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2017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이다. 이번 스승의 날은 청소년 상담사 연수를 마친 후이기도 하고, 4월에 바빠 못 다 읽어 열심히 독서하고 있는 김탁환 선생님의 책,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를 읽는 중 「제주도에서 온 편지」 이야기에 나온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故 김초원 선생님과 故 이지혜 선생님의 희생이 순직으로 인정된 뜻깊은 날인 만큼 이 날을 기록하고 새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더욱 들었다.
김탁환 선생님의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그러나 세월호를 겪은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사실에 기초에 허구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분별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내용, 본질에 있음이다.
교육자이자 상담자를 목표로 하는 내게 있어서 이 작품... 본문에 옮겨 둔 내용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다. '사소함에 대한 예민성/관심'과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한편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교육자에게, 그리고 상담자에게 매우 중요한/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다.
비록 같은 반에 묶여있지만, 같은 학년으로, 같은 나이로 묶여 있지만 개별 학생(청소년들) 한명한명이 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들인 만큼 아이들 한명한명에 개별적인 집중과 경청을 해야 하며, 그들이 교사나 상담자에게 호소하는 내용- 주된 감정과 생각-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 다루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한쪽의 시각 뿐 아니라 열린 시각으로 내 앞에 있는 학생/청소년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성.. '여행하는 교사는 어떨까?'라는 한 문장에, 아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를 많이 느꼈다. 이를 위해선 가능한 많은 선입견을 제거하고 교사/상담자 자신이 많은 경험을 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
여행도 그렇고.. 일상 속에서 보다 많은 아이들을 가까운 자리에서 만나고 대화할 필요성...
세월호에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헌신하신 선생님들 , 그리고 나의 은사님들, 대학원 동기쌤 들에 비하면, 늘 많이 부족하여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많다. 그 중 故 유니나 선생님의 삶을 통해 늘 상기해야 할 부분으로 '사소함에 대한 예민성'과 '선입견 없이/충분한 기다림을 갖는 경청의 태도' 그리고 '열린 시야'를 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며 함양해 가도록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늘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전세계의 많은 교육자/상담자 그 모든 스승들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사람은 모두 한 그루 나무란다.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자라는 나무. 이 나무가 결코 저 나무가 될 수 없고, 저 나무가 또한 이 나무가 될 수 없지. 그 둘은 하나로 만드는 모든 시도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어왔어.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우리 둘!"
실망하는 학생들을 보며 이렇게 살짝 희망도 주셨지요.
"각각의 자리를 지키며 , 저마다의 가지를 뻗고 꽃과 열매를 맺지만, 땅속 깊은 곳에선 두 나무의 뿌리가 만나 인사 나누고 엉켜 평생을 보내기도 한단다. 내게 '사랑'은 땅속 뿌리들과 같아.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37쪽.
모든 교사가 학생의 삶에 영향을 끼치진 않겠지만, 어떤 교사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학생의 미래를 바꿔놓는답니다.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40쪽.
스물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많다면 많지만 적다면 매우 적은 나이에요. 제가 그 나이에 이르고 나니, 과연 제가 선생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선생님처럼 끝까지 배에 남아 학생을 찾아다녔을까 스스로 묻곤 한답니다. 이 차이가 학생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또한 두려웠어요.
지난 2월, 선생님의 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는 기차에서 두 가지 추측을 해보긴 했어요. 제 부족한 생각일 뿐이니, 혹시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는대도 속상해하진 마세요.
