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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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
- 채샘, 「4부」 서문,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분홍빛이 감돌아 마치 힐링을 줄 것만 같은 에세이로 보이는 이 책은, 표지와는 달리 결코 가볍게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는 아니다.
문체는 가벼우나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닌 이유는 바로 저자가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서 경험한 내용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아직 임상경험도 상담장면에서의 상담 경험도 이제 겨우 한 발 내딛은 내게 도박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도박중독자의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정서적 문제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120쪽에도 약술하고 있듯이 도박장애(Gambling Disorder)는 DSM-5 편람 상 물질사용 및 중독성 장애(Substance Use and Addictive Disorder)의 아형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진단기준은 아래와 같다.
[DSM-5의 도박장애 진단기준]
4개 이상= 도박장애, 2~3개=준임상 도박장애
(4~5개: 경증 Mild, 6~7개: 중등도 Moderate, 8~9개: 중증 Severe)
A. 지난 12개월 도안 다음 중 네 개(또는 그 이상) 항목에 해당하는 도박행동이 비적응적인 성격을 띠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1. 집착(Preoccupation with Gambling): 지난 도박의 좋은 기억, 도박계획, 도박자금 마련 등에 집착하여 일상생활이 곤란해진다.
2. 내성(Tolerance): 원하는 흥분을 위해 판돈을 올릴 필요성을 느낌.
3. 통제력의 상실(Loss of control): 도박을 줄이거나 끊으려는 노력의 반복적 실패
4. 금단증상(Withdrawal): 도박을 줄이거나 끊으려 할 때 초조, 안절부절, 성마름
5. 회피(Escape): 문제나 나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함
6. 추격매수(Chasing):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도박함
7. 거짓말(Lying):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도박을 숨김
8. 대인관계, 일 등에 부정적인 결과(Negative consequences): 관계손상, 가족 및 사회관계 직업, 학업 등 위태, 상실
9. 구조요청(Bailout): 도박으로 인한 재정문제로 도움 요청.
B. 도박행동이 조증삽화에 의하지 않는다.(조증의 증상으로 도박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조증삽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12개월 이상의 지속성을 지니고 도박에 집착하며 도박에 대한 통제력(조절능력)을 상실, 금단증상을 겪고, 재정문제로 인해 주변인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주요 증상들이 4개 이상이라면 임상심리사들에 의해 도박장애로 진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평에서 이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싶다. 심리학 전공자이며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내가 임상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자가 들려주는 그동안의 분투와 삶에 깊이 공감하며 몰입해 책을 읽었다.
특히 저자는 도박중독을 겪는 가족이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쌍둥이오빠였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들었을 것 같다. 차라리 일반 형제나 자매라면 어느 정도 선에선 타인과 마찬가지로 심리정서적 분리가 가능하지만,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쌍둥이’이기에 이미 성장과정 상 공유해온 내면세계가 깊이 자리했기에 저자가 우울증과 무기력을 겪을 정도로 순교자형의 공동의존 형태까지 겪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조심히 생각해 본다.
저자 본인이 그녀의 쌍둥이오빠 현이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먼저 알게 되었기에 저자는 오빠와 부모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그녀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린다. 물론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는 저자의 오빠 본인에게도 그 고군분투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가고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바는 심리와 적응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한 것인지를 막론하고 모든 질병들은 그 질병을 겪는 환자 본인과 더불어 가족들이 그 치료의 여정을 함께 지난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한명의 도박중독으로 인해 저자는 우울과 무기력을 겪는가 하면 지난세월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헌신했으나 그 지난 삶을 모두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받는 어머니, 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자가 작품 중간 인용한 사티어의 이론처럼, 가족 구성원 한 명의 문제가 가족 전체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가족 치유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 버지니아 사티어(Virgina Satir)는 가족을 천장에 매달아 놓는 장난감 모빌에 비유했다. 모빌의 어느 한 부분이 움직이면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가족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175쪽.
