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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30 [청춘의책탑] 호프 자런, 『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독립북클러버 16기- 청춘의책탑] 11회차(16기 2회차)-「랩 걸(Lab Girl)」 리뷰
2021.2.14. 日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11회차 리뷰(16기 2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3년 전쯤(2018년) 이었던가, 가장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던 <알쓸신잡> 시즌2 10회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책에 대한 화두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 중 유시민 작가님께서 ‘딸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향으로 호프 자런의 이 책, 『랩 걸 (Lab Girl)』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나도 전자책을 진즉 구입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3년 간 『랩 걸 (Lab Girl)』은 내게 있어서 수많은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을 한켠에 지닌 채,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보다.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친구들 모두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의 반열에 『랩 걸 (Lab Girl)』이 자리해 있었고, 그렇게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덕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완독할 수 있었다.
‘과학’에 대한 에세이라길래 기실 조금 걱정했는데 책은 매우 두꺼운 장편 에세이(7.8인치 전자책 ‘페이퍼프로’ 기준으로도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인 것 치고는 제법 가독성 있었고 저자의 삶을 함께 지나가는 중에 생각할 거리도, 삶에 대한 여러 문장들도 다수 등장했다.
특히 저자의 삶에 가장 큰 양분이 되어 준 것은 바로 부친의 실험실을 놀이터삼아 유년기를 보낸 일이다. 또한 학위과정을 마치고자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한 어머니의 모습도 호프 자런에게는 모델링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자랐다. 화학 실험도구가 늘어서 있는 실험대에 키가 닿지 않을 때는 그 밑에서 놀았고, 키가 큰 다음에는 실험대에서 놀았다. 아버지는 미네소타 시골 한가운데에 있는 전문대학에 자리한 실험실에서 물리학과 지구과학 입문을 42년에 맞먹는 시간 동안 가르쳤다. 아버지는 자신의 실험실을 사랑했고, 나와 오빠들도 그곳을 사랑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아버지랑 함께 실험실에 갈 때면 언제든 그 장비들을 가지고 놀 수가 있었다. 그것들을 다 꺼내달라고 부탁하면 아버지는 절대로, 한 번도 안된다고 거절하지 않으셨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해마다 5월제(유럽 각지에서 5월 1일에 하는 봄 축제—옮긴이) 날이 되면 엄마와 나는 땅에 씨를 하나하나 심었고, 일주일 후 싹을 틔우지 못한 것들을 파내고 새 씨앗을 다시 심었다. 6월 말이 되면 모든 작물이 왕성하게 자라고 주변이 모두 초록빛으로 둘러싸여서, 그렇지 않은 시절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7월이 되면 이 모든 식물들이 흘리는 땀으로 공기가 가득 차서 그 습기 때문에 공중을 가로지르는 전선들이 윙윙거렸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엄마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빠와 결혼을 했고, 네 아이를 낳은 후 20년을 자녀 양육에 전념했다. 막내가 유치원에 갈 무렵, 학사 학위를 따겠다는 집념을 불태우며 엄마는 미네소타 대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엄마는 통신 과정밖에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문학을 택했다. 내 일과의 대부분을 엄마와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 공부에 참여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유치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반 아이들보다 수준이 높은 책을 읽고, ‘상냥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러나 호프 자런의 유년시절부터 뿌리깊게 자리해 온 여성에 대한 성 차별은 그녀의 삶에서 너무나 크나큰 ‘장벽’으로 느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과학계’(이공계)에서 여성으로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해왔으며 심지를 굳건히 했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작년에 관람한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도 여성과학자로서 그녀가 경험한 고군분투를 작품을 통해 생생히 느낀 바 있었다. 소르본대학에 입학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험실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고 화장실도 없었기에 분투해야만 했고, 어느정도 업적을 거둔 후에도 자녀들의 육아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마리 퀴리. 19세기를 살았던 ‘마리 퀴리’의 시대가 그러했을지인데 20세기를 살아간 ‘호프 자런’의 삶도 마리 퀴리의 시대와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19세기가 아닌 20세기였기에 호프 자런이 ‘여성 연구자’로서 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녀에게는 ‘유리천장’이 존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여긴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게 무엇이든 남자아이보다는 못한 건 확실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여자아이인 척하는 동안 나는 솜씨 좋게 몸단장을 하고 다른 여자아이들과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관해 수다를 떨었다. 줄넘기를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고, 내 옷을 스스로 꿰맬 수도 있었으며 누구든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처음부터 모두 내 손으로, 그것도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늦은 저녁이 되면 나는 아빠와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건물들은 텅 비어 있었지만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서 나는 어린 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내 경우는 반대 방향의 변신이긴 했지만.