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정, 『너와 나의 점심시간』,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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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문학동네북클럽 ‘『너와 나의 점심시간』’ 가제본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김선정 선생님과, 문학동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전에 문학동네북클럽 가제본 서평단 공지를 우연히 접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김선정 선생님의 에세이, <너와 나의 점심시간>이었다.
 마침 얼마 전 여러 작가님들께서 앤솔로지 형식으로 집필하신 <나와 너의 야자시간>을 구입하고 읽고 있던 참이라 고등학교가 아닌 초등학교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나는 현재 상담 기간제교사이지만, 국어로 근무를 처음 시작했기에 내가 있는 곳은 중등(중,고등을 통칭)학교였고 특히 왜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채용되는 곳은 고등학교들이었다. (딱히 중학교와 중학교를 배제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력이 적지만, 이제는 교사의 입장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장단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고등학교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점잖은 대신 생기부와 출제로 허덕이게 되고 중학교는..그 에너지에 기가 빨리는 곳 ^^
 그러나 초등학교는 내게 다소간 미지의 영역이다. 대학원 시절 교육봉사 시간을 받고 2주/간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수업을 하기도 힘들고 진땀이 났던 기억만 난다. 

주변에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들이 많기도 하고, 전문상담교사인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상 초등학교로 임용을 응시하거나 발령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바 초등학교에 대한 궁금증을 지니고 책을 펼쳤다.

<너와 나의 야자시간>에서 저자분들이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한 소회를 풀어내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수험생 시절에 대한 기억, 야자시간에 지도해 주신 선생님을 떠올리는 등 청소년기에 겪을 법한 정체성의 문제와 감정선이 잘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김선정 선생님의 <너와 나의 점심시간>은 '김영하북클럽' 선정도서였던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라는 세계』 를 떠오르게 했다.
 초등 교사의 입장에서,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모든 학년을 다 지도하면서 어린이들을 마주하고 경험한 선생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게 그려져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에세이 속 에피소드들이 있는데,특히 체육시간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체육시간의 서열화문제는 너무나도 공감되었는데, 영화 <우리들> 에서도 피구를 통한 묘한 관계의 서열화와 아이들의 우정이 잘 그려져있다.
 또한 어린이들의 채무관계 정리방법이 참 인상적이었다.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규칙을 정하고, 어른들보다 더 따뜻하면서도 정의로운 존재가 어린이들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짧지만 울림이 깊은 책이었는데, 특히 책을 읽으며 곳곳에서 나의 학창시절(초중등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육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운동신경이 1도 없는 어린이였고, 지금보다도 더욱 더 극 내향적이라 친구들 무리에 끼기 보다는 교실 한쪽에서 조용히 독서에 매진하며 학교 도서관을 자신만의 도피처로 삼던 아이..
급식을 먹을 때도 혼자 앉아 밥을 먹으며 책읽기에 열중하던 그 아이는, 자칫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아이구나라는 시선 이면에 외로움을 감추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리에 끼고싶고, 반장이란 걸 해보고 싶은 어린아이 이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선정 선생님의 에세이 곳곳에도 어릴 적의 나 자신과 같은 아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급을 막론하고 지금도 자리하고 있을 또다른 나에게 가장 따뜻한 것은 믿음직하고 따뜻한 어른의 존재이다.


위클래스가 부재하던 시절 내가 만난 초중고의 은사님들께서 내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셨고 덕분에 학교생활을 버텨올 수 있었음이다.
위클래스, 위센터에서 중고등학생을 만나고 또 초등학생들을 만나게 될 나 자신이, 내가 만나게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존재로 자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다시금 떠올렸다.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아 마땅한 그 작은 존재들이 사랑과 행복을 듬뿍 받아 자라나길 소망한다.

비록 성장하며 제도권에 편입되어 가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기를. 좁디 좁은 운동장, 학교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를.

 

 

 

아주 오랫동안 아이들의 집을 생각하면 두렵고 무서웠다. 
'어서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어라. 그리고 그 집에서 나와라.' 
나는 속으로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함께 사는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에게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아이가 밖에서 힘든 일,
슬픈 일을 겪고 들어왔을 때 "어서 와라"하며 맞이해주는 것이다.
그런 어른이 한 명만 있다면 아이는 살아갈 수 있다던
선배의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사소함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86쪽)

 

학원 차를 타느라 바쁘게 뛰어가는 아이들 뒤로 남겨진 운동장이 쓸쓸하다.
밥을 입안에 쓸어넣으면서까지 차지하고 싶었던 운동장은 다음날이 올 때까지 오래오래 비어 있다.
수업이 끝난 오후나 휴일, 그리고 방학에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

(52쪽)

 

 


