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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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게시물은 창비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전문상담교사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창비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차열음 작가과, 창비 출판사, 한국전문상담교육연구회전국의 모든 동료 전문상담교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울은 때로 타고난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 내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애초에 우울의 뿌리를 찾았던 것은 문제를 풀어내기 위함이었고, 따라서 가족력과 같은 통제 불가 요인은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우울을 발현하게 한 또 다른 뿌리를 찾아야 했고, 상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56.

 

 

  차열음 작가의 에세이,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는 저자의 자기고백이 담긴 글이다. 이제는 20대 성인이 된 저자가 중학생 때 거식증과 우울증을 겪어내는 과정을 회상하며 서술하고 있는데, 저자가 경험한 청소년기 거식증과 우울증의 증상과 그 내면을 촘촘하게 서술하고 있어 거식증이 발현된 원인부터 우울과 관련된 가족력, 거식증에 이어 폭식증이 나타나면서 섭식장애의 양상을 지니게 된 촉발요인과 유지요인을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사인 부모님을 두고 있던 열 네 살의 저자는 학업으로는 동생만큼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경험으로 인해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에 몰두하게 된다. 그 열 네 살 아이의 인정욕구가 다이어트와 외적인 미()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져 거식증이 발현한 것인데, 상담과 병원치료의 여정 중에서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와(급작스럽게 결정된 전학) 교사 및 친구들로부터의 낙인 등의 선행사건들이 저자가 자살 시도와 자해 등 위기이슈로까지 나아간 일들이 160페이지 남짓의 짧은 책 속에 상세히 그려진다.

 평생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독자로 살아왔으며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고 서평을 써 왔지만, 직업적인 이유로 속해있는 연구회 단톡방에서 서평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새로운 일이다.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왜 출판사에서 그 많은 교사들 중에서도 한국전문상담교육연구회의 전문상담교사들이 읽고 서평을 쓰기를 가장 바랐는지 그제야 알 듯했다.

 이 책은 저자가 거식증과 우울증을 지나 성장해왔다는 내용의 자기 고백이 담긴 단순한 에세이임을 넘어서, 충분히 사랑받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온전히 수용되는 무조건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그 경험을 갈구하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그려내고 있다.

 

  짧은 교직 경력을 지니고 있지만, 저자의 청소년기와 같이 그런 고통과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청소년들을 작년에 가장 많이 만났다.

 작년에 근무한 전임교는 내 전문상담교사 경력 중에서 아니, 교직 경력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고통스러웠던 학교임이 틀림이 없다.

 위기관리위원회를 1년에 여덟 번 열었고, 3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돌아가는 학교의 4계절 중 자살시도만 최소 4(학기가 시작된 조금 후), 7(방학 직전), 8(2학기 개학 이후), 10, 12(2학기가 끝나가는 시점) 다섯 번 이상은 있었으니 말이다. 약물 과다복용, 투신 시도 등…….

 가장 많은 아이들이 약물을 과다복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상담교사로 상담을 하고 관련 위원회 업무를 맡아 준비해야 했던 나 역시도 반복되는 자살시도 사안에 많이 힘들었지만, 시도를 해야만 했던 아이들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지나는 와중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거겠지.

 저자의 글을 읽어내려가다보니 작년에 잠시나마 선생님도 힘들어, 제발, 살아만 있어줘, 라는 기도를 반복해서 올리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그 대신 아이들이 시도를 결심할 용기를 내기 직전에 나를 찾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하나...?

 

‘가방에는 집에서 몰래 훔쳐 온 수면제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어디선가 봤는데,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자는 듯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중략) 거식증이나 우울증 환자가 전보다 활력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은 쉽게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환자에게 이 시기는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정신적인 회복 전에 약과 식이 조절로 몸이 먼저 활력을 찾게 되면서 실제로 이 시기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으나 마음먹은 것을 실행할 만큼의 몸의 기력은 생겼기 때문이다. ’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89.

 

 

 

‘언니 오빠들과 있다 보면 자유롭게 나는 것 같다가도, 공기가 없는 공중에 표류하는 것같이 숨이 턱 막히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때 컴퍼스나 커터 칼 같은 것으로 손목을 그으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예전 학교에서 어울렸던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 친구의 팔뚝에는 늘 붉은 별이 그어져 있었다. 컴퍼스로 그은 별이었다. 아빠에게 맞아 화가 날 때마다 이렇게 하면 분이 풀린다던 그 친구의 말처럼 예리한 고통은 순간적인 쾌감이 되었다. (중략)
스트레스를 자해로 푼다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던 우울한 마음을 누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나름의 SOS 신호였던 것이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110-113.