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 교수들은 내가 여자아이였음에도 나를 받아들였고, 내가 이미 의심하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해줬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한 번 나는 아빠의 실험실에서처럼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의 근본은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번도 살아 있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없었다. 여성 과학자로서 나는 여전히 그다지 평범하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 번도 다른 것이었던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는 세 개의 실험실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완성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가 이야기를 끝내고 “고마워” 하고 말하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했다. 소개받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기 때문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이제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들은 나도 그들과 동등한 학자로서 이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연구 자금을 댄 기관에서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의 눈에 나는 괴상한 사람을 달고 와서 20킬로그램 정도의 짐도 들지 못하는 지저분한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그 이미지를 없애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인정받는 자기상에 비중을 두고 삶을 살아가지 않았나 싶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비중에 둔다면 여러 한계와 장벽이 존재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비중을 둔다면 연구자로서 실험을 설계하고 변인을 통제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등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 계획에 따라 세상을 탐구할 수 있으며 사회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아버지와 보낸 유년시절에서 느낀 행복감과 연결되어 었다.
실험실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날에 가는 곳이다. 세상 모든 곳이 문을 닫는 휴일에도 내 실험실은 열려 있다. 내 실험실은 도피처이자 망명처이다. 그곳은 직업상 전투를 벌이다가 후퇴해서 몸을 쉬는 곳이자, 내 상처를 돌아보고 갑옷을 보수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자라난 내가 진정으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20년을 실험실에서 일하는 동안 내 안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자라났다. 내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자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진정한 과학자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불안한 첫걸음을 떼서 오솔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오솔길은 도로가 되고, 그 도로는 고속도로가 되고, 그 고속도로는 언젠가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성장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내가 확실히 안 유일한 사실은 언젠가 내 실험실을 갖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한편, 비단 여성과학자로서의 한계 뿐 아니라 실험실의 책임자로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로서의 어려움도 호프 자런의 이 에세이에 여실없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미국사회도 연구자에게 ‘연구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임이 강조되며, ‘빌’이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이라 할지라도 그의 계약과 보험 등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지점이 그러하다. 어쩌면 호프 자런은 이 에세이를 통해 ‘과학계’를 비롯한 연구 환경에 솔직하고도 따끔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연구자이자 가족과도 같은 깊은 친구(마치 전우戰友와도 같은) ‘빌’과 연대하며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낸다. 그리고 이는 단지 호프 자런 그녀의 안위安慰나 명예名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대 연구자들을 위한 호프 자런의 기꺼운 걸음이기도 했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빌은 실험실에 필요한 연구 자금을 말하고 있었다. 연방 정부에서 받은 계약이 몇 개 있어서 2016년 여름까지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실험실을 접어야 할 위험이 여전히 있었다. 환경 과학에 대한 연구 기금은 매년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종신 계약을 맺은 상태지만 빌은 그렇지 않다. 종신 계약은 교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과학자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과학자가 장기적 직업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기금을 받지 못하면 나도 그만두겠다고 위협하는 것뿐이다. 아마 그러면 우리 둘 다 거리로 나앉게 되겠지만 말이다. 연구 과학자의 직업을 가진 우리는 절대, 영원히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호프 자런에게 더 경의를 표하고 싶으며 그녀가 부딪혀 온 과정에 놀라왔던 점은 결혼 이후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내담자로서 호프 자런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매우 불안해한다. 사실 이는 저자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이다. ‘경력단절’에 이어 아이를 위해 ‘내 삶’ 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우리 사회의 현재에 있어서도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산모로서, 임신 25주차까지 항정신성 약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공포로 다가왔을지 –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라 여긴다.
