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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시대에 품는 소망’
-방민호, 『연인 심청』을 읽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겉에 보이는 대로, 사랑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줄 안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실은 사랑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인 것을, 그네들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연인 심청』, 166쪽)
작금의 한국 사회는 참으로 역동적이며 급진적인 사회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에서는 경영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학문이 각광받고 있으며 인문학 전공자들은 취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공부를 무엇 때문에 지속하느냐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회기에 더욱 문학과 예술을 대한 갈망 또한 기저에 잔존하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을 멘토로 초청해 좋은 강연을 듣기 원하고 멘토들이 추천하는 고전을 찾아 읽는다. 이는 우리들의 내면에 잠재된, ‘보편적 정서구조’와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 여러 고전 중에서도 <심청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계 소설인 <흥부전>, <춘향전>과 함께 여러 번 접한 작품이고 적지 않은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방민호 작가의 소설 『연인 심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이를 현대소설로 변용한 작품이다. 즉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근본에 두고는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변형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는 등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실 독자들에게 기존의 <심청전>에서 심청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해 인당수에 기꺼이 몸을 던진 ‘효녀’로 각인되어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의식 또한 심청이의 희생을 통해 유교적 윤리의식인 효(孝)를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효녀 심청의 모습은 분명 도덕적으로 칭송할 만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에게 있어 죽음을 통해 효를 다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혹은 극단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거리감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조차 ‘심청이는 과연 정말 효녀인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은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소설 『연인 심청』의 주인공 심청은 이와 다르다. 아버지를 위한 효성 때문에 무작정 인당수에 뛰어드는 효녀 심청과는 달리, 『연인 심청』의 심청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못지않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귀덕오라버니와 윤상오라버니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크다. 윤상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오랜 고민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 심학규를 위해 인당수에 뛰어든 것 또한 일방적인 효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에서 욕망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늘 쾌락을 추구하며 군자의 체면을 깎는 모습을 보이는 부친에 대해 원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는 것으로 삶의 마지막 소명을 이루자고 다짐한다.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삶의 과정에서 애증의 심정으로 부친을 원망하기도 하고, 윤상 오라버니와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는 심청의 모습은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독자는 『연인 심청』의 심청에게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
부친 심학규 또한 원전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심학규가 장님이 된 사연을 추가하며 심학규가 공맹의 도리를 익히던 선비의 자세에서 이탈하여 좌절하고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게 된 계기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여 인물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든 후에도 딸의 죽음에 대해 반성하기보다 기생 애랑이와 어울리고 뺑덕어멈에게 속으며 재물을 잃고 성병을 얻는 등 나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며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나 그러한 심학규의 나약하고 이중적인 모습은 독자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이중적 자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심청, 심학규 모두 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내면 안에 두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작품 후반부로 접어들면 심청이와 심학규가 본디 천계에서 유리선녀와 유형선관으로서 사랑을 나누었으나 옥황상제의 탕약을 빼돌린 죄로 적강하여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겪으며 부녀(父女)로서 살아간다는 적강 모티프를 삽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환상성을 배가 시킬 뿐 아니라 전생에서의 사랑이 이승에서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청이 죄를 모두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구원받을 수 없어 용왕께 다시 이승으로 올라가기를 간청하는 장면에서 심청의 사랑이 더욱 극대화된다. 또한 아버지를 먼저 구할 것이냐,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구할 것이냐는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단 한 번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먼저 살려 기쁨과 겸허 속에서 삶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에서도 심청의 사랑은 극대화 된다.
한편 연꽃을 발견하고 궁지기가 되어 심청과 재회했으나 심청을 지키고자 정희빈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윤상의 사랑 또한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부각되며 큰 여운을 남긴다.
심청은 전생에서 유형 선관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온 선관의 연인이었음과 동시에 윤상 오라버니에게 사랑받는 윤상의 연인이었다. 물론 심청이 개인의 행복만을 바랐다면, 자신의 사랑만을 추구했다면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살리고 아버지를 뒤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심청은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부친에게 희망과 기쁨이 있는 삶을 선물할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심청이가 소설의 끝 무렵까지 아버지(유형 선관)에 대한 사랑과 윤상 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가운데 갈등을 겪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어느 한 쪽의 가치를 취하여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해야 하는 험난한 선택을 경험하게 된다. 한 쪽을 살리면 한 쪽은 죽어야 하는 매정한 현실 가운데, 심청이의 선택은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 순수한 사랑이 진정한 가치임을 시사한다. 심청이의 이러한 사랑은 애랑이나 뺑덕 어멈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소설 『연인 심청』의 심청이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랑’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본의 논리 하에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지 못하고 수단으로 대하며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 곁에 함께 해 주기를 원한다. 고통과 좌절에서 혼자 벗어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의 모습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소망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야 말로 현대인의 옆에 자리한 진정한 ‘연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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