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자런, 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독립북클러버 16기- 청춘의책탑] 11회차(16기 2회차)-「랩 걸(Lab Girl)」 리뷰

 

2021.2.14. 日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11회차 리뷰(16기 2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3년 전쯤(2018) 이었던가, 가장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던 <알쓸신잡> 시즌2 10회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책에 대한 화두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 중 유시민 작가님께서 딸에게선물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향으로 호프 자런의 이 책, 랩 걸 (Lab Girl)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나도 전자책을 진즉 구입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3년 간 랩 걸 (Lab Girl)은 내게 있어서 수많은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을 한켠에 지닌 채,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보다.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친구들 모두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의 반열에 랩 걸 (Lab Girl)이 자리해 있었고, 그렇게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덕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완독할 수 있었다.

  과학에 대한 에세이라길래 기실 조금 걱정했는데 책은 매우 두꺼운 장편 에세이(7.8인치 전자책 페이퍼프로기준으로도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인 것 치고는 제법 가독성 있었고 저자의 삶을 함께 지나가는 중에 생각할 거리도, 삶에 대한 여러 문장들도 다수 등장했다.

  특히 저자의 삶에 가장 큰 양분이 되어 준 것은 바로 부친의 실험실을 놀이터삼아 유년기를 보낸 일이다. 또한 학위과정을 마치고자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한 어머니의 모습도 호프 자런에게는 모델링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자랐다. 화학 실험도구가 늘어서 있는 실험대에 키가 닿지 않을 때는 그 밑에서 놀았고, 키가 큰 다음에는 실험대에서 놀았다. 아버지는 미네소타 시골 한가운데에 있는 전문대학에 자리한 실험실에서 물리학과 지구과학 입문을 42년에 맞먹는 시간 동안 가르쳤다. 아버지는 자신의 실험실을 사랑했고, 나와 오빠들도 그곳을 사랑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아버지랑 함께 실험실에 갈 때면 언제든 그 장비들을 가지고 놀 수가 있었다. 그것들을 다 꺼내달라고 부탁하면 아버지는 절대로, 한 번도 안된다고 거절하지 않으셨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해마다 5월제(유럽 각지에서 5월 1일에 하는 봄 축제—옮긴이) 날이 되면 엄마와 나는 땅에 씨를 하나하나 심었고, 일주일 후 싹을 틔우지 못한 것들을 파내고 새 씨앗을 다시 심었다. 6월 말이 되면 모든 작물이 왕성하게 자라고 주변이 모두 초록빛으로 둘러싸여서, 그렇지 않은 시절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7월이 되면 이 모든 식물들이 흘리는 땀으로 공기가 가득 차서 그 습기 때문에 공중을 가로지르는 전선들이 윙윙거렸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엄마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빠와 결혼을 했고, 네 아이를 낳은 후 20년을 자녀 양육에 전념했다. 막내가 유치원에 갈 무렵, 학사 학위를 따겠다는 집념을 불태우며 엄마는 미네소타 대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엄마는 통신 과정밖에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문학을 택했다. 내 일과의 대부분을 엄마와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 공부에 참여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유치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반 아이들보다 수준이 높은 책을 읽고, ‘상냥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러나 호프 자런의 유년시절부터 뿌리깊게 자리해 온 여성에 대한 성 차별은 그녀의 삶에서 너무나 크나큰 장벽으로 느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과학계’(이공계)에서 여성으로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해왔으며 심지를 굳건히 했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작년에 관람한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도 여성과학자로서 그녀가 경험한 고군분투를 작품을 통해 생생히 느낀 바 있었다. 소르본대학에 입학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험실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고 화장실도 없었기에 분투해야만 했고, 어느정도 업적을 거둔 후에도 자녀들의 육아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마리 퀴리. 19세기를 살았던 마리 퀴리의 시대가 그러했을지인데 20세기를 살아간 호프 자런의 삶도 마리 퀴리의 시대와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19세기가 아닌 20세기였기에 호프 자런이 여성 연구자로서 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녀에게는 유리천장이 존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여긴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게 무엇이든 남자아이보다는 못한 건 확실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여자아이인 척하는 동안 나는 솜씨 좋게 몸단장을 하고 다른 여자아이들과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관해 수다를 떨었다. 줄넘기를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고, 내 옷을 스스로 꿰맬 수도 있었으며 누구든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처음부터 모두 내 손으로, 그것도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늦은 저녁이 되면 나는 아빠와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건물들은 텅 비어 있었지만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서 나는 어린 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내 경우는 반대 방향의 변신이긴 했지만.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 교수들은 내가 여자아이였음에도 나를 받아들였고, 내가 이미 의심하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해줬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한 번 나는 아빠의 실험실에서처럼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의 근본은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번도 살아 있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없었다. 여성 과학자로서 나는 여전히 그다지 평범하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 번도 다른 것이었던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는 세 개의 실험실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완성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가 이야기를 끝내고 “고마워” 하고 말하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했다. 소개받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기 때문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이제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 호프 자런, 2.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들은 나도 그들과 동등한 학자로서 이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연구 자금을 댄 기관에서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의 눈에 나는 괴상한 사람을 달고 와서 20킬로그램 정도의 짐도 들지 못하는 지저분한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그 이미지를 없애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인정받는 자기상에 비중을 두고 삶을 살아가지 않았나 싶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비중에 둔다면 여러 한계와 장벽이 존재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비중을 둔다면 연구자로서 실험을 설계하고 변인을 통제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등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 계획에 따라 세상을 탐구할 수 있으며 사회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아버지와 보낸 유년시절에서 느낀 행복감과 연결되어 었다.

