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구텐 모르겐.’책 제목과 더불어 책 소개 페이지에서 아, 독일 생활을 적은 에세이구나! 하는 마음에 자연스레 마음이 갔다. 독일 이민과 독일에서의 삶과 교육을 적어내려간 책이려니, 생각하고 책장을 펼쳐내려갔다.
저자는 개신교 교회 목사님의 아내로, 90년대 중반 먼저 유학길에 오른 남편의 뒤를 따라 독일에 이민하게 된다. 저자에게는 세 아이가 있는데 차례로 ‘결, 길, 힘.’이다. 내 나이와 저자의 아이들 중 ‘길’의 나이가 엇비슷해 보여 괜히 세 남매 중 길의 에피소드에 마음이 갔다.
작품의 여러 내용 중 특히 인상깊은 점은 저자가 독일에서 아이들의 한글(모국어)교육에 힘쓰며 아이들을 한국 학교에 보내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최근 이중국적이나 다문화가정, 해외거주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즐겨보는 다음 웹툰 <딩스,뚱스,땡스>라는 만화만 보아도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다 귀국한 아이 땡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모국어 정체성문제, 학교부적응 등의 문제를 겪는 부분들이 그려지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독일에 살면서도 얼마나 자녀들의 한국적 정체성과 한글 교육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을지 그 과정이 너무나 생생히 그려졌다. 서로 다른 두 국가의 문화와 언어를 모두 습득한다는 것이 분명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자/주 양육자들의 아이들에 디핸 신뢰와 기다림, 지속적인 대화가 필수적이지 않은가 싶다.
에세이를 통해 아이들의 유년기부터 성장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내 또래의 친구들이 커가는 모습을 살펴본 듯한 기분이 들어 무언가 유대감이 형성되기도 했다.
다만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다는 점인데,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는 것은 그만큼 저자의 삶을 지탱해온 데 개신교 신앙이 가장 우선순위에 놓이며 그 삶의 결과 가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으나, 다만 독일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는 독일문화와 독일의 학교교육에 대해 더 알고싶어 선택했던 책인지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분홍빛이 감돌아 마치 힐링을 줄 것만 같은 에세이로 보이는 이 책은, 표지와는 달리 결코 가볍게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는 아니다.
문체는 가벼우나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닌 이유는 바로 저자가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서 경험한 내용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아직 임상경험도 상담장면에서의 상담 경험도 이제 겨우 한 발 내딛은 내게 도박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도박중독자의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정서적 문제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120쪽에도 약술하고 있듯이 도박장애(Gambling Disorder)는 DSM-5 편람 상 물질사용 및 중독성 장애(Substance Use and Addictive Disorder)의 아형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진단기준은 아래와 같다.
4. 금단증상(Withdrawal): 도박을 줄이거나 끊으려 할 때 초조, 안절부절, 성마름
5. 회피(Escape): 문제나 나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함
6. 추격매수(Chasing):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도박함
7. 거짓말(Lying):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도박을 숨김
8. 대인관계, 일 등에 부정적인 결과(Negative consequences): 관계손상, 가족 및 사회관계 직업, 학업 등 위태, 상실
9. 구조요청(Bailout): 도박으로 인한 재정문제로 도움 요청.
B. 도박행동이 조증삽화에 의하지 않는다.(조증의 증상으로 도박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조증삽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12개월 이상의 지속성을 지니고 도박에 집착하며 도박에 대한 통제력(조절능력)을 상실, 금단증상을 겪고, 재정문제로 인해 주변인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주요 증상들이 4개 이상이라면 임상심리사들에 의해 도박장애로 진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평에서 이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싶다. 심리학 전공자이며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내가 임상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자가 들려주는 그동안의 분투와 삶에 깊이 공감하며 몰입해 책을 읽었다.
특히 저자는 도박중독을 겪는 가족이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쌍둥이오빠였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들었을 것 같다. 차라리 일반 형제나 자매라면 어느 정도 선에선 타인과 마찬가지로 심리정서적 분리가 가능하지만,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쌍둥이’이기에 이미 성장과정 상 공유해온 내면세계가 깊이 자리했기에 저자가 우울증과 무기력을 겪을 정도로 순교자형의 공동의존 형태까지 겪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조심히 생각해 본다.
