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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을 읽고

 

나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의 예술은 순수한 예술, 자율적 예술, 천재라 불리는 예외적 개인의 예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이 아니다. 단언컨대 그런 예술은 죽었다.

 

(중략)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

 

 책을 대표하는 문구프롤로그에 나온 작가의 선언은 단호하다. 단호한 선언만큼이나 그을린 예술은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저자 심보선의 문학과 사회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식이 담긴 책이었다. 국문학도인 나로서는 사회학 분야의 전문용어나 지식들을 모두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가 책을 통틀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양하고 사람을 위한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의 삶 안에 녹아있는 예술, 즉 두리반에서의 예술이 그리고 한충자 시인과 같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예술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아닐까.

 

 저자의 말대로 문학이 단지 문단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작가의 지식체계를 표출하려는 작품으로 수단으로서만 사용된다면 그러한 상황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싶다. 그 예로 김동인 같은 유미주의(唯美主義)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를 살펴보면 음악가 백성수는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살인, 방화, 시체 간음 등의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끔찍하고도 잔인한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비평가 K씨는 백성수 같은 천재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위대한 예술창작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행동들은 죄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며 주장을 한다. 즉 사람이 예술 아래에서 수단이자 도구로 사용되는 극단적인 예술지상주의를 뜻한다.

 

 어쩌면 예술 자체의 수준과 그 향유 계층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는데 예술지상주의의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삶과 괴리되어 있는 작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단적인 예로 우리 문학사를 살펴보면, 박영희의 사냥개와 같은 카프(KAPF)의 자연발생적 신경향파 문학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인과관계에 따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말이 아닌, 감정적이고 본능에 치우친 작품들로서 비판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카프(KAPF) 내 프롤레타리아 작품에 대한 대중화 논쟁 과정에서도 작품을 프롤레타리아 사상, 즉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정작 일제강점기 하의 노동자 계급의 현실적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카프(KAPF)는 지나치게 경직된 채 볼셰비키화 되고 말았다. 즉 일제 강점기 하의 지나친 억압적 분위기,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노동자층의 상황을 카프(KAPF)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카프(KAPF)도 지식인 그룹으로서,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는 부르주아의 속성을 카프(KAPF)의 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역설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절한 천재들로 불리는 이상과 랭보는 속물적인 근대사회를 부정하며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현실사회에서의 도피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낳았고 그들은 그 씁쓸함을 인정하며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홍기돈, 문학권력 논쟁, 이후, 예옥, 2012, 43쪽 참조)즉 차안의 현실과 민중들을 부정하고 피안(彼岸)의 세계로 도피한 것과 다름없으며 현실세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학이 사회 우위의 입장에서 사회를 지도하며 대중추수적 입장을 취하는 것도, 근대의 속물성을 부정하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모두 지양해야한다면,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현실과 예술의 관계는 무엇이며, 문학의 진정한 윤리성과 정치성이란 어느 곳에 자리할까. 방현석 작가와 비평가 홍기돈 선생님의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방현석 소설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작품으로 그려내기 위해 스스로가 직접 위장취업을 하여 노동현장에 뛰어든 바 있다. 실제로 70~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사회 지식인들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노동현장에 취업하던 현상이 존재했는데 방현석은 작품을 위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직접 노동자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과 고충을 이해하였기에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새벽출정과 같은 소설에서 근로자들의 현실을 묘사해내 공감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양귀자 작가의 원미동 사람들이 소시민들의 삶을 그려낸 작품들로서 오래도록 공감대를 받으며 국어교과서에 70-80년대 사회를 그려낸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결국 현실의 애환에 공감하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방현석 작가의 사례와 같은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홍기돈 선생님께서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반대하고, 희망버스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등 그을린 예술의 저자 심보선 시인과 마찬가지로, 문인으로서 진정으로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지키려 하시며 사회 약자들의 편에 서서 지나치게 억압적이며 이기적인, 비상식적인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시고 비판하시는데 결국 이렇게 부도덕하고 모순적이며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사회일지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이들과 함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할 때 문학이 우리 삶 속에 함께 자리하여 긍정적으로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유일무이한 개별자라든가 파천황의 감각과 미증유의 언술같이 겉으로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새로움만을 좇아 현실의 깊이를 벗어난 허상을 지양해야 하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이며 수단적인 -그것의 관계에서 탈피하고 -의 관계로 인식 한 채, 사회현실의 문제점을 간파하여 문제점을 메울 수 있는 장차 도래할 인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한 스스로 사회현실에 모순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스스로를 성찰하여 이미 도래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 나갈 때 사회현실에 대한 공감과 저항, 성찰이 문학 안에서 이루어져 문학의 윤리성과 정치성이 모두 확보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순을 느끼면서도 작가로서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했던 김수영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 등이 문학의 윤리성과 정치성을 실현한 문인이 아닌가 싶다. 결국 문학이 사회의 현실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깊은 우정을 나눌 때 삶 속에서 문학의 자리가 확보되어 되살아난다. (홍기돈, 문학권력 논쟁, 이후, 예옥, 2012, 16-31쪽 참조)

 

타인과 함께 삶을 나눌 때, 인간은 ’(“너를 돌봐 줄게.”)행동’(기어이 돌아오려 함)을 통해 가까스로자신의 존재를 보다 나은 존재로 갱신하고 고양시킨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내포한다. 텅 빈 우정의 정치는 친구와의 약속을 위선과 허세로 축소시키는 속물화의 강박에 저항하며, 동시에 친구와의 약속을 엄두도 못 내게 하는 동물화의 압력에 저항한다. 또한 텅 빈 우정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그 곁에 머물려 하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 준다. (우정으로서의 예술, P28)

by papyros 2013. 8. 21. 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