 


  실험실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날에 가는 곳이다. 세상 모든 곳이 문을 닫는 휴일에도 내 실험실은 열려 있다. 내 실험실은 도피처이자 망명처이다. 그곳은 직업상 전투를 벌이다가 후퇴해서 몸을 쉬는 곳이자, 내 상처를 돌아보고 갑옷을 보수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자라난 내가 진정으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20년을 실험실에서 일하는 동안 내 안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자라났다. 내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과학자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진정한 과학자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불안한 첫걸음을 떼서 오솔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오솔길은 도로가 되고, 그 도로는 고속도로가 되고, 그 고속도로는 언젠가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성장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내가 확실히 안 유일한 사실은 언젠가 내 실험실을 갖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한편, 비단 여성과학자로서의 한계 뿐 아니라 실험실의 책임자로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로서의 어려움도 호프 자런의 이 에세이에 여실없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미국사회도 연구자에게 연구비문제가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임이 강조되며, ‘이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이라 할지라도 그의 계약과 보험 등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지점이 그러하다. 어쩌면 호프 자런은 이 에세이를 통해 과학계를 비롯한 연구 환경에 솔직하고도 따끔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연구자이자 가족과도 같은 깊은 친구(마치 전우戰友와도 같은) ‘과 연대하며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낸다. 그리고 이는 단지 호프 자런 그녀의 안위安慰나 명예名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대 연구자들을 위한 호프 자런의 기꺼운 걸음이기도 했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 호프 자런, 2.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호프 자런, 2.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빌은 실험실에 필요한 연구 자금을 말하고 있었다. 연방 정부에서 받은 계약이 몇 개 있어서 2016년 여름까지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실험실을 접어야 할 위험이 여전히 있었다. 환경 과학에 대한 연구 기금은 매년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종신 계약을 맺은 상태지만 빌은 그렇지 않다. 종신 계약은 교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과학자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과학자가 장기적 직업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기금을 받지 못하면 나도 그만두겠다고 위협하는 것뿐이다. 아마 그러면 우리 둘 다 거리로 나앉게 되겠지만 말이다. 연구 과학자의 직업을 가진 우리는 절대, 영원히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호프 자런에게 더 경의를 표하고 싶으며 그녀가 부딪혀 온 과정에 놀라왔던 점은 결혼 이후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내담자로서 호프 자런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매우 불안해한다. 사실 이는 저자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이다. ‘경력단절에 이어 아이를 위해 내 삶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우리 사회의 현재에 있어서도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산모로서, 임신 25주차까지 항정신성 약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공포로 다가왔을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라 여긴다.

  그러나 호프 자런은 해냈고,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해낸다. 어쩌면 그것이 가능했던 건 저자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뿌리깊은 사랑이 저자의 내면 한 가운데 양분이 되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나는 2002년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붙잡고 도대체 왜,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묻고 또 묻지만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필요한 약을 먹어도 괜찮은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날짜를 세는 것밖애 없다. 임신 26주차라는 것은 마술 같은 날이다. 그때부터 나는 임신 7개월에 접어들고, 그때부터는 산모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항정신성 의약품을 사용해도 된다고 미국식약청이 승인했기 때문이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때 학과장 월터가 걸어들어왔고 나는 상관을 만난 군인처럼 자동으로 일어섰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받기 직전이던 나는 임신에 동반되는 어떤 육체적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도 내가 행복하고 기대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쇼핑하고, 아기 방을 꾸미고, 배 안의 아기에게 사랑을 담아 말을 건네면서, 사랑의 결실을 기뻐하고, 내 자궁이 그득 찼다는 사실을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슬퍼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신비로운 정체에 대해 꿈을 꿔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 아기가 남자아이고, 그의 아빠처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는 혼란스럽게 말을 더듬는다. “전 모유 수유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말은,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약을 먹어야 하거나 그러면-”

  “괜찮아요.” 의사가 내 말을 가로막는다. “아기는 조제분유로도 잘 자랄 거예요. 전 그 걱정은 하지 않아요.”