저자 본인이 그녀의 쌍둥이오빠 현이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먼저 알게 되었기에 저자는 오빠와 부모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그녀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린다. 물론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는 저자의 오빠 본인에게도 그 고군분투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가고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바는 심리와 적응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한 것인지를 막론하고 모든 질병들은 그 질병을 겪는 환자 본인과 더불어 가족들이 그 치료의 여정을 함께 지난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한명의 도박중독으로 인해 저자는 우울과 무기력을 겪는가 하면 지난세월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헌신했으나 그 지난 삶을 모두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받는 어머니, 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자가 작품 중간 인용한 사티어의 이론처럼, 가족 구성원 한 명의 문제가 가족 전체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가족 치유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 버지니아 사티어(Virgina Satir)는 가족을 천장에 매달아 놓는 장난감 모빌에 비유했다. 모빌의 어느 한 부분이 움직이면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가족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175쪽.
때문에 질병을 앓는 환자 개인 뿐 아니라 환자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 역시 함께 치료받아야 할 대상임을 우리 사회가 더욱 깊이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저자가 개인상담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 스스로를 자책하는가 하면 오빠의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아야만 했던 것은 질병을 앓는 이의 가족도 치료의 주체라는 인식 없이 질병을 앓고 있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일반적인 사회의 요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가족이 고통을 넘어 치유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들이 도박중독은 ‘완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단(斷)도박’의 기간을 유지하는 것임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도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과잉기대도, 도박중독이 장애가 아니라고 여기며 ‘부정’하는 것도 아닌 도박장애의 실체와 그 문제를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했기에 그 치유의 여정이 열렸던 것이다.
특히 저자의 가족에게는 가족상담보다도 ‘자조집단’을 통한 집단상담이 더욱 유의미했는데, 어쩌면 중독 관련 자조집단 모임의 특성 상,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개방’을 통해 응집력을 지닌다는 점이 강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오빠 현뿐만 아니라 저자도 함께 모임에 꾸준히 나가는 것은 가족구성원들의 자조집단에서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평가하거나 염려,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경험을 한 이로서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전감을 통한 응집력의 형성이 중독치료에서 얼마나 중요한것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곱씹을 수 있었다. 비단 중독모임 뿐만 아니라 상실과 같은 외상경험(PTSD)을 겪은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중독문제가 없는 이들은 내 삶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오늘도 살아갑니다.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방법도 모르고 의지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중독자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문제를 벗어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가리켜 회복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삶이 회복중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내 삶이 회복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19쪽.
특히 이 에세이에서 나 자신에게 경종을 울린 부분은 후반부에 등장했는데, 사실 우리 모두 누구나 조금씩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자의 오빠 현처럼 도박중독이라는 진단이 꼭 내려지지 않더라도, 혹은 알콜중독이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어딘가에 중독되어있다. (나만 해도 설탕과 밀가루 중독이 아닌가......! ) 개인적으로, 다이어트 중이라 최대한 초콜릿과 같은 군것질거리와 밀가루와 튀김과 같은 음식을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나 또한 이러한 중독에서 멀어지기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꼭 진단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현대인은 누구나 대상이나 정도의 차이 있을뿐 다소간의 중독을 겪고 이는데 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회복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나가냐, 혹은 자신이 무언가에 중독되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그 삶에 안주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이 평이하고 편안한 어투로 쓰여져 가독성이 있었음에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저자 본인이 겪은 ‘외상과 치유의 경험’을 고백하고 깨달음을 나눔으로써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년 전, 출간 후 화제가 되었던 수 클리볼드의 저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은 바 있다. 그 책 또한 미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학생의 어머니가 총기난사 이후 그녀가 마주한 삶의 변화와 체득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인데, 수 클리볼드의 이 책도 그리고 저자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라는 이 책도.. 두 책은 모두 그들이 겪은 외상의 경험을 책의 제재로 잡아 다른 치유의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가 되고자 했던 동기가 내 유년시절 너머 외로움의 기억과 이를 보듬어주신 좋은 은사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듯,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변화와 성장의 동력이 되리라 여긴다.