 

 

 한편 저자가 거식증으로 인해 상담을 받는 장면을 그려내는 지점에서는 저자보다도 상담자의 발화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자살시도를 하고도 자퇴를 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불안했고 아이들이 그들이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처럼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도(거부하고도) 자퇴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을까, 병원 치료를 더 설득하고 내가 연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걱정하던 내게, 작년 4월 한 내담학생이 해 준 말이 떠오른다. 자살시도 이후 바로 연계와 학교생활 적응을 위해 조력했지만, 끝까지 자퇴를 고집하던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계속 걱정만 하는데 왜 제가 잘 될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의 내가 1년 전의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아이들이 학교에 기댔으면 좋겠고 할 수 있는 만큼 제도 안에서 상담과 치료 지원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상담교사로서 상담을 하며 내가 만나는 내담학생에게 불안과 걱정을 티내거나 훈시하지 않고 저자가 만난 상담자처럼 따뜻하고 객관적이면서도 한 걸음을 늦추며 내담자에게 맞추는 상담자로 자리하고 싶다. 적어도, 다른 곳에 찾아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Wee클래스에서 온전히 사랑받고 존중받는 경험을 하러 편히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한테 먹는 걸로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해 주세요. 들을 때마다 짜증 나요.”
“그래, 선생님이 이따가 이야기해 둘게. 먹는 걸로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지.”
“사실 할머니는 더 심하긴 해요. 방까지 쫓아와서 먹이려고 하는데 짜증 나서 가출해 버리고 싶어요
.”
선생님과 있을 때는 내가 아픈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좋았다.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먼 발걸음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담실의 체중계와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50-51.

 

 

 

“이번 주 식단 일기는 지난주보다 빠진 부분이 많네. 식사를 거른 거야?”
“…….”
“뭐라고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시간은 맞춰서 먹기로 했었지? 먹고 싶은 만큼 조절해서 먹고, 먹은 것만 잘 적어 보자
.”
무리해서 다가오려는 엄마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아빠보다
모든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더 편했다.
사랑해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가족보다 이성적인 타인이 때로 더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52.

 

 살기 위해 자해를 하고, 고통의 끝에서 조금 더 안전한 방법을 고민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많은 아이들이, Wee클래스/Wee센터/병원/사설 상담센터, 그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그들에게 가장 가깝고 편한 곳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선생님도 한 사람이기에 많이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고통은 당연하다고, 아픔을 느끼는 네 마음이 너무나 옳다고, 함께 길을 찾아보자고 손을 내밀고 곁에 머무르고 싶다.

 

‘너를 응원한다고, 작고 연약해진 너의 이런 모습마저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146.

 

 

‘물론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가 모든 우울을 고쳐 주지는 못한다. 주벼에서도 상담이나 약물 치료를 병행했지만 호전되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살아온 시간이, 삶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테니 문제를 벗어나는 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담과 약물을 통해 문제가 나아지는 경우도 있은 병원은 삶의 낭떠러지 앞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주요한 방법 주 하나임은 틀림없다.
정신 병원은 학교와 같다. 환자는 모두 학생이다. 그곳에서 스스로 마음을 진단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다음에 더 강인해질 수 있도록, 다음 우울엔 더 의연히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도움도 받아 본 사람이 청할 줄 안다. 우울도 겪어 본 사람이 이길 줄 안다.’

 

- 차열음,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창비, 2024, 148-149.

 

 

 

 전문상담교사로서 가장 힘들었던 2023년을 잘 버텨 내고(수많은 위기사안들에 소진이 심해, 작년에는 블로그에 서평을 많이 써내지 못했다), 2024년 블로그에 올리게 된 첫 서평이 이 책이었기에 더욱 유의미하다고 여긴다.