  아기에 대한 내 첫 번째 실패를 이토록 너그럽고도 쉽게 받아들이는 의사의 용서가 내 심장을 관통한다.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희망이 꿈틀거린다. 어쩌면 이 여자는 내게 관심과 애정이 있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 차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무서워요.” 내가 말한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것이라고 늘 확신해왔다.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외할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삼촌이나 이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 죽지 않고 성장한 삼촌, 이모만 해도 열 명이 넘었지만 말이다. ‘Diskutere fortiden gir ingenting(과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실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을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와 아들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삶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온 나로서는 정말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귀중한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경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 하나하나는 내가 그토록 절실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모든 입맞춤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이 말을 이제는 할 수 있다)지만 오직 내가 기대했던 엄마 노릇의 관념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킨 후에야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딸에 대해서는? 나는 이 감정이 딸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딸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계혈통은 한 세대를 건너뛰어야 다시 이런 어려운 관계가 반복되는 것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손녀를 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내 욕심은 늘 너무 앞서 나가곤 한다. 내 계산에 따르면 이렇게 기다리는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죽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특히 이 혈통이 건너뛰는 것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럼에도 햇살이 눈부신 오늘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병을 띄워 보내고 싶다. 누군가 기억해주길. 누군가 언젠가 내 손녀를 찾아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부엌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창밖을 보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는 결정을 내리느라 바빠서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도, 창틀에 쌓인 먼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결국 할머니는 수십 년 먼저 손녀를 사랑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햇빛을 받고 앉아서 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꿈꿨다고 누군가가 말해줄 수 있기를.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아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라고요? 처음에는 ‘그’라고 했잖아요. 호랑이는 남자예요.”

  “호랑이가 여자면 왜 안 되지?” 내가 물었다.

  아들은 너무도 뻔한 사실을 내게 설명했다.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몇 초 후 물었다. “오늘 밤에도 실험실에 갈 거예요?”

  “응, 하지만 네가 깨기 전에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빠가 바로 방 밖에 있고, 네가 자는 동안 코코가 너를 지켜줄 거야. 이 집은 널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나는 아이를 재우며 날마다 하는 말을 반복했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 – 옮긴이)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온실 안에서 빌과 내가 함께 앉아있던 그날, 우리는 희망과 목표에 대해서, 그리고 식물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한 것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 얼마 가지 안아 우리는 서로에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20년에 걸쳐 벌어졌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호프 자런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즉 개인마다 고유한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는 셈인데, 나는 호프 자런의 자기서사가 문학치료학적 이론에 근거하면 부모서사와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서사는 스승이나 부모 등의 위치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위치에서, 양육을 통해 자녀의 성장과 독립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호프 자런이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한 실험실을 양분 삼아, 그리고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을 발판삼아 여러 장벽을 넘어 성장했듯이, 그녀도 그녀의 아들에게 양분이 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시민 작가님이 이 책을 자신의 딸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에 있지 않을까. 과학자(연구자)로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한계 극복이라는 호프 자런의 삶에 주요한 키워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양분 삼아 네 길을 올곧이 걸어가고 이루어 나가라고.

  그런 점에서 나도 이 책을 통해 깊은 위로를 받는다. 또한 나는 나의 청년기를 어떤 모습으로 보낼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여러 한계를 어떻게 넘어 나갈지 깊이 고민하며 앞으로의 삶을 재조망해보게 된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 호프 자런, 1. 뿌리와 이파리,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에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호프 자런, 3.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by papyros 2021. 4. 30. 22:50

blog.yes24.com/document/12558420

[독립북클러버 9기- 청춘의책탑] 7회차(9기 1회차) 모임 후기

강화길 外 6인,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2020.05.17 土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7회차 리뷰(9기 1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안녕하세요. 독립 북클러버 1기와 4기에 이어, 9기에도 함께하게 된 독서모임<청춘의 책탑>입니다어느덧 5월 31일인데, 우선 이번 리뷰를 쓰기 앞서 너무나 과분하겓 채널예스 5월호에 저희 모임의 인터뷰가 실리는 영광스런 기회를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려 펭수가 표지사진!! 이라 기뻤습니다.)

