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열린책들, 2020.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이리스 이벤트에 당첨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후기입니다.

(이리스(Ebook Readers Society)카페 운영진분들과 열린책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리스 '내손으로 고른 서평책 (feat. 열린책들)' 이벤트 :  cafe.naver.com/bookbook68912/74256

 

 


 ‘가브리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롤린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예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1막 제4장」, 『심판』, 열린책들, 2020.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개미』를 통해 한국 사회에는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작가이며 작품의 팬층이 두터울 정도이지만, 유년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나는 그의 소설 『개미』를 읽다가 미처 완독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라는 작품 역시 청소년기에 구입 후 미처 완독하지 못한 채 내 방 책장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대학 시절 잠시나마 법학 부전공을 할까 생각하며 법학개론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나름 법과 정치, 정의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바, 『심판』이라는 작품 제목은 나를 매료시켰다. 표지 디자인 또한 파란색에 디케의 눈을 그린 작품의 표지도 매혹적이였으며,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의 저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는 다소간의 걱정거리였다. 내가 과연 이 작가의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작품은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인 ‘아나톨’이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워댄 결과 폐암 수술 중 수술이 잘못되어 코마상태에 빠지며 시작한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아나톨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의 상황을 수용하면서,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사인 ‘카롤린’과 검사 베르트랑 사이에 놓여 그의 마지막 생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설정을 통해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묘사된 것처럼 동양, 우리네 설화 속에도 사후세계에 이르러 여러 관문을 거치고 업보(業報)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상상력이 존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집단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장에서 판사 ‘가브리엘’의 법봉 아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아나톨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한다.

 


 ‘아나톨 제 삶이요? 음…… 저는 꽤 좋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아내에게 충실했죠. 그리고 좋은 가장이었어요. 사람들한테 지갑도 잘 열었고요. 일요일마다 미사에 가는 가톨릭 신자였고, 윗사람과 동료에게 인정받는 좋은 직업인이었죠.’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2, 심판, 열린책들, 2020.

 

 특히 지상에서 판사였던 아나톨이 이제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사후세계의 판관에게 심판받고 있는 상황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후의 심판 기준은 지상에서의 기준처럼 그가 가정에 충실했으며 인심이 좋았는지, 판사로서 이룬 직업적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상의 기준과 다른 사후의 기준은 그가 아나톨 피숑으로 살기 이전, 그의 앞선 생들이 살아가며 이루지 못한 삶의 지향점들을 충분히 이루었는가에 있다. 즉 그에겐 그의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고유한 ‘카르마’가 존재하는데 아나톨 피숑이 스스로 그의 카르마와 삶의 지향점을 선택했으나 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1, 심판, 열린책들, 2020.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꿈을 배신했어요.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손가락으로 아나톨을 가리키며)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전혀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2, 심판, 열린책들, 2020.

 

 심리학에서 흔히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유명한 유전과 환경 논쟁이 유명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유전과 환경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삶의 자국을 남기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있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통해 결정된 선택들만이 유전과 환경(카르마)를 극복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아나톨 피숑이 지난 생애의 끝에서, 자신이 선택한 ‘배우’라는 꿈과 운명의 배우자를 좇아 가지 않고, 예술인으로서의 삶보다는 ‘판사’로서의 삶을 택한 것을 우리는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비록 신의 의도에는 어긋난 선택일지 모르나, 소명(召命)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후세계의 심판대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검사측의 논리와 판사의 구형이유보다는 아나톨의 수호천사이자 그의 변호사를 자처했던 카롤린의 논리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가 한 선택들은 수백만의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재판장님. 단 한 번도 잘못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자만이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4, 심판, 열린책들, 202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말미, 아나톨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달픔과 지난함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삶의 형’이 구형되었음에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고 사후세계의 판관으로 남기를 원한다. 사실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나톨은 알콜중독자 부모에게 태어나 학대를 이겨내고 법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내세를 선택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삶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나톨의 선택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사후세계의 판사를 역임해왔던 가브리엘은 이제는 다시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고 싶다며 아나톨을 대신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자처한다.

 아나톨과 가브리엘의 모습은 죽음 그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우리 내면의 양면성이 두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드라마 우리에게 내생이 있다면, 다시금 사람으로 태어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과, 지상에서의 삶을 다시 영위하기에는 너무나도 두렵고 힘든 양가감정.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면의 여러 갈래들 중,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올곧이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유전의 영향이든, 환경(카르마)의 영향이든, 혹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이 선택한 자유의지든. 나름의 당위성을 지니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충실히 살아왔다면 아나톨처럼 사후 심판의 순간에서 내가 만들어온 삶의 결(존재의 서정성)을 인정해주고 뒤에서 지지해 온 수호천사의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것을 선택하기도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어떤 모험도 하지않는 삶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그 어떤 인물도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심지어 아제미앙 교수까지도.) 카롤린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서 늘 완전무결한 판결을 내려온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에. 무수한 선택의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에.

 나는 앞으로의 생에서 아나톨처럼 자신이 믿는 가치를 향해 올곧이 나아가는 한편 가브리엘처럼 지금까지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필요할 경우 누군가를 대신해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기실 내가 만 스물여덟 평생을 들여 지금껏 추구해 온 ‘교사’라는 삶의 목표가 과연 내가 선택한 카르마의 강렬한 영향일지, 혹은 카르마를 거스름에도 불구하고 내 고유한 이성이 발현한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일지 이 지상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까짓것 무슨 상관이랴. 내가 믿는 ‘올바른’ 방향이 있다면 언젠가 천상의 누군가는 날 변호해 주리라 믿어본다.

 


‘당신이 모험을 계속할 마음이 생기게 만들려는 거예요. 당신의 영혼은 젊다는 걸 기억해요. 어린아이 같죠. 그 영혼이 너무 비좁은 껍질 속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하게 내버려 둬야 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1막 제8, 심판, 열린책들, 2020.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 이 짧고도 강렬한 작품은 작품을 읽는 시간보다 이 작품을 곱씹고 자기만의 메시지로 체화하는 시간이 훨씬 걸리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과 행동 동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한편, 「옮긴이의 말」에서 표현된 것처럼 아나톨 피숑의 수술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료계 인력부족 문제, 연로한 환자를 위해 안락사를 자처한 간호사에게는 중형을 내리는 반면 살인자는 방면한 사법계의 정의문제, 아나톨의 자녀들을 통해 드러나는 데이트폭력과 청년세대 문제, 바칼로레아의 권위와 목적 상실 등 교육부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등 프랑스 사회 의료계, 교육계, 사법계의 문제를 위트 있게 지적하고 있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 역시 쉽게 한국 사회의 의료, 교육, 사법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의대 설립과 관련한 의료계 파업. 지방쪽 의료계 인력부족, 수능으로 인한 입시위주의 교육제도, 성폭력 범죄자의 12년 형으로 인한 출소문제와 대책마련, 사법계의 공정성 등……,)

 이처럼 이 작품은 문학작품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본연의 요소인 작품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서도 실은 그 이후 생각의 과정을 오래 머금게 하는 작품이기에, 나는 이 작품을 수작(秀作)으로 꼽고 싶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작품들(『고양이』, 『기억』, 『잠』, 『나무』 등)을 더 읽고싶다는 생각이 든 만큼,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와의 제대로 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될 책이 될 것으로 의미가 크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당신의 내생을 위한 이상적인 여정을 우리가 함께 고를거니까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3막 제1, 심판, 열린책들, 2020.

 


지상에서 유람 잘하고 와요.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카르마를 잊지 말아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3막 제5, 심판, 열린책들, 2020.

 

 

by papyros 2020. 9. 26. 00:2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