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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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컬처블룸'  <작은아씨들> 서평단의 일환으로, RHK(알에이치코리아)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컬처블룸 카페 매니저님과 RHK(알에이치코리아) 담당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련링크 : https://cafe.naver.com/culturebloom/883862) 

 

 

   영화 <작은아씨들>이 개봉한 덕분에,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을 통해 함께 읽기로 했던, 『메이블 이야기』를 후순위로 잠시 미루고, 영화를 관람한 뒤 『작은 아씨들』을 읽고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특히 감사하게도 RHK 출판사에서 받은 종이책은 원작의 표지를 그대로 구현해 정말 1860년대 출간된 작은아씨들을 읽는 느낌이었고, 흡입력있는 서사 덕분에 금방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기실, 베스와 로런스 할아버지의 신뢰관계, 에이미의 스케이트 사건, 메그의 무도회, 브룩선생님의 장갑 이야기 , 베스의 성홍열 등 주요서사는 유년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던 능인출판사의 세계고전 만화책 덕분에(박종관 화백 作)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어린이를 위한 만화책이나 동화책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베스의 죽음과 에이미와 로리의 결혼은 이번 영화와 책을 통해 새로이 접해 매우 놀랍고 마치 새로운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능인 <작은아씨들>

 

 기실 나는 유년시절부터 베스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원작소설을 제대로 읽으며, 베스에 대한 애정에 더해 '조'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베스는 작품 곳곳에서 네 자매 중, 아니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선한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부상 소식에 아버지를 돌보러 떠났을 때, 유일하게 훔멜 씨 가족을 돌보다 성홍열에 걸리기까지 한 정도로 이타적이었으며 로런스 할아버지의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아마도 유년시절의 내가 베스와 동일시 했던 것은 '인정욕구'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베스처럼 내향적인 아이였으며 선생님들께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나는 당연히 베스가 지닌 선(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던 것 같다. 아마도 교사를 꿈꾸게 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특히 베스와 로런스 할아버지의 신뢰로운 관계는 참으로 애틋하고 다정한데, 가족 외의 타인을 대하기를 어려워하는 베스가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로런스 씨의 애정어린 시선과 배려 덕분이었다. 나 또한 은사님들의 애정 속에 성장해 온 만큼 베스와 로런스 씨의 관계에 많은 이입이 되었다.

 


"난 매일 갔어. 하지만 아이가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훔멜 부인은 일하러 나가고 로트첸이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 내 생각엔 언니나 해나 아주머니가 가봐야 할 것 같아." 베스가 진지하게 말하자, 메그는 내일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메그와 조는 각자의 일에 다시 파묻혀 훔멜 씨네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에이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베스는 할 수 없이 조용히 일어나 두건을 두르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여러 가지 물건을 바구니에 담은 뒤 참을성 있는 눈동자에 슬픔을 가득 담고서 차디찬 밖으로 나갔다.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363-364쪽.

 


 

"엄마, 로런스 할아버지께 실내화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제게 그토록 잘 대해 주시는데 저도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달리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고요. 그래도 돼요?" (중략) 베스는 메그와 조와 여러 차례 진지한 논의를 거쳐 모양을 정하고 재료를 산 다음 실내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진한 보라색 바탕에 점잖으면서도 화사한 분위기의 삼색제비꽃 무늬를 보고 다들 아주 예쁘다며 한마디했다.

(중략)

"지금까지 많은 실내화를 신어보았지만, 이처럼 나에게 꼭 맞는 실내화는 이번이 처음이오." 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계속해서 읽었다. "삼색제비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오. 이 꽃들을 볼 때마다 이걸 준 친절한 사람이 생각날 거요. 신세를 갚고 싶어 그러니 '이 늙은이'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손녀딸의 물건을 아가씨께 보내는 걸 허락해 주구려. 진심 어린 감사와 축복을 보내며. 당신의 좋은 친구이자 충실한 하인, 제임스 로런스."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132-136쪽.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어요…….."