[    blog.yes24.com/document/12461816 청춘의 책탑 인터뷰 전문]

 

참, 이번 9기에는 멤버가 한 명 추가되었는데요, 본래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친구들 셋이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참여해 왔는데, 다른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쌓아 온 모임장의 친한 친구가 새로 합류하면서, 91~94년생이 다 모여 완전한 90년대 초반생의 독서모임이 되기도 했고 모임에도 새로운 활력이 생겼답니다. 인원이 한명 추가된 것 만으로도 더욱 다채로운 의견들이 쏟아졌으며, '책'을 통한 관계의 이어짐의 의미를 재발견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매년 문학동네에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고는 있지만 특히 올해 작품집은 SNS를 통해 여성서사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은 만큼, 사회문제를 작품에 반영해낸 최근 문학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되나 궁금함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도서를 선정하게 되었답니다.

 

 특히 이번 모임은 죽전역 인근에 소재한 <제이플라워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단편선이라는 특징점이 있기도 했으나 모든 작품이 그 나름대로 의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게 많아서 , 여유를 지니고 모든 작품에 대해 천천히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꽃을 피웠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모임 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매년 나오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어야겠다고 생각지도 못하다가 '여성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쇼코의 미소>로 알려진 최은영 작가님과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알려진 장류진 작가님의 각각의 작품들을 이미 읽어왔기에 더더욱 해당 작가님들의 글이 궁금해졌습니다.

- 저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정말 좋아해서, 매년 읽어왔고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년에 비해 여성서사가 더욱 넓은 지평과 인식으로 확대된 점이 눈에 띄었답니다.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는 대상의 의미가 딱히 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길 작가님이 대상을 받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장류진 작가님의 <연수>의 경우 창비에서 사전서평단으로 먼저 접하고 낭독회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반가움이 들었고 다시 읽어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집에 몇권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있지만 미처 다 완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아무래도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따로 있다보니 신진작가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소수자의 서사를, 특히 현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옮긴 좋은 문학이 있다는 데 대해 매우 기뻤고 동시에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도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2.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각 단편에 대한 단평 (인상깊은 내용과 구절 중심으로)

 


1) 강화길, 음복(飮福)

- 작품을 다 읽고, 처음드는 느낌은 이건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평소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건 정말 - 주인공을 따라 상황을 이해해야 이 작품이 진정한 스릴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공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사랑이란 뭘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씁니다.작가의 서사구성능력이 정말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 뭐랄까, 생각을 많이하게 된 작품이고..... 많이 신박했어요. 계급을 깨부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인데 그 때문에 더욱 소름돋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 다른 먼 곳이 아닌, 우리 집안의 바로 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서 너무도 깊게 몰입되었어요.  사실 책 속에서 제일 답답한 건 고모도 , 할머니도 아니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성인데, 현실도 그렇거든요. 여성들에게만 너무나 많은 부담을 지우고 이걸 문제시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 '네가 날 이해해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깊게 와 닿았어요. 사실 장녀라서 어머니에게 가장 유대되어 있고 그렇기에 어머니의 심리적 고충을 듣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기에 남동생이 몰라도 되는, 몰라서 편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저는 많이 알고있고 심리적으로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 저뿐 아니라 많은 여성, 맏딸들이 겪는 고충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처음으로 나는 고모가 짜증나지 않았다. 그 대화, 한 명은 계속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쾌활하게 웃는 그 기괴한 대화가 이들 사이에 아주 여러 번 반복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고모는 내 남편을 미워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걸 몰랐다.’

 

- 강화길, 「음복(飮福)」,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19쪽.

 


 

2)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어요. 사실 저는 인터넷에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쓰는데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SNS에도 회의적인 부분이 분명 있는데, 글쓰는 행위를 통해 사유하고 표현하는 의미에 대해 이 작품을 통해 많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 이 작품은 '용산 참사'의 주인공이 에둘러 쓴 글이잖아요.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의 =용산참사에 대한 트라우마와 부채의식이 공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용산참사 시절 고등학생이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예로 세월호를 생각해보면 , 우리 모두 '세월호 사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들은 사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동의 아픔과 PTSD를 겪었잖아요. 주인공을 통해 그런 부분이 형상화되어있어서 감정적으로 많이 슬펐던 작품입니다.

