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온유, 『유원』,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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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사전서평단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유원> 가제본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창비 측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성장소설.성장이란 내게 어떤것일까. 입사식 소설, 이니에이션 소설, 통과제의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성장소설에는 흔히 소년/소녀나 청년 초기의 인물들이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내가 중학시절부터 애착을 지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데미안』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스쳐지나가듯 데미안이 언급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으며 또한 유원에게도 데미안은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 아마 작가님에게도 그러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는 성장과 관련된 작품서사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년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애정을 지니고 있는『해리포터』 외에도,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은 내 삶에 진정한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 사전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미 서른이 된 마당에 20대의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지만, 아직도 성장의 화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나의 내면이,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과 유사하게, 『유원』의 주인공인 유원도 언뜻 평범해 보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인 유원이 고작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12년 전, 집에 불이났을 때 언니가 유원을 구하기 위해 11층 아래로 던진 덕에 길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유원을 구한 덕에 유원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열일곱이던 언니예정은 동생을 구하고서 본인은 결국 불길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언니와 같은 나이의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유원의 뒤에는 늘 그 사건이 맴돌았다.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서 나온 언니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거실을 보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현관 쪽으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욕실로 들어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이불에 물을 부어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내 방 창문을 열어 베란다 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와 얇은 합판으로 분리되어 있던 내 방의 베란다까지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신고한 것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파트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11층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을 것이다. 언니는 수건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사람들은 검게 치솟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생존자를 보고 탄식했다. 불길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까지 덮쳐 오고 있었을 것이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31.

 

 

 특히 집에 불이났던 그 사건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유원이 성장한 이후에도 늘 유원이 12년 전 겪은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유원은 암묵적으로 불쌍한 아이이자,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유원의 삶에 당위성으로 작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책임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픔을,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슬퍼해야 한다는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또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통해 평생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인데, 유원에게는 그러한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의무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심지어 진로마저도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길 등이 제시되는데,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나는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우친 것처럼. 나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눈빛과 목소리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도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83.


중학교 때부터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학원에 갔다. 엄마 아빠가 강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기 주도 학습이 불가능한 나 같은 애는 엄격한 학원에 가야 성적이 오른다는 것을 좀 일찍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00.

 

 

  이처럼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워야 마땅할 청소년기에 유원에게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감은 결국 유원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예정의 오랜 친구인 신아언니인데, 기실 유원은 신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며 무엇보다 유원에 대한 신아의 지나친 걱정과 과보호가 관계를 지배하다보니, 유원과 신아의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바람직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유원은 아직까지도 사고 당시에 대한 반복적인 꿈을 꾸는 등 유년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PTSD를 겪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유원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과 더불어 진정한 관계가 결여 되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마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서 나를 움켜쥐려는 불길이 돋아나고 있었다. 화염 너머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지펴지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 방에서 엄마 아빠가 잠든 방으로, 혹은 내 꿈에서 십이 년 전 나와 언니가 잠든 거실로 아무렇게나 옮겨붙는 불길을 나는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아는 꿈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서야 꺼지는 꿈.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14.

 

 

  특히 유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원에게는 자신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숨지고 말았던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친 신씨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늘 무언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신씨 아저씨의 모습이 유원에게는 불편하게 비추어진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6.

 

  작품 속에서 유원의 삶과 내면을 변화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수현인데, 수현은 학급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친구이며 동시에 옥상 마스터키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서글서글한 학생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또한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한 면면이 드러나는데, 수현과의 관계속에서 유원은 삶에서 최초로 평범한 우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유원과 유원의 가족을 포함하여, 외상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이 평범성에 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평범치 않은 고통을 맞이했기에, 옆에서 건네주는 말 한 마디,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너무 붉어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넋을 잃게 만들었다. 만약 상처를 받아 취약해져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위로를 받거나, 혹은 이걸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69-70.

 


  내 방에는 정말 별게 없었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덮자마자 잠이 몰려오는 마법 같은 푹신한 극세사 이불, 정도. 수현은 많은 아이들의 방을 구경했겠지. 내 방은 평균은 될까. 그 이하일까. 다른 애들은 친구 방에서 뭘 하고 놀지. 커다란 앨범에 있는 유치원 졸업 사진 같은 걸 보면서 깔깔 웃나. 너는 이런 책을 읽고 컸구나. 우리 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 있어. 너도 『데미안』 읽었니, 그러면서? 아니면 새로 나온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세상에 똑같은 색깔의 립은 없어. 이것저것 발라 보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거나.

  나도 수현의 집을, 수현의 방을 보고 싶었다. 왠지 수현의 방에는 구경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릴 때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잔뜩 있고, 서랍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이, 책상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수현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캘린더에는 친구 누구의 생일, 특별한 모임 날짜들이 체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94-95.