 그러나 로런스씨가 너무나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는 바람에 할 말을 잊어버려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베스는 노인이 사랑하는 손녀딸을 잃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노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했다. 자기 집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해도 이보다 더 놀라진 않았겠지만, 노인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정말 그랬다! 노인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신뢰가 담뿍 담긴 키스에 감동한 나머지 체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베스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앚혔다. 그러고는 주름살투성이 뺨을 베스의 분홍빛 뺨에 대고 비비며 손녀딸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 순간 이후로 베스는 노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노인의 무릎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감사하는 마음은 자존심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베스가 집으로 돌아갈 때 노인은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걸어가 따스한 마음이 담긴 악수를 건넸다.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132-136쪽.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1부 내용에 이어 2부가 포함된 원작소설을 정독하면서, 마치가문의 둘째, '조'에게 깊은 애정이 더해졌다. 조에게는 다른 자매들과는 다른 '강인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스케이트 사건은 조의 원고를 불태운 에이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음에도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를 낸 자신을 자책하는가하면, 자신의 슬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위급한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칼을 자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가족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특히 2부 결말부에서는 마치 대고모로부터 물려받은 저택을 소년들을 위한 학교로 활용하며 보살핌과 애정이 필요한 소년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맡은 만큼 '조'는 다른 어떤 자매들보다 가장 강인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믿고 옳은 선택을 하면서, '성장하는 인물'이었다. 조가 완벽한 인물이 아닌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더욱 와 닿았다. 해리 포터가 처음부터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 '성장하는 인물'이었던 것처럼, '조' 역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인물이었다. 기실 성인기의 주요과제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믿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인데, 이 점을 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유년시절의 내가 베스와 같았다면, 이제는 조와 같이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내 고약한 성질 때문이에요!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돼요. 이제 됐다 싶으면 전보다 더 악화돼 있어요. 엄마! 어쩌면 좋아요, 난?"

불쌍한 조가 자포자기한 채 외쳤다.

"늘 주의하면서 기도하렴. 그리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거야. 혹시라도 네 결점을 극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마치 부인은 헝클어진 머리를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기대게 한 뒤 축축한 뺨에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168쪽.

 


"어디서 났니? 25달러나 되잖아! 조, 난 네가 경솔한 짓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런 돈 아니에요. 이건 내가 정직하게 번 돈이에요. 구걸하거나 빌리거나 훔친 게 아니라고요. 내가 번 거예요. 내 걸 팔았을 뿐이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조가 보닛을 벗자 다들 놀라서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털이 짧게 잘려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글쎄, 난 정말 아빠를 위해 뭔가 해드리고 싶었어." 자매들은 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탁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창 때의 젊은이들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만큼이나 돈을 빌리는 게 싫었어. 그리고 마치 대고모님이 잔소리를 해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9펜스를 빌려도 잔소리를 하실 분이니까. 게다가 메그 언니는 석 달 치 봉급을 집세로 내놓았는데 난 내 옷만 사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거든. 돈을 구할 수 있다면 코라도 베어 팔았을 거야."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338-340쪽.

 


 "초 좀 치지 마, 테디. 물론 부자 학생도 받을 거야.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 일단 시작하고 나면 시험 삼아 사정이 딱한 아이 한두 명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사실 부잣집 아이들도 가난한 집 아이들만큼 보살핌과 위로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 하인들의 손에 내맡겨지거나 타고난 성향과 정반대의 길로 내몰리는 불행한 꼬마들이 한둘이 아니야. 정말 잔인한 일이지. 잘못된 교육을 받거나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해 비뚤어진 아이들도 있고, 엄마를 잃은 아이들도 있어. 게다가 아무 문제 없는 아이들도 사춘기 시절은 겪고 넘어가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인내와 배려가 가장 많이 필요할 때가 바로 이 시기거든. 사람들은 이 시기 아이들을 비웃고, 다그치고,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하면서 예쁜 아이에서 하루아침에 훌륭한 청년으로 바뀌질 바라지. 자존심이 있어서 불평은 잘 안 하지만 애들도 다 느껴. (후략)"
 

-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 958-959쪽.