 나는 학창시절 외로움을 느끼며 청소년기를 보냈고(당시에는 몰랐지만) Wee클래스가 부재하고 상담교사가 없던 시절 교과 선생님들의 지지와 격려 덕에 자라났기에 평생의 업()으로 교사를 목표로 하게 된 아이였다. 학부 시절 심리학을 복수전공할 때만 해도 내가 전문상담교사로 살아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교직에의 첫 동기와 가장 밀접한, 전문상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상담을 받으며 나의 비합리적 신념을 수정하고자 노력하고(가령 상담교사로서 상담에서 실수하면 다 망할 것 같다는 비합리적 신념? 지난 주에 상담자분과 찾아봤는데 근거가 1도 없더라~) 자기 이해와 타인 이해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한 개인이지만, 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고 상담을 경험하는 전문상담교사이기에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상담의 의미를 더 잘 전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저자의 학창시절을 넘어, 내가 만나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진실로, 함께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읽고 나누며, 지금 만나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잘 들여다보고 지원하면서 항상 상기하고픈 글이다.

 어렵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어 주신 차열음 작가님과, 창비출판사, Wee클래스와 Wee센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료 전문상담교사/전문상담사 선생님들께 다시금 깊은 감사를 전한다.

 

 

 

 

by papyros 2024. 4. 23. 01:29

장유경, 『깜빡깜빡해도 괜찮아』, 딜레르, 2021.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깜빡깜빡해도 괜찮아'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한솔수북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한솔수북(딜레르) 출판사와 저자이신 장유경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솔수북 인스타그램 : https://instagram.com/chaekdam?utm_medium=copy_link 

 

    강릉 보름살이를 이어나가던 12월 중순 어느날이던가, 한솔수북 출판사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서평단을 모집하는 글을 읽고 책에 대한 소개를 접한 후 이 책은 내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여 이후 바로 서평단을 신청했다.

  『깜빡깜빡해도 괜찮아』라는 이 책은 인지심리학을 전공한 심리학자인 딸이 경도인지장애를 진단받고 생활을 이어나가는 어머니를 부양하는 가족돌봄에 관한 에세이이다.  나 역시 심리학 전공자로서 전문상담교사를 목표로 하는 이로서, 전문성을 지닌 저자 분께서 경도인지장애를 어떻게 설명하실지 궁금증이 앞섰다. 그러나 전공 전문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만 스물아홉 살의 딸로서, 장녀로서 또래 친구들보다 상대적으로 부모님의 연세가 많은 편이다. (부모님 두분의 연세가 각각 55년 양띠와 57년 닭띠이시다.)

 가장 상대적인 것이 나이라고는 하나, 벌써부터 두렵고 슬프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또래 친구들에 비해 어쩌면 닥쳐올 부모님과의 이별이 머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내가 30대로 진입하면서 부모님께서도 70에 가까워지시는 이 때에, 노화와 함께 인지저하를 겪으실 부모님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져 책소개에 그려진 내용이 남일같지 않게 느껴졌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어쩌면 내게 찾아올 수도 있는 부모님의 어려움을 잘 준비하고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딸이, 상담 전문가가 되고 싶어 서평단에 지원해 책을 받아보았다.

 

  책을 읽어나가며,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일상의 루틴'유지와 '사회적 접촉'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가사노동과 같이 젊은시절부터 유지해 온 일상의 루틴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유지해 나가는 것이 인지기능 회복에 중요한 것이기에 저자분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어머니께서 자연스럽게 저자분의 청소, 설거지를 조금씩이나마 보조할 수 있게끔(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매일 꾸준히 산책할 수 있게끔 도움을 드리기도 한다.

 한편 노년기의 인지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접촉', 즉 긴밀한 타인들과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외부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의 중요성이었는데, 이를 위해 저자께서는 어머니의 사회적 활동을 위해 센터의 미술강좌, 음악강좌에 등록하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가시거나 카카오톡 등 연락수단을 통해 친구분들과 꾸준히 소통하실 수 있게끔 도움을 드리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부모님만 보더라도 성당활동을 꾸준히 하시며 모임에 참여하시는 어머니, 당구 모임에 참석하시며 동창분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고 좋아하는 스포츠를 즐기시는 아버지의 생활 속에서 더욱 건강성이 확보되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한편,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팬데믹(코로나19) 이후 출생한 아이들의 지능이 코로나19 이전 출생한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저하되었다는 연구결과 또한 존재하는데,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 유의미한 연구가 아닌가 싶다. 영아기의 부모애착, 유아-아동기의 또래관계, 그리고 노년기의 공동체활동이 모두 인지기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뢰로운 친구들과의 교류와 대화가 얼마나 깊이 우리의 삶에 관여하는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WHO에서 바람직한 노년의 모델로 제시한 '활동적 노년'(Active Aging)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활동적 노년은 심신의 건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내 집에 살지, 요양원에 들어갈지)을 자신이 결정하고(자율성), 공동체 내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독립성) 노인이다.