어른에 의해 자신의 의도가 나빴다고 규정당하고 미래까지 점쳐져서는 안 된다.
너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며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더 좋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끝까지 믿어주는 어른이 있을 때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60쪽)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외로운 아이는 반드시 있었다.
무리에서 겉도는 아이가 없도록 살피고 감시해도 어느새 혼자인 아이들이 생겼다.
마음이 따뜻한 아이에게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내가 나서서 같이 밥을 먹거나 놀아주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이미 쌓인 상처 때문에 달아나버리거나 차라리 혼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여럿이 뭔가를 조정하고 맞춰가는 것보다 혼자가 편하다는 아이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거나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68쪽)

 

 


(전략) 전처럼 안달을 해가면서 아이를 빨리 누군가와 연결시키려고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조심스럽게 알려줄 것이다.
사람은 혼자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무리 속에 있어야 할 때도 있고,
혼자이기 싫어서 애를 써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69쪽)

 

 

아이들은 계속 자란다. 어떤 아이도 계속 혼자 있거나 계속 같이 있지는 않는다.
무리 안에서 신난 아이도 살다보면 혼자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늘 혼자인
아이도 어느새 친구를 만난다. 그렇게 관계의 쓴맛과 단맛, 허무함을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뒤에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얕은 인간관계를 넓게 갖기도 하고 좁은 범위의 인간관계를 깊게 갖긷 한다.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가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이 경험 없이 저절로 자리잡지는 않으며
이 모든 경험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70쪽)









by papyros 2022. 12. 29. 23:48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마음이 먹먹해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여운이 남는 영화.
극장을 나오며, 동행한 이들과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끊이지 않는 영화. (시간이 늦어 카페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바딤 피얼먼' 감독의 연출작 , <페르시아어 수업>은 바로 그런 영화에 해당했다.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 그 시대에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 들 정도로 몰입한 수작이었다.


 영화는 프랑스에 위치한, 나치 수용소에 끌려온 한 유대인(본명 질 / 그러나 영화 내내 '레자'로 살아가므로, 이후 레자로 표기)이 수용소에  가는 기차속에서 샌드위치와 맞바꾼 한권의 페르시아 책으로 인해, 페르시아인으로 행세하며 나치 장교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주가 된다.


 우선 서사 과정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것은 과연 레자의 진짜 정체(유대인)가 밝혀지는가의 여부다. 몇번의 위기가 있긴하지만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은, 그가 가짜  페르시아 단어를 만들며 수용소 유대인 명부의 이름에서 따온 부분이다. 나치 장교 코흐는 꽤  오랜시간 수천개의 가짜 페르시아 단어를 배우면서도 끝까지 그 단어들이  유대인 명부에서 착안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아름답고 놀라운' 단어로 칭송하면서 그 언어로 멋있는 시를 짓기까지 하면서도 유대인 개개인의 이름에는  관심갖지 않는 장교 코흐의 모습은 퍽 모순적이었다.


 반면 레자는 가짜 페르시아인으로 살아가지만 수용소 생활을 함께하면서 동포들에게 죄책감을 느껴나간다. 배식을 하며 유대인 동포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 이름에서 단어를 만드는 한편 코흐에게 받은 음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특히 후반부에 언어장애가 있는 한 이탈리아 청년을 살리고자 자신이 유대인 옷을 입고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데, 이는 용기있는 결단임과 동시에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않은 결단으로 느껴졌다.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레자를 의심하고 죽이고자 하는 나치군 병장 바이어의 서사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결국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수용소를 정리하는 분위기일때 그가 느낀 감정은 허망함이 아니었을까. 나치이기 이전에 한 청년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시대의 비극이며,  또다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코흐 장교가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으로 도주하려하다  가짜 페르시아어로 인해 실패하고 붙잡히는 것은, 우정과 신뢰에 사기당한 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결국 나치장교였던 그에게는 합당한 처벌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마음에 남을 2840명의 유대인 희생자 이름들.. 연합군 앞에서 그 이름들을 담담히 외워나가던 레자의 모습이 오래 기억날 듯 하다.
오랜만에 귀한 수작을 봤고, 벌써 다시 보고싶은 작품이다. 

연말을 맞아 수많은 영화가 개봉하고 있지만, 단연코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시라고 많은 이들에 권하고싶다. 

 

https://youtu.be/OC1e-XiBacE

 

 

당신은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죠. 그러나 그 살인자들을 배부르게 할 뿐이죠.

- by 레자

 

일 우나히 아우 (I love You)
일 바흐 우나히 아우 (I love you, too.)






덧1. 영화 시작전 '영화사 진진'에 눈길이 갔다. 늘 좋은 작품만을 수입/배급해주시는 진진에 감사합니다. 