 

 

 한편 전체적인 서사 면에서, 영화만으로는 로리와 에이미의 결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에이미가 그저 얄미워보였고 타이밍을 놓친 조가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나 원작소설을 읽으며 로리와 에이미, 그리고 조와 프리드리히가 이어진 것에 대한 감정선이나 상황이 영화에 비해 더욱 이해되었는데, 조에게 로리는 그저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 온 '친구',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반면, 에이미에게 로리는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조가 프리드리히를 대하는 감정도 그가 지닌 '지식'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메그와 브룩, 조와 프리드리히, 에이미와 로리의 애정과 결혼관계를 통해 작품에 드러나는 당시 여성에 대한 관점이나 결혼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 결혼해야 출세한다는 인식들이 작품 곳곳에 깔려 있다. 그러나 세 자매 모두 '돈'이나 여타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인격, 지식, 신뢰로운 관계 등을 더욱 중시했으며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이 네 자매의 선택을 통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천로역정 놀이 (순례자 놀이) 등의 챕터에서 드러나듯이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경에 따라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며 네 자매 모두가 각자의 짐이 있고 그 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이 점이 작은아씨들이 진정한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라 여겨진다. 자매들의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그 나이대 청소년/청년이라면 한번쯤 지녔을 고민을 다루고, 각자 짊어진 짐을 자신의 방식대로 극복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메그는 당대 사회상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책임감을 지니고 여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조는 마치 대고모를 보살피는 등 그저 삶을 충실히 살아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과 선택들 안에서 깊은 가치와 깨달음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소하지만 거대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작은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 자신이 실제로 네 자매 중 장녀였고, 둘째였던 동생 리지를 떠내보내는 상실을 겪어낸 바 있으며 실제로 '조'와 같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젊은 시절 신문과 잡지에 단편소설을 싣기도 했고, 간호사로 종군한 경험이 있는 등 작가의 삶이 작품 곳곳에 여러모로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삶을 풀어낸 여러 자전적 소설(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 등)들과 마찬가지로 <작은아씨들> 또한 독자들에게 있어 작가의 자기고백을 통한 강렬한 몰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160년의 세월을 넘은 고전소설 <작은아씨들>의 강렬한 힘은 작가의 경험을 통한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확신한다. 최근에 인상깊게 관람하여 인생작이 된 뮤지컬 <Story Of My Life>에서도 이 점이 드러나는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한 갈래들이 하나하나 모두 소중히 들여댜보아야 할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이 점이 바로 어느 시대의 어느 누가 읽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는 중요한 단초라고 여긴다.

 

 유년시절에는 네 자매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과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고 성인이 된 지금에는 실제적인 '선택'과 '책임',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금 정리하게 해 준 책 <작은아씨들>에 깊은 감사함과 애정을 느끼며, 평생 옆에 두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다. 

 

by papyros 2020. 3. 1. 02:00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30주년 기념판

RHK, 2018. (자기계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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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독서 카페 리뷰어스 클럽 http://cafe.naver.com/jhcomm/13279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알에이치코리아(RHK)'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RHK 측에 감사드립니다.



 

(네이버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642251)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내가 배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으라.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리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밖에서는 차를 조심하고 옆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움직이라.

경이로움을 느끼라. 스티로폼컵에 든 작은 씨앗을 기억하라. 뿌리가 나고 잎이 자라지만 아무도 어떻게 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씨앗과 같다.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림책 딕과 제인Dick&Jane, 태어나서 처음 배운 단어, 모든 단어 중 가장 의미 있는 단어인 보다Look’를 기억하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

 