  -  장유경, 『깜빡깜빡해도 괜찮아』, 딜레르, 2021, 240쪽.





 


사회적 접촉이 많은 것은 더 건강한 생활습관의 표시일 수 있다. 
 사회적 접촉이 많은 사람은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활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사회적으로 활동적이어서 사회적 접촉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사회적 접촉이 많으면 치매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사회적 위축은 치매 위험의 증가와 관계된다. 치매 진단을 받기 전에 사람들은 점점 사회적인 접촉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이것이 실제로 향후 치매 가능성에 대한 초기 신호이기도 하다.

 -  장유경, 『깜빡깜빡해도 괜찮아』, 딜레르, 2021, 188-189쪽.



 

 

 

 


  한편 또한 책을 읽어나가며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미 성장하여 독립해 살던 딸인 자녀가 어머니와 다시 함께 살면서 격는 여러 심리적인 고민과 어려움이었는데, 경도인지장애의 증상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어머니를 대하는 저자분의 모습을 통해 많은 부분을 체득할 수 있었다. 저자분에 비하면, 그리고 실제로 경도인지장애나 치매를 겪는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이들에 비하면 나의 어려움은 세발의 피이기는 하나 노화와 함께 점점 반복질문이 늘어나시고 쉬이 짜증과 분노를 내시며 감정적으로 변하시는 父의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고 나 역시 이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기도 하는데, 조금더 차분함과 인내심을 지니고 부모님을 대할 필요성과 더불어 자기돌봄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가 건강해야 부모님의 노화와 관련된 심리적 문제에 건강하게 대처/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04년, 중학교 1학년 시절 치매 합병증으로 작고하신 친할아버지를 주로 부양하던 어머니께서 얼마나 내면에 어려움을 겪으셨을지,(자녀돌봄,시부모 부양, 가사노동)  노화와 더불어 사회적 활동이 극도로 줄어드시고 주로 집에서 TV시청에만 매몰하시던 친할아버지께서는 어떠한 감정을 주로 느끼셨을지, 유년시절의 나로서는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그리고 대학 시절, 내가 심리학을 복수전공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본다. 교직이수에 실패해 특수교육과 복수전공이 무산되었던 20대 초반의 어느 날, 내가 심리학을 복수전공한 것은 자기이해의 욕구와 더불어 나의 주변에 자리한 부모님과 가족들의 내면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가족의 경계를 지키며 건강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상담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임용을 준비하는 현재도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초심(初心)을 기억하며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성과 더불어 주변 소중한 이들의 심리적 건강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족들의 질병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자칫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고 부정적 정서반응을 야기할 수 있는 가족들의 언행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도움을 된 책이다.

 한편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 몇 년 전 대학원에서 학부때와는 다른 교수님께 '발달심리학' 수업을 수강하며 '노인심리학'을 강조하시던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노년'을 두려움의 대상, 회피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노년기는 곧 삶의 종결, 무망감, 허무함과 연결되는 인식(병리적, 수동적 관점)이 팽배한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발달단계 상 노년기를 맞이하는 만큼, 자신은 어떠한 노년기를 맞이할 것인지 그리며, 전 생애를 통틀어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노년기의  중요성을 조망하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인지적, 언어적 소통에 다소 어려움이 있는 만큼, (이 책에서도 등장했던)미술치료나 음악치료 등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는데, 전문상담교사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로서,(상담 전문자로서) 노인심리학과 관련된 연구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비언어적 소통이 가능한 상담도구에 더욱 관심을 갖고 전문성을 확대해 나가고자 새로운 결심을 하게된다.

 

 

'일상의 기적' 시 속에서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맴돈다. 오늘도 이 사소한 일상의 기적에 감사한다.

                      -  장유경, 『깜빡깜빡해도 괜찮아』, 딜레르, 2021, 256쪽.

