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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영화 <그랑블루>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민음사, 104)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해(2012)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풀린 이후 노인과 바다의 번역본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노인과 바다소설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문구였다. 패배와 파멸, 파멸은 육체와 물질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패배는 정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아픔을 겪을지라도 정신적 가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강인함과 인내인데, 산티아고야 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과 인내, 의지, 도전정신을 보여준 인물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생태계의 일부에 속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대자연 안에 속한 생명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노인과 바다가 쓰인 시대에, 많은 어부들이 최신식 기계장치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으려 했다는 것은 대자연 위에 올라서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이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그 어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낚싯대에 미끼를 걸어 고기를 건져올리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서 대자연의 광활한 바다를 가능한 훼손시키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 파도와 청새치, 상어와의 사투에 동등한 생명체로 그 스스로가 직접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 앞에서 한계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모습, 산티아고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의 많은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자연을 끝없이 지배하고 정복하고 개발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많은 비극들 -원전비리 사태로 인한 전력부족,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지구 온난화 등-이 수없이 많은 이 때, 대자연 속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지닌 산티아고의 태도를 타산지석 삼아야 함은 명백한 것 같다.

 

착한 놈들이지. 놈들은 함께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저 돌고래들도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들이지.” (민음사, P49)

 

그러나 이러한 산티아고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 그리고 강인함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는 결국 상어 떼와의 싸움에서 파멸한다. 패배는 하지 않았으나 결국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상어 떼와의 전투를 통해 남은 것은 애써 잡은 청새치의 뼈대뿐이었고 늙은 산티아고의 기력은 소진되어 녹초가 되었고 결국 육체적으로는 파멸한 것이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와 공허(空虛)함만을 남긴 상어와의 전투. 파멸을 부른 원인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 인 채움에 대한 욕심(욕망)’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산티아고가 만선을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청새치라는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이 또한 생존을 위한, 채움의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범인(凡人)들과 산티아고의 차이점을 들자면, 범인(凡人)들은 채움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반면, 산티아고는 채움의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낚시를 하지만 어부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양심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고기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며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고기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대한 미안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으로서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어부라는 직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낚시를 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바탕으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자세, 그리고 비록 채움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고기를 잡고자 갈구하고 있지만 정당하게 맞서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그의 자세가, 비록 파멸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진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산페드로도 저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의 아버지처럼 어부였지. 그러나 노인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모든 걸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읽을 책도 없었고 들을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했고, 또한 죄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네가 그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죽인거야. 너는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또 녀석이 죽은 뒤에도 사랑했지. 만약 네가 그놈을 사랑하고 있다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걸까? (민음사, P106)

 

결국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통해 비움의 자세를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에 채움의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조급함과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를 내맡기는 것.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행복을 쟁취하려 하기보다는 욕망과 행복에 대한 생각을 내려둘 때, 이와 멀어질 때 진정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 단 한 마리의 청새치를 잡으려 했던 산티아고에게도 채움의 욕망은 존재했고 그 욕망 때문에 고기와 산티아고 모두에게 파멸을 불러왔다.

 

차라리 이 일이 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또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고기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던 거야.” (민음사, P111)

노인과 바다가 주는 이러한 메시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최근에 감독 판으로 재개봉한 영화인 <그랑블루>가 있다. 노인과 바다<그랑블루>가 주는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잠수사고로 잃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대자연인 바다와 바다의 소중한 생명체 돌고래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작크와, 작크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엔조. 작크가 잠수를 했던 것이 바다와 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향연이었다면 엔조에게 바다는 생존을 위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기록을 내야만 하는, 넘어서야 할 극복과 갈구의 대상이었다. 물론 엔조 또한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바다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의 차이가 작크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아니었을까. 결국 엔조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야 기록을 위한 잠수가 아닌, 바다 속 깊은 공간에 대한 향연과 사랑을 느끼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작크도 결말부분에서, 바다 밑의 더 깊은 공간과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 향연을 이기지 못하고 잠수를 결심하게 된다. 남겨진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남긴 작크의 태도가 모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작크의 입장에서는 인간으로서 영위하고 누릴 수 있는 채움의 욕망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바다 앞에서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채움의 욕망을 버리고 비움의 자세,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은 행복에 취해 있다가 상어 떼로부터 화를 당한 것이나 작크가 잠수사고로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지만 결국 그로 인해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 향연이 더 깊어지는 것 등이 이 속담에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 결국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채우기 위한 욕심을 가지고 조급하게 달려 나가는 일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채움의 자세보단 비움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누릴 수 있는 현재의 작은 행복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소중한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천천히 나아갈 때 비록 파멸할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라 믿는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그리고 참, 침대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는 내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참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P121)

 

소년은 테라스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뜨겁게 해 주세요. 우유랑 설탕도 듬뿍 넣어 주시고요.” (중략)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이거 드세요.” 소년은 유리자에 커피를 조금 따랐다. (민음사, P124)

 

그는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민음사, P125)

 

산티아고가 사랑해 마지않는 귀여운 소년 마놀린과 같이, 정말 힘겹고 외로울 때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힘을 낼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이의 따뜻함이 있다면, 작크와 엔조같이 서로 간에 위안이면서 동시에 자극이 되는 소중한 이가 있다면,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느낀다면 분명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없을지언정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 믿는다. 인생의 굴곡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소중한 이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행복에, 그 따뜻함에 감사하면서 비움의 자세로, 쉼의 여유를 가질 때 그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더욱 강인한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민음사, 128)

 

by papyros 2013. 8. 23.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