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온유, 『경우 없는 세계』,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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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  ‘『경우 없는 세계』’ 가제본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창비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백온유 작가님과, 창비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 게시물의 인용구 페이지는 정식 출간본과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3년 전, 백온유 작가님의 소설 유원사전 서평단에 참여한 적이 있기도 하고, 청소년소설에 늘 관심을 두고 있는지라 금번에 출간 예정인 백온유 작가님의 신간 소설 경우 없는 세계서평단에 지원했다. 유원PTSD를 겪고 있는 개인의 상처 극복과 성장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경우 없는 세계는 가출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내면과 아픈 성장과정을 청소년들 그 자신의 시선에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두 축은 ‘인수’와 ‘이호인데, 이미 성인이 된 인수가 가출청소년 이호를 만나면서 가출 청소년 시절을 겪은 바 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호와 인수의 서사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이호의 경우 인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깊은 에피소드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청소년인 이호가 가출 이후 을 버는 방법은 스스로 가짜 교통사고를 내는 방식이었다. 다가오는 차량에 슬쩍 몸을 던지고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돈을 뜯어내는 방식. 그의 그런 방식들을 목격한 인수가 이호에게 손을 내밀며 이를 만류한다. 위험한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조처하고 이호를 자신의 집에 거두어 숙식을 제공한다. 덕분에 이호는 다른 친구들까지 인수의 집으로 데려오며 기거하게 된다.

이호에게 있어 인수는 그의 손을 잡고 도움을 주고자 한 유일한 어른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호와 달리 인수에게는 그런 어른이 없었던 것이 그의 청소년기를 아프고 곤란하게 했다.

 전문상담교사로서 소설을 읽으며 인수의 청소년기를 사례개념화해 보게 되었다.

 인수의 가출로 인한 심신의 고통을 주 호소문제로 보자면, 인수의 경우 의 가정폭력이 인수의 가출에 대한 직접적인 촉발요인인데, ‘유발요인으로는 진심어린 사랑이 부재한 가족환경, 의지되지 않는 에 대한 실망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인수가 가출 이후 집에 자신의 옷 여벌과 돈을 가지러 들어갔을 때 부모의 집에는 사랑을 받으며 먹이를 먹는 반려묘가 자리했으며 인수는 자신을 찾지 않는 대신 그 고양이에 투자하는 부모에게 서운함과 실망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인수는 내심 늘 부모가 사랑으로 대해주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모는 늘 인수의 소망과는 대조적인 언행을 보인다.

 

 

강압적이며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몹시 엄격한 아버지가
내게 분노하는 지점은 너무나 다양하고도 변칙적이라
나는 지뢰밭을 걷는 심정으로 조심조심 살았다.


                                                                       -47쪽.

 

 

 ‘위험요인’(유지요인)으로서 인수가 가출생활을 지속하는 데는 가출생활 중 만난 친구들이 있는데, 특히 성연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무리속에서 대장으로 자리하려고 하는 성연은 인수를 가까이한다. 성연은 그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가족들이 있지만 그 따뜻함 속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면 인수는 걱정하고 아껴주는 가족들을 갈망하고 내심 부모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는데, 이처럼 대조적인 환경과 상황이지만 그들은 가출 청소년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 집이라는 공간 내에서 함께 가출 생활을 지속한다.

 

 보호요인으로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작품의 제목도 경우의 이름에서 기인하는데, ‘ 경우는 가출 청소년이지만 늘 규범과 규칙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보육원에서 자랐으나 언젠가는 자신을 만나러 와 줄 어머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선을 넘는 행동을 삼가려는 경우는 인수가 다른 가출팸(‘우리 집이라고 불린다.) 친구들을 따라 선을 넘으려고 할 때 이를 적당히 제어해준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언젠가는 자신을 데리러 오려는 의지가 있다고 믿은 경우는 마치 사랑 받아 본아이처럼 보이며 구김살도 없어 보인다. 인수에게는 그런 경우야 말로 한편으로는 가장 부럽고 질투가 나는 대상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의지하고 싶은 존재였을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 자신이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낯선 호의에 다소간 경계한 것도 당연했을지 모른다.