덧2. 교원대 대학원 시절 #강태호 교수님의 '독일영화 감상분석' 관련 교양을 들었을정도로 독일 관련 영화, 나치 관련, 인권관련 영화는 무언가 마음을 울린다. 이런 작품서사가 나의 자기서사와 연관이 있는걸까? 

덧3. 같이보면  좋은 영화 추천
#피아니스트 #타인의삶 #인생은아름다워 #쉰들러리스트 #조조래빗 #더리더책읽어주는남자

덧4. 코흐 장교  배우님 생일이 나랑같다 ㅋㅋ #0121

#12월15일개봉


https://www.instagram.com/p/CmEgJQUL21y/?igshid=YmMyMTA2M2Y=

 

Instagram의 권수현님 : "#페르시아어수업 #페르시아어수업_추천리뷰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

권수현님이 Instagram에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페르시아어수업 #페르시아어수업_추천리뷰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마음이 먹먹해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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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yros 2022. 12. 13. 09:28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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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캐서린 메이와,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삼십대 끝무렵에 이르러서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진단받은 캐서린 메이. 저자의 신작에 대한 홍보문구를 접하고 자연스럽게 서평단을 신청했다. 서평단에 선정되고서는 나도 모르게 신간이 아니라 기존에 구입해 읽다가 완독하지 못했던 전작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를 먼저 완독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작의 남은 부분을 먼저 일독했다.

 전작에서 저자 캐서린은 윈터링’, 겨우나기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삶에서 가장 어둡고고도 추운 겨울의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으며 그 겨울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역설한 바 있다.

 

윈터링(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 옮긴이)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캐서린 메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웅진지식하우스, 2021 중에서.

 

행복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다.
그것이 바로 윈터링이다.
슬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캐서린 메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웅진지식하우스, 2021 중에서.

 

특히 그녀가 우울과 슬픔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겨울을 보내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바다수영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 이번 신간인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에서는 그 연장선상으로 걷기가 제시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사실 바다수영은 겨울의 시간을 잘 보내고 고통을 해소하는 나름의 방법 중 하나였지만 걷기라는 행위는 자신의 고통마저도 전체적인 삶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의 자기고백은, 라디오를 듣다가 자신의 자폐 증상을 인지하는 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스펙트럼 선상에 있나?’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저자의 내부에 있으나 걷기를 통해 그 답은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온다. 저자가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 누구도 진단해 주지 않아 겪는 답답함이 책에 잘 묘사되는데, (98-104.) 사실 그녀에겐 오히려 그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서른 아홉에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저자에게 있어서 어쩌면 평생 가져온 자신의 남다름’, ‘이상함에서의 해방이 아니었을까 싶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서 좀 예민한 상태이긴 해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이미 구축한 나의 이미지에 반기를 들어봤자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그런 단순한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넘겨버리는 듯ᄒᆞᆮ. 넘겨버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102.

 

 ‘남다름’, ‘이상함’, ‘기이함’. 자폐스펙트럼장애 뿐 아니라 세상의 기준과 달라 이해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부과되는 수식어이다. 특히 특정한 진단을 받지 않거나, 자신에 대한 이해 측면에서 무언가 괴리감을 느낄 경우 자아 스스로 더욱 큰 불안과 혼란을 느낄 것이다. 책의 추천사를 쓴 정지음작가(민음사, 젊은 ADHD의 슬픔저자)님도 캐서린 메이와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후 ADHD 진단을 받았기에 아마 캐서린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 책은 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위한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런 책을 읽기 원하신다면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권하고 싶다.) 그러나 캐서린 메이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자폐 가능성을 발견한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에세이는 깊은 통찰과 부드러운 사유로 자기치유의 성격을 넘어 하나의 문학작품과 같이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저자는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지만,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 탁월한 역량이 있다.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누군가는 상호작용이나 의사소통에서 부족한 점을 지닐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그러하다. 업무를 보면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늘 뚝딱이곤 한다.) 누구나 조금씩 어느정도는 스펙트럼 안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 각각의 한 개인이 누구나 특별하고 가치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러이 느낀다. 지난 여름 사랑스러운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보았고, 이번 겨울 캐서린 메이의 글을 통해 다시금 보았듯이 진정 중요한 것은 자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개개인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저자의 글을 통해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뇌신경을 가지고 있고 다른 특별함을 지닌 존재일 수밖에.

 

자폐인들을 생각하면 별무리나 은하계가 떠오른다.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별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며 반짝인다. 나는 그 무수한 별들 가운데 하나의 유형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9.

함께 읽을 책으로 저자의 전작과 함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젊은 ADHD의 슬픔을 권하고 싶습니다.

 

 

 

 
by papyros 2022. 12. 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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