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9회 :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4주차)

최종 감상평 및 참여후기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정용준 작가님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를 3주간에 걸쳐 읽어내었다. 이미 지난주에 완독을 했기에, 작품의 의미를 곱씹어보고자  이번 주차에는 「작가의 말」 이제니 시인의 「추천의 말」을 마지막으로 읽어내려가는 한편 민음사 인스타그램 에서 개최했던 문학대축제 영상을 뒤늦게 나마 찾아 영상을 보았다.

  「작가의 말」은 소설을 쓴 작가 정용준의 메세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여운때문인지 왠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 소년이 들려주는 후일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용준 작가님의 전작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언어장애'를 겪는 인물들이 많다고 하는데,  정용준 작가는 왜 이를 '질문'으로 삼았을까. 일전에 마음에 남는 문장으로 남아 필사했듯이 우리모두는 어느정도 말더듬이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단 표면적으로 말을 더듬는 걸 넘어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타인들에게 얼마나 깊이, 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는 걸까.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우리는 보기에 조금 튀는 거고. 너도 나중에 더듬지 않게 되면 알게 될 거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75쪽.

 작품의 소년 또한 선택했듯이  '글쓰기'는 '말하기'와 비슷하면서도 직접 언어화하고 발화하기에는 너무 힘겹고 아픈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전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책을 좋아하고 조금씩이나마 글을 쓰기를 좋아했던 나도 내 안에 품어내고 있는 그 모든 생각을 정연히 언어화하여 전달하기엔 대범치 못해서, 부족한 사람이어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더 선호해오지 않았나 싶다.

 


 너 글 잘 쓴다. 글쓰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 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아무튼 글쓰기도 마찬가지야.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다음 다음 음도 나오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문장도 문장도 없지. 그러니까 첫 문장은 많은 문장들 중 첫 번째가 아니라 앞으로 나오게 될 글들의 생명체의 머리 머리 머리 같은 기능을 담당하지. 글을 고치는 과정도 비슷해. 좋지 않은 문장을 조금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바꾸고 구조와 순서를 고민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게 노력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거든. 그래서 말더듬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단어를 단어를 알아야 하고 습득해야 해. 실패한 단어를 대체할 단어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거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야.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해. 그런데 24번. 네가 쓴 글을 보니까 괜찮아. 재능이 재능이 있어.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5-116쪽

 

  작품 속 열 네살 소년의 모습은 이미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와 많이 닮아있는 그 소년.. 아마 소년을 통해 자기 내면의 소년을 발견한 독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여긴다. (심지어는 작가님 본인 조차도) 그런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년을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계피 맛 사탕을 쥐어주는 할머니, 돈까스를 사주는 친절하고 따뜻한 이모, 자신과 닮아있는 친구들, 글을 잘쓴다고 이야기해주는 작가 형 - 이들 같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년에게 상처를 입힌 그 어른들을 용서하는 방식으로든 혹은 복수심을 키워나가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던 어른들의 그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순간, 내 안의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폭력적인 아저씨에게 매여있는 엄마의 사정도, 할머니(어머니)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던 스프링 언어교정원 원장님도,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더듬는 이모도.... 그들 모두가 내 마음의 한 자리에서 자연스레 이해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성장한 우리에게 이제는 둘리의 고길동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것처럼)  

 작품을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 무언가가 남아있는 이 기분은.. 북토크에서 등장한 한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이 '비판적 독서'의 대상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겪어내며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작품으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서평을 갈무리해 본다.

 소년이, 내가,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과 만나온 사람이 비단 '한 여름밤의 꿈'이나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품어야 할 강렬한 무엇인가로 남기를 소망한다.


그는 어른이 됐다.

언제, 어떻게, 왜, 어른이 되는지 궁금했던 그는

마침내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욕했던 모든 어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막연히 알 것 같았다.

(중략)

감정. 얼굴. 이름. 일기. 날과 달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단어들.

진짜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고 얼굴이 되고 이름이 되어 살아 움직였어.

가짜가 아니었어. 뻥이 아니었다고.

 

- 정용준, 「작가의 말」,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61-163쪽.