때문에 이 책의 독자로서, 내가 지닐 수 있는 몫은 상담자(전문상담교사)로서 도박중독을 겪고있는 청소년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단(斷)도박을 위해 조력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책을 주변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 또한 내 삶의 체험과 상담교사로서의 경험들을 함께 나누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족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해 주고, 새로운 목표를 지니게 해 준 이 책의 저자분께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저자분과 그녀의 가족들의 삶을, 그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내가 신부이고 도박을 끊은 강박적 도박중독자라는 사실에 신께 감사한다. 내가 도박을 할 때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그 일들도 모두 내가 회복으로 가는 여정과 어떻게 다른 강박적 도박중독자들이 도박을 끊도록 도울 수 있는가를 배워가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자를 덮고 일어나 다시 백 신부님의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갔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타인에게 제공한 사람. 상처 입은 이들을 자신의 삶에 들이고, 그들이 삶의 닻을 내릴 수 있게 안전한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준 사람.
"내 꿈은 말이야, 저 별처럼 한결같이 살고 싶어. 길 잃은 누군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 말이야."
"그게 바로 선생님이네. 혜정이는 천직을 잘 찾은 것 같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28쪽.
최근 '빈빈책방'이라는 인문사회서적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대해 알게되어 출판사의 책을 찾아보다가, 최강문 작가님의 『다시, 광장』 이라는 책을 접한 뒤,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기실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최인훈 작가의 소설, 『광장』이었다. 책에 대한 깊은 정보 없이 제목과 역사소설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읽게 된 작품이다보니 처음에는 『광장』을 패러디한 소설이려나?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작품의 중간에도 최인훈의 『광장』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긴 한다. 뒤에서 후술토록 하겠다.)
작품은 1984년부터 1997년 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신군부의 독재가 이어지던 1984년, 대학생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한복판을 살아간 당시의 20대 청년들. 84년 대학 신입생이 된 인석, 혜정, 용우, 수홍, 현태. 그들 모두는 2010년대의 20대로서 대학생활을 해 온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대학생으로서 청년기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했고, 사회문제에 깊이있게 고민했으며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옳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20대였다. 특히 작품의 초반부에 나는 그들 중에서도 국어교사를 목표로 하는 혜정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교직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있는 혜정과 같이, 나도 중학시절부터 평생 국어교사를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할텐데, 어떻게하면 좋은 책을 잘 고를 수 있을까요?
혜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춘길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독서 모임을 해봐. 주기적으로 만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음 책을 무엇으로 정할지 서로 의논도 하고. 그러면 정말 도움이 될 거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3쪽.
친구들이 춘길 선배의 추천으로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는 대목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유년시절부터 책을 즐겨읽어왔고, 대학 시절 가장 먼저 들었던 동아리가 대학 연합 독서토론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1980년대의 20대들도 2010년대의 20대와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지식과 생각, 가치,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서모임을 지속했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광장』 등 … 우리도 학창시절 성장 과정에서 당대 사회현실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수없이 공부해 온 작품들을, 작품 속 친구들 또한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바로 보기 위해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필적이 닮았다? 유태인이다? 그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아?"
"맞아 수홍아.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진상을 계속 은폐하기만 했대. 법원도 군부의 편을 들어 거짓을 지키기 위해 진범 스파이를 무죄 석방하기까지 했어. 그러자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6쪽.
"넌 책도 다양하게 읽는구나. 교양서적하며, 소설책도 많이 있고. 최인훈의 『광장』, 나도 있는데. 이데 올로기가 뭐라고 그렇게 남과 북이 아닌 제 3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소설 읽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 결국에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좇아 푸른 바다로 투신하잖아.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율도국을 찾아 떠난 홍길동 이야기도 생각나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곳이잖아? 멀리 있을 이상향이 아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9쪽.
