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고 생각잇기 4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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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주차에는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한국문학사까지 세 편의 시가 인상적이었다. 세 편의 시를 통해, 시인 김수영이 지니고 있었던 시대의식과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964년 발표된 시이다. 생소한 시이며 일전에 접한 적이 없는 시이지만, 6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첫 연은 6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뿌리가 가라앉고 이 가슴의 동계도, 기침도, 한기도, 가족들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생명마저 이미 맡기어진 죽음의 가치가 지배하는 질서의 세상 속에서 화자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투쟁하는 방법으로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한 마디 을 내뱉기 조심스럽고 두렵기까지 한 시대상황에서, 화자는 자유로이 발언할 수 없다. 때문에, 화자는 무언의 말을 택한다. 4연을 보면 이 무언의 말하늘의 빛이자 물의 빛’, ‘우연의 빛’, ‘우연의 말로 표현된다. 이에는 긍정적인 속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말이며 죽음에 섬기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겨울의 말이자 의 말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무언의 말은 곧 시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소신있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를 지어 자신의 가치와 생각, 신념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발표되면 이는 세상이 함께 공유하는 작품이기에 더 이상 내 말이 아니게 된다. 결국 이 시는 김수영의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시인의 이러한 소명은 미시권력은 전짓불 뒤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진술을 요구하는 감시장치의 요소가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었던 60년대 시대상황과 연결된다. 이청준이 이러한 시대상황에 대해 메타픽션으로 대응했다면, 김수영은 권력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언어를 통해 시대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시는 김수영 시의 의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시인으로서의 자기희생을 내포하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김수영, , P103-10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교과서에 수록되어 중등교육에서 이미 오랜 시간 교수-학습 되어 온 정전[正典에 속한다. 시대현실에는 강력히 비판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자기고백적인 시로 잘 알려져 있는데, 금번에 재독하면서 눈에 띄었던 점은 학창시절 배우고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연에서 당대 문제시되었던 사회문제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2연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소설가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는그릇된 현실에 대해, ‘언론의 자유수호와 월남파병 반대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시인으로서의 슬픈 천명을 자각했던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와도 같은 가치를 향유하고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

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중에서, P111-113.

 

 

이 한국문학사에서 시적 화자는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겪으며 이어 내려오는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오늘날 이 시대에는 김동인이나 박승희 같은 작가들과 같이 헌신적인 작가도, 또 김유정 같이 직접 낮은 자리에서 체험하고 골몰하며 작품을 집필하는- 자기를 희생하며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찾기 드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감수하며 자기만의 글을 써내려가는 충실한 글쟁이들이 모여 이 한국문학사가 이루어졌으므로 비웃을 대상이 아님을, 화자는 강조하고 있다. 즉 오늘날 이 한국문학사또한 거대한 뿌리의 전통 안에서 그 잠재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이경수 공저, 2016년 젊은평론가상 수상 작품집, 지만지, 2016. 참조)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고민해왔다

김동인, 박승희같은 이들처럼 사재를 털어놓고

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

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

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

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

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신현대문학사의 시를 깨알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

될 수만 있다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한 글씨보다 더

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시기의

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핑 출판사의 일을 하는 이 무의식 대중을 웃지 마라

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

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

저들의 무서운 방탕을 웃지 마라

이 무서운 낭비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

 

-김수영, 이 한국문학사중에서, P114-115.

 

 

