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베크만, 『브릿마리 여기있다』, 다산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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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2020년 6월, 영화 개봉 기념 다산북스 출판사 <브릿마리 여기있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다산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다산북스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브릿마리 여기있다>는 그의 첫번째와 두번째 소설인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 연작, <일생일대의 거래>와 같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2020년 6월, 2016년에 출간된 책이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했다. (해외에서는 2019년에 이미 개봉되었다.)

 기실 <오베라는 남자> 이후 <베어타운> 사전 서평단을 먼저 참여했으며 최근 함께하고 있는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에서 <우리와 당신들>을 읽어온 만큼, <오베라는 남자>의 출간 후 <베어타운>에 이르러 상당부분 문체가 정돈되고 인물서사와 시의성 면에서 다양한 메세지를 함의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최근작을 먼저 읽어온 바 있다.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경우 이미 전자책으로 도서를 소장해 온바 있으나, 이번 사전 서평단을 통해 종이책과 전자책을 교대로 읽어오면서 완독하게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느낀 바로 그 감정처럼, 나 또한 책의 도입부를 일독할 때만 해도 브릿마리라는 인물에 대해 결코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수동공격성이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할 정도의 강박적 성격, 결벽증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고용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직원을 힘들게 하거나 퇴근조차 시키지 않는 모습들에서 , 브릿마리를 '꼰대'와 같은 인물로 바라보고 젊은 고용센터 직원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릿마리라는 인물의 서사가 소개되고 작품이 전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모되어갔다. 도입부에 너무 쉽게 낙인을 찍어버린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녀가 새삼스럽게 꼭두새벽부터 고용센터에 찾아가고 그토록 직원을 귀찮게 하며 간절히 구직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녀가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 , 그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언니 잉그리드의 사후 부모님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에 대해 인정받으려 부단히 애썼던 브릿마리는 어머니의 장례 이후 사무친 슬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켄트에게 기대며, 처음에는 켄트의 형인 알프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알프와 이별하고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브릿마리를 선택한 켄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집안에서 켄트의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독립시킨 이후 그녀 나이 60대 -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목도한 것은 '켄트의 불륜'이며, 그녀는 결국 크나큰 무망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집을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즉 브릿마리는 일평생을 자신의 욕구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성장시켰으며 또한 남편 '켄트'로부터 수많은 무시 (가령 브릿마리가 일을 하고자 하면 그만한 급여에 해당하는 자금을 자신이 준다며 가사일에 충실하라고 하는 등)를 감내해오며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왔는데, 켄트의 불륜은 그러한 그녀의 노력과 책임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브릿마리 씨, 40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거기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40년 동안 일을 했어요. 살림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제와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한 때는 신경 썼다는 건 안다. 그가 그녀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켄트의 아이들은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라고, 성인들은 브릿마리 같은 여자들을 가리켜 '잔소리꾼'이라고 한다. 가끔 같은 블록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 이사 올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면 브릿마리가 어쩌다 한 번씩 저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나 할머니가 등장하기 마련이었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 브릿마리는 '잔소리꾼'이 되었다. 켄트에게 계속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오니 그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겼다. 그의 인생이 그녀의 인생이 되었다. 그녀는 그런 데 재주가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누구라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법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읽은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상작인 강화길 작가님의 <음복(飮福)>이나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 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릿마리 역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남편'이나 '자녀'들을 더 우선시하며 자신의 진정한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르그'라는 -거의 폐허와도 같은- 작은 도시의 레크레이션센터 관리직에 취직되는 순간 , 그녀의 삶에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데, 그녀가 켄트와 함께 살며 느꼈던 무망감이나 좌절, 허무함과는 달리 보르그에서는 그녀를 필요로하는 어린아이들이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브릿마리는 오롯한 '존재 가치' 를 느끼게 된다.  자기 내면의 고유한 원리원칙과 도덕관념에 의해 행동하는 브릿마리를 혹자는 '강박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르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특히 브릿마리가 '새미, 베가, 오마르' 3남매에 대한 애정을 가꾸어 나가는 부분은 작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서사였는데, '사이코'와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반사회적인 청소년으로 인식되는 새미를 주변의 평가에 의해 바라보지 않고, 커트러리(테이블에 쓰이는 은기류의 총칭, 식사용 기구로서 나이프 세트(Knife Set), 포크(Fork), 스푼(Spoon)을 이름.) 를 바르게 정리하는 면모나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새미의 사연을 듣고 그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바로 브릿마리였다. 그녀가 비록 자신의 기준에 의해 완고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는, 직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내면에는 진정성이 자리해 있었다.