 

 왜 저 아이는 사랑받아본 아이처럼 행동할까. 나는 궁금해했다.
왜 처음에 경우의 존재에 대해 순수하게 감격하거나 감동하는 대신 의아해하고 얼마쯤 수상하게 여겼는지 지금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경우와 가장 친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경우가 집을 구하고, 그애의 소원대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더라도(경우라면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때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두운 마음 한편에는 저렇게 가식적이고 답답한 애는 도무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고,
그애에게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경우에게 정을 떼기 위해 마음속으로 고군분투했다.

-253254.

 

 소설의 후반부, 인수가 성인이 되어서 만난 이호와 같이 그의 어린 시절에 만난 A라는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가출팸 아이들은 무너지고 해체된다. A는 이호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 위해 차에 자기 몸을 던지는 일을 지속해온 아이인데, A가 죽던 그 날 밤 차에 깔리고 짓밟혀 마치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이 보였던 그 소년은 결국 그 날 새벽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을 보고 가출팸 ‘우리 집 아이들은 이성이 마비되어 신고를 말리고 심지어는 사체를 산에 가서 매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인 나는 그 아이들이 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신고 후 따라올지 모르는 온갖 낙인이 두려웠으리라. 불필요한 오해가 두려웠으리라. 다시는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휩쌓였으리라.(막연한 희망의 좌절).

결국 사건이 드러나고 경찰 수사 및 법적 처분이 드러난 이후 인수와 혜연을 제외한 아이들은 8, 10호 처분을 받고 소년원에 송치된다. 그 과정에서 인수는 유일하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그의 가 자신의 재력을 통해 값비싼 변호사를 선임한 덕분에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으나 그런 아버지에게 질린(사랑과 걱정이 아닌 자신의 명예만 생각하는) 인수는 결국 집을 다시 나가게 된다.

 

 아버지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저도 보통의 아이들처럼 순하게 살고 싶어요.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도 불편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싶은데요.
아빠한테 조금 더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거든요. 내 방에서 자고 싶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어요.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분식집의 테이블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갑작스러운 행패에 당황한 분식집 아줌마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옆 테이블의 의자도 쓰러뜨렸다.
학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분식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테이블 모서리에 발등이 찍힌 아버지가 윽,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곧장 몸을 일으켜 내 뺨을 힘껏 내리쳤다. 귀가 먹먹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덕에 재판장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감동적이기보다는 너무나 견디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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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인과 판사는 내게 죄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나만은 알고 있었다.
내가 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좁은 캐리어 안에 웅크린 자세로 굳어가던 A가 화석처럼 내 영혼에 새겨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추위에 시달리며 내가 외면한 A를 줄곧 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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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출팸의 분명 비이성적이었고 너무나 위험하고 불안정했으나,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싶다. 그들을 그렇게 내몬 것은 사랑과 관심, 따뜻한 손길을 표현하지 않은 어른들과 사회의 잘못이 아닐까. ‘ 경우가 가출팸의 그 어떤 아이보다도 인수에게 가장 큰 의지가 되는 존재였던 것처럼, 인수가 이호에게 기꺼이 집을 내주고 사랑과 걱정을 표현한 것처럼,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그저 손을 잡아주고 사랑과 걱정, 진심을 표현하는(비록 혼을 내더라도 사랑을 담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 존재 한명이 그들의 세계에 전부가 되는 것일지 모른다.

 인수, 이호, 경우, 성연........그들의 세계를 조금쯤 따뜻하고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 한 개인으로, 어른으로 자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린 나이에 그 외로움과 처절한 몸부림을 겪어낸 그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다.