- 무엇보다 여성들 간의 연대성을 단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인상깊었어요. 이미 여성으로서 어려운 길을 걸어보았기에 더욱 더 그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을 치르게 될 학생과 강사가 동일시되는 느낌이었달까요. 사실 TVN 드라마<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채송화 같은 인물이 특별해 보이며 이상향이 되는 것도 송화는 송화 그자체로 빛나는데, 여성으로서의 한계 따위 없는데 -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남아있지요.

- 앞으로의 현실에 대해 이 작품 속 강사님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엿보였는데 그 점에서 무언가 씁쓸했어요.

 


3) 김봉곤, 그런 생활

- 퀴어문학을 너무 많이 접해서인가, 또 퀴어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 작가의 일기장을 읽은 느낌이었어요. 수필 같은 소설이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이 작품은 일상성과 특수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고 여겨지는데, 퀴어의 정체성-아웃팅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퀴어문학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어머니나 연인과의 관계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다름이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 퀴어문학에 대해 그동안 선입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퀴어라고 해서 그 관계까지 특별/특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저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4)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가장 충격적인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통해 시각을 확대해 준 작품이었어요.

- 동생과의 대화가 인상에 많이 남아요. "내는 그냥 행복하고 싶더라. 언니야도 안 그렇나?" 어떤 선택을 하든 여성 혼자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당연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 희진이 이야기한 '도덕적 우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뜻 어렵기도 하고... 많은 곱씹음이 필요하지만 마치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물었듯, 더 큰 선이 무엇인지 - 딜레마 상황은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 임신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중략) "…… 임신중지가 언제나 예외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써내려갔습니다. "……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 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

 

 

 

-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195-196쪽.


5) 김초엽, 인지공간

- SF 장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제나'라는 인물의 용기를 낼 수 있을까.....제나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어요

- 전 이브에 더욱 주목했어요. 이브는 충분히 강인함을 지니고 있는 아이인데 교육에서도 배제되는 등 공동체로서 약자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 과연 약자/장애의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 기억의 소중함을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이 사라진다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미또한 상실될 것 같아요.


6) 장류진, 연수

-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라는 이 말 한마디에 위안받는 느낌이었어요.

- 휴대폰 화면을 보는 강사님을 보면서 엄마가 떠오르는 작품이었어요. 엄마의 희생이 늘 알게모르게 자리하는데 그것을

경시해온 것은 아닌가 성찰하게 됩니다.

- 장류진 작가님의 <도움의 손길>이 함께 떠올랐어요. 파출부아주머니나 <연수> 속 강사님이나 우리세대의 어머니들이 지니고 있는 모습이, 그들의 문법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 그 깊은 속정에 주목해야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려봅니다.

 

“고마워요 선생님.”

“어이구, 인사할 정신은 있어? 전방 주시하세요.”

스피커폰에서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계속 직진, 그렇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 장류진, 「연수」,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286쪽.


 

7) 장희원, 우리(畜社)의 환대

- 이 작품을 읽고서 유럽 여행에서 인종차별을 겪을 때가 다시금 생각 났는데, 한국에서는 내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유럽여행 중에서야 , 아 내가 약자구나, 이방인에 불과하구나 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 성 정체성을 들키고, 부친의 폭력에 유학을 간 아들의 삶이 안타깝지만, 동거하는 이들의 관계속에서 아들이 빛나는 것처럼 재현 부부도 점차 아들을 인정하게 되리라 여겨보면서.. 절망 속 희망을 찾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3.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에 대한 전체적인 총평

 

- 여성서사가 부족했던 문학계의 현실에 그 필요성을 알린 작품집 (★★★★★)

- 젊은 작가들의 시대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다룬 작품집 (★★★★☆)

-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과 연대성으로 한국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품집 (★★★★☆)

- 20대를 지나 40대, 50대에 읽을 때 꼰대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게 해 줄만한 작품집 (★★★★☆)


****

청춘의 책탑 6월 모임 도서는

[권인걸 , 『이 책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 우리의 대화, 2020.  ]  입니다.

독서모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방향성, 모임에서 읽을 문학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며 더 좋은 독서모임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책이라 여깁니다. 

