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고 생각잇기 2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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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집 거대한 뿌리, 나의 가족, 헬리콥터 사령死靈 , 「폭포」 이렇게 네편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사령死靈의 경우, 이미 학창시절부터 오랫동안 배워 온, 익숙한 시이다. 1959년 발표된 이 시는, ‘욕된 교외에 있는 화자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삶, 죽은 삶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자유를 노래하는 시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59년에 발표된 이 시가, 2017년 현재에까지 공감을 주는 것은, 40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아직도 활자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를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54년 발표된나의 가족에서는 어지러운 시대, 혼탁한 가운데, 화자의 사유와 고뇌가 짙게 깔린 한편, 그 이면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사랑에서 발견하는 담담한 모습이 내게 와 닿았다. 또한 헬리콥터는 헬리콥터의 출현 당시 충격을 묘사하면서도, 시의 전개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이 전화되고 화자와 대상의 일체감을 지니게 된다. 즉 헬리콥터라는 대상을 통해 서구문명에 대한 객관적, 사실적 인식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시이다. (박순원, 김수영 시의 화자와 대상의 관계 양상 연구 -레이판탄, 헬리콥터, VOGUE를 중심으로, 어문논집49, 2004.) 독자로서 내게 헬리콥터라는 시는 생경했으나, 그 생경을 넘어 시적대상을 거리감 있는 사물에서 , 전환하며 감정을 이입하는 한편 그 속의 가치를 발견하는 모습이 와 닿았던 것 같다.

1959년 발표된폭포는 폭포가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끊임없는 비판이성을 상징하고 있는 작품인데, 화자의 비판이성과 자기성찰이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4연의 구절은 간단한 문장임에도, 이 시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는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아래 잡초(雜草)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덜릐(正義)도 우리들의 섬세(纖細)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사령(死靈)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瀑布)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의 경우, 난해함으로 인해 오독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1장과 2장을 독서하면서 이해한 바를 간단히 요약해 적어보자면, 철학적 욕망의 네 가지 요소인 봉기, 논리, 보편성, 위험을 실현하는 데 대해 현 세계는 지속적인 압력을 통해 이를 제어하고 있으며, 이는 상품의 지배, 의사소통의 지배, 화폐의 보편성 등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목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할 주요한 철학적 흐름으로 분석철학, 해석학적 접근,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한다.

 

by papyros 2017. 1. 26. 00:29

밑줄긋고 생각잇기 배송인증&1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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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민음사 밑줄 긋고 생각잇기 도서로 김수영 시인의 전집 거대한 뿌리를 선택했다.

김수영 시인은 주지하다시피 ,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등의 대표시가 교과서에 정전(正典)으로 실리며 익히 알려져 있고, 나 또한 학창시절 배운 그 시들의 영향으로 시대의식을 지니고 자기성찰을 하며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4.19 세대 시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집을 보니 낯선 시들, 그리고 더욱 깊은 생각을 요하는 시들이 참 많은 듯 보인다. 시집과 함께 관련 논문이나 시인의 생애에 대한 서적의 독서가 추가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선 배경지식이 많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처음 접한 구라중화라는 시에서 4연과 5연에서 김수영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정신이 다시금 느껴져 특히 인상 깊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를 眞摯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하는 나의 붓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

(중략)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것도 아니며

나의것도 아니고 누구의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놓고 고즈너기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김수영, 구라중화

 

 

한편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은 공식적으로 밑줄긋고 생각잇기에 참여하는 서적은 아니지만, 북클럽 에디션을 소장한 바 , 아직 독서하지 못했기에 함께 병행해 읽고자 한다. 우선 서론만 간단히 읽었는데 비록 작은 책이나 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 바, 천천히 꼼꼼히 읽어 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진리들에 이르는 모든 통로를 가리키는 틀림없는 표지이며 따라서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의 실재적 목적이기에, 진리로 향하는 도정과 그 도정에 관한 완전한 성찰이 행복의 형이상학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행복의 형이상학서론, P10

 

 

 

by papyros 2017. 1. 19. 00:08

가와이 하야오, 왈칵 마음이 쏟아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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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MBTI&Health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예담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 느낌, 감각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들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 나와서 일상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이렇듯 마음이란 우리 삶에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P12.

