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내 꿈은 말이야, 저 별처럼 한결같이 살고 싶어. 길 잃은 누군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 말이야."

"그게 바로 선생님이네. 혜정이는 천직을 잘 찾은 것 같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28쪽. 

 

  최근 '빈빈책방'이라는 인문사회서적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대해 알게되어 출판사의 책을 찾아보다가, 최강문 작가님의 『다시, 광장』 이라는 책을 접한 뒤,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기실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최인훈 작가의 소설, 『광장』이었다. 책에 대한 깊은 정보 없이 제목과 역사소설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읽게 된 작품이다보니 처음에는 『광장』을 패러디한 소설이려나?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작품의 중간에도 최인훈의  『광장』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긴 한다. 뒤에서 후술토록 하겠다.)

  작품은 1984년부터 1997년 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신군부의 독재가 이어지던 1984년, 대학생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한복판을 살아간  당시의 20대 청년들. 84년 대학 신입생이 된 인석, 혜정, 용우, 수홍, 현태. 그들 모두는 2010년대의 20대로서 대학생활을 해 온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대학생으로서 청년기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했고, 사회문제에 깊이있게 고민했으며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옳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20대였다. 특히 작품의 초반부에 나는 그들 중에서도 국어교사를 목표로 하는 혜정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교직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있는 혜정과 같이, 나도 중학시절부터 평생 국어교사를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할텐데, 어떻게하면 좋은 책을 잘 고를 수 있을까요?

혜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춘길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독서 모임을 해봐. 주기적으로 만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음 책을 무엇으로 정할지 서로 의논도 하고. 그러면 정말 도움이 될 거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3쪽.

 

 친구들이 춘길 선배의 추천으로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는 대목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유년시절부터 책을 즐겨읽어왔고, 대학 시절 가장 먼저 들었던 동아리가 대학 연합 독서토론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1980년대의 20대들도 2010년대의 20대와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지식과 생각, 가치,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서모임을 지속했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광장』… 우리도 학창시절 성장 과정에서 당대 사회현실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수없이 공부해 온 작품들을, 작품 속 친구들 또한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바로 보기 위해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필적이 닮았다? 유태인이다? 그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아?"

"맞아 수홍아.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진상을 계속 은폐하기만 했대. 법원도 군부의 편을 들어 거짓을 지키기 위해 진범 스파이를 무죄 석방하기까지 했어. 그러자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6쪽.

 

 


"넌 책도 다양하게 읽는구나. 교양서적하며, 소설책도 많이 있고. 최인훈의 『광장』, 나도 있는데. 이데 올로기가 뭐라고 그렇게 남과 북이 아닌 제 3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소설 읽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 결국에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좇아 푸른 바다로 투신하잖아.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율도국을 찾아 떠난 홍길동 이야기도 생각나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곳이잖아? 멀리 있을 이상향이 아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9쪽.

 

 


 "아, 그런 이야기도 나왔어? 비록 소설 형식이기는 하지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었던 셈이야. 청계천 알지? 지금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그곳이 60년대 말까지 난쟁이라고 표현된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살았던 곳이었어. 70년대 초 개발 바람이 일면서 정부에서 다 쫓아냈지. 그래서 그들이 간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 지금의 성남시. 소설에도 나오잖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42쪽.

 

 그러나  MT장소에서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중 그들을 의심하던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북한서적 아니냐, 혹은 막스 베버를 마르크스로 착각하는 형사의 이야기... 이 시대의 20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유롭고 편안한 가운데 독서모임을 하는 것과 달리 80년대의 청년들에게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수한 독서모임이 '운동권'이나 '간첩'으로 의심받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은 나름의 변화나 내적 갈등들을 겪으며 그들 삶의 경로는 각각 변하게 된다.

  인석은 한국대(서울대의 소설 속 명칭) 사회학과를 다니는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던지며 운동권의 선두에 앞장서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종국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법대생인 용우는 더욱 철저히 권력을 지키고 힘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 사법시험에 매진해 검사가 되고, 혜정은 교사가 되었으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해직되기까지 한다. 현태는 옥상에서 사고를 당한 후 장애를 지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진실을 좇는 기자가 되었으며, 수홍은 안기부(국정원)에 입사했으나 그럼에도 친구들을 저버리지 못한다.

 각기 처한 상황과 선택은 다르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각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니고 격동의 80년대에 대응해왔다. 자신을 내던지고 독재정권에 열정적으로 투쟁한 인석이나, 전교조에 가입하는 등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혜정과 비교하면 용우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용우마저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한 청년으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서른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내가, 2010년대가 아닌 그 당대의 대학생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인석이나 혜정같은 용기도, 그렇다고 용우나 수홍처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두려운 나는 이 작품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인 90년대생의 나로서는 살아가보지 않은 80년대 청춘들이 겪은 고뇌의 깊이와 선택에 대해 감히 함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그저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었으며,(스무살에서 12년이 지난 후에도 3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하다.) 운동권으로 학생운동을 해왔다고 해서 , 노조에 가입했다고 해서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정치검사나 안기부 직원이라 하여 극우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모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청년들은 각자 자기만의 신념과 가치로 삶을 살아내고 버텨왔을 뿐이다.