 알랭 바디우의행복의 형이상학의 경우, 마지막 장인 행복의 정동에 관해 읽어 내려갔다. 전반적인 내용이 난해해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부분을 생각한다면, 결국 철학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즉 실존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진리를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진리의 실존은 원칙, 규범, 경험으로 삼을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가치있는 것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가야 한다. 즉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처럼 철학에도 일종의 정언명령이 기대되는 것이다. 즉 철학적 질문을 통해 시대를 진단하고, 이에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진리를 탐색 및 구축하고, 이렇게 구축한 진리를 통해 참된 삶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실존적 경험이 자리할 때, 철학을 통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연명령(이념)을 구축하여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이가 비로소 철학(적 사유)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 예비교사로서 나는 교과교육만큼이나 학습자들이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에 대해 고민한 후 가치관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주체적으로 확립하고 자신이 확립한 올바른 가치관에 걸맞게 인격을 갖출 수 있도록 인격교육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할을 철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철학을 통해 자기 나름의 진리를 발견해 자발적으로 자신이 평생을 지니고 살아갈 만한 정동을 삼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때문에 학교현장에서는 개별 교과안에 철학적 질문과 고민을 녹여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김수영 시선과,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을 잠시 연관 지어 본다면......., 아마도 김수영 시인의 정동은 자유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대의 문제를 비판하고 그 본질을 회복해 한 국가의 개개인 모두가, 그 사회가 비로소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김수영 시인은 바로 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선의 이데아, 진리를 대중들에게 공유한 것이다.

 

 

 

참된 삶은 이념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것, 이를테면 결과적인 통합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완전한 삶을 향한 최초의 열망을 되찾게 되며, 완전한 삶의 열망은 단지 이념과 진리로 표명될 뿐 아니라, 완성된 삶, 곧 진리에 관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거친 삶이라는 개념으로도 표명된다.

-행복의 형이상학, P112-113.

 

플라톤은 이데아의 철학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에게 이 경험을 전달할 필요성은 대체로 경험 자체의 내용 바깥에 있다. 이는 플라톤이 철학자는 정치가나 교육자가 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이유이다. 선의 이데아로 이끌릴 때, 철학자에게는 오직 하나의 이데아만이 있을 뿐이며, 바로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진리의 경험 바깥에서 오는 이러한 전달의 필요성은 플라톤에게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요청이다. 진리의 경험은 사회의 일반적인 조직이라는 층위에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경험을 전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지배적 의견의 영향 아래 놓인다.

-행복의 형이상학, P127-128.

 

내게 철학은 진리들이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하는 사유의 교과(discipline, 훈육), 곧 단독적인 교과이다. 그로 인해 철학은 명령과 삶의 통찰로 향하게 된다. 통찰이란 어떤 것인가? 개별 인간에게 가치가 있으며 진정한 삶을 전달하고 그의 실존을 방향 짓는 것은 이러한 진리들로부터 시작된다.

(중략)

철학은 진리들의 실존을 제시하는 삶에서 진리들의 실존을 하나의 원칙으로, 규범으로, 경험으로 삼는 삶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무엇을 부여하는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가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은 경험의 혼란에 정리를 제시하며, 따라서 방향을 이끌어 낸다. 혼란에서 정향(定向)으로 옮겨 가는 이 상승은 전형적인 철학의 활동이며 철학의 고유한 교육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4-145.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엄하면서도 강렬한 삶, 엄격하게 동물적인 특질들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정동을, 실제적 행복의 정동을 나타내는 삶이란? 나는 철학이 참된 삶을 내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그 구상과명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는 철학 자체의 내부에 있는 참된 삶을 알려야 한다. 그저 외부적인 명령이 아니라 칸트적 명령으로서 말이다. 이것은 삶에 겪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내재적으로 나타내고 보여 주는 정동의 관할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내가 매우 선호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불멸의 삶을 살라.”는 정식이 있다. 이런 정동에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지복”, 파스칼에게는 기쁨”, 니체에게는 초인”,베르그송에게는 신성함”, 칸트에게는 존경…… 나는 참된 삶의 정동이 있다고 믿으며, 이에 가장 단순한 이름인 행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5-146.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보다 행복하다고 믿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부자보다, 향락을 즐기는 사람보다, 참주보다, 그 누구보다 더. 플라톤은 그치지 않고 이 문제를 재론하며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증명을 제시한다. 오직 이념의 표지 아래 사는 자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며, 바로 그가 모든 사람들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확하다. 철학자는 삶의 내부에서 무엇이 참된 삶인지 알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리라는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7.

 

by papyros 2017. 2. 8. 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