 

 

  주목할 만한 점은, 수현의 서사가 드러난 이후부터인데, 수현이 사실 유원을 구한 금정동의 호인이자 용감한 시민으로 평가받는 신의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유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수현과 유원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가온다.

  전술한 바 있듯 사실 유원과는 대조적으로 학교 내에서 반장을 맡으며 학급 아이들의 신망을 받기도 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그 어떤 구김살이나 그늘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수현에게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리한다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년이 넘게 유원의 가정에 기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도 했으니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 등이 교차하는 수현의 내면은 열일곱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결코 통합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그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그러나 수현이 결국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유원에게 공언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은 유원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Blos(1979)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이차적 개별화 과정 (secondary ndividuation process)’으로서, 유아기 시절 경험한 일차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나아가 부모와의 의존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심리적·정서적 독립을 이루는 데 발달 과제가 있는데, 수현은 이를 충분히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 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82-183.

 

 

  아버지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선언한 수현의 모습을 통해 유원의 내면에도 변화의 씨앗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 준 댓가로 지나치게 부모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언행이 부담스러움을 용기있게 고백하는 한편, 신아언니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직접 이야기하고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으로 인해, 유원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니 예정과 유원은 다른 인격체이며,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유원의 내부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진솔성과 용기가 유원에게도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그늘이, 그 불행한 사건이 내 탓’, ‘내 잘못이 아님을, 그것은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아주는 신뢰로운 관계 안에서,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통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24.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5-196.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89.

 

 

  문득 세월호 유가족분들, 4.3 5.18 희생자의 가족분들 및 여타 사고와 국가적 문제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분들께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이를 직면하여,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PTSD와 관련해 지나친 죄책감을 직면한 유원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당위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인식하였으며 이제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원이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진실한 개인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바,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자신이 선택한 삶만을 지향하며, 유원이 그 자체의 빛깔을 드러내기를 진실로 바란다.

 


 

“유원아.”

“네?”

아저씨는 무슨 말인가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너, 별로 안 무거웠다. 그냥…… 사람 몸은 원래 약하다. 다 잊어버려라.”

 

- 백온유, 유원가제본, 창비, 2020, 199.

by papyros 2020. 6. 30. 01:37

최강욱, 정치의 시대 -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창비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창비출판사 『정치의 시대 소책자 사전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중략)

유일하게 주권자인 국민에게만 권력을 딱 한 번 쓴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헌법이 권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헌법의 정의대로라면 주권자가 인정하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닌 셈입니다. 권력은 주권자에게만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떻습니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헌법이 그 사실을 보장하고 있다는 게 의외라고 여겨질 정도로 헌법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고, 오남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헌법에서 규정한 권력에서 크게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그들을 옹호하는 구체적인 판결을 예로 들 것도 없습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6-7.

 

나는 고등학생 때 수능 사회탐구 선택과목 중 하나로 법과 정치를 공부하고, 대학 신입생 때 법학과 전공기초 과목인 법학개론을 수강했을 정도로 -심지어 법학과를 부전공하고자 했다. 물론 심리학 복수전공과 교직수업의 방대함으로 인해 취소하고 말았지만- 법학이나 정치 등 사회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다소간의 관심을 가져온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의 대한민국을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행정부 수반이 주체적으로 자기 몫을 하지 못하고 한 개인에 의존하는 모습, 심각한 정경유착 등이 공개되고 난 후 충격을 금치 못했다. 물론 정치인이나 법조인들의 관행이나 관습,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암흑기(독재정치)를 역사책으로 공부한 내게 있어 행정부의 수반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심각성이 피부로 와 닿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정치인들에 특히 국정운영의 중심을 이루는 행정부의 수반(대통령)-대한 국민(책에서 인민이라는 단어의 필요성에 대해 더 명확히 나오지만, 편의상 국민으로 통칭한다.) 들의 기대가 높은 편이다. 이게 나라냐는 자조 섞인 질문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헌법 제 1조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듯 보이는 국가. 사리사욕에 앞서 국민들을 우선하지 않는 국가.

