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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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아시아의 마지막 보석이라 불리는 미얀마의 작은 도시 인레에는 두 명의 피셔맨이 있다. 머니 피셔맨과 노 머니 피셔맨.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한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노력과 노동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여행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삶을 잠시나마 엿보는 일. 그 순간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른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169.

 

 조아연 작가의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이 책은 이번 독립출판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선택한 도서들 중 그 어떤도서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여행에세이였다. 기실 코로나로 인해 여행도 마음 편히 가지 못하는 시대에, 대리만족의 욕구때문일까, 여행에세이로나마 간접적으로 여행을 하고싶은 욕구가 큰 요즈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예상외로 마음에 와 박는 귀한 문장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20대의 끝을 불과 1개월 여 남겨두고 있는 지금, 작가님과 달리 나는 20대를 학업으로만 보냈다. 대학-대학원-대학원. (두 번의 대학원이 석사-박사가 아닌 석사-석사라는 다소 슬픈 이야기는 차치하자.)

 그렇기에 젊은 시절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소회를 옮기고 멋진 사진들을 찍고 사람들을 만난 작가님의 여행이 참으로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행 자체보다는 여행을 통해 느낀 작가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사유의 흔적들이 더욱 부러웠다.

  꼭 작가님처럼 많은 여행을 갈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단 한 번의 여행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주체인 여행하는 나의 사유.

  유년기의 나와 어른이 된 나는 그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경험세계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바라보면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그 양질의 경험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 아닐까. 나 자신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고 타인의 오롯한 삶을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조금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그런 면에서 <팔찌 파는 10>에 등장한 소년의 일화는 지금 이 순간 어른으로 살아가는 나를 반성하게 했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까.

 만 289개월 7일을 살아왔음에도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직도 누군가와의 관계에 슬퍼하고 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지만, 부족한 부분을 포함한 그 모든 내 모습들을 안고 나의 길을 떠날 때 뜻밖의 변화를 만나는 것처럼, 여행도 그렇지 않은가싶다.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했다.

  나도 언젠가 떠나게 될 또 한 번의 여행에서 2020년, 스물아홉의 나와는 다른 또다른 나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기를....... 그리고 나의 여행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열 살 소년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기를, 상처를 넘어서 누군가의 상처를 포근하게 감싸는 존재로 여행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4다르함(500원)을 내면 마실 수 있는 순도 100% 오렌지주스, 혹여 소매치기를 만날까 복잡하고 긴장되는 골목길, 12시간이 넘는 버스를 타야 하는 일, 호스텔에서 무료로 주는 싸구려 비누로 세수하기와 같은 것들이 일상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마도 이런 일상이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이 될 때까지 난 여행을 할 것이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나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메디나 골목조차 그리워질까. 그때가 되면 내 안경에 남겨진 검은색 나사를 바라보며 문득문득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까.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23.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식품, 컵 떡볶이, 선생님 몰래 흰 우유에 몰래 타 먹던 초콜릿 가루 이런 것들이 이제는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 마카롱 하나로는 행복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된 나는 그때처럼 따뜻하고 작지만 사랑스러운 것들에 쉽게 감동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계절이 바뀌는 동안 입맛이 변했고 취향이 변했고 좋아하는 것들이 변했기에 그때 느꼈던 감동은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조금씩 착실하게 날 변하게 했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29.

 


  우리의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거운 순간을 살아 내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마음의 상처 또한 내가 가지고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비록 흉터가 남을지라도 그 자리에는 딱지가 올라오고 새살이 돋는다.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오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추운 계절은 끝이 난다.

  시간이 지나 엄지발가락이 수영해도 괜찮을 만큼 나았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수영장은 여전히 차갑고 시원했다. 발가락의 흉터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흉터가 남는다고 내가 행복하지 못할 단 하나의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엉망으로 상처 입는다고 해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매년 상처와 흉터는 늘어나겠지만, 그것조차 끌어안고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57.

 


  열 살 무렵 나는 매일 용돈으로 500원을 받아 슬러시를 사 먹고 남는 돈으로 만화책을 빌려보거나 스티커를 사곤 했다. 엄마가 가직 싶은 비싼 바비 인형을 사주지 않아서 슬픈 것 빼고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옛 잉카 왕국의 수도 쿠스코에 사는 초등학생이라고 나와 다를까 싶었다. 달콤한 군것질거리와 좋아하는 장난감이 있다면 행복할 나이. 열 살은 그런 나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열 살이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소년은 말을 이어나갔지만, 스페인어를 못 하는 나는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얇은 옷을 입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 씩씩하게 물건을 팔고 있었던 그 아이의 꿈은 뭐였을까. 좋아하는 운동은 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을까. 미처 건네지 못한 질문들이 마음에 울렁거려 코끝이 시큰거렸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145-147.

 

 

 

by papyros 2020. 10. 28.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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