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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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E-book cafe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RHK(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RHK측에 감사드립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 올 거야.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8쪽.
“레일라는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적어도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너희들의 깨끗한 마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야. 만약 레일라가 살아 있다면 도와줘.”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9쪽.
마치 한 편의 시(詩)와 같이 서정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는 미야모토 테루의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구조 안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먼저 접했는데, 알고보니 그 영화의 원작소설 작가가 바로 미야모토 테루였기에 작품의 서정성이나 서사 구조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일본 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서정적인 소설이라는 소개와는 달리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마주하게 되는 것은 ‘기쿠에 올컷’이라는 한 여성의 죽음이다. 그녀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미망인으로, 남편인 이안 올컷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이 남편 대에서 성공을 거두었기에 상당한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전국 일주 중 벌어진 '기쿠에 올컷'의 죽음. 그리고 망자의 유산을 그녀의 조카인 ‘오바타 겐야’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원에서 유학하며 MBA과정을 마친 일본인 – 가 전부 상속하게 되어 오바타 겐야가 로스엔젤레스(LA)의 팔로스버디스반도로 건너가게 되면서 작품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기쿠에 올컷의 집 – 그 정원에서 겐야가 마주한 진실은, 백혈병으로 여섯 살의 나이에 죽은 줄만 알았던 사촌 레일라가 사실 유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비공식적인 기쿠에 올컷의 유언 마지막 줄에 따라서, 레일라를 찾아 유산의 70%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겐야에게 부과된다.
“‘그것’과는 아직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이라고 쓰여 있는 걸로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물건인가. 떨어질 수 없는 ‘물건’ ……. 멜리사는 레일라와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지. 그렇다면 그때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 그 정도의 여자아이가 떨어질 수 없는 ‘그것’이란 한정되지 않을까? 부모가 우격다짐하지 않고 느긋하게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그것’이라고 하면 인형이나 장난감, 이제 갓난아기가 아닌 유아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겠지.”
겐야는 니코가 교코 매클라우드의 편지에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낀 것인지, 딸 멜리사가 떨어질 수 없는 ‘그것’에만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이라……. 이 교코 매클라우드의 편지를 보면 원래 몬트리올에 살지는 않았군. 다른 나라에서 이주한 거야. 기쿠에 씨하고는 어디서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선가. 일본에서부터 친구인데 기쿠에 씨는 미국인과, 교코는 캐나다인과 결혼했지만 교우관계는 이어졌다. 하지만 기쿠에 씨는 그것을 남편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어떻게든 남편에게 숨기고 싶었다. 그건 왜일까?”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152-153쪽.
레일라를 찾기 위해 오바타 겐야가 기쿠에 올컷이 만약을 위해 남겨둔 – 마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것만 같은 – 힌트들을 찾아내고, 사립탐정인 ‘니콜라이 벨로셀스키’(니코)가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히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이 협력하여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밝혀지는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쿠에 올컷이 유괴사건에 가담했다는 것. 즉, 딸을 유괴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다는 것. 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독자들은 “왜?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딸을?”이라는 질문에 당면하게 된다. 그녀가 ‘유괴’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일라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야 했던 것은, 마트 CCTV안에서 자신에게 타월을 흔드는 딸 레일라의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학생을 만났나요?”
흑인 경비원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 예.. 건방진 꼬맹이였어요. 신분증을 보여달라지 뭐예요.”
경비원은 웃으며,
“학생의 요구는 정당한 겁니다.”
하고 말했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07쪽.
언제였더라. 사격 클럽의 이사를 맡고 있다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가,
“매년 미국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총알이 들어있지 않은 총으로 죽는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주위의 어른들도 총알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는 총으로 놀다가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21쪽.
“벽이나 창에 매달린 화분의 숫자 말이네. 거베라 화분이 서른세 개야. 레일라는 서른세 살이지. 우연일까?”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260쪽.