 



 

 

by papyros 2020. 8. 19. 09:08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9회 :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3주차)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어느덧 정용준 작가님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은지 3주가 지났고, 작품을 완독했다. 사실 책의 지면이 그리 길지 않아 충분히 하루에 완독할 수 있는 길이였지만,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프로그램을 위해 3주간에 걸쳐 조금씩 끊어 읽으며 더욱 오래 소년과 함께하면서 아이를 바라보고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 유의미했다.

 발표를 '망쳤다'고 생각한 소년이 '스프링 언어교정원'에 나가지 않게 되자 교정원의 사람들은 소년의 부재(不才)로 인해 그를 그리워한다. 그만큼 언어교정원에서 소년이 스스로를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교정원의 사람들은 이미 소년을 공동체 안의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특히 소년의 발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까지 표현한다.

 소년도 스프링(언어교정원)에 나가지 않는 사이, 그에게 영향을 준 스프링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 할머니, 이모, 노트, 하이, 원장에 이르기까지-을 그리워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한다. 


 얼음의 나라처럼 지금 이 말을 그대로 얼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할 때마다 더듬지 않은 말을 따뜻한 말에 녹여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술 취하지 않은 엄마의 다정한 말도 얼리고 이모가 내게 해 줬던 모든 말도 얼리고 할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말도 얼리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그 아들을 만나면 다 들려주고 싶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얼리고 싶다. 이모에게 하고 싶은 말도 얼리고 싶다. 할머니에게는 할머니의 아들 역할을 한 연극배우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괜찮아요. 용서해요. 그렇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훌륭한 연극배우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까지 여유롭게 닦아 주면서. 노트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이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스프링 사람들 모두에게 다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원장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 해 줘야 할 말이 있다. 할머니가 준 계피 맛 사탕이 이제 딱 두 개 남았다. 그중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이 사탕은 도대체 어디에서 파는 걸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 한 달 전에 슈퍼에 가서 할머니가 준 계피 맛 사탕을 보여 주고 같은 걸 달라고 했는데 슈퍼 주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팔지 않는다고 했다. 엄청 오래된 사탕 같다고. 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걱정도 해 줬다. 백 년쯤 된 사탕일까? 유통기한이 하루 지나 먹으면 병에 걸리는 그런 불량 식품일까? 병에 걸리면 그것도 좋겠다. 병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사탕을 빨았다. 빨 때마다 쓰고 달콤해지는 입안. 줄어들 때마다 조금씩 나는 잠에 빠져든다. 자장자장 재워 주는 맛이다. 어둠 속에서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이 내 머리를 만지는 것 같다. 만져 줬으면 좋겠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8-119쪽.

 

 이 지점에서 '관계 속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연으로 엮여진 가족보다도 오히려 깊이있게 내면이 맞닿은, 내면과 감정의 선을 이해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 특히 경찰서에서 진술하는 소년을 보호해주기 위해 스프링의 모든 이들이 합심해 나설 때 그 사랑과 애정의 힘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노트에 쓰는 겁니다. 생각하는 것. 관찰한 것. 느낀 점.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것들 모두 쓰게 합니다. 때론 시나 소설처럼 문학적인 상상력 같은 것들까지 쓰게 하죠. 그러니까 그건 일기장이 아니라 마음을 언어로 옮기는 연습장 같은 거예요. 언어를 풍성하게 하고 말을 잘하기 위함이죠. 교정원 사람들은 다 그런 노트를 쓰고 있어요.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38쪽.

 

 용서와 복수. 작품의 초반부터 조금씩 생각나게 하지만 마지막에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이 화두는 과연 양립이 가능한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하고싶으면서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애증)의 마음. 심리학에서는 이를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양가감정을 조금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작품속 소년처럼 '신뢰로운', '신뢰할 수 있는' , '좋은' 이들을 만나고,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수단(매개체)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년과 같이 '글쓰기'가 될 수도, 반 고흐의 '그림이' 될 수도,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이 될 수도, 그리고 헤르만 헤세처럼 글쓰기와 그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다.

 한 생애를 살면서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우리네 마음 자리를,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매개물과 더불어 이를 알아 줄 사람들이 주변에 자리한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자리한다면 - 그것이 바로 내면의 외상을 극복하고 한 차원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주차에 작가의 말과 더불어 생각을 좀 더 정제하여 작품을 전반적으로 정리해 내면화하고 싶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도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그런데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50-151쪽.