많은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며 매우 추운 겨울을 견디어 올해 초 헌재의 탄핵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이 책의 제목을 질문으로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최강욱 변호사)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 이는 한국 사법의 구조적인 문제탓이다. 실망스러울지 모르나 생각을 전환시켜 본다면 사법의 구조적인 문제가 변화된다면 법이 정치를 심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사법의 두 축인 검찰법원조직의 구조적 문제를 제시한다. 두 조직 모두 위계질서에 따른 서열화가 핵심 문제로 등장한다. 우선 검찰의 경우, 검사들이 지니고 있는 막강한 권력인 기소권이 이와 관련해 쟁점이 되는데 이 기소권의 행사에 있어 대상에 따라 기준이 바뀌거나 검찰 조직 내부의 윗사람(검사장 등)의 개입이나 압력에 의해 검사 개인의 법적 판단이 침해 될 수 있다. 법원(사법부)의 경우 법관들의 임명에 있어서, 특히 대법관의 임명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 그리고 여야합의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는 만큼 정치적 성향에 대한 고려가 이미 선출에 있어 고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두 조직 모두 서열화문제는 심각한데 가령 성적이 좋지 못하거나 윗선의 눈 밖에 나게 되면 서울중앙지검에 다시 돌아오지 못해 검사로서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승진의 기회가 막혀버리며 판사(법관)의 경우에도 초기 발령을 성적순에 따라 획일적으로 배치할 뿐 아니라, 고등법원 부장판사라는 요직에 승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뒤따른다.

이렇듯 저자가 지적한 법조계의 문제는 몇 달 전 읽었던 김두식 선생님의 불멸의 신성가족의 화두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국민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법조인들이 소수의 국민들에게만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정치인 뿐 아니라 판사나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이 지나치게 신성화 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특히 성적이나 조직 내 순위에 의해 서열화 되어 같은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두는 것은 그 권력과 권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신성화작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과 일부 판사들은 정의의 여신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은 눈을 떠서 당사자의 사정을 세세하게 살피고 헤아리며, 그런 후에 저울에 달아서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판단을 해보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책을 펼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정확한 판결을 내린다.

(중략)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은 당사자의 신분과 지위를 확인해서 봐줄 사람인가 아닌가를 식별한 후에 형식적으로 저울에 다는 척을 하다가, 손에 든 장부를 보고 나에게 뭘 갖다준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한 다음 심판한다.

어떻습니까?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릴 듯한데, 바로 이 점이 대한민국 사법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21-22.

 

 

 

검경 조직이 자신의 법적인 양심에 따라 기소권을 행사하고, 법원이 약자들의 편에서 공정한 재판을 가할 때, 즉 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때 비로소 판사로서, 그리고 검사로서 이상적 모범이 되는 법조인들이 증가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법조계 내부의 자성적 기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기에, 사법 조직 개혁을 단행하려면 행정부나 국회 등 정치권의 문제의식이 자리해야하며, 법조계와 이해관계가 없는 인물이 개혁을 진행해야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조국교수의 민정수석 임명은 첫 단추가 잘 꿰매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검경수사권 조정을 통해 수사절차와 행정절차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데 그 방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개혁이 다시금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충돌에 있어 국민들의 건전한 법 상식을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과 법조인의 유착과 정경유착 등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에서 해결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겠다. 법조인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나 모범생’, ‘우등생으로 불리는 이들이었고,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끊임없이 내부의 서열화가 자행되어 있어 우수한 인재로 상급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즉 학창시절 우등생으로서 급우들을 통제하는 한편 교사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당연히 해야 될 것이기에, 명령을 따라야 인정받을 수 있기에 그 어떤 비판의식 없이 상급자(대통령, 검사장, 부장판사 등)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제 2의 아이히만을 양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다. 때문에 법조인들이나 정치인들의 그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고자 할 때 이를 제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국민들의 시선, 그리고 법조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나와는 멀리 있는저 너머의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법적 도움을 제공하는 조력자일 뿐이며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신성화의 해체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서열화되어 있으며 획일화된 학벌위주의 교육 현실을 바로잡고 대학진학 및 직업 선택에 있어 특정 직업군의 이들이 지나치게 신성화되지 않고 고유한 직업윤리를 지닐 수 있도록 윤리 및 가치관교육, 직업의식, 그리고 교육 평준화가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특목고나 자사고 등 학습자 간 교육 격차를 확대할 수 있는 학교들의 폐지 또는 전환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단적으로 의사 면허는 합법적 살인 면허라는 한 의대생의 발언은 특정 직업을 신성화하며 특권화 해 온 우리 사회의 부정적 단면이라 하겠다. 서열화를 통해 학습자들을 줄 세우고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유하고 토론하고 논의하여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 가치를 지니고 있는 타자의 의견을 조화롭게 반영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문화를 변화시켜 나갈 때 법조계와 정치계의 문제도 해결되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법이 정치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보다 정치를 통해 올바른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집행하거나 법을 통해 판단하는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주권자의 입장에서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민주주의의 길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주권자의 뜻이 그대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법은 당연히 정치의 아래에 놓여야 하지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법이 올바로 만들어지고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주권자에겐 일종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111.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by papyros 2017. 5. 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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