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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을 읽고

 

우리에게 확신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있다면, 이 세상의 학문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뚜렷하게 분별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보다 큰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사용하면 됩니다.’ (336.)

 

 

 1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면,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에서 그 중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신앙의 실천적 측면이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곧 신학과 철학의 양립 가능성 여부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특히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며 변증론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 주장하는 변증론자들과, ‘철학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신학의 시녀라고 주장하면서 이성을 경시한 반변증론자들을 중심으로 그 대립이 이어져 왔다.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쿠스 사이의 논쟁 또한 이 맥락에 서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신학과 철학, 즉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58.)라며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펼친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날카로운 이성의 도움을 받고자 한 아벨라르두스(86.)의 노력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 과정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회 내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이성신앙의 문제가 대두되어 왔으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고 하면서, 이성을 지닌 인간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이 이를 채워주고 완성시켜 주는 것이라 보았다. 즉 이성과 신앙은 하나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며 철학과 신학은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것임을 주지한 바 있다.(213-215.)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에 대한 교회의 인정 및 수용 문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학문적인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서로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점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들에 대해 이를 일방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수용할 만한 장점을 찾아 기존의 문제(단점)를 보완하며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회 내의 여러 입장 차이 - 가령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교회 내 보수와 진보 문제의 패러다임 에 대한 편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상대 당의 약점만을 찾으며 배척하고 밀어내려는 여러 정치인들, 다른 종교를 배격하고자 하는 일부 이단이나 극단주의자들, 그리고 나의 가치관이나 입장과 다르다고 하여 누군가를 배척하고 배격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시각이 전제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실천또한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세리와 죄인, 과부 등 소외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먼저 돌보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한 이들이 있는데 청빈, 정결, 순명을 강조하며 시토회를 창설한 로베르투스, 그리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소유를 경계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수도회 규칙으로 청빈정결을 몸소 실천하며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보여주신 그 본보기는 세속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귀족적인 수도회의 행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즉 신앙을 단지 학문적으로, 그리고 명예를 떨치는 데에 사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배움과 학습을 넘어서 행동과 실천을 추구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현재 사제들의 자발적 참여로 활발히 운영되는 프라도 사제회또한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을 통해 우리들 그리스도인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깨우칠 바가 있다면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신앙의 정반합正反合을 확립하고, 확립된 굳건한 신앙을 단지 지식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이라 여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것이 바로 건전한 양심이다. 마땅히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의 두 극단을 모두 피하고 이성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통해 건전한 양심을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의식을 통감하고 교회 내에서 자성과 실천을 주도하시는 등 가장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분이 바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바로 현 프랑치스코 교황님이 아닐까 싶다. 교황님께서 보이시는 모범은 주교, 사제, 수도자, 심지어 평신도까지도 감화시키고 있다. 특히 626(2016)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라는 현재 교황명에 담긴 그 의의 교회 내의 과오를 반성하고, 현안을 검토하며 필요하다면 수용하며, 가치를 지향하고 몸소 실천하는 노력-를 상기해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아시아 주교단과의 만남

by papyros 2016. 6. 27. 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