 

by papyros 2020. 8. 12. 23:21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9회 :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2주차)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63페이지 내외의 짧은 소설인 정용준 작가님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말을 더듬는 열네살 소년 '나'는 스프링 언어교정원에서 만난 한 친구의 말 -국어선생님께 복수하라는- 의 개연성이나 타당성도 제대로 검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소외감을 겪고 있다. 열네살 소년이 지닌 그 소외감의 무게가 크면 얼마나 크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는데,  기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는 상처가 가장 무거운 법이다.

 소년처럼, 원장 또한 시계를 제대로 못하는 어린 시절의 그를 답답해하며 모욕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부자(父子)의 모습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어머니가 있었던 가족 환경 속에서 받은 상처를 소년에게 담담히 풀어낸다. 어른이 된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이해하는 모습까지 보이지만, 아직은 열네살 중학생에 불과한 소년이 상처를 가하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까지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부모들이란 그렇단다. 잘해 주다가도 때리고 사랑하는 말로도 상처를 주곤 하지.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다 그러려니 해. 그리고 미워해.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97쪽.

 

 소년은 말을 더듬는 그를 연민하는 엄마와 더불어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 엄마의 전 애인이 함께하는 상황 그 자체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특히 소년은 엄마의 전 애인으로부터 '나약한' 아이이자 '어머니의 근심(걱정)거리' 정도로만 치부되며 심지어 학교에서는 친구 한 명 없는 외롭고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아이로 여겨지는데, 이 때문에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삶에는 큰 희망이나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라든가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기 어려운데다가 심지어 왕십리역에서 진행한 스피치까지 망치고 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구를 죽이려는 게 아니고 누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복수의 마음인가, 도와주려는 마음인가.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떤 날엔 엄마에게 그 약을 주고 싶기도 하고 어떤 날엔 엄마의 애인에게 그 약을 주고 싶기도 하다. 어떤 날엔 선생에게, 어떤 날엔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먹이고 싶기도 하니까. 그리고 어떤 날.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날. 그냥 살고 있는 것뿐인데 엄청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엔 차라리 내가 먹고 싶기도 하다. 어떤 친구가 물었다.

 넌 왜 사냐? 쓸모없고 말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늘 괴롭힘만 당하잖아. 왜 살아? 친구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말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내 삶이 너무 쓸모없고 괴로워 보여 차라리 죽지 뭐 하러 사는지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01쪽.

 


 그만하자. 끝났다. 다 끝났어. 무엇을 기대했을까. 난는 속고 또 속는 바보처럼 이번에도 속았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위해 노력해 줬던 사람들. 진심으로 대해주고 마음 아파해 줬던 사람들. 그들을 배신했다는 생각과 그들이 실망했다는 생각이 마음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다. 나 외엔 누구도 날 비난할 수 없다. 나를 이해한다고? 아니, 누구도 나처럼 살지 않았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07쪽.

 


 결국 왕십리역에서 스피치 사건을 망친 이후로 좌절감을 겪은 소년은 스프링 언어교정원에까지 나가지 않게 되고야 말지만.. 기실 답은 소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예감하고 있다. 이미 소년 내부에는 그 자신만의 가치가, 그 자신만의 힘이 있다. 아직 그것을 소년 자신이 찾지 못했을 뿐이다.

 때문에 소년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해나갈, 작품의 후반부가  더욱 기대된다.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우리는 보기에 조금 튀는 거고. 너도 나중에 더듬지 않게 되면 알게 될 거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75쪽.

 


 너 글 잘 쓴다. 글쓰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 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아무튼 글쓰기도 마찬가지야.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다음 다음 음도 나오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문장도 문장도 없지. 그러니까 첫 문장은 많은 문장들 중 첫 번째가 아니라 앞으로 나오게 될 글들의 생명체의 머리 머리 머리 같은 기능을 담당하지. 글을 고치는 과정도 비슷해. 좋지 않은 문장을 조금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바꾸고 구조와 순서를 고민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게 노력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거든. 그래서 말더듬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단어를 단어를 알아야 하고 습득해야 해. 실패한 단어를 대체할 단어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거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야.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해. 그런데 24번. 네가 쓴 글을 보니까 괜찮아. 재능이 재능이 있어.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5-116쪽.

 

by papyros 2020. 8. 5. 2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