 초등학생인가 중학생 즈음으로 기억하는 어느 여름날, 가족 휴가로 간 어느 콘도에서인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초반의 청소년이던 내게는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가 아닌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무슨 말이야.’ 언뜻 책의 제목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며 책장을 펼쳐 일독하기 시작했으나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행복감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독서 관련 카페에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제목.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보았는데, 기분 탓일까? 싶었으나 3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된 도서라는 소개 글을 읽고 10여 년 전 어느 여름의 행복감을, 20대 후반의 성인이 된 지금 다시금 마주하고 싶었고,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유년기에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책의 제목을 비유적으로 느꼈을 때와는 달리 2018,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20대 후반의 성인 독자인 내게 책의 제목, 그리고 저자의 경험은 비유적이라기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워 온 학문에 관한 깊은 지식들이 분명 원하는 분야에의 자격을 갖추고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 속에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간절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저자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듯이 가치관이라는 삶의 지혜였기 때문이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가치관과 신념들이 드러나 있는 1: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수많은 타인들에 대해 다룬 2: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천사들, 그리고 마지막 3: 나는 나의 삶을 다시 살 것이다에서는 저자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미래에 대해 제시된다. 책의 이러한 구성처럼, 이 책은 저자가 실천하고 소망하고 있는 가치가 자신과 타인에서 나아가 세상으로까지 확대되는데, 즉 한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접하고 깨달은 많은 가치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목사 바텐더><도움받을 자격>이라는 에피소드였다. 개신교의 목사인 저자가 신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학비를 마련하고자 바텐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꾸중하긴 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격려하는 대학 교수들의 태도. 그리고 장학금을 수령하기 위해 학비사용 계획안을 제출 하는 저자에게 즐거움을 추구하고 타인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예산을 계획하지 않는 학생에게 어떻게 장학금을 주느냐며 반문하는 학장의 가르침은 저자 뿐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까지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 말을 잘 듣게. 자네 예산에는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 하나도 없네. , , 음악, 심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돈조차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돈이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자네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네.”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항목이라고!

나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는다고!

세 번째 가르침이었다. 또 배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62-63.

 

 

 

 성공하기 위해, ‘빨리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 보다는 마음 한켠에 여유와 행복의 자리를 비워두며 타인과 그 행복을, 즐거움을 나누는 삶이 더욱 귀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급함과 불안에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그 당연한 가치를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2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인어들> 이었다. 거인, 마법사, 난쟁이 중 한 캐릭터를 정해 줄을 서야 하는 놀이에서 자신은 인어인데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느냐는 어린 아이의 물음.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모두 내가 생각하고 그리는 틀 안에 넣고 분류해 이에 맞추고자 하는 획일화된 교육, 이질적인 타인을 수용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사회현실. 최근 읽었던 표명희 작가님의 어느 날, 난민이라는 책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소외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개개인의 개성과 다양화된 배경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세상을 운용해 수많은 난민들을 양산시키고 있지 않는가.

 

 

 

 

 

인어는 어디에 서요?

인어는 어디에 서냐고?”

긴 침묵이 흘렀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중략)

 여자아이는 거인이나 마법사나 난쟁이 어느 것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만의 카테고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인어였다. 놀이에서 빠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게임에서 진 아이들의 줄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인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놀이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신의 존엄성이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는 당연히 인어가 설 자리가 있으며, 내가 그 자리를 안다고 믿었다.

글쎄…….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나? 인어들, 남과 다른 사람들,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 이미 만들어진 상자와 비둘기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 서야 하나?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학교와 나라와 세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26-127.

 

 

 책을 모두 완독하고, 책장을 덮을 무렵 나는 이 책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를 독자들 개개인이 진정성 있는 성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 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저자가 <받은 만큼 돌려주기>라는 챕터에서도 기술하고 있으며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 Pay It Forward>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언뜻 자그마하게 보일 수 있는 누군가의 선행이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순환될 수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나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나 이웃들을 차치하더라도, 나와 그 어떤 관련이 없어 보이는 타인(他人), 심지어 이방인(異邦人)으로 여겨지는 이, 약자(弱者), 심지어 인류를 넘어 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로부터 배울 점이 있고 늘 조금씩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타인, 타 생명에 대한 사랑은 성인기에 이르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늘 배워오는 가치이지만, 곱씹어 올라가면 유년 시절부터 강조되어왔고 편견과 선입견 없이 타인과 대상을 대하던 시기가 유년기가 아니었던가.

