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고 생각잇기 5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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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민음북클럽 밑줄긋고 생각잇기모임도 마지막 주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주인 이번 5주차에는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사랑의 변주곡, 꽃잎1, 이렇게 세 편의 시가 특히 마음에 남았다.

 사랑의 변주곡은 그 서두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언뜻 제목을 보면 강렬한, 뜨거운 사랑에 관한 시로 오인할지 모르나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4 · 19혁명을 지나며 화자가 겪은 내면의 깨달음이 제시되어 있다. 1연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의 끝에서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연에서 제시되는 도시- ‘서울의 등불’-는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에 지나지 않는다. 즉 도시는 돼지우리의 밥찌꺼기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사랑이 발견되는 공간으로서 자리한다. 김수영 자신이 겪은 4 · 19혁명도, 불란서혁명도, 결국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혁명안에는 이데올로기권력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간악한 폭풍과 같은 고된 역경을 이겨내고 열매 맺는 복사씨살구씨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인간애)과 정의正意에 대한 신념이 지니는 힘이, 그 어떤 도시의 크기보다도 더욱 크다는 것을 시인은 4 · 19를 통해 배웠을지 모른다. 즉 이 시는 혁명을 통해 시인이 깨닫고 내면화한 깨달음을 강렬하면서도 담담한 시어로 묘사하는 시로서, 유의미하다. (임홍배 해설 참조. 출처 : http://blog.daum.net/lespaul6/228758)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중략)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중략)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P126-128.

 

 

 

세편의 꽃잎 연작시 중에서는꽃잎1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3연에서 보듯 화자는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보고 임종의 생명같기도 하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다고도 하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다고도 한다. ‘임종이 아닌 생명에 방점을 찍은 것에, 그리고 한 장의 얇은 꽃잎이 바위를 뭉갠다고 표현한 것을 통해 시를 이해해본다면 시인은 이 시에서 꽃잎을 통해 생명력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대한 바위를 뭉갤만한 힘을 지닌 꽃잎혁명의 힘과 같이 어두움과 죽음, 소멸보다는 더 큰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다.

(이광호 평론가 해설 참조. / 출처: http://cafe.daum.net/ryhn1616/IP7w/216)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김수영, 꽃잎1, P132.

 

 

 1968년 발표된은 김수영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정전正典이다. 이 시를 짓고 불과 보름 만에 시인이 타계한 바, 이 시가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그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소망어린 메시지처럼 들린다. 거센 비와 바람에 절망하며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풀의 강한 생명력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꺼지지 않는 촛불의 의미, 올바른 삶에 대한 희망/소망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 P142.

 

 

 

5주간 읽어온 김수영 시인의 시선 거대한 뿌리를 마무리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번 독서는 제대로 독서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그저 1960년대 모더니즘 시인으로 현실참여적 시를 많이 써온 시인으로만,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시인 김수영을 알고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지닌 실존에 대한 철학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려면 먼저 김수영의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평전 등을 읽어야 하며, 김수영 시세계에 영향을 준 철학자-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최하림 시인이 저술한 김수영 평전,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이해를 선행한 후 거대한 뿌리의 시 한 편 한편을 이해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만큼, 오래 두고 고심하며 읽어야 그 빛을 발하는 시집이라 생각한다.

 

 

 

 

 

 

알랭 바디우의행복의 형이상학의 경우, ‘저자 인터뷰글과 옮긴이의 말’(행복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다)를 읽고 나름대로 5주간 읽어온 내용을 회상하며 정리해 보았다.

결국 행복은 소극적 의미의 만족과 다른, 보다 능동적이며 실존적 차원의 가치인데, 지난 주차의 4장에서 분명히 보았듯, 이 행복이 주체의 차원에서 실현되려면 행복이 지니는 가능성영향력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하며, 공동체 내의 행복이란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정언명령으로 삼을 만한 규율을 실천적으로/실존적으로 선택하며 새로운 규율을 통해 공동체를 변화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만족이 아닌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철학 안에서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야 하는 이유의 답은 바로 현 사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싶다. 특정 개인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닌,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다수에 의해 합의된정언명령,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실천되는 자리일 때 비로소 당면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고 사회/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앞서 거대한 뿌리에서 살펴보았던 김수영 시인의 메시지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행복은 단순히 불행의 부정일 수 없으며, 삶의 선물이나 증여는 만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삶의 선물을 받으려면 반드시 상당한 각오를 해야만 하며,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실존적 선택입니다.

                                                                                                 -행복의 형이상학, P173.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은 오직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동물적 차원에 머무른다. 반면 행복은 진리를 구성하는 주체를 위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분명히 만족과 구별된다.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 자체에서 오는 개별적 욕구와 달리, 어떤 공유된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인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82.

 

 

 

 

 

  분석가 담론에서 바디우 철학의 주체는 진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자가 아니라 사건과 그 이후 나타나는 진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상의 자리에 선다. 심지어 철학마저도 그 자체의 진리를 보유하는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다수의 진리가 철학의 성립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주인 기표의 사라짐, 해방, 즉 모두가 모두와 평등해지며 결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는 철학의 전달과 토론이다. 이런 여정을 거쳐 수정된 철학에서, 행복은 플라톤에게 그랬던 것과는 달리 철학자만이 독점하는 정동이 아니다. 바디우의 뒤집힌 플라톤주의에서 행복은 주체들 간에 평등하게 분유될 수 있는 정동이자 민주주의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가치이며, 바디우가 말하는 그대로 주체가 될 가능성은 인간 동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행복의 형이상학, P195-196.

 

 

 

 

  행복이란 변화를 받아들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기존의 방향과 다른 삶이 있음을 확신할 때 얻을 수 있는 정동임을 가리킨다. 행복은 언제나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며, 이 발명을 통해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집단과 그 집단에서 작동하는 규율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집단 속에서 규율이란 또한 자유이며 자신의 규율을 지탱하기 위한 의지이기도 하다.

-행복의 형이상학, P198.

 

 

 

  5주간 행복의 형이상학독서를 하며 문장의 면면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철학자나 철학도가 아닌 이상, 어쩌면 이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처음 책을 접할 때는 정말 너무 난해 하여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는데, 어느 순간-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자 생각했더니 전체적인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끊임없이 실존적 사유와 선택을 해나간다면 행복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더욱 깊이 고민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y papyros 2017. 2. 15.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