먼저 ‘사소함’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과 그 사소함들을 알아차리는 선생님만의 예민한 감각이 배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반을 맡고 겨우 한 달 반이 흘렀는데, 선생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취미와 장래희망은 물론이고, 식성과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멤버까지 아셨어요.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조금 다른 말투와 걸음걸이와 눈빛을 보내도, 선생님은 금방 알아차리셨죠. 그리고 표시나지 않게 그 학생에게 다가가선 관심을 드러내셨어요.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죠. 언제 한번 같이 네가 좋아하는 쫄면 먹으러 가자는 관심, 다음 달에 네가 좋아하는 보이그룹이 컴백한다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는 관심.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어요. 매일 이 교실에서 같은 공부를 반복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모두 다르다고. 완전히 일치하는 똑같은 반복은 이 세상에 없다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내일과 모레가 다른 법이라고. 그러니 누군가 반복이라서 시시하고, 반복이라서 관심 두지 않아도 잘 안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라고. 우리가 죽는 날까지, 완전히 겹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반복 속에서, 혹시 선생님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신 건 아닐까요. 15도 배가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45도 배가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 75도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없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여섯 글자라고 해도, 상황이 바뀌면 의미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배의 각도에 따라, 우리 반 객실의 유리창에 비친 바닷물의 출렁임과 색깔이 달라지듯이 15도는 객실을 벗어날 수 있어도 가만히 있는 것이지만, 45도가 넘어가면 가까스로 움직여야 나갈 수 있는 것이며, 75도를 넘겼을 땐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사소함은 사소하니까 흔히 지나치죠. 저는 지금도 그래요. 교사가 되고 나선, 학생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으려 하지만, 잠깐만 딴생각을 해도 사소함을 놓치거든요. 사소함에 대한 관심과 예민한 감각을 늘 열어두고 지내신 선생님이니까, 반복되지 않는 차이로부터 비롯된 오해나 갈등 혹은 화해를 문장으로 옮긴 작가들을 제게 권하기도 하신 선생님이니까, 어쩌면 그 긴박한 순간에 전문가들 판단보다 선생님이 느낀 사소한 그렇지만 중요한 차이를 움켜쥐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하고 또 확인하셨던 것이고요. 배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렇게 외쳤더라면, 더 많은 친구들이 살았을 거예요. 선원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해경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교사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저는 선생님까지 원망할 마음은 없어요. 선생님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바삐 경심이를 찾으며 3층 식당으로 향하기 직전, 제게 눈길을 주셨어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셨죠.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널 믿어!
또 하나는 선생님 부모님을 뵙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깨달은 거예요. 선생님이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적해주고 싶은 부분이 있더라도, 끝까지 이야기하도록 뒀다고 하셨어요. 혹시 잘못되거나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이야기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요. 중요한 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요.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며 그 말씀을 듣고 있자니, 한 달 반 동안 선생님과 나눈 특별한 오후가 떠올랐어요. 선생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학생은 종례 후 남으라고 하셨죠. 그리고 한 사람씩 차례차례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비밀 이야기라고 하면 단 둘이, 딴 사람이 들어도 상관없다고 하면 함께 둘러앉아서, 학생은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은 들으셨죠. 저도 두 번 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딱히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기보다는 도대체 선생님이 방과 후에 학생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했답니다. 친구들 이야긴 솔직히 지루했어요. 꼭 선생님 앞에서 할 이야기일까 고개를 젓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죠. 선생님은 무슨 이야기든 끝까지 들으셨어요.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거짓말을 했어요. 부모님은 제게 교사가 되라고 하시는데, 저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요. 교사란 직업은 너무 따분해 보인다고, 그래서 저는 여행가가 되고 싶다고요. 이야길 하면서도 선생님 표정을 계속 살폈어요. 혹시 선생님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거나 눈귀가 올라간다면, 그 순간 이야기를 중단하거나 방향을 틀었을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끝까지 듣고만 계셨어요.
그날 바로 의견을 주시진 않았어요.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안에 반드시 의견을 주시긴 하셨죠. 길지는 않지만 핵심을 찌르는 의견이었습니다. 제게도 열 줄 정도 문자를 주셨어요. 그중에서 제 가슴을 찌르는 문장은 이것이에요.
-여행하는 교사는 어떨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맡기 전에 일본과 스페인을 여행하셨더군요. 교사와 여행가를 대립시킨 제 한심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 대신 유쾌한 절충안을 제시하셨고요. 여행하는 교사,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교사를 그만두고 여행가의 길로 나설 수도 있겠죠. 혹시 선생님도 이런 미래를 그리신 건 아닌가요.
부모님이 단 한 번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막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제게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함께 생활하는 교사들도 천차만별이에요. 학생을 공평무사하게 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교사도 또한 인간이니까요. 상처를 치유하고 넘어서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어요. 가령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봄에 침몰선에서 탈출했고, 민아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을 그 배에서 잃었으며, 담임선생님과도 재회하지 못하는 상처를 평생 지닌 교사죠. 이런 참혹한 경험이 있는 교사와 없는 교사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사소함에 대한 관심과 그 사소한 차이를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능력, 그리고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라도 거리낌 없이 하는 성격. 이것들을 선생님은 지니셨던 것입니다.
(중략)
언젠가 선생님이 그러셨죠. 편지를 손으로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 편지를 직접 가져가 단 한사람의 귀에 대고 가만히 읽어주는 것 또한 무척 특별하다고.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행복을 잊기 힘들다고.
스물아홉 살 여교사의 모습을 제게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또 그러셨죠. 누군가에겐 ‘고맙습니다’란 말이 ‘사랑합니다’란 말보다 더 사랑스러운 법이라고. 제겐 봄꽃과 같은 선생님이 그래요. 정말 고맙습니다.
2025년 4월 16일
제주에서
윤현진 올림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49쪽-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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