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의 『말』 을 읽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경구이다. 그의 자서전인 『말』을 읽으며 사르트르의 너무나도 현학적이고 심도 있는 자아에 대한 고찰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긴 했지만, 이 책은 결국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준 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의 1부 읽기에서는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 자세히 상술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외조부 샤를 슈바이체르와 함께 지내며 그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으며 ‘신동’, 혹은 ‘특별한 선물’로 여겨지며 성장한다. 외조부 샤를은 사제였으나 문학 교수가 되려고 했을 만큼 문학적, 지적 소양을 중히 여겼고 그런 외조부의 영향 때문에 유년기의 사르트르의 삶은 외조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교직을 성직(聖職)으로 생각하고 문학을 수난으로 여기는 소지를 기르게 되었다고 그는 기술한다.(민음사, P49) 거장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글을 암송하고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성장하지만 사르트르는 그의 유년기의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과 어른들을 기만하는 ‘연극’에 불과했고 어른의 세계 또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즉 의식적이며 어른들의 기대에 충족하는 연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었으며 문학 읽기를 통한 지식의 획득을 그에게 주어진 기대와 환경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본질’로 받아들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책의 2부 ‘쓰기’ 단계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에 자신을 반영해 나가고 자신의 삶을 성찰 해 나감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신을, ‘실존’적 자아를 탐구해 나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가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음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민음사, P208)
미래의 기다림에서 탄생한 나는 눈부시게 온몸으로 비약했고, 순간순간이 나의 탄생이라는 예식의 반복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작용을 톡톡 튀는 불꽃처럼 느끼고 싶었다. 어째서 과거가 나를 풍요롭게 해 주었단 말인가? 과거가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無)로부터 건져 낸 것이다. 나는 더욱 훌륭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고, 내 영혼에 사장(死藏)된 비축물들을 더욱 잘 활용했다.(민음사, P253)
특히 사르트르는 글을 씀을 통해 자신의 실존, 존재 이유를 파악했는데 자신이 쓴 글이 전 인류에게 항존적 가치를 전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한 것 같다. 즉 그의 사후 자신의 글이 인류에 전해 질 수 있다는 점을 통해 글쓰기의 의미를 보다 확고히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인류가 나의 불멸을 보장해 주리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 나는 인류가 끝없이 존속하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류속으로 내가 꺼져 없어진다는 것, 그것이 곧 탄생하고 또 무한한 존재가 되는 길이었다.(민음사, P265) 또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직업 선택에 대한 자유, 즉 인생의 우연적 측면을 글쓰기라는 과정을 통해 필연적 의미의 삶으로 바꾸어나가며 실존적 결단에 대해 숙고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민음사, P267) 특히 그가 30세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명작 『구토』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삶을 형상화 한 대표작이자 완성이었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민음사, P267-268)
즉 그는 ‘쓰기’를 통해 읽기과정에서 느낀 인간의 의무, 본질, 연극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 실존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찾은 것 같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민음사, P270)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삶을 인물에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을 걸어가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존재 이유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깨닫지 않았나 싶다. 손주로서 외조부의 지적 만족, 욕구를 채워드리기 위한 자기기만의 연극적 행위에서 벗어나 ‘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진실한 만족과 기쁨을 느낀 사르트르의 작가라는 직업적 선택이 가능했기에 ‘쓰기’를 통한 성찰과정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포괄적이며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주석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갈 때 부족함과 어려움을 많이 느꼈지만 미약하게나마 그의 자서전 『말』을 통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의미, 성찰을 통한 주체적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읽어나가며 많은 부분에서 지적 한계를 느꼈기에, 더 많은 공부를 한 후 꼭 다시 읽고 새로이 정리하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의 『말』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도 연결을 시켜 보았는데, 사르트르가 현대의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점, 그리고 개츠비라는 이름 앞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이유를 두 가지 기준에서 찾아보았다. 위대함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첫 번째는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쓰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실존적 주체를 탐색해 나갔고, 개츠비 또한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긴 했으나, 경제대공황 시대에 물질과 향락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반해 소중한 이와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물질적 논리에 앞서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성찰했다는 점에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이 붙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또한 두 번째 기준은 ‘고독함,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가’의 여부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이들이 항상 따르는 이들은 그들 내면의 외로움을 지닐 수 있는데,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을 정도로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쓰기’과정을 통해 극복했으며, 개츠비 또한 데이지와의 미래와 꿈에 대해 생각하며 드넓은 집에서 외로움을 견뎌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