 

메논은 그 빚을 결코 있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선물도 15루피도 잊지 않았다. 메논이 죽기 전날에 어떤 거지가 와서 신발이 없어 발이 상처투성이니 샌들 살 돈을 달라고 구걸했다. 메논은 딸에게 지갑에서 15루피를 꺼내어 주라고 했다. 그것이 메논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한테 들었다.

(중략)

 그 사람의 아버지는 메논의 보좌관이었고, 메논에게 자선을 배웠으며, 자신의 배움을 아들에게도 물려주었다. 아들은 낯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름 모를 어느 시크교도에서 인도 공무원에게로, 그의 보좌관에게로, 보좌관의 아들에게로, 그리고 절망에 빠진 백인 외국인인 나에게로 자비가 베풀어진 것이다. 그 선물은 큰돈이 아니었고, 나 또한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선물은 돈의 가치를 떠나 내게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주고, 나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81-82.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모퉁이 식품점의 남자, 자동차 정비소의 수리공, 주치의, 선생님, 이웃, 동료들이 그렇다. 항상 거기에있는 좋은 사람들, 작은 일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매일 우리를 가르쳐주고 축복해주고 용기 내게 해주고 지지해주며,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을 역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에게서 배우고 뭔가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누가 그러는지 우리는 결코 모른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88.

 

 

 

 

 로버트 폴검의 이 에세이가 3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아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추구할 만한 항존(恒存)적인 가치 타인과 생명에 대한 사랑, 늘 누군가로부터 빚지며 사는 존재라는 사실, 공정성, 삶에 대한 경이로움 등 는 거창한 소설이나 동화,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가까운 곳의 이웃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마음 따뜻하면서도 타성(惰性)을 깨뜨릴 수 있는 깊고도 날카로운 울림은 바로 우리가 직접 발견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사실을.

로버트 풀검이 그리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내면의 추억에 자리하는 조부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는 할아버지로서의 이상향(理想鄕)이기도 한 것처럼, 소소하게 보이는 일상 속의 작은 이야기들이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한편 미래를 그려내게 하고 대를 걸쳐 전해줄 수 있는 가치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다 널리, 오래 전해질 때에 한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으로 작용하리라 믿으며,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전해 준 저자 로버트 풀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나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청춘기에서 벗어나 기성세대로 나아갈 지인데, 이 책을 읽어주며 새로운 청춘들과 소통하고 내 경험을 전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 간다. 할아버지와 나는 밝은 람바 사기타리 별과 겹칠 정도로 가까워진 금성과 목성, 서남쪽 하늘에서 달리는 큰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본다. 머리 바로 위에는 뿌연 안개 가튼 안드로메다 성운이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은하수도 보인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할아버지는 1910년에 본 헬리혜성 이야기를 해준다. 그해 5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할아버지는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한 일을 목격했다. 세상은 헬리혜성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과 두려움을 느끼며 공포에 떠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할아버지는 헬리혜성이 다시 올 때 자신을 대신해서 꼭 보겠다는 약속을 하란다. 나는 약속한다.

새벽이 올 때쯤이면 머리 위 하늘을 지배하는 위대한 사냥꾼 오리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텔게우스와 벨라트릭스, 오리온 허리 부분의 성운,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를 향해 있는 발 부분의 리겔과 사이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오랫동안 똑같은 별들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서 지구와 마찬가지로 저 하늘 어딘가에도 생명체가 있고, 어떻게 생겼든 간에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서 보면 우리 지구도 빛날까? 우리 지구도 그곳에 사는 존재들이 상상력과 경이로움으로 만들어낸 밤하늘 별자리의 일부분일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어떤 것,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어떤 것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면 가끔씩 나가서 하늘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잠자리에 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5-196.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하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하다.

꿈은 사실보다 힘이 있다.

희망은 늘 경험을 이긴다.

웃음만이 슬픔을 치유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9.

 

 

 

 

 

 

by papyros 2018. 6. 20. 14:21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E-book cafe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RHK(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RHK측에 감사드립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 올 거야.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8.