 몰입감있고 가독성있어 편안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들의 서사를 따라가며 종국에는 다소간 무겁고 먹먹해진 이 책을 주변의 많은 어른들-특히 교사(교육자), 상담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한때 청소년이었던 나를 떠올리는 한편 전문상담교사로서 내가 만날 이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치는아이들을 어떻게 상담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던 책이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작품이었다. 또한 작가님의 의도일지 모르겠으나....... 영상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영화로 제작되기를 소망해 본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갈 비밀이라면, 아직도 종종 집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

일년에 한번쯤, 대체로 사람이 없는 늦은 밤을 노렸다.아버지는 주로 차를 지하 1층 주차장에 댔다.
술을 한병 먹고 낫 날카로운 자갈이나 열쇠로 몰래 아버지 차를 긁어놓고 재빨리 도망쳤다.
아버지가 홧김에라도 나를 찾아와 눈물이 날 만큼 혼쭐내는 상상을 했다.
옥탑방으로 쳐들어와 멀쩡한 집 놔두고 왜 밖에서 개고생이냐며 거친 손길로 대강의 짐을 챙겨 차에 태우는 상상도 했다.
반강제적으로 집으로 끌려 들어가 불편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성대고 있으면 어머니는 감격한 표정으로 내 등을 감싸 안으리라.

그들은 내가 꿈속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나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

 

-249250.

 

이호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느 쭈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뭐가.”
“누가 내 신발 끈 묶어주는 거요.”
나는 멈칫했다.
“어릴 때. 누군가가 묶어줬을 거야. 네가 기억 못할 뿐이지.”
나는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요.”

- 256257.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심연에서 바람이 휘돌며 서서히 내 몸을 녹였다.
이런 온기를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막상 따스함을 느끼니
내게는 이런 온기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 258.

 

 

 

 

 
by papyros 2023. 4. 1. 11:43

백온유, 『유원』, 창비, 2020.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창비사전서평단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유원> 가제본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창비 측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성장소설.성장이란 내게 어떤것일까. 입사식 소설, 이니에이션 소설, 통과제의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성장소설에는 흔히 소년/소녀나 청년 초기의 인물들이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내가 중학시절부터 애착을 지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데미안』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스쳐지나가듯 데미안이 언급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으며 또한 유원에게도 데미안은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 아마 작가님에게도 그러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는 성장과 관련된 작품서사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년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애정을 지니고 있는『해리포터』 외에도,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은 내 삶에 진정한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 사전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미 서른이 된 마당에 20대의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지만, 아직도 성장의 화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나의 내면이,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과 유사하게, 『유원』의 주인공인 유원도 언뜻 평범해 보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인 유원이 고작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12년 전, 집에 불이났을 때 언니가 유원을 구하기 위해 11층 아래로 던진 덕에 길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유원을 구한 덕에 유원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열일곱이던 언니예정은 동생을 구하고서 본인은 결국 불길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언니와 같은 나이의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유원의 뒤에는 늘 그 사건이 맴돌았다.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서 나온 언니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거실을 보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현관 쪽으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욕실로 들어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이불에 물을 부어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내 방 창문을 열어 베란다 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와 얇은 합판으로 분리되어 있던 내 방의 베란다까지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신고한 것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파트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11층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을 것이다. 언니는 수건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사람들은 검게 치솟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생존자를 보고 탄식했다. 불길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까지 덮쳐 오고 있었을 것이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31.

 

 

 특히 집에 불이났던 그 사건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유원이 성장한 이후에도 늘 유원이 12년 전 겪은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유원은 암묵적으로 불쌍한 아이이자,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유원의 삶에 당위성으로 작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책임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픔을,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슬퍼해야 한다는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또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통해 평생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인데, 유원에게는 그러한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의무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심지어 진로마저도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길 등이 제시되는데,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나는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우친 것처럼. 나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눈빛과 목소리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도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83.


중학교 때부터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학원에 갔다. 엄마 아빠가 강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기 주도 학습이 불가능한 나 같은 애는 엄격한 학원에 가야 성적이 오른다는 것을 좀 일찍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00.

 

 

  이처럼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워야 마땅할 청소년기에 유원에게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감은 결국 유원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예정의 오랜 친구인 신아언니인데, 기실 유원은 신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며 무엇보다 유원에 대한 신아의 지나친 걱정과 과보호가 관계를 지배하다보니, 유원과 신아의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바람직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유원은 아직까지도 사고 당시에 대한 반복적인 꿈을 꾸는 등 유년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PTSD를 겪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유원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과 더불어 진정한 관계가 결여 되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마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서 나를 움켜쥐려는 불길이 돋아나고 있었다. 화염 너머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지펴지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 방에서 엄마 아빠가 잠든 방으로, 혹은 내 꿈에서 십이 년 전 나와 언니가 잠든 거실로 아무렇게나 옮겨붙는 불길을 나는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아는 꿈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서야 꺼지는 꿈.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14.