 


"학생운동?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 않더라구. 군사독재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가진 자는 더욱 갖게 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은 더욱 굶주리는 그런 구조를 깨닫고 나서는 그냥 눈 감고, 귀 먹고 벙어리로 살 수가 없더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난 세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 94쪽.

 

 


"오빠야가 출세해가 돈 벌면 안되나?"

"물론 그렇게 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당장 이 동네 이웃들은? 나 혼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벽을 허물어서 다 함께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야."

"나는 오빠야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꼭 생각해주어야 되나?"

"인옥아, 난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이 학생 운동의 목표이고, 또 민주화운동의 지향점이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62쪽.

 


"세상이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지만, 돈과 권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잖아요. 그 친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거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서령씨도 풍물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가요?"

"풍물을 하면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아요. 더없이 기쁘죠. 게다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요? 용우씨야말로 인생의 목표가 무언지 묻고 싶네요."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91쪽.

 이 소설은 정치적 신념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고뇌와 선택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며 동시에 90년대생인 내가 80년대 독재정권 시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유의미했다. 교과서, 책,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80년대 독재정권 시절과 현대사회의 역사에 대해 배워왔으나 교과서의 한 줄로 접해온 것이나, 다른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청년들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그만큼 흥미롭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또한  청년들이 실존인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품이 생생했으며 가독성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의 청년들은 바로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세대이자, 정치인들의 모습이리라 여긴다.

 다만 결말부가 조금 아쉬웠는데, 작품의 인물소개글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뒷이야기나 자세한 고민, 반전 등이 작품 속에 담겨있지 않았다. 때문에 97년에 이어 98년부터 2020년까지를 다룬 후속 권이 나오지 않을까 추정하는데, 이 청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과연 그들의 우정은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 궁금증이 앞선다. 계속되는 내용이 기대되는 한편 마음에 남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오래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잘들 한번 찾아보세요.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 모습일 수도 있고,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겠습니까?"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43쪽.

 

by papyros 2020. 9. 27. 19:41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열린책들, 2020.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이리스 이벤트에 당첨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후기입니다.

(이리스(Ebook Readers Society)카페 운영진분들과 열린책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리스 '내손으로 고른 서평책 (feat. 열린책들)' 이벤트 :  cafe.naver.com/bookbook68912/74256

 

 


 ‘가브리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롤린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예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1막 제4장」, 『심판』, 열린책들, 2020.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개미』를 통해 한국 사회에는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작가이며 작품의 팬층이 두터울 정도이지만, 유년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나는 그의 소설 『개미』를 읽다가 미처 완독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라는 작품 역시 청소년기에 구입 후 미처 완독하지 못한 채 내 방 책장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대학 시절 잠시나마 법학 부전공을 할까 생각하며 법학개론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나름 법과 정치, 정의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바, 『심판』이라는 작품 제목은 나를 매료시켰다. 표지 디자인 또한 파란색에 디케의 눈을 그린 작품의 표지도 매혹적이였으며,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의 저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는 다소간의 걱정거리였다. 내가 과연 이 작가의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작품은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인 ‘아나톨’이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워댄 결과 폐암 수술 중 수술이 잘못되어 코마상태에 빠지며 시작한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아나톨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의 상황을 수용하면서,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사인 ‘카롤린’과 검사 베르트랑 사이에 놓여 그의 마지막 생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설정을 통해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묘사된 것처럼 동양, 우리네 설화 속에도 사후세계에 이르러 여러 관문을 거치고 업보(業報)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상상력이 존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집단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장에서 판사 ‘가브리엘’의 법봉 아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아나톨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한다.

 


 ‘아나톨 제 삶이요? 음…… 저는 꽤 좋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아내에게 충실했죠. 그리고 좋은 가장이었어요. 사람들한테 지갑도 잘 열었고요. 일요일마다 미사에 가는 가톨릭 신자였고, 윗사람과 동료에게 인정받는 좋은 직업인이었죠.’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2, 심판, 열린책들, 2020.

 

 특히 지상에서 판사였던 아나톨이 이제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사후세계의 판관에게 심판받고 있는 상황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후의 심판 기준은 지상에서의 기준처럼 그가 가정에 충실했으며 인심이 좋았는지, 판사로서 이룬 직업적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상의 기준과 다른 사후의 기준은 그가 아나톨 피숑으로 살기 이전, 그의 앞선 생들이 살아가며 이루지 못한 삶의 지향점들을 충분히 이루었는가에 있다. 즉 그에겐 그의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고유한 ‘카르마’가 존재하는데 아나톨 피숑이 스스로 그의 카르마와 삶의 지향점을 선택했으나 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1, 심판, 열린책들, 2020.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꿈을 배신했어요.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손가락으로 아나톨을 가리키며)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전혀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2, 심판, 열린책들, 2020.

