리스’의 소설 <새소녀>를 드디어 완독했다. 사실 ‘성장소설’이다보니 아무래도 행복한 결말과 사랑이야기를 예측했었다. 얼마 전 <새소녀> 기대평을 작성할 때만 해도 소년 ‘다구’와 새소녀 ‘주툰바’가 재회하여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과는 다른 그들의 성향을 서로 인정하고, 기존의 사회질서와는 달리 새로운 가정을 꾸려 기존 부족들에게서 비판받을지라도 그들의 신념을 믿고 나아가고, 결국 인정을 받게 되는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흐름을 따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결말과는 무척이나 달라 사실 다소간의 충격이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잔인하고 마음이 아픈 부분은 새소녀 ‘주툰바’가 원치 않는 혼인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부족인 ‘그위친족’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치콰이’족에게 노예로 사로잡혀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겪는것도 모자라 적장인투라크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그의 아들인 카누크를 치콰이족에게 빼앗기며 아들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생애를 겪어왔던 점이다. 특히, 그녀가 치콰이족에서 벗어난 것도 누군가의 조력을 받은 것도, 혹은 무언가 협상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 새소녀를 구하러 온 그녀의 오빠들의 머리통이 치콰이족의 공놀이에 쓰이는 그 참혹한 형상을 목도한 후 치콰이족을 모두 살해한 후 탈출한 것이라는 사실까지, 그녀의 전 생애가 너무 비극적이고도 애통해서 작품을 읽는 동안 참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왜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려던 그녀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
 ‘다구’ 역시 자신이 원하던 삶의 방향과는 많은 변곡점을 겪는다. 무리 속에 예속되어 사냥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안히 여행하고 싶던 소년은 그위친 족 남성들이 살해당하고 자신만 운좋게 살아남은 이후 한 부족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는다. 그렇게 소년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데, 부족을 안정시킨 이후 ‘해의 땅’을 찾아 여행하는 다구가 다시 비극적인 사건으로 자신이 꾸리고 선택한 가정을 상실하는 과정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다구의 모습을 보면서 다구가 삶의 여러 사건들을 통해 진정 어른이 되어 돌아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성장’에는 반드시 그에 수반되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 ‘통과제의’라고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시대, 오늘날의 사회보다는 다구와 새소녀가 살아가던 그 시대에 더욱 많은 희생이 요구되었으니 그들의 통과제의와 ‘어른이 되는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다구와 새소녀의 삶을 통해,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해 올 수 있는 그 많은 삶의 과정에서 어떤것을 ‘기억’하고 삶의 중심에 두는지를 기준으로 삶을 영위할 때 조금씩 어른됨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문득 생각해본다. 
 물론, 그 어른됨을 위해 자신의 소망이나 본성,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은 다구와 새소녀의 시대나 지금이나 부당하다. 그러나 매 순간 자신이 선택하고 마주해 온 그 길을, (그 비극성까지도) 모두 감내하다보면 어느 순간 어른됨에 가까워져있을 터이고, 결국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그때의 ‘내’가 해야하는 무언가를 더욱 잘 식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바람과 해와 별이 멀리 있고 가까이 있고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그는 알았다. 그를 고향 땅에서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의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다구는 긴 여행으로 어떤 대단한 지혜를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해의 땅’에서 찾아냈다가 잃어버리고 만 귀중한 삶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수년 전 떠나고 싶다는 자신의 조바심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 즉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을 하는 것 뿐이었다.

- 벨마 월리스, 『새소녀』, 이봄출판사, 2021, 219쪽.

by papyros 2021. 12. 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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