 

 

  특히 유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원에게는 자신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숨지고 말았던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친 신씨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늘 무언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신씨 아저씨의 모습이 유원에게는 불편하게 비추어진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6.

 

  작품 속에서 유원의 삶과 내면을 변화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수현인데, 수현은 학급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친구이며 동시에 옥상 마스터키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서글서글한 학생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또한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한 면면이 드러나는데, 수현과의 관계속에서 유원은 삶에서 최초로 평범한 우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유원과 유원의 가족을 포함하여, 외상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이 평범성에 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평범치 않은 고통을 맞이했기에, 옆에서 건네주는 말 한 마디,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너무 붉어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넋을 잃게 만들었다. 만약 상처를 받아 취약해져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위로를 받거나, 혹은 이걸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69-70.

 


  내 방에는 정말 별게 없었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덮자마자 잠이 몰려오는 마법 같은 푹신한 극세사 이불, 정도. 수현은 많은 아이들의 방을 구경했겠지. 내 방은 평균은 될까. 그 이하일까. 다른 애들은 친구 방에서 뭘 하고 놀지. 커다란 앨범에 있는 유치원 졸업 사진 같은 걸 보면서 깔깔 웃나. 너는 이런 책을 읽고 컸구나. 우리 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 있어. 너도 『데미안』 읽었니, 그러면서? 아니면 새로 나온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세상에 똑같은 색깔의 립은 없어. 이것저것 발라 보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거나.

  나도 수현의 집을, 수현의 방을 보고 싶었다. 왠지 수현의 방에는 구경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릴 때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잔뜩 있고, 서랍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이, 책상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수현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캘린더에는 친구 누구의 생일, 특별한 모임 날짜들이 체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94-95.

 

 

  주목할 만한 점은, 수현의 서사가 드러난 이후부터인데, 수현이 사실 유원을 구한 금정동의 호인이자 용감한 시민으로 평가받는 신의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유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수현과 유원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가온다.

  전술한 바 있듯 사실 유원과는 대조적으로 학교 내에서 반장을 맡으며 학급 아이들의 신망을 받기도 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그 어떤 구김살이나 그늘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수현에게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리한다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년이 넘게 유원의 가정에 기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도 했으니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 등이 교차하는 수현의 내면은 열일곱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결코 통합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그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그러나 수현이 결국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유원에게 공언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은 유원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Blos(1979)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이차적 개별화 과정 (secondary ndividuation process)’으로서, 유아기 시절 경험한 일차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나아가 부모와의 의존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심리적·정서적 독립을 이루는 데 발달 과제가 있는데, 수현은 이를 충분히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 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82-183.

 

 

  아버지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선언한 수현의 모습을 통해 유원의 내면에도 변화의 씨앗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 준 댓가로 지나치게 부모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언행이 부담스러움을 용기있게 고백하는 한편, 신아언니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직접 이야기하고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으로 인해, 유원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니 예정과 유원은 다른 인격체이며,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유원의 내부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진솔성과 용기가 유원에게도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그늘이, 그 불행한 사건이 내 탓’, ‘내 잘못이 아님을, 그것은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아주는 신뢰로운 관계 안에서,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통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24.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5-196.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89.

 

 

  문득 세월호 유가족분들, 4.3 5.18 희생자의 가족분들 및 여타 사고와 국가적 문제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분들께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이를 직면하여,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PTSD와 관련해 지나친 죄책감을 직면한 유원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당위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인식하였으며 이제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원이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진실한 개인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바,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자신이 선택한 삶만을 지향하며, 유원이 그 자체의 빛깔을 드러내기를 진실로 바란다.

 


 

“유원아.”

“네?”

아저씨는 무슨 말인가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너, 별로 안 무거웠다. 그냥…… 사람 몸은 원래 약하다. 다 잊어버려라.”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9.

by papyros 2020. 6. 30.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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