 

 심리학에서 흔히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유명한 유전과 환경 논쟁이 유명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유전과 환경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삶의 자국을 남기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있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통해 결정된 선택들만이 유전과 환경(카르마)를 극복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아나톨 피숑이 지난 생애의 끝에서, 자신이 선택한 ‘배우’라는 꿈과 운명의 배우자를 좇아 가지 않고, 예술인으로서의 삶보다는 ‘판사’로서의 삶을 택한 것을 우리는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비록 신의 의도에는 어긋난 선택일지 모르나, 소명(召命)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후세계의 심판대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검사측의 논리와 판사의 구형이유보다는 아나톨의 수호천사이자 그의 변호사를 자처했던 카롤린의 논리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가 한 선택들은 수백만의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재판장님. 단 한 번도 잘못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자만이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2막 제4, 심판, 열린책들, 202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말미, 아나톨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달픔과 지난함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삶의 형’이 구형되었음에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고 사후세계의 판관으로 남기를 원한다. 사실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나톨은 알콜중독자 부모에게 태어나 학대를 이겨내고 법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내세를 선택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삶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나톨의 선택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사후세계의 판사를 역임해왔던 가브리엘은 이제는 다시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고 싶다며 아나톨을 대신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자처한다.

 아나톨과 가브리엘의 모습은 죽음 그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우리 내면의 양면성이 두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드라마 우리에게 내생이 있다면, 다시금 사람으로 태어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과, 지상에서의 삶을 다시 영위하기에는 너무나도 두렵고 힘든 양가감정.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면의 여러 갈래들 중,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올곧이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유전의 영향이든, 환경(카르마)의 영향이든, 혹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이 선택한 자유의지든. 나름의 당위성을 지니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충실히 살아왔다면 아나톨처럼 사후 심판의 순간에서 내가 만들어온 삶의 결(존재의 서정성)을 인정해주고 뒤에서 지지해 온 수호천사의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것을 선택하기도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어떤 모험도 하지않는 삶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그 어떤 인물도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심지어 아제미앙 교수까지도.) 카롤린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서 늘 완전무결한 판결을 내려온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에. 무수한 선택의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에.

 나는 앞으로의 생에서 아나톨처럼 자신이 믿는 가치를 향해 올곧이 나아가는 한편 가브리엘처럼 지금까지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필요할 경우 누군가를 대신해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기실 내가 만 스물여덟 평생을 들여 지금껏 추구해 온 ‘교사’라는 삶의 목표가 과연 내가 선택한 카르마의 강렬한 영향일지, 혹은 카르마를 거스름에도 불구하고 내 고유한 이성이 발현한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일지 이 지상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까짓것 무슨 상관이랴. 내가 믿는 ‘올바른’ 방향이 있다면 언젠가 천상의 누군가는 날 변호해 주리라 믿어본다.

 


‘당신이 모험을 계속할 마음이 생기게 만들려는 거예요. 당신의 영혼은 젊다는 걸 기억해요. 어린아이 같죠. 그 영혼이 너무 비좁은 껍질 속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하게 내버려 둬야 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1막 제8, 심판, 열린책들, 2020.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 이 짧고도 강렬한 작품은 작품을 읽는 시간보다 이 작품을 곱씹고 자기만의 메시지로 체화하는 시간이 훨씬 걸리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과 행동 동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한편, 「옮긴이의 말」에서 표현된 것처럼 아나톨 피숑의 수술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료계 인력부족 문제, 연로한 환자를 위해 안락사를 자처한 간호사에게는 중형을 내리는 반면 살인자는 방면한 사법계의 정의문제, 아나톨의 자녀들을 통해 드러나는 데이트폭력과 청년세대 문제, 바칼로레아의 권위와 목적 상실 등 교육부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등 프랑스 사회 의료계, 교육계, 사법계의 문제를 위트 있게 지적하고 있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 역시 쉽게 한국 사회의 의료, 교육, 사법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의대 설립과 관련한 의료계 파업. 지방쪽 의료계 인력부족, 수능으로 인한 입시위주의 교육제도, 성폭력 범죄자의 12년 형으로 인한 출소문제와 대책마련, 사법계의 공정성 등……,)

 이처럼 이 작품은 문학작품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본연의 요소인 작품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서도 실은 그 이후 생각의 과정을 오래 머금게 하는 작품이기에, 나는 이 작품을 수작(秀作)으로 꼽고 싶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작품들(『고양이』, 『기억』, 『잠』, 『나무』 등)을 더 읽고싶다는 생각이 든 만큼,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와의 제대로 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될 책이 될 것으로 의미가 크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당신의 내생을 위한 이상적인 여정을 우리가 함께 고를거니까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3막 제1, 심판, 열린책들, 2020.

 


지상에서 유람 잘하고 와요.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카르마를 잊지 말아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3막 제5, 심판, 열린책들, 2020.

 

 

by papyros 2020. 9. 26. 00:2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