 

 

 

 

by papyros 2021. 12. 30. 18:39

   '북크루'에서 서비스하는 에세이 메일링서비스 '책장위고양이.' 나는 시즌2를 구독한 적이 있는데, 이메일로 작가들의 에세이가 전달되는 것이 새롭기도 했고 무언가 이메일로 특별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책을 사랑하고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 시즌5 서포터즈 공고를 보고 욕심이 생겼다. 이 좋은 서비스를 다시 체험하고 싶고,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도 함께 향유하고픈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10월 23일)부터 월요일(10월 25일)까지 서포터즈로서 미리 선공개된 시인들의 시 세 편을 받아보았는데 세 편의 에세이가 모두 담백하면서도 깊이있고, 큰 여운을 가져다 주었다. 

 본 글에서는 세 편의 에세이에 수록된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간단한 후기를 남겨보고자 한다. :) 그리고 누군가 이 글을 통해 '책장 위 고양이' 서비스에, 그리고 책이나 해당 작가에, 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책 중독자로서 함께할 수 있는 독서가를 또 한 명 만드는 일로 나의 행복이 될지도 모르겠다 :)


1. 김선오, '첫 시집' : 「미래로의 회귀」

 

 

 

   -  첫번째 에세이였던 김선오 시인의 '미래로의 회귀'를 읽으며,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 그리고 김선오 시인의 세계를 지나 나는 '나'를 이루는 세계를 떠올렸다.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이루는 세계는 바로 '책'('독서')에 있다. 만 이십 구년 10개월을 독서가로 살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나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지니기도 하고, 나도 내가 전공분야에 대해 쌓아온 문학과 심리학에 대한 지식으로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김선오 시인의 에세이 본문 중 마지막 문장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언젠가 도서관 책장 한 자리에 나의 이름이 담긴 '나의 첫 책'이 출간되겠지. 그리고 먼 미래에 어느 누군가가 내 책을 읽고는 또다른 독서 중독자로 성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담은 글을 내리라는 꿈을 꾸겠지.......   

 

 


 

 

 


 

2. 유희경, '첫 시집' : 「마른나무인간의 시절」

 

 

 

 - 두번째로 접한 에세이는 유희경 시인의 글이었다. 시인은 '첫 시집'을 출간한 이후 , '마른나무인간의 시절'을 보냈다고 표현한다. '첫 시집'을 내본 적이 없는 일개 독자로서는 그 고독과 우울의 깊이가 어느정도까지 내려갈는지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시를 포함해 작가들이 자신의 책을 내는 과정에는 작가가 반드시 담고싶었던 자기 내면의 본질이 출판사나 편집자, 혹은 외부의 여러 사정에 의해 잘려나가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시집을 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타협이나 절충의 의미려나....싶은데, 사실 '첫 시집'을 내는 시인 뿐 아니라 대부분 많은 이들의 처음도 '마른나무 인간의 시절'을 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논문, 첫 그림, 첫 직장... 많은 처음들 이후에 부서지고 깨지고 가라앉기도 하는 나약한 존재들인 우리 주변에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마른나무 인간의 시절을 잘 버티어 낼 수 있으리라.

 

 


 

 

 


 

3. 김복희, '첫 시집' : 「나를 닮았지만 나는 아닌」

 

 

- 세 번째로 받아 본 김복희 시인의 에세이. ' 첫 시집'을 주제로 하는 시인의 글이 참으로 담백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시인의 첫 시집, 소설가의 첫 소설, 교사의 첫 제자들(첫 담임)........ 누구에게나 '처음'이란, 그 '첫'이란 나의 - 내가 지은 그것이면서도 '나'는 아닌 무언가가 안ㄹ까? 내게는(내 경우에는) 첫 학위논문이 이에 해당할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너무 이질적인 것만 같게 느껴지는 내 논문....

- 김복희 시인의 시를 읽고싶어졌다.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의 내면이 깃든 그 첫 시집 속 시는 무엇을 담아내고 있을까.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떠할까. 시집을 사 볼까 싶다. 그리고 문득 내가 과거에 썼던, 그리고 앞으로 써 나갈 글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질 지 궁금하다.

 

 


 

 

 


 

 

by papyros 2021. 11. 1. 00:45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30주년 기념판

RHK, 2018. (자기계발, 에세이)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독서 카페 리뷰어스 클럽 http://cafe.naver.com/jhcomm/13279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알에이치코리아(RHK)'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RHK 측에 감사드립니다.



 

(네이버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642251)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내가 배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으라.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리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밖에서는 차를 조심하고 옆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움직이라.