 

by papyros 2020. 5. 31. 00:26

 

 

[독립 북클러버 4기 - 청춘의 책탑] 5회차(4기 2회) 모임 후기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2020.01.30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4회차 리뷰(4기 2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안녕하세요.  독립 북클러버 1기에 이어 4기에 참여중인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입니다. 이번 4기 2회차 모임은 어제, 1월 30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함께 해외연수를 다녀왔는데 - 여행 중에 함께 독서모임을 하려했으나 빡빡한 패키지 일정에 실패하고 ㅠㅠ - 한국에 돌아와  여독을 푼 후 다시한 번책의 내용을 정리한 뒤, 독서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번 책은 yes24 북클럽에도 포함되어 있는 도서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책 베어타운과 베어타운의 후속작 우리와 당신들을 읽고 독서모임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마을을 둘러싼 사건들과 그 사건 이면에 자리하는 여러 인물들의 내면, 그리고 그 상황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과 문제의 해결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러 이슈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광교엘리웨이에 있는 오상진 아나운서의 책방 , <책 발전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지난해 독서모임에서도 방문했던 곳이지만 당시 호수공원의 야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했고 책 내음 가득한 서점에서 다시한 번 독서모임을 하고싶어 모임장소를 정했답니다. 달달한 음료를 마시며 좋은 친구들과 좋은 책을 주제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이번 모임도 여느때와 같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독서모임을 마친 후 함께 식사를 하고 호수공원을 야경을 보며 한 산책을 통해 우정이 한결 더 깊어진 하루였답니다.

 

그럼 사설은 생략하고 이제 본격적인 독서모임 후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2018, <베어타운>이 공식 출간되기 전, 따끈따끈한 가제본 도서를 먼저 받아 읽고 서평을 작성한 서평단 중 한 명이었답니다. 그 때 베어타운을 너무 즐겁고 의미있게 읽어 인생책이었는데 그 뒤 작년 초에 나왔던 후속작 <우리와 당신들>을 출간 뒤 뒤늦게 출간소식을 접하고 구매했는데 ...... 너무 읽고 싶은 책이었음에도 삶이 바빠 사놓고 읽지 못하는 책 중에 한권이었어요. 뒤편 내용이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논의할 내용이 많을 것 같아 함께 읽을 도서로 추천했는데, 이번에 <우리와 당신들>을 읽으면서 <베어타운> 때보다 더 다양한 인물들의 면면을 그려주어 좋았어요. 누구하나 사연 없는 인물이 없고,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 사실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먼저 읽었고 앞에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전작과 유사하겠다는 생각에 사실 작품에 큰 기대가 없었어요. 널리 알려진 <오베라는 남자>도 삶에 크게 남은 책은 아니었는데, 사실 이 책 - <베어타운><우리와 당신들> -을 읽으면서 작가가 몇 년 사이에 깊이가 생겼고 트렌드시류-에 맞춰서 많이 변해가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수자(동성애자나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인터넷 커뮤니티, 최근 악플로 인한 연예인들의 자살 문제 등 여러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책이에요.

 

- 일단 <베어타운><우리와 당신들> 모두 분량이 꽤 되는 작품이다보니 처음에는 너무 압도되어, 언제 다 읽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도 베어타운은 술술 읽혔으나 우리와 당신들은 좀 걸리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복선들이 사실 큰 사건이 아닌데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어요. 작가가 블로그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들어 작가의 원래 문체인 것도같고 다음 편을 읽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 같지만 문장들이 읽기에는 불편했던 것 같아요.

 

2.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과 구절을 소개해 주세요.

 

 


사람들은 성폭행을 이야기할 때 항상 과거시제를 쓴다. 그녀가 피해자 ‘였다’고 한다. 그녀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 지금도 겪고 있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지금도 당하고 있다. 케빈에게는 몇분 만에 끝난 일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끝나지 않는 일이다. 매일 밤마다 그 조깅 트랙이 꿈속에 등장할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매번 가서 그를 죽인다. 그러나 눈을 뜨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고 입속에 비명을 머금고 있다.

불안. 그것은 보이지 않는 지배자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364.

 


 

- 마야나 벤이와 같은 피해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은 충격과 아픔이 늘 현재진행형인데, 우리 사회를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는 피해자들의 아픔을 늘 과거로 처리한다. 과거의 고통이 아니며 여전히 그 고통은 진행중이고 결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점이 소설에서 너무나 잘 묘사되어 이 문장에 공감이 되었다. 어느 사회든 성폭행 피해자를 비롯해 다양한 소수자들의 문제는 비슷하게 겪고 있는데 그들이 삶에서 진통을 겪는 부분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 프레드릭 베크만이 그만큼 사회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이를 알리고 나누고자 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장이 나올 수 있었다고 여긴다. 기실 성폭행 피해자의 이야기나 동성애 이슈, 페미니즘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소설로 다루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는데 사회문제를 가볍지 않게 다루면서도 문학적으로 잘 승화시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벤이의 면전에 대고 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기에 그들은 이럴 때 사람들이 늘 하는 대로 한다. 그를 놓고 입방아를 찧을 뿐 그와 말을 섞지는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 되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지만 대개 동원되는 이 방법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 없다. 그에게서 이름을 빼앗는 것이다. ’진실‘이 유포되자 어느 누구도 전화기나 컴퓨터로 ’벤야민‘이나 ’벤이‘라고 쓰지 않는다. ’그 하키 선수‘라고 한다. 아니면 ’그 학생‘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남자애‘라고 한다. 아니면 ’그 호모‘라고 한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392-393.