 

레일라는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적어도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너희들의 깨끗한 마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야. 만약 레일라가 살아 있다면 도와줘.”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9.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이 서정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는 미야모토 테루의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구조 안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먼저 접했는데, 알고보니 그 영화의 원작소설 작가가 바로 미야모토 테루였기에 작품의 서정성이나 서사 구조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일본 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서정적인 소설이라는 소개와는 달리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마주하게 되는 것은 기쿠에 올컷이라는 한 여성의 죽음이다. 그녀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미망인으로, 남편인 이안 올컷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이 남편 대에서 성공을 거두었기에 상당한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전국 일주 중 벌어진 '기쿠에 올컷'의 죽음. 그리고 망자의 유산을 그녀의 조카인 오바타 겐야-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원에서 유학하며 MBA과정을 마친 일본인 가 전부 상속하게 되어 오바타 겐야가 로스엔젤레스(LA)의 팔로스버디스반도로 건너가게 되면서 작품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기쿠에 올컷의 집 그 정원에서 겐야가 마주한 진실은, 백혈병으로 여섯 살의 나이에 죽은 줄만 알았던 사촌 레일라가 사실 유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비공식적인 기쿠에 올컷의 유언 마지막 줄에 따라서, 레일라를 찾아 유산의 70%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겐야에게 부과된다.

 

 

“‘그것과는 아직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이라고 쓰여 있는 걸로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물건인가. 떨어질 수 없는 물건……. 멜리사는 레일라와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지. 그렇다면 그때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 그 정도의 여자아이가 떨어질 수 없는 그것이란 한정되지 않을까? 부모가 우격다짐하지 않고 느긋하게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그것이라고 하면 인형이나 장난감, 이제 갓난아기가 아닌 유아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겠지.”

 겐야는 니코가 교코 매클라우드의 편지에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낀 것인지, 딸 멜리사가 떨어질 수 없는 그것에만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이라……. 이 교코 매클라우드의 편지를 보면 원래 몬트리올에 살지는 않았군. 다른 나라에서 이주한 거야. 기쿠에 씨하고는 어디서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선가. 일본에서부터 친구인데 기쿠에 씨는 미국인과, 교코는 캐나다인과 결혼했지만 교우관계는 이어졌다. 하지만 기쿠에 씨는 그것을 남편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어떻게든 남편에게 숨기고 싶었다. 그건 왜일까?”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2-153.

 

 

 레일라를 찾기 위해 오바타 겐야가 기쿠에 올컷이 만약을 위해 남겨둔 마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것만 같은 힌트들을 찾아내고, 사립탐정인 니콜라이 벨로셀스키’(니코)가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히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이 협력하여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밝혀지는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쿠에 올컷이 유괴사건에 가담했다는 것. , 딸을 유괴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다는 것. 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독자들은 ?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딸을?”이라는 질문에 당면하게 된다. 그녀가 유괴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일라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야 했던 것은, 마트 CCTV안에서 자신에게 타월을 흔드는 딸 레일라의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학생을 만났나요?”

흑인 경비원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 .. 건방진 꼬맹이였어요. 신분증을 보여달라지 뭐예요.”

경비원은 웃으며,

학생의 요구는 정당한 겁니다.”

하고 말했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07.

 

 

언제였더라. 사격 클럽의 이사를 맡고 있다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가,

매년 미국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총알이 들어있지 않은 총으로 죽는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주위의 어른들도 총알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는 총으로 놀다가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21.

 

 

 

벽이나 창에 매달린 화분의 숫자 말이네. 거베라 화분이 서른세 개야. 레일라는 서른세 살이지. 우연일까?”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60.

