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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사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을 읽고
눈을 떠요. 라디오에서 프랑스 남자가 말했었다.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1권 136-137쪽.)
21세기가 되기까지 거대한 역사 속 한 개인의 행동은 모두 타율과 자율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역사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 갈등이 더욱 첨예했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전쟁 막바지인 1944-1945년을 주된 배경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적 배경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러 다른 연도들이 배치된다. 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그린 과거, 그리고 전쟁이 종식된 이후 성장한 후의 모습을 그린 2014년으로 작품이 끝나는 구조를 지닌다. 또 두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진행될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불꽃의 바다’라는 돌-이 돌은 소유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야기하지만, 소유자 자신은 영생을 누리게 한다. -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마치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연상하게 하면서 환상적 요소를 배가시킨다.
핵심 인물은 ‘베르너’라는 독일소년과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 이다. 독일과 프랑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적대관계에 있었던 양국의 소년소녀들이 어떤 접점으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인가.
두 아이들의 접점,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내적인 힘이 무엇인가 고민하건대 아마도 바로 아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성’이라고 본다. 전쟁이라는 절망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 ‘옳은 행동’에 대한 중요한 가치들을 잃지 않은 –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은 아이들이 바로 베르너와 마리로르였기 때문에 바로 두 사람 자체가 희망이 되지 않는가 싶다. 비록 베르너는 탄광도시 졸페라인에서 광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수리하고 기계를 잘 다루는 타고는 재능을 살리기로 결심하여 엘레나 아주머니, 그리고 소중한 어린 동생 ‘유타’를 두고 나치 치하 엘리트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기술과학 분야 하우프트만 교수의 눈에 들고 미래를 보장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귄 소중한 친구 ‘프레데리크’-새를 사랑하는 소년- 가 교수에게 부당함을 이야기 했다는 것만으로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 무자비하게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계기로, 학교에서 ‘시키는 것’ - 타율-이 아닌, 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율-이 옳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프레데리크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굴었던 건 베르너였고, 프레데리크가 – 싫습니다 하면서 – 물이 든 양동이를 바치에 내동댕이치는 걸 보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으며, 그 결과들이 비가 쏟아지듯 몰려올 때 그저 서 있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다. (2권 280-281쪽.)
선천성 녹내장 진단으로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소녀 ‘마리로르’는 비록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낸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많은 세상을 마주하도록 도와주시고 새로운 자극을 주시어, 마리로르는 앞을 볼 수 있는 여느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모든 생명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색깔, 향기를 생각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오신 덕분에 어느 곳에 사물이 있는지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박물관 열쇠 관리인인 아버지 덕분에 박물관을 구경하기도 좋아했고, 생일선물로 받은 책『해저 2만 리』를 탐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후 파리를 떠나 작은할아버지 댁인 생말로로 거취를 옮기면서 그녀의 삶에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전쟁의 분위기가 자욱한 회색 빛깔의 생말로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색깔은 바다에 갈 때,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이 절망을 극복하고 독일군몰래 숨겨둔 라디오를 꺼내 음악을 트는 순간이다. 마리로르는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독일군에게 저항해 라디오를 트는 작은할아버지 에티엔, 그리고 이를 전달할 수 있게 숫자를 받아오는 마네크 아주머니의 조력자임과 동시에, 작은할아버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독일에 협력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예요.”
바람이 훅 치고 들어온다. 마리로르의 마음속에서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반짝이다가, 바늘들을 끌어당겨선 그 가시들로 허공을 찌른다. 은색으로, 그 다음엔 초록색으로, 다시 은색으로.
“전 방법을 알아요.” 마네크 부인이 말한다.
“무슨 방법? 요새 들어 누구를 믿게 된 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믿어야 할 거예요.”
“자네 옆에 있는 그 사람의 팔다리에 자네와 똑같은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자넨 그 무엇도 믿어선 안 돼. 설령 그런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치더라도 자네가 싸우길 바라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야, 마네크, 체제지. 무슨 수로 체제와 맞서 싸우겠다는 건가?”
“나리가 해 보세요.”
(중략)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죠. 조카 손녀를 생각해 보세요. 마리로르를 생각해 보시라고요.” 커튼은 펄럭이고 서류들은 바스락거리며 두 어른은 서재에서 맞서 버틴다. 작은 할아버지의 방문 바로 앞까지 살금살금 간 마리로르 손이 문틀에 닿기 직전이다. 마네크 부인이 말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2권 88-89쪽.)
“나한테 아직 희망이 있네!” 에티엔이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마리로르는 작은할아버지가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지낸 것은 아님을, 이 전쟁 전에도 그전의 전쟁 전에도 그는 나름대로 인생을 살았음을 떠올린다. 그도 한때는 세상 속에 살았고 또 그녀 못지않게 그 세상을 사랑했던 청년이었음을. (2권 109-110쪽.)
‘베르너’와 ‘마리로르’ 그리고 이들 주변을 둘러싼 ‘프레데리크’, ‘유타’와 ‘에티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 자신의 존재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한 것이라고 본다. 베르너에게는 그것이 마리로르와 에티엔의 방송을 듣고 생말로를 찾아가 마리로르를 구해주는 것이었고, 마리로르에게는 에티엔 작은 할아버지가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프레데리크’에게 더 없이 귀한 것은 모든 ‘생명’이었고 때문에 한 생명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을 우선하여 사관학교의 교수에게 ‘싫습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였다. ‘에티엔’또한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 속 골방에 갇혀있었던 것을 극복하고 전쟁통에 다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라디오를 잡고 방송을 한다.
음악, 책, 라디오, 새 –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가치가 있었다는 것. 즉 타율적 삶이 아니라 자율적 삶을 살아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그 시대에 그저 순응하고 방관하며 살아갔던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참 용감해요.”
그녀가 양동이를 내린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2권 371쪽.)
소설 마지막 장, ‘2014년’ 에서 나오듯 전쟁이 끝난 수십 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마리로르의 손자 – 게임기를 잡고 있는 ‘미셸’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음악, 책, 라디오 – 과거 베르너와 마리로르, 에티엥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던 데 반해 현재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고전이 되어 버렸고, 지하철을 타면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 사용에 열중하고 있다. 좀 더 빠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좀 더 빨리 정보를 찾고 단 10초만에 SNS로 소식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만약 절망이 온다면,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인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가치, 내가 추구해야 할 무엇 –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나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 위해, 우리가 한번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게끔 하고자 이러한 장편의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람들이 저 아래 식물원 오솔길을 걸어 다니고, 바람은 생울타리를 누비며 송가를 부르고, 미로 입구에서 자라는 크고 늙은 삼나무들은 삐걱거린다. 마리로르는 그 옛날 에티엔 할아버지가 설명해 준 대로, 전자파가 미셸의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는 것을, 그들을 싸고 감도는 것을 상상한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천 배는 많이 종횡무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100만 배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빗발치는 문자, 파도처럼 들고나는 핸드폰 메시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메일에서 광섬유와 전선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도시 위아래로 얽힌 채 건물들을 지나고, 지하철 터널 속 송신기들을 활모양으로 잇고 무선 송신 장치를 내장한 가로등 기둥에서 나오는 가운데, 카르푸와 에비앙과 미리 구워 나온 토스터 페이스트리 광고들이 허공으로 번쩍이며 쏘아졌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나 늦을 것 같은데 예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보카도를 찾아 주세요. 그가 뭐라고 말했지? 1만 번의 당신이 보고 싶어. 5만 번의 당신을 사랑해. 아르덴 위로, 라인 강 위로, 벨기에 위로, 덴마크 위로, 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페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와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 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2권 458-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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