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홀든 콜필드’.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이 소년을 획일적이고 억압적 교육에 반항하는 학생으로서 획일적이고 주입식 교육에 의해 희생당한 반항아’, ‘문제아로서 사랑과 관심으로 보듬어 주어야 할 소년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고 깊은 사랑과 관심을 주면서 내면의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교육해 나가는 진정한 참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콜필드는 문제 학생이 아니었다. 학창시절부터 주어진 길, 올바른 삶만을 추구하며 기성세대가 전해주는 가치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지 않았던 전형적인 학생이었던 내가 콜필드에게 가졌던 인상은 문제 학생이라는 낙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콜필드는 그 누구보다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기만의 가치관과 내면의식이 풍요로운 개성이 풍부하고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돋보였던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유년기와 청년기의 진실함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동생인 피비를 누구보다 아끼고 순수함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며,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픈 꿈을 지니고 있는 이유도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싶다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소망에서 비롯된 꿈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거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민음사, 229-230)

 그러나 콜필드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그가 지키려난 순수함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내적인 가치보다는 외적인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콜필드가 그나마 믿고 따르는 두명의 스승스펜서와 앤톨리니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기성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교사 스펜서는 콜필드의 문학실력만큼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다른 과목들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실력 없는 학생이라고 생각 하고 있으며, 교사 앤톨리니는 결국 아무리 개성 있고 창의성이 있어도, 한 분야에서 실력이 출중해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회적 평가와 현실을 대변한다.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히도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냥 재능 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어?(민음사, P250)

 결국 콜필드를 문제 학생으로 보이게 하고, 그가 퇴학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 내면의 진실함이나 개성, 창의력보다는 시험 점수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능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한 교육제도 때문이었다. 또한 호밀밭의 파수꾼이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자전적 소설임을 염두에 둔다면, 작품 속 시대적 배경이 1930년대 정도로 추정되며 당시 미국의 경우 재건주의 교육운동이 확산되어 사회 질서에의 적응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에 반대하여 사회의 새로운 목표를 지향했으며 사회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므로 그러한 사회적 가치를 소설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소설이 1951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생각 해 보면, 적어도 스푸트니크 충격으로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우세하기 이전의 1950년대 초반까지는 경험중심 교육과정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출간 시기와 소설 속에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기를 통해 학생들의 전인교육, 통합적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즉 지나친 주입식, 암기식 교육 제도는 학생들에 대한 전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며 콜필드는 그러한 교육제도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기성세대의 위선, 인간 내면의 본래적 가치가 아닌 외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염증을 느끼고 있는데, 당시 학교에서 발견하게 되는 위선의 인물 중 하나로 펜시 고등학교에 많은 기부금을 내어 그 이름을 딴 건물도 있는 장의사 오센버거(Ossenburger)를 통해 발견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연설할 때 물질적 성공만을 강조하고, 자신의 기여사실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데에만 급급하다. 또 그러한 오센버거에게 굽신대는 교장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콜필드는 사회 및 교육제도, 기성세대 전반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어른들의 외적인 세계와는 대조되는 내적인 순수함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며,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물질만능주의와 위선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조되어 개츠비의 순수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콜필드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며 작가 샐린저가 위대한 개츠비를 극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콜필드의 진실성과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대항방식에서는 문제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가 클럽에서 성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동료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비속어를 사용하는 등의 행동은 분명히 부도덕한 행동이며 음주 , 흡연 등을 하며 기성세대를 비판하면서도 모방하면서 도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피비와 함께 서부로 도망가려는 모습에서 그가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모습이 부각 되는데, 이는 콜필드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정체성 및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한 롤모델-도덕적 책임감에 기초한 권위자,리더-에 의한 가치관교육이 전혀 부재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즉 청소년기의 가치관교육의 중요성과 인생의 안내자이자 조언자로서의 교육자의 역할에 대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의미를 지닌 소설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by papyros 2013. 6. 1. 00:19