 

마음의 실체는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때때로 다양한 모양과 상태를 가진 날씨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날씨와 같다면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도, 눈보라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상태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폭풍우, 천둥, 번개, 안개, , 소나기 전부 포함해야 날씨가 되는 것입니다. 눈부시게 햇빛이 비치면 그런 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1년 내내 햇빛이 쏟아진다면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땅이 메마르고 농작물이제대로 자라지 못해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되겠지요. 그런데도 우리의 생각은 한가지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P15.

 

이 책은 일본의 칼 융 학파 정신분석자로서 분석심리학을 일본에 최초로 소개한 가와이 하야오의 연재 글을 엮어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갈등, 그리고 인간관계의 문제를 기술하고 있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있어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간의 문제로, 혹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탐색하는 등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독자에게 책은 마치 활자 너머의 가와이 하야오가 직접 마주해 건네주는 이야기로 다가와, 상담에 대한 간접 경험을 제공한다.

한편, 책 중후반 즈음에는 저자가 꿈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서술되는데, 요컨대 확고한 과학주의자였던 저자는 학업과정 중 지도교수와 수없이 논쟁을 거치기도 했으나, 자신의 꿈에 대한 분석을 받으며 꿈이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과정에서 꿈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매료되고 소명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저자 뿐 아니라 분석심리학을 확대 및 공고화시킨 칼 융 그 자신 또한 목사인 부친과 신경장애를 앓았던 모친의 사이에서 집안의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리고 기묘하고 끔찍한 꿈들로 인해 신경쇠약을 앓으며 학창시절 학업을 잠시 쉴 정도로 고독하고 불안했던 그가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내부의 문제들을 해소해 간 것을 상기한다면,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갈등과 고민, 불안, 정신세계, 무의식 등의 요소를 이해 수 있을 때 자기를 인식해 통합된 인격을 갖추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융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달성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권한다. 자기 인식은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이다. 이는 중요한 구분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실현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적인 완성을 원해서 순식간에 완전히 자기를 실현한 사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끊임없는 수련과 지속적인 노력, 최고의 책임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람의 인생에서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융 심리학 입문E-book, 문예출판사, P77.

 

비록 저자가 직접적으로 융의 정신분석학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원형, 무의식(집단 무의식), 개성화 등 의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는 있지 않으나, 결국 융이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했던, 개인의 개성화를 통한 자기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충분히 유의미한 가치를 제공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만 25년 가까이 살아오며 대인관계에 있어 갈등상황에 대한 불안, 거절민감성이 적지 않게 자리했던 편인 내게 실패나 좌절로 끝난 대인관계는 마음 한켠에 늘 아쉽게 자리해 왔는데 다음 문장을 통해 내가 대인관계에서 범했던 본질적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제공해 준 바 있는데, 바로 평가와 같은 인지적 과정을 배제한 채 그저 들어주어야한다는 점이 그러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대인관계에서 상대의 고민을 들으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도와주어야겠다는 문제와 더불어 오해하고 있는 부분, 모르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가르쳐주고 정정해 주어야겠다는 생각- 어쩌면 상대에게는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는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대학시절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문학(국어교육)과 상담이라는 두 전공을 모두 살려 학교현장에서 교육자로, 상담자로 자리하고자 학업을 지속하며 준비 중인 내게, 가와이 하야오의 이 책은 결국 개인적인 대인관계의 고민을 해소해 주는 상담자가 되기도 했고 앞으로 상담을 지속하려는 젊은이에게 수퍼바이저의 기능까지 제공해 주었다.