이후 작품의 후반부에서 겐야가 교코와 케빈 부부를 만나며 밝혀지는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왜 어머니가 직접 유괴사건을 조작해 딸을 떠나보내야만 했나’ 하는 물음에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드디어 풀리는 지점. 소설에서만 나타나는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대부분의 성폭력이 친족 간에 일어난다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최근 읽었던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소설 『베어타운』에서도 하키단 단장의 딸 마야가 유소년팀 하키팀 유망주인 청소년 케빈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공동체의 시선과 싸워나가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사건 이후 공동체 안에서 외롭고 처절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족들이 추구하는 가치인 ‘사랑’ 안에서 부모님의 보호 속에 사건을 함께 극복해 나가면서 결국 베어타운에 남게 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레일라는 결국 어머니를 떠나 다른 가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고, (그녀의 친부모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레일라와 마야의 삶은 (본래의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마야와 레일라 둘 모두,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모성애’에 의해 ‘보호’받았으므로.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삶은 어떤 어린아이에게나 당연한 환경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쿠에 씨는 굉장한 정신력의 소유자네. 감탄할 수밖에 없어. 27년이나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불안이나 공포와 싸우며 살아온 거니까. 몬트리올대학의 졸업식 식장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멜리사 매클라우드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쿠에 씨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401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부터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손에 맡겨 자신을 잊게 해야만 했던, 그리고 범죄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평생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던 기쿠에 올컷의 비극적인 상황. 딸을 보호해야 하는 그녀의 깊은 애정이 아니었다면, 레일라는 지금의 삶처럼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기쿠에 올컷이 진정으로 바라고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야 말로 딸에 대한 사랑과 딸의 행복이었기에, 작품 말미에 겐야가 그려낸 27년 전 기쿠에 올컷과 레일라의 모습은 따뜻하고도 슬픈 느낌이 묻어난다. 레일라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기꺼이 감수한 어머니 기쿠에 올컷의 희생이, 마치 자신의 진주알을 기꺼이 내어주는 어미조개 같기에. 그만큼 아름답고도 서린 사랑이기에.
겐야는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오바타가의 능소화보다 색이 짙고 꽃잎도 큰 올컷가의 능소화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중정의 잔디밭 위에 27년 전 서른여섯 살의 기쿠에 고모를 두었다. 겐야에게는 그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기쿠에 고모는 길이가 긴 주름치마를 입고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겐야가 잠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어디선가 어린 레일라가 달려와 엄마에게 안겼다. 기쿠에 고모는 깔깔 웃음소리를 내며 레일라와 함께 잔디밭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달빛이 두 사람의 몸에 금색으로 선을 둘렀다.
레일라는 엄마에게 안아달라며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나서 꽃밭으로 달려가 꽃들을 가슴에 안을 만큼 안아서는 강아지 같은 걸음걸이로 돌아와 엄마에게 쏟았다.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405쪽.
추리적(미스테리적) 서사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가치 있었던 이유는, 기쿠에 올컷이 그녀의 조카에게 전해주고자 한 - 마치 퍼즐과도 같은 레일라에 대한 ‘비밀’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한편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지닌 내면의 깊은 곳에 순수한 ‘사랑’과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한 개개인의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겐야가 품은 ‘제시카’에 대한 사랑, 탐정 니코와 함께하는 터본스테이크와 스프가 마련된 식사자리 등의 소박한 행복이 서사 속에 자리하는 것은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삶의 그러한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중정의 ‘풀꽃’이라는 신비스러운 존재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한편 ‘행복’ 소망하며 진실을 찾아나가는 서정성. 양측의 무게 추를 맞추는 사이 기쿠에 올컷의 내면을 독자 자신에게로 내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 작품은 마무리된다.
비극과 행복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 중정의 꽃들, 기쿠에 올컷의 결심, 겐야와 니코의 추리 –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만 같은 작품이었다.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장 스크린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기쿠에 씨는 이언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나서 레일라가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 밤에는 정원의 꽃밭으로 안고 나갔어요.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무리 무서운 일이나 슬픈 일이 일어나도 엄마가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레일라는 그냥 안심하고 있으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기쿠에 씨는 레일라가 얼마나 영리하고, 마음씨가 얼마나 고우며, 모두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아이인지를 몇 번이고 말해주었대요.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다들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도록 이 꽃밭에 부탁해보자, 꽃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어.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레일라의 마음과 꽃, 풀, 나무의 마음은 말을 할 수 있어. 꽃도 풀도 나무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말해줄 거야. 레일라도 언젠가 꽃, 풀,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될 거고…….”
- 미야모토 테루,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RHK, 2018,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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