"아, 그런 이야기도 나왔어? 비록 소설 형식이기는 하지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었던 셈이야. 청계천 알지? 지금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그곳이 60년대 말까지 난쟁이라고 표현된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살았던 곳이었어. 70년대 초 개발 바람이 일면서 정부에서 다 쫓아냈지. 그래서 그들이 간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 지금의 성남시. 소설에도 나오잖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42쪽.
그러나 MT장소에서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중 그들을 의심하던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북한서적 아니냐, 혹은 막스 베버를 마르크스로 착각하는 형사의 이야기... 이 시대의 20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유롭고 편안한 가운데 독서모임을 하는 것과 달리 80년대의 청년들에게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수한 독서모임이 '운동권'이나 '간첩'으로 의심받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은 나름의 변화나 내적 갈등들을 겪으며 그들 삶의 경로는 각각 변하게 된다.
인석은 한국대(서울대의 소설 속 명칭) 사회학과를 다니는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던지며 운동권의 선두에 앞장서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종국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법대생인 용우는 더욱 철저히 권력을 지키고 힘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 사법시험에 매진해 검사가 되고, 혜정은 교사가 되었으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해직되기까지 한다. 현태는 옥상에서 사고를 당한 후 장애를 지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진실을 좇는 기자가 되었으며, 수홍은 안기부(국정원)에 입사했으나 그럼에도 친구들을 저버리지 못한다.
각기 처한 상황과 선택은 다르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각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니고 격동의 80년대에 대응해왔다. 자신을 내던지고 독재정권에 열정적으로 투쟁한 인석이나, 전교조에 가입하는 등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혜정과 비교하면 용우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용우마저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한 청년으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서른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내가, 2010년대가 아닌 그 당대의 대학생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인석이나 혜정같은 용기도, 그렇다고 용우나 수홍처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두려운 나는 이 작품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인 90년대생의 나로서는 살아가보지 않은 80년대 청춘들이 겪은 고뇌의 깊이와 선택에 대해 감히 함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그저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었으며,(스무살에서 12년이 지난 후에도 3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하다.) 운동권으로 학생운동을 해왔다고 해서 , 노조에 가입했다고 해서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정치검사나 안기부 직원이라 하여 극우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모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청년들은 각자 자기만의 신념과 가치로 삶을 살아내고 버텨왔을 뿐이다.
"학생운동?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 않더라구. 군사독재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가진 자는 더욱 갖게 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은 더욱 굶주리는 그런 구조를 깨닫고 나서는 그냥 눈 감고, 귀 먹고 벙어리로 살 수가 없더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난 세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 94쪽.
"오빠야가 출세해가 돈 벌면 안되나?"
"물론 그렇게 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당장 이 동네 이웃들은? 나 혼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벽을 허물어서 다 함께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야."
"나는 오빠야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꼭 생각해주어야 되나?"
"인옥아, 난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이 학생 운동의 목표이고, 또 민주화운동의 지향점이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62쪽.
"세상이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지만, 돈과 권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잖아요. 그 친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거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서령씨도 풍물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가요?"
"풍물을 하면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아요. 더없이 기쁘죠. 게다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요? 용우씨야말로 인생의 목표가 무언지 묻고 싶네요."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91쪽.
이 소설은 정치적 신념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고뇌와 선택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며 동시에 90년대생인 내가 80년대 독재정권 시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유의미했다. 교과서, 책,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80년대 독재정권 시절과 현대사회의 역사에 대해 배워왔으나 교과서의 한 줄로 접해온 것이나, 다른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청년들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그만큼 흥미롭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또한 청년들이 실존인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품이 생생했으며 가독성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의 청년들은 바로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세대이자, 정치인들의 모습이리라 여긴다.
다만 결말부가 조금 아쉬웠는데, 작품의 인물소개글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뒷이야기나 자세한 고민, 반전 등이 작품 속에 담겨있지 않았다. 때문에 97년에 이어 98년부터 2020년까지를 다룬 후속 권이 나오지 않을까 추정하는데, 이 청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과연 그들의 우정은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 궁금증이 앞선다. 계속되는 내용이 기대되는 한편 마음에 남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오래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잘들 한번 찾아보세요.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 모습일 수도 있고,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