개개인의 독자마다, 처한 상황이나 환경 및 심리적 문제, 배경지식, 독서 동기 등에 따라 이 책을 펼치는 심경은 다르겠으나, 독자들 개개인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웃으로, 내담자의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격려를 보내는 상담자로, 상담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수퍼바이저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책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들어준다는 느낌으로 이해하면 상하관계의 입장이 됩니다. 상담은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 즉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이나 부모가 학생과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이 어른이고 위에 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르쳐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하는 사람이 상담 받는 사람과 같은 위치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말에 귀 기울여야 진정한 관계가 싹틉니다.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 찾기 힘듭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가르쳐줄 수 있지만 인생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독할 정도로 서로가 다른 개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 222-223.

 

 

 

 

 

by papyros 2017. 1. 18. 23:01

손끝으로 문장읽기 5주차 필사, 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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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서 있는 201611월 한 달 동안 함께한 작품은 황석영의 돼지꿈단편집이었다. 단편집에 수록된 철길,종노,돼지꿈,몰개월의 새,밀살,야근,,삼포가는 길,객지9편의 작품들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깊이있게 탐독하다보니 벌써 4주가 다 지나가 11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기실 소설가 황석영을 처음 접한 건 학창시절이었다. 교과서 수록 작품으로서 널리 알려진 삼포가는 길아우를 위하여, 그리고 모랫말 아이들정도가 그를 알게 된 최초의 작품들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출간된 바리데기정도로. 그렇게 그냥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된,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소설가 정도로만 여겼다. 재수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학부생 시절 역시 작가 황석영에 대한 인식적 지평이 크게 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저 40년대에 출생한 작가로 197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삼포가는 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산업화 시대 소시민들의 비극과 소시민들 사이의 유대를 그려내고자 한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소설가 황석영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15, 대학원에 진학 후 나병철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서였다.몰개월의 새라는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고, 죽음정치적 노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내몰려진’(내쳐진) 상황에서도 개인 들 간의 유대와 연대, 사랑의 윤리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며 전망을 획득해 나가고 있었다.

몰개월의 새를 통해 소설가 황석영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던 때문이었을까,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모임 책들 중, 황석영의 단편집을 보자마자 다른 작품들보다도 황석영의 작품들을 깊이 탐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단편집 한 권을 모두 완독한 지금, 그가 왜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진실로 알 것 같다. 군인, 노동자, 농민 , 기지촌여성 등 70년대 당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살펴보지 않고서는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들이 삶에 천착하였고, 심지어 그 삶이란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바이기에, 황석영의 문학을 접하는 독자들이 활자 이면에 담긴 민중들의 애환과 소망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겪어낸 전후세대이며 방북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리고 유격동의 산업화시기를 겪었던 소설가 황석영은 규율화된 권력에 의해 배제/소외를 겪었으며 이를 소설에서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물밑의 연대와 유대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와 전망을 제시한다.

시대를 반영하고,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소망하는 문학의 책무가 이 지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황석영의 문학은 2016년 가을, 작금의 한구 사회에도 깊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여긴다. 동일을 지닌 사람들 뿐 아니라, ‘비동일성을 지닌 사람들 간 계급, 인종, 성별 등에서 차이가 있는 사람들 간 그 차이를 넘어 트랜스내셔널의 관점에서 사랑의 윤리를 통한 공동체적 연대가 모색 될 때, 어두운 현실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도모될 것이다.

이번 민음사 필사 모임은, 내게 삶에서 정말 존경할 만한 작가를 한 명 더 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기존에 출간한 여러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집필할 여러 작품들을 계속해서 탐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출간될 자서전을 집필하실 계획이라고 작년의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계신데 아직 출간이 되진 않은 듯 하지만 꼭 탐독하고 싶다. 또한 청년들에게 권하는해질무렵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다.

작품이 작가 자신을 드러내듯이, 내가 읽은 작품들도,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작품들도 모두 나 자신을,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여긴다. 황석영의 작품들도 앞으로 펼쳐질 20대 후반, 30……평생의 삶에서 가치관과 인격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문학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by papyros 2016. 11. 30. 23:18

금태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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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신간평가단 활동의 일환으로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도 하프야. 아버지가 한국인이었어. 하프란 중간, 혹은 반반이란 뜻은 아닌 거 같아. 샌드위치 두 개 중 하나는 치즈, 하나는 야채 하는 식으로 구별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벽에 가만히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 행동이나 생각 같은 걸 하프로 나눌 수 있을까?“

 

-P149.