 

 

이후 작품의 후반부에서 겐야가 교코와 케빈 부부를 만나며 밝혀지는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왜 어머니가 직접 유괴사건을 조작해 딸을 떠나보내야만 했나하는 물음에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드디어 풀리는 지점. 소설에서만 나타나는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대부분의 성폭력이 친족 간에 일어난다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최근 읽었던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소설 베어타운에서도 하키단 단장의 딸 마야가 유소년팀 하키팀 유망주인 청소년 케빈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공동체의 시선과 싸워나가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사건 이후 공동체 안에서 외롭고 처절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족들이 추구하는 가치인 사랑안에서 부모님의 보호 속에 사건을 함께 극복해 나가면서 결국 베어타운에 남게 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레일라는 결국 어머니를 떠나 다른 가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고, (그녀의 친부모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레일라와 마야의 삶은 (본래의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마야와 레일라 둘 모두,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모성애에 의해 보호받았으므로.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삶은 어떤 어린아이에게나 당연한 환경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쿠에 씨는 굉장한 정신력의 소유자네. 감탄할 수밖에 없어. 27년이나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불안이나 공포와 싸우며 살아온 거니까. 몬트리올대학의 졸업식 식장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멜리사 매클라우드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쿠에 씨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401.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부터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손에 맡겨 자신을 잊게 해야만 했던, 그리고 범죄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평생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던 기쿠에 올컷의 비극적인 상황. 딸을 보호해야 하는 그녀의 깊은 애정이 아니었다면, 레일라는 지금의 삶처럼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기쿠에 올컷이 진정으로 바라고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야 말로 딸에 대한 사랑과 딸의 행복이었기에, 작품 말미에 겐야가 그려낸 27년 전 기쿠에 올컷과 레일라의 모습은 따뜻하고도 슬픈 느낌이 묻어난다. 레일라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기꺼이 감수한 어머니 기쿠에 올컷의 희생이, 마치 자신의 진주알을 기꺼이 내어주는 어미조개 같기에. 그만큼 아름답고도 서린 사랑이기에.

 

 

 

 

 겐야는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오바타가의 능소화보다 색이 짙고 꽃잎도 큰 올컷가의 능소화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중정의 잔디밭 위에 27년 전 서른여섯 살의 기쿠에 고모를 두었다. 겐야에게는 그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기쿠에 고모는 길이가 긴 주름치마를 입고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겐야가 잠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어디선가 어린 레일라가 달려와 엄마에게 안겼다. 기쿠에 고모는 깔깔 웃음소리를 내며 레일라와 함께 잔디밭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달빛이 두 사람의 몸에 금색으로 선을 둘렀다.

레일라는 엄마에게 안아달라며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나서 꽃밭으로 달려가 꽃들을 가슴에 안을 만큼 안아서는 강아지 같은 걸음걸이로 돌아와 엄마에게 쏟았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405.

 

 

 추리적(미스테리적) 서사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가치 있었던 이유는, 기쿠에 올컷이 그녀의 조카에게 전해주고자 한 - 마치 퍼즐과도 같은 레일라에 대한 비밀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한편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지닌 내면의 깊은 곳에 순수한 사랑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한 개개인의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겐야가 품은 제시카에 대한 사랑, 탐정 니코와 함께하는 터본스테이크와 스프가 마련된 식사자리 등의 소박한 행복이 서사 속에 자리하는 것은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삶의 그러한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중정의 풀꽃이라는 신비스러운 존재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한편 행복소망하며 진실을 찾아나가는 서정성. 양측의 무게 추를 맞추는 사이 기쿠에 올컷의 내면을 독자 자신에게로 내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 작품은 마무리된다.

비극과 행복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 중정의 꽃들, 기쿠에 올컷의 결심, 겐야와 니코의 추리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만 같은 작품이었다.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장 스크린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기쿠에 씨는 이언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나서 레일라가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 밤에는 정원의 꽃밭으로 안고 나갔어요.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무리 무서운 일이나 슬픈 일이 일어나도 엄마가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레일라는 그냥 안심하고 있으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기쿠에 씨는 레일라가 얼마나 영리하고, 마음씨가 얼마나 고우며, 모두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아이인지를 몇 번이고 말해주었대요.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다들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도록 이 꽃밭에 부탁해보자, 꽃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어.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레일라의 마음과 꽃, , 나무의 마음은 말을 할 수 있어. 꽃도 풀도 나무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말해줄 거야. 레일라도 언젠가 꽃, ,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될 거고…….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393.

 

 

 

 

 

 



 

by papyros 2018. 5. 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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