경이로움을 느끼라. 스티로폼컵에 든 작은 씨앗을 기억하라. 뿌리가 나고 잎이 자라지만 아무도 어떻게 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씨앗과 같다.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림책 딕과 제인Dick&Jane, 태어나서 처음 배운 단어, 모든 단어 중 가장 의미 있는 단어인 보다Look’를 기억하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

 

 초등학생인가 중학생 즈음으로 기억하는 어느 여름날, 가족 휴가로 간 어느 콘도에서인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초반의 청소년이던 내게는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가 아닌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무슨 말이야.’ 언뜻 책의 제목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며 책장을 펼쳐 일독하기 시작했으나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행복감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독서 관련 카페에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제목.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보았는데, 기분 탓일까? 싶었으나 3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된 도서라는 소개 글을 읽고 10여 년 전 어느 여름의 행복감을, 20대 후반의 성인이 된 지금 다시금 마주하고 싶었고,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유년기에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책의 제목을 비유적으로 느꼈을 때와는 달리 2018,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20대 후반의 성인 독자인 내게 책의 제목, 그리고 저자의 경험은 비유적이라기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워 온 학문에 관한 깊은 지식들이 분명 원하는 분야에의 자격을 갖추고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 속에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간절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저자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듯이 가치관이라는 삶의 지혜였기 때문이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가치관과 신념들이 드러나 있는 1: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수많은 타인들에 대해 다룬 2: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천사들, 그리고 마지막 3: 나는 나의 삶을 다시 살 것이다에서는 저자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미래에 대해 제시된다. 책의 이러한 구성처럼, 이 책은 저자가 실천하고 소망하고 있는 가치가 자신과 타인에서 나아가 세상으로까지 확대되는데, 즉 한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접하고 깨달은 많은 가치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목사 바텐더><도움받을 자격>이라는 에피소드였다. 개신교의 목사인 저자가 신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학비를 마련하고자 바텐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꾸중하긴 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격려하는 대학 교수들의 태도. 그리고 장학금을 수령하기 위해 학비사용 계획안을 제출 하는 저자에게 즐거움을 추구하고 타인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예산을 계획하지 않는 학생에게 어떻게 장학금을 주느냐며 반문하는 학장의 가르침은 저자 뿐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까지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 말을 잘 듣게. 자네 예산에는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 하나도 없네. , , 음악, 심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돈조차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돈이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자네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네.”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항목이라고!

나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는다고!

세 번째 가르침이었다. 또 배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62-63.

 

 

 

 성공하기 위해, ‘빨리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 보다는 마음 한켠에 여유와 행복의 자리를 비워두며 타인과 그 행복을, 즐거움을 나누는 삶이 더욱 귀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급함과 불안에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그 당연한 가치를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2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인어들> 이었다. 거인, 마법사, 난쟁이 중 한 캐릭터를 정해 줄을 서야 하는 놀이에서 자신은 인어인데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느냐는 어린 아이의 물음.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모두 내가 생각하고 그리는 틀 안에 넣고 분류해 이에 맞추고자 하는 획일화된 교육, 이질적인 타인을 수용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사회현실. 최근 읽었던 표명희 작가님의 어느 날, 난민이라는 책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소외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개개인의 개성과 다양화된 배경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세상을 운용해 수많은 난민들을 양산시키고 있지 않는가.

 

 

 

 

 

인어는 어디에 서요?

인어는 어디에 서냐고?”

긴 침묵이 흘렀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중략)

 여자아이는 거인이나 마법사나 난쟁이 어느 것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만의 카테고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인어였다. 놀이에서 빠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게임에서 진 아이들의 줄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인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놀이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신의 존엄성이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는 당연히 인어가 설 자리가 있으며, 내가 그 자리를 안다고 믿었다.

글쎄…….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나? 인어들, 남과 다른 사람들,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 이미 만들어진 상자와 비둘기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 서야 하나?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학교와 나라와 세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26-127.

 

 

 책을 모두 완독하고, 책장을 덮을 무렵 나는 이 책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를 독자들 개개인이 진정성 있는 성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 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저자가 <받은 만큼 돌려주기>라는 챕터에서도 기술하고 있으며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 Pay It Forward>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언뜻 자그마하게 보일 수 있는 누군가의 선행이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순환될 수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나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나 이웃들을 차치하더라도, 나와 그 어떤 관련이 없어 보이는 타인(他人), 심지어 이방인(異邦人)으로 여겨지는 이, 약자(弱者), 심지어 인류를 넘어 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로부터 배울 점이 있고 늘 조금씩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타인, 타 생명에 대한 사랑은 성인기에 이르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늘 배워오는 가치이지만, 곱씹어 올라가면 유년 시절부터 강조되어왔고 편견과 선입견 없이 타인과 대상을 대하던 시기가 유년기가 아니었던가.