  도입부 고용센터 직원에게 연필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표현과 전달에 서툴지언정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어린 마음과 따뜻한 시선이 드러난다.



"이거 받아요." 브릿마리는 연필을 건넨다. 아가씨가 당황스러워하며 연필을 받자 연필깎이 한 쌍도 마저 건넨다. 하나는 파란색이고 하나는 분홍색이다. 그녀는 연필깎이를 턱으로 가리킨 다음 전혀 편견이 없는 태도로 아가씨의 사내 같은 헤어스타일을 턱으로 가리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두 색 다 샀어요."

 


 "당신은 편견이 없잖아요. 날 인간으로 대하잖아요. 어쩌다보니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인간. 어쩌다보니 인간을 태우게 된 휠체어로 대하지 않고." 그녀는 브릿마리의 팔을 토닥이며 덧붙인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브릿. 같은 인간이라서."


"그 사람들한테 커트러리 서랍을 보여주면 되잖아! 너도 신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면 되잖아!"

"고맙습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러한 브릿마리의 진정성에 대해 아이들은 편견 없는 순수한 시선으로 그녀를 수용하는 것으로 답하는데, 아이들은 그녀의 부족한 면모를 채워주며 브릿마리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파이어릿의 동성애에 대해 염려하며 배려하려는 브릿마리에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하는 파이어릿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편견없고 순수한 시각이 브릿마리의 닫혀있고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씩 열여주지 않았나 싶다.

 한편 아이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켄트'의 귀환에 따라 , 남편 켄트를 따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따뜻하고 진정어린 사랑을 전해주는 경찰관 '스벤'과 새로운 사랑을 함께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브릿마리의 심리묘사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스벤과의 사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결국 브릿마리가 그 어느집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결말(켄트와도, 스벤과도 함께하지 않는 결말)이 그려진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브릿마리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친언니 잉그리드의 그늘 밑에서, 잉그리드의 사후에는 부모님의 기대를 위해, 결혼 이후에는 켄트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보르그에서는 축구팀 아이들을 위해 늘 누군가를 위하는 삶만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뒤로해 온 삶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적이 없는 것이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 본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반문은 작중 브릿마리에게도, 그리고 이를 읽는 그 너머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축구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한 브릿마리는, 이제 작품 도입부 무망감과 허무함에 휘감겨있는 그녀도 아니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왔던 어린아이도 아니다.  직접 그녀가 나아갈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보르그의 아이들로부터 받은 진정한 '선물'이라 여겨진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브릿마리는 운동복에 과탄산소다를 뿌리고 맹렬하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쏘아붙인다.

베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머뭇거린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브릿마리가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어른들과 달리 온몸으로 손을 흔든다. 아침이 보르그에 찾아오지만 태양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시간, 난생 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자제하며 지평선 위에서 공손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햇살이 지붕 위로 쏟아지자 파란 문이 달린 하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칼 구스타프 융(Carl J. Jung)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self)'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방향성이며 최종 목적지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실현과정' , '개성화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특히 중년기에 '자기'의 변화 국면을 맞이하며, 자기 내부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작품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추구하는 개성화과정과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지는데, 브릿마리의 자기실현(개성화)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한편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통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이나, 끈끈한 가족애의 경우는 <브릿마리 여기있다>를 발판으로 하여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더욱 확대된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이 작품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세계를 더욱 확대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오베라는 남자>부터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일생일대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고 다시금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브릿마리의 이후 행보는 어떠할지, 프레드릭 베크만은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인물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게 된다.

 특히 영화가 개봉된 만큼,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영화로는 어떻게 구현했는가를 비교하며 작품의 여운을 오래 지니고 싶다.

 약 470 페이지에 걸친 브릿마리의 서사를 통해 그녀의 내면에 더욱 깊이 다가가 브릿마리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될 인물들 역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서사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파악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해."

by papyros 2020. 7. 21. 2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