때문에 질병을 앓는 환자 개인 뿐 아니라 환자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 역시 함께 치료받아야 할 대상임을 우리 사회가 더욱 깊이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저자가 개인상담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 스스로를 자책하는가 하면 오빠의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아야만 했던 것은 질병을 앓는 이의 가족도 치료의 주체라는 인식 없이 질병을 앓고 있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일반적인 사회의 요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가족이 고통을 넘어 치유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들이 도박중독은 ‘완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단(斷)도박’의 기간을 유지하는 것임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도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과잉기대도, 도박중독이 장애가 아니라고 여기며 ‘부정’하는 것도 아닌 도박장애의 실체와 그 문제를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했기에 그 치유의 여정이 열렸던 것이다.
특히 저자의 가족에게는 가족상담보다도 ‘자조집단’을 통한 집단상담이 더욱 유의미했는데, 어쩌면 중독 관련 자조집단 모임의 특성 상,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개방’을 통해 응집력을 지닌다는 점이 강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오빠 현뿐만 아니라 저자도 함께 모임에 꾸준히 나가는 것은 가족구성원들의 자조집단에서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평가하거나 염려,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경험을 한 이로서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전감을 통한 응집력의 형성이 중독치료에서 얼마나 중요한것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곱씹을 수 있었다. 비단 중독모임 뿐만 아니라 상실과 같은 외상경험(PTSD)을 겪은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중독문제가 없는 이들은 내 삶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오늘도 살아갑니다.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방법도 모르고 의지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중독자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문제를 벗어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가리켜 회복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삶이 회복중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내 삶이 회복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19쪽.
특히 이 에세이에서 나 자신에게 경종을 울린 부분은 후반부에 등장했는데, 사실 우리 모두 누구나 조금씩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자의 오빠 현처럼 도박중독이라는 진단이 꼭 내려지지 않더라도, 혹은 알콜중독이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어딘가에 중독되어있다. (나만 해도 설탕과 밀가루 중독이 아닌가......! ) 개인적으로, 다이어트 중이라 최대한 초콜릿과 같은 군것질거리와 밀가루와 튀김과 같은 음식을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나 또한 이러한 중독에서 멀어지기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꼭 진단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현대인은 누구나 대상이나 정도의 차이 있을뿐 다소간의 중독을 겪고 이는데 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회복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나가냐, 혹은 자신이 무언가에 중독되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그 삶에 안주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이 평이하고 편안한 어투로 쓰여져 가독성이 있었음에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저자 본인이 겪은 ‘외상과 치유의 경험’을 고백하고 깨달음을 나눔으로써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년 전, 출간 후 화제가 되었던 수 클리볼드의 저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은 바 있다. 그 책 또한 미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학생의 어머니가 총기난사 이후 그녀가 마주한 삶의 변화와 체득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인데, 수 클리볼드의 이 책도 그리고 저자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라는 이 책도.. 두 책은 모두 그들이 겪은 외상의 경험을 책의 제재로 잡아 다른 치유의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가 되고자 했던 동기가 내 유년시절 너머 외로움의 기억과 이를 보듬어주신 좋은 은사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듯,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변화와 성장의 동력이 되리라 여긴다.
때문에 이 책의 독자로서, 내가 지닐 수 있는 몫은 상담자(전문상담교사)로서 도박중독을 겪고있는 청소년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단(斷)도박을 위해 조력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책을 주변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 또한 내 삶의 체험과 상담교사로서의 경험들을 함께 나누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족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해 주고, 새로운 목표를 지니게 해 준 이 책의 저자분께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저자분과 그녀의 가족들의 삶을, 그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내가 신부이고 도박을 끊은 강박적 도박중독자라는 사실에 신께 감사한다. 내가 도박을 할 때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그 일들도 모두 내가 회복으로 가는 여정과 어떻게 다른 강박적 도박중독자들이 도박을 끊도록 도울 수 있는가를 배워가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자를 덮고 일어나 다시 백 신부님의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갔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타인에게 제공한 사람. 상처 입은 이들을 자신의 삶에 들이고, 그들이 삶의 닻을 내릴 수 있게 안전한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준 사람.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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