 

- <베어타운>에도 마야에 대한 폭력이 같은 방법으로 묘사되었는데, 면대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사자의 인격을 제거하고 대상화시키는 모습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나중에 그는 남들과 다른 그 느낌을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얼마나 몸으로 느껴지는지를 말이다. 겉도는 것은 뼛속까지 소진되는 느낌이다. 남들과 같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다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407.


 

-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때, 철저히 소외되거나 배제될 때의 느낌을 잘 묘사한 것 같다.뼛속까지 소진되는 느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너무나 가슴 깊이 이해되어서 더욱 사무치는 구절이었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을 좋아한다.

 

 

- 프레드릭 베크만, 베어타운, 다산북스, 2018, 66.

 


- 사실 우리가 학교나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늘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사랑이나 배려등 선()한 가치인데, 정작 추구하는 것은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점에서 마음아픈 구절이었다. 베어타운에서 페테르가 끝까지 케빈을 고발하기 주저했던 점이 바로 케빈이 그들의 주력 선수였기 때문이었듯, 그 무엇보다 하키 시합에서의 승리가 우선시되는 가치라는 점은 여러 좋은 면에도 불구하고 베어타운이 지니고 있는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켈은 눈썹을 추켜세운다.

“나한테 골키퍼를 주겠다고요?”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그쪽이 골키퍼를 키우는 데 소질이 있다고 그러기에요. 그쪽이라면 이 녀석을 환상적인 선수로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중략) 그는 헤드 출신이지만 거의 이십 년 동안 베어타운팀에서만 활약할 테고 어느 날부턴가는 응원단이 보기에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곰이 되어 있을 것이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600-601.

 


 

- 작품 곳곳에서 베어타운 대 나머지 전부라는 표현들이 나온다. 그만큼 그들 안에서 강하게 단결된 베어타운과 헤드의 지역감정을 잘 다루면서도 종국에는 베어타운도, 헤드도 모두 악인이 아니며 지역을 넘어 서로 간의 열정을 존중하고 조금이나마 서로 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색되고 있어 의미있었다. 그 상징적인 부분이 결말부에 드러나는데, 다비드가 사켈에게 골키퍼로 쓸 만한 선수를 추천하면서 헤드 출신 베어타운 골키퍼의 탄생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단짝 친구의 허물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무슨 수로 남들보다 먼저 알 수 있을까? 그 해 봄의 어느 날 밤에 케빈이 여기서 멀지 않은 숲속에 서서 벌벌 떨며 벤이에게 용서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벤이는 몸을 돌려서 떠나버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64.

 

“내가 왜 걔를 용서해야 해요? 선배에게 그렇게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녀는 쏘아붙인다. “하지만 너희는 자매나 다름없잖아. 자매들은 서로 용서하는 거야.” 벤이는 우물쭈물 이렇게 얘기한다. 그에게도 누나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야는 고개를 모로 꼬고 묻는다.

“선배는 아나를 용서했어요?”

“응?”

“왜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니까.”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543.

 

- 용서 라는 화두도 이 작품에서 생각해 볼만한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케빈은 마야와 벤이 모두에게 용서받지 못했고 아나는 마야와 벤이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문득 고민해 보았다. 어쩌면 케빈과 아나라는 인물의 결이 달라서이지 않았을까.. 물론 케빈도 초반에 나름대로 후회하는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그는 그의 잘못에 대해 그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용서를 구하지 않았지만 아나는 피해자에 대한 깊은 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벤이에게도, 마야에게도 깊은 미안함을 지녔다. 두 인물이 지닌 피해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령 아나는 자기 잘못에 대해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고 마야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용서라는 가치가 케빈에게는 허용되지 않았고 아나에게는 허용되었던 점은 이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3.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호감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내가 이겨. 왜냐하면 불공평한 싸움이거든. 벤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지 못하니까.”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141.