 

메논은 그 빚을 결코 있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선물도 15루피도 잊지 않았다. 메논이 죽기 전날에 어떤 거지가 와서 신발이 없어 발이 상처투성이니 샌들 살 돈을 달라고 구걸했다. 메논은 딸에게 지갑에서 15루피를 꺼내어 주라고 했다. 그것이 메논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한테 들었다.

(중략)

 그 사람의 아버지는 메논의 보좌관이었고, 메논에게 자선을 배웠으며, 자신의 배움을 아들에게도 물려주었다. 아들은 낯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름 모를 어느 시크교도에서 인도 공무원에게로, 그의 보좌관에게로, 보좌관의 아들에게로, 그리고 절망에 빠진 백인 외국인인 나에게로 자비가 베풀어진 것이다. 그 선물은 큰돈이 아니었고, 나 또한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선물은 돈의 가치를 떠나 내게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주고, 나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81-82.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모퉁이 식품점의 남자, 자동차 정비소의 수리공, 주치의, 선생님, 이웃, 동료들이 그렇다. 항상 거기에있는 좋은 사람들, 작은 일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매일 우리를 가르쳐주고 축복해주고 용기 내게 해주고 지지해주며,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을 역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에게서 배우고 뭔가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누가 그러는지 우리는 결코 모른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88.

 

 

 

 

 로버트 폴검의 이 에세이가 3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아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추구할 만한 항존(恒存)적인 가치 타인과 생명에 대한 사랑, 늘 누군가로부터 빚지며 사는 존재라는 사실, 공정성, 삶에 대한 경이로움 등 는 거창한 소설이나 동화,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가까운 곳의 이웃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마음 따뜻하면서도 타성(惰性)을 깨뜨릴 수 있는 깊고도 날카로운 울림은 바로 우리가 직접 발견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사실을.

로버트 풀검이 그리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내면의 추억에 자리하는 조부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는 할아버지로서의 이상향(理想鄕)이기도 한 것처럼, 소소하게 보이는 일상 속의 작은 이야기들이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한편 미래를 그려내게 하고 대를 걸쳐 전해줄 수 있는 가치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다 널리, 오래 전해질 때에 한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으로 작용하리라 믿으며,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전해 준 저자 로버트 풀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나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청춘기에서 벗어나 기성세대로 나아갈 지인데, 이 책을 읽어주며 새로운 청춘들과 소통하고 내 경험을 전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 간다. 할아버지와 나는 밝은 람바 사기타리 별과 겹칠 정도로 가까워진 금성과 목성, 서남쪽 하늘에서 달리는 큰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본다. 머리 바로 위에는 뿌연 안개 가튼 안드로메다 성운이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은하수도 보인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할아버지는 1910년에 본 헬리혜성 이야기를 해준다. 그해 5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할아버지는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한 일을 목격했다. 세상은 헬리혜성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과 두려움을 느끼며 공포에 떠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할아버지는 헬리혜성이 다시 올 때 자신을 대신해서 꼭 보겠다는 약속을 하란다. 나는 약속한다.

새벽이 올 때쯤이면 머리 위 하늘을 지배하는 위대한 사냥꾼 오리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텔게우스와 벨라트릭스, 오리온 허리 부분의 성운,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를 향해 있는 발 부분의 리겔과 사이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오랫동안 똑같은 별들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서 지구와 마찬가지로 저 하늘 어딘가에도 생명체가 있고, 어떻게 생겼든 간에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서 보면 우리 지구도 빛날까? 우리 지구도 그곳에 사는 존재들이 상상력과 경이로움으로 만들어낸 밤하늘 별자리의 일부분일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어떤 것,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어떤 것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면 가끔씩 나가서 하늘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잠자리에 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5-196.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하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하다.

꿈은 사실보다 힘이 있다.

희망은 늘 경험을 이긴다.

웃음만이 슬픔을 치유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9.

 

 

 

 

 

 

by papyros 2018. 6. 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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