장폴 사르트르의 을 읽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경구이다. 그의 자서전인 을 읽으며 사르트르의 너무나도 현학적이고 심도 있는 자아에 대한 고찰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긴 했지만, 이 책은 결국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준 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의 1부 읽기에서는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 자세히 상술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외조부 샤를 슈바이체르와 함께 지내며 그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으며 신동’, 혹은 특별한 선물로 여겨지며 성장한다. 외조부 샤를은 사제였으나 문학 교수가 되려고 했을 만큼 문학적, 지적 소양을 중히 여겼고 그런 외조부의 영향 때문에 유년기의 사르트르의 삶은 외조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교직을 성직(聖職)으로 생각하고 문학을 수난으로 여기는 소지를 기르게 되었다고 그는 기술한다.(민음사, P49) 거장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글을 암송하고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성장하지만 사르트르는 그의 유년기의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과 어른들을 기만하는 연극에 불과했고 어른의 세계 또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즉 의식적이며 어른들의 기대에 충족하는 연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었으며 문학 읽기를 통한 지식의 획득을 그에게 주어진 기대와 환경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본질로 받아들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책의 2쓰기단계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에 자신을 반영해 나가고 자신의 삶을 성찰 해 나감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신을, ‘실존적 자아를 탐구해 나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가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음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민음사, P208)

 

미래의 기다림에서 탄생한 나는 눈부시게 온몸으로 비약했고, 순간순간이 나의 탄생이라는 예식의 반복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작용을 톡톡 튀는 불꽃처럼 느끼고 싶었다. 어째서 과거가 나를 풍요롭게 해 주었단 말인가? 과거가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로부터 건져 낸 것이다. 나는 더욱 훌륭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고, 내 영혼에 사장(死藏)된 비축물들을 더욱 잘 활용했다.(민음사, P253)

 

특히 사르트르는 글을 씀을 통해 자신의 실존, 존재 이유를 파악했는데 자신이 쓴 글이 전 인류에게 항존적 가치를 전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한 것 같다. 즉 그의 사후 자신의 글이 인류에 전해 질 수 있다는 점을 통해 글쓰기의 의미를 보다 확고히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인류가 나의 불멸을 보장해 주리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 나는 인류가 끝없이 존속하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류속으로 내가 꺼져 없어진다는 것, 그것이 곧 탄생하고 또 무한한 존재가 되는 길이었다.(민음사, P265) 또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직업 선택에 대한 자유, 즉 인생의 우연적 측면을 글쓰기라는 과정을 통해 필연적 의미의 삶으로 바꾸어나가며 실존적 결단에 대해 숙고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민음사, P267) 특히 그가 30세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명작 구토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삶을 형상화 한 대표작이자 완성이었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민음사, P267-268)

즉 그는 쓰기를 통해 읽기과정에서 느낀 인간의 의무, 본질, 연극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 실존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찾은 것 같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민음사, P270)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삶을 인물에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존재 이유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깨닫지 않았나 싶다. 손주로서 외조부의 지적 만족, 욕구를 채워드리기 위한 자기기만의 연극적 행위에서 벗어나 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진실한 만족과 기쁨을 느낀 사르트르의 작가라는 직업적 선택이 가능했기에 쓰기를 통한 성찰과정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포괄적이며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주석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갈 때 부족함과 어려움을 많이 느꼈지만 미약하게나마 그의 자서전 을 통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의미, 성찰을 통한 주체적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읽어나가며 많은 부분에서 지적 한계를 느꼈기에, 더 많은 공부를 한 후 꼭 다시 읽고 새로이 정리하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도 연결을 시켜 보았는데, 사르트르가 현대의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점, 그리고 개츠비라는 이름 앞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이유를 두 가지 기준에서 찾아보았다. 위대함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첫 번째는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쓰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실존적 주체를 탐색해 나갔고, 개츠비 또한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긴 했으나, 경제대공황 시대에 물질과 향락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반해 소중한 이와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물질적 논리에 앞서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성찰했다는 점에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이 붙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또한 두 번째 기준은 고독함,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가의 여부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이들이 항상 따르는 이들은 그들 내면의 외로움을 지닐 수 있는데,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을 정도로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쓰기과정을 통해 극복했으며, 개츠비 또한 데이지와의 미래와 꿈에 대해 생각하며 드넓은 집에서 외로움을 견뎌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by papyros 2013. 5. 31. 22:01

대학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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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yros 2013. 1. 15.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