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배케트의 연극을 부조리 연극이라고 최초로 이름붙인 마틴 에슬린은 베케트를 <유쾌한 허무주의자>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에슬린이 베케트에게 붙여 준 명칭 때문일까, 정말로 이 희곡을 다 읽고 난 뒤 지극한 허망함을 느꼈다. 문학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서사구조가 없었고, 흥미로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고도라는 인물이 후반부쯤에는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의 끈을 아주 놓아버리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고도는 등장하지 않았고,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바보 같은 대화만이 남았고 이건 무슨 우스운 개그인가, 라는 생각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몇몇 표현들이 쉽지 않았고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찾으려,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특별한 것이 주어지지 않은 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난해함과 많은 의문점들을 지닌 채 책을 덮었다.

그러나 부조리극’, ‘허무주의’, 그리고 작품이 쓰인 당시의 시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한 데가 있다는 뜻을 지닌 의뭉스럽다는 단어에 걸맞은 작품인 듯하다.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이어가는 한 편의 희곡은 그야말로 희극적인 콩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인간과 사회현실의 단면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1952년에 출간된 베케트의 이 희곡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망함과 좌절만이 남은 가운데 피폐해진 사회의 모습, 사유하기를 거부한 당대 사회의 모습, 즉 부조리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출간된 이 희곡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의 희극적 행동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굳이 오래 전의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아도, 지난 해 대선 때를 회고해 보자. 비록 지지하는 후보자는 다르지만, 모두가 이번에 뽑히는 제 18대 대통령 때는 사회가 조금이나마 바람직한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출범한지 100여일이 지난 지금도 이전 정부가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작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가 없고 여전히 신문기사의 정치, 사회면에는 씁쓸한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다. 강도, 살인, 위선, 너무나도 비윤리적이고 부조리한 행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그 중 남양유업의 갑-을관계와 윤창중 사건이 확대되어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조명되었을 뿐이지 이미 현대사회의 부조리는 오래 전부터 비일비재해왔다. 즉 많은 이들이 한마음으로 기다리고 추구하는 바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과 정의로운 세계질서 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적 관계를 이루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사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언제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되고 진정한 지도자가 출현하여 바람직한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고도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많은 이들의 열망이고 소망이며 이육사의 시 광야청포도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요, ‘청포를 입고 찾아 올 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는 이러한 소망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서민들 그 자체이며, 거만한 노인과 늙은 짐꾼의 관계로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형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관계, 불평등한 사회구조로서 사회 전반의 억압, 틀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정리해 보자면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포조와 럭키의 관계) 안에서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되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서민들이 존재하지만(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 아직 서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이상세계, 구원(고도)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비단 현대 사회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억압적 사회 구조 하에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변화에 대한 열망, 혹은 지도자의 출현에 대한 소망을 가진 민중들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단적인 예로 고려시대 최충의 노비가 주도했던 만적의 난, 조선후기 동학농민운동으로부터 시작해 지금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준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명동성당에 모여 항거했던 6.10 민주항쟁 까지....... 만적의 난의 경우는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예외로 치더라도, 동학농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경우,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이나 현 시대 우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인데 , 우리는 볼라디미르, 에스트라공과 함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사회 현실에 체념하고 안주한다. ‘고도가 오면 살 수 있지만 오지 않으면 그저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거나 혹은 극단적인 방법(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볼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볼라디미르 내일 목이나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볼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민음사, P158)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달랐다. ‘고도를 기다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비판의식과 능동적 실천을 조화시켜 직접 고도를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습과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사회의 부도덕이나 불평등에 부조리함과 모순을 느끼고도 누군가 나서겠지, 하는 생각에 자신은 현실에 안주해버리곤 한다. 심지어 자살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 현실에 치여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비단 고도를 사회 개선에 대한 열망, 소망이라는 점과 연관 짓지 않아도 개인의 상황이나 현실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데, 이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실현하지 못한 자신만의 목표가 있고 꿈이 있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혀 꿈에 다가가기도 전에, 도전 해 보기도 전에 쉽게 포기해 버리곤 한다.

진정으로 고도를 만나고 싶다면,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만 말고 이제는 고도를 찾아나서 거나 그 자신이 고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혁명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바로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고 조화시키려는 노력, 자신의 의견만이 절대적 진리이며 가치라고 오판을 내려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 대표적 예랴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로부터 발생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비판함으로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한 비판적, 대항적 혁명이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자본주의의 장점을 모두 부정했고 자신들과 다른 가치관에 대해서는 모두 배격하고 축출한 바 있다. 그러한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오판이 사회주의 혁명의 저항정신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이다.

즉 우선적으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지녀야 하는데, 단지 사회 현실에 대한 감정적 불만이 아닌 이성적이며 합리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단 한 번 있었던 럭키의 대사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되었던 점이 이를 시사한다.

 

럭키 (단조로운 어조로) 프왕송과 와트만의 최근의 공동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 인격신은 공간의 시간 밖에 존재 하고 있어 하늘의 무감각과 무공포와 침묵 위 높은 곳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사랑하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터이고 하늘의 미랑다의 본을 떠서 고뇌와 불 속을 헤매는 자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겪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이하 생략)

(민음사, P69-72)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합리적 비판의식이 마련된 후에 능동적인 실천이 가능한데, 능동적 실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가치 질서의 체계 안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구체적이며 바람직한 가치관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망은 정신적 행복이 아닌 육적 쾌락으로 사람들을 빠지게 하고 쾌락에서의 같은 좌절은 폭력과 범죄를 낳는다. 즉 가치아노미 현상이 발생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인데, 즉 가치관의 분석과 점검을 통해 가치 질서를 재정립, 재구조화 하여 다양한 가치관을 포용하고 통합해 나아가며 가치관의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고도를 직접 찾아나감으로서 혹은 자신이 고도를 직접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하고 삶의 방향을 주도적으로 전환, 조정 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며 반항적 자아로서 능동적 실천과 참여가 가능하며, 프로라이프의 생명대행진 등 낙태를 반대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는 것이 생명경시풍조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 실천적 참여로서의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합리적인 비판의식과 능동적 실천을 통해 고도를 찾아나서는 개인과 사회를 돕기 위해서 교육의 의미가 중요해지며, 도덕적이고 윤리적 책임감을 지닌 교육자 혹은 지도자가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 지식과 지혜, 그리고 영감을 불어넣어 줄 때 개인과 사회 전체의 능동적인 변화가 가능해 진다고 본다.

 

 

 

by papyros 2013. 6. 2.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