 

- 벤이의 인생 자체가 굴곡져 있는 데다가 겉으로는 강인해보이지만 내면은 섬세하고 여린 벤야민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다가왔기에 시리즈 내내 벤야민에 가장 많은 애착이 갔고 그에 대해 공감하며 읽었다.

 


  이 일대에서는 하키가 곰들의 스포츠지만 아맛은 사자처럼 플레이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는 이 스포츠를 통해 이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이것이 거기서 탈출하는 티켓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겨울에는 아이스링크에서, 여름에는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지만 아맛에게는 나중에 프로 선수가 돼서 어머니를 탈출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난 봄에 청소년팀에 합류했을 때 기회가 생겼다. 그는 그 기회를 잡았다. 이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그가 승자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의 꿈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100.

 


 

- 아맛. 사실 아맛의 어머니가 아맛에게 전해 준 삶의 가치 부터가 공감이 되었다 정직을 강조하는 모습 덕분에 아맛도 자신이 지닌 한계를 넘어 진실을 마주하고 알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작아보이는 아맛이었지만, 할로 출신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한계에도 극복하고 노력을 통해 자신의 성취를 이루어가는 모습이 멋있다고 여긴다.

 


동료는 준엄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너는 네 명이야, 미라.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게 되어주려고 해.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직원.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 거야?”

미라는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은 중요한 서류를 보는 척했지만 결국에는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네 명이라며. 아내, 엄마, 직원....... 나머지 하나는 뭐야?” 동료는 책상 위로 허리를 숙여서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슬픈 표정으로 유리를 두드리며 얘기했다. “이 여자. 언제면 이 여자의 차례가 돌아올까?” 미라는 앉아서 시커먼 모니터에 비친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177-178.

 

 

- 사실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미라였다. 좋은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변호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임하는 인물. 모든 일을 잘해내고 싶은 미라의 모습에 공감이 갔고 어쩌면 내게도 그런 욕심이 있기에 닮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강인해 보이는 미라가, 소진될까봐 아니 소진되고 있는 부분도 있어서 안쓰럽기도 했다. 미라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너무 모든 것을 다 완벽히 해내려고 애쓸 필요 없다고 왠지 계속 옆에서 토닥여 주고 싶은 캐릭터다. 마야만큼이나 힘들지만 엄마이기에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인물이 미라라고 생각했다.

 


 

“나는 언론을 상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단장님이 하세요. 그리고 나는 리사르드 테오의 홍보단이니 뭐니 하는 거에 눈곱만콤도 관심이 없고 여자 하키 코치가 되려고 여길 찾아온 게 아니예요.”

페테르와 수네는 서로 쳐다본다.

“그럼 뭐가 되고 싶은데?” 수네가 묻는다.

“하키 코치요.” 사켈이 대답한다.

 

- 프레드릭 베크만, 우리와 당신들, 다산북스, 2019, 180.

 


- 사켈도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늘 남자 하키코치들에 비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원하는 팀만을 맡아오지 못하는 등 유리천장이 있었을텐데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부단히 노력해 온 인물이었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시험대인 것만 같을 듯 하다.

 


 

4. 작품 속에 등장한 여러 내용 중 우리 사회에서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만한 화두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우리 사회 속에서 성폭행 피해자와 관련된 뉴스나 기사를 많이 접해 왔지만, 그 후의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다루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피해자의 가족들과 주변인들의 상황을 잘 다루어주고 있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보였고 내가 과연 베어타운의 주민들이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성찰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 여긴다.

 

- 내부 고발자에 대한 이야기(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를 테면 케빈의 행동을 증언한 아맛에 대한 시선도, 또 케빈의 시합 직전 그를 고발한 페테르에 대한 시선도 베어타운 안에서는 그리 좋게 보여지지 않았는데 그들이 내부 고발자가 아닌 다른 언어로 불렸으면 좋겠다. 그들은 양심에따라 행동했을 뿐인데 이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긴다.

 

- 하키에만 너무 매몰된 베어타운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힘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기에 자신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키라는 스포츠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모습이 마치 현대 사회에서 공무원 시험에 몰입하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 같아 안타까웠다.

 

- 베어타운에서는 하키장의 빙판와 같은 공간이 바로 불합리한 사회 속에서 공정성/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우리 사회속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위해 바로 장학금 지원, 중소기업 지원(대출지원) , 농어촌전형 등의 장치가 더욱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청춘의 책탑의 6회차 모임 도서는

헬렌 맥도널드, <메이블 이야기> ,판미동, 2015. 입니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의미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y papyros 2020. 1. 3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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