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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고

 

갓 구워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빵 냄새, 한 달에 단 하루인 보름을 제외하고 24시간 문을 여는 제과점, 마법으로 빵을 굽는 마법사 점장과 낮에는 사람, 밤에는 파랑새로 변하는 소녀. 베일에 감춘 듯 비밀스러우면서도 포근함을 갖추고 있는 위저드 베이커리. 이 책은, 14년 전의 어린 시절, 해리 포터를 처음 접하던 그 순간처럼 읽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마법을 부리는 동화(童話)였다.

그러나 동면의 양면과도 같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마법으로만 보이는 동화 이면에 개인의 선택과 책임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상기하게 한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위저드 베이커리 P134, P200)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존재한다. 매번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못하기에, 삶의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다시 말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아파하고 후회하는 그 모든 과정들이 이후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장통인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후회와 아픔을 남기는 선택들이 인생의 더 귀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데 대해 심한 자책을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 이후의 책임감에 달려있다. 함께 읽어 내려간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책임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학 실천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상,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P122 실천이성비판)

 

즉 선택이란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인 정언명령에 따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한 것이고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은 마땅히 자유롭게 행동한 자신이 지녀야 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면 타인에게 책임전가(責任轉嫁)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선택이란 것 자체가 자신의 이성에 따른 판단으로 선택한 자율적 행동인데 막상 선택의 결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 그 책임을 자신의 선택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타인에게로 전가하며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시킨다. 즉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서 무작정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너 이 쿠키에 매겨진 별점이랑 사용 후기 안 봤어? 효과 백 프로인 거 안 봤어?”

봤죠. 제품을 띄워주려는 알바생들의 댓글인 줄 알았죠.”

그럼 이것도 묻자. 사용 시 경고 사항 안 봤어?”

모든 마법은 부메랑이 어쩌고 하는 거? 그것도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죠. 그런 걸 진지하게 믿고 사는 애들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위저드 베이커리, P90)

작품 속에서 시나몬 쿠키를 산 교복 입은 여학생이 보이는 사후책임감의 부재가 비단 소설 속 상황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미혼 부모들의 영유아유기, 학교폭력 등의 많은 사회문제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후책임감의 부재는 사전책임감의 부재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후책임감이 과거의 사건과 관련된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이라면 사전책임감은 미래 활동의 기대감이나 사건의 사전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으로 타인에 대한 자발적인 보살핌을 하는 도덕적 책임감이다. 즉 내재화된 도덕적 책임감인 사전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과 타인, 사물에 대한 책세 가지 측면으로서의 책임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공동체 전반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사후책임감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즉 도덕적 책임감을 중심에 둘 때 사후 책임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사람을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며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교복 입은 여학생이 질투하던 친구에 대해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악마의 시나몬 쿠키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부두 인형을 구매하러 온 여자가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체인 월넛 프레첼을 구매하여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여 그 결과가 다시 자신에게로 미치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타인에 대한 배려와 그 관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부재했고 때문에 사람을 결국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라면 마법의 빵을 먹여서라도 제거하고 조종해야 할 수단으로서만 취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 선생 또한 주인공 를 제거해야 할 전부인의 자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 어머니로서 아들에 대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욕구에 반응하고 헌신하여 보살폈다면 , 또한 주인공의 아버지 또한 배 선생과 그녀의 딸 무희를 단지 그 자신의 욕구충족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사전책임감을 가졌더라면 가정이 틀어지는 잘못된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선택의 결과가 틀어지더라도 사후책임감을 지닌 채 질서를 바로잡고 결과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점장에게 받은 타임 리와인더를 통해 주인공 앞에는 시간을 돌려 배 선생을 만나지 않는 선택과 시간을 돌리지 않고 삶을 살아나가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이게 된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혹자들은 Y의 경우는 현실에서의 도피이기 때문에 N의 경우가 더욱 바람직한 결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Y의 경우, N의 경우 두 가지 결말 중 어떤 쪽이 옳은 선택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대한 사전책임감사후책임감이다. Y의 경우를 택하면 주인공이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자유의지를 표현함으로서 배 선생으로부터 학대받는 경험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위저드 베이커리에서의 추억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그의 삶,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희생이 따른다. N의 경우를 택할 경우 아버지와 배 선생의 이혼, 사건으로 인한 전학 등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게 될 수밖에 없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내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한 가지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기회비용. 운명이나 필연적 법칙은 없다고 하지만,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점장과 같이 인생의 귀인과 마주칠 수도 있고 배 선생과 같은 악연을 마주칠 수도 있다. 때문에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 여부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후회를 일삼고 선택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배 선생 같은 악연과의 만남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만 선택의 책임을 돌리는 인물이라면 그야말로 사전책임감과 사후책임감 모두 결여된 채 완벽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환상에 고착되어 자아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위저드 베이커리, P248)

 

중요한 것은 수많은 마주침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자신과 타인 및 이를 둘러싼 환경을 관심 깊게 바라봄으로서 마주침이 아닌 헤아림의 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혹여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되돌아올지라도 소 사후책임감을 견지한 채 묵묵히 그 다음 일을 해내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며, 소중한 이와의 인격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얻은 소중한 기억을 통해,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깨달음을 통해 인격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추는 것이라 본다.

 

낚싯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싯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철학이 필요한 시간, P259)

결국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닐 것인지 또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나는 후자를 선택해 매 순간 선택의 결과를 통해 배우고 노력함으로서 교육자이자 인격자로 성장하고자 한다.

 

 

 

 

 

by papyros 2013. 8. 21.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