그러나 호프 자런은 해냈고,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해낸다. 어쩌면 그것이 가능했던 건 저자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뿌리깊은 사랑이 저자의 내면 한 가운데 양분이 되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나는 2002년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붙잡고 도대체 왜,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묻고 또 묻지만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필요한 약을 먹어도 괜찮은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날짜를 세는 것밖애 없다. 임신 26주차라는 것은 마술 같은 날이다. 그때부터 나는 임신 7개월에 접어들고, 그때부터는 산모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항정신성 의약품을 사용해도 된다고 미국식약청이 승인했기 때문이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때 학과장 월터가 걸어들어왔고 나는 상관을 만난 군인처럼 자동으로 일어섰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받기 직전이던 나는 임신에 동반되는 어떤 육체적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도 내가 행복하고 기대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쇼핑하고, 아기 방을 꾸미고, 배 안의 아기에게 사랑을 담아 말을 건네면서, 사랑의 결실을 기뻐하고, 내 자궁이 그득 찼다는 사실을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슬퍼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신비로운 정체에 대해 꿈을 꿔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 아기가 남자아이고, 그의 아빠처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는 혼란스럽게 말을 더듬는다. “전 모유 수유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말은,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약을 먹어야 하거나 그러면-”
“괜찮아요.” 의사가 내 말을 가로막는다. “아기는 조제분유로도 잘 자랄 거예요. 전 그 걱정은 하지 않아요.”
아기에 대한 내 첫 번째 실패를 이토록 너그럽고도 쉽게 받아들이는 의사의 용서가 내 심장을 관통한다.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희망이 꿈틀거린다. 어쩌면 이 여자는 내게 관심과 애정이 있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 차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무서워요.” 내가 말한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것이라고 늘 확신해왔다.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외할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삼촌이나 이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 죽지 않고 성장한 삼촌, 이모만 해도 열 명이 넘었지만 말이다. ‘Diskutere fortiden gir ingenting(과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실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을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와 아들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삶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온 나로서는 정말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귀중한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경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 하나하나는 내가 그토록 절실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모든 입맞춤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이 말을 이제는 할 수 있다)지만 오직 내가 기대했던 엄마 노릇의 관념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킨 후에야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딸에 대해서는? 나는 이 감정이 딸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딸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계혈통은 한 세대를 건너뛰어야 다시 이런 어려운 관계가 반복되는 것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손녀를 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내 욕심은 늘 너무 앞서 나가곤 한다. 내 계산에 따르면 이렇게 기다리는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죽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특히 이 혈통이 건너뛰는 것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럼에도 햇살이 눈부신 오늘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병을 띄워 보내고 싶다. 누군가 기억해주길. 누군가 언젠가 내 손녀를 찾아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부엌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창밖을 보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는 결정을 내리느라 바빠서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도, 창틀에 쌓인 먼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결국 할머니는 수십 년 먼저 손녀를 사랑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햇빛을 받고 앉아서 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꿈꿨다고 누군가가 말해줄 수 있기를.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아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라고요? 처음에는 ‘그’라고 했잖아요. 호랑이는 남자예요.”
“호랑이가 여자면 왜 안 되지?” 내가 물었다.
아들은 너무도 뻔한 사실을 내게 설명했다.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몇 초 후 물었다. “오늘 밤에도 실험실에 갈 거예요?”
“응, 하지만 네가 깨기 전에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빠가 바로 방 밖에 있고, 네가 자는 동안 코코가 너를 지켜줄 거야. 이 집은 널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나는 아이를 재우며 날마다 하는 말을 반복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 – 옮긴이)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온실 안에서 빌과 내가 함께 앉아있던 그날, 우리는 희망과 목표에 대해서, 그리고 식물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한 것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 얼마 가지 안아 우리는 서로에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20년에 걸쳐 벌어졌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호프 자런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즉 개인마다 고유한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는 셈인데, 나는 호프 자런의 자기서사가 문학치료학적 이론에 근거하면 ‘부모서사’와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서사는 스승이나 부모 등의 위치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위치에서, 양육을 통해 자녀의 성장과 독립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호프 자런이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한 실험실을 양분 삼아, 그리고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을 발판삼아 여러 장벽을 넘어 성장했듯이, 그녀도 그녀의 아들에게 양분이 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시민 작가님이 이 책을 자신의 딸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에 있지 않을까. 과학자(연구자)로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한계 극복이라는 호프 자런의 삶에 주요한 키워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양분 삼아 네 길을 올곧이 걸어가고 이루어 나가라고.
그런 점에서 나도 이 책을 통해 깊은 위로를 받는다. 또한 나는 나의 청년기를 어떤 모습으로 보낼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여러 한계를 어떻게 넘어 나갈지 깊이 고민하며 앞으로의 삶을 재조망해보게 된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 호프 자런, 「1부.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에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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