 

신부 한 사람은 시눌룩축제 기간에 들어와 몇 년간 정착했다. 신부는 대학 바로 옆에 붙은 빌리지에 살았다. 우리는 대학 정문 건너편 나무집을 본부로 두고 있었다.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가 신부의 꾐에 넘어갔다. 공짜로 밥도 주고 한글도 가르쳐준다고 했다. 젠장, 우리 같은 코피노는 아주 불쌍하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다.

신부는 나를 처음 보던 날, 성당에 가면 먹을 게 많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몇 끼 먹니?” 웃음을 참아야 했다. 나는 십대에 참치맛을 알았다.

-P11.

 혼혈인, 특히 미국이나 유럽계 등 백인혼혈이 아닌 동아시아계나 흑인과의 혼혈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작품 속 신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단일민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미디어의 영향이 더해져 코피노와 같은 동아시아계 혼혈아들은 버림받은 존재로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들이라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인에게 그들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비동일성을 지닌 존재로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틀 내부에서 소외/배제되어 있다. 작품 중반 누나의 집에 한인회 구성원들이 초대되었을 때 잠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인 블로그 및 여러 사회단체에서 코피노 아빠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하며 코피노 아빠 찾기운동을 벌이는 것 또한 배제/소외된 타자를 양산하고 방치한 데 대한 책임을 묻는 일환으로 여겨진다.

 기실 한국문학사에서 혼혈인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1930-1940년대 한국 문학에서도 혼혈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그린 소설이 있는데, 혼혈인을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시킨 작가가 바로 염상섭이다. 염상섭은 그의 소설 해방의 아들(1946)에서 준식/마쓰노와 같은 혼혈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순수한 혈통의 조선인을 찾는 데 두고 있다. 염상섭의 여타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양옥집, 만세전의 혼혈소녀 일녀 정자, 사랑과 죄, 숙박기등 다수의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혼혈인의 문제가 드러나는데, 혼혈인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한 자성을 소설 속에 담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실패한 까닭은 해방의 아들에서 홍규로 인해 준식/마쓰노가 결국 아버지 쪽을 따르는 것으로 떳떳함을 추구하며 가부장적 논리를 선택하는 등 혈통적 민족주의에 국한하여 혼혈인을 바라본 바, 민족주의적 동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같은 혼혈혼종의 문제에 천착한 김남천이나 김사량은 염상섭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1939)는 트랜스내셔널의 위치에서 주체성을 회복하여 민족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혼혈인 하루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를 부인하고 있는데, 아버지 한베에가 조선인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나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인하는 것은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에서 준식/마쓰노가 그러했듯 한쪽을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하루오가 조선인인 ’(남선생/미나미)을 조센징이라고 놀리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그러나 내(남선생/미나미)가 하루오에게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이며 내면의 사랑을 끌어내고자 하며 선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자, 하루오는 자신이 부정하고 지워내고자 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또한 그 역시 ’(남선생/미나미)의 애정에 남선생이라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화답하게 된다. 즉 남선생(미나미)과 하루오는 염상섭의 소설에서 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혼혈인의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극복하는데, 이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를 드러내며 타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남선생이 자신을 미나미로 소개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던 것도,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정해 왔던 것도 결국 자기 내부에서 겪는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의 차이를 통합하고 수용하기 어려웠던 까닭인데, 결국 하루오가 남선생에 의해 혼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남선생이 지니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차이 또한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이자적(二者的) 관계 하에서 상호간의 울림과 사랑을 통해 윤리적, 인격적 관계를 모색해 나가는 모습이 남선생과 하루오의 관계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나병철,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현대문학이론연구54, 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참조.)

 금태현의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이라는 소설 또한 혼혈 문제에 있어 김사량이 추구한 바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하퍼 킴(Harper Kim)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새아버지와 결혼해 살고 있어 부모님 모두와 이별한 코피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혈통적 민족주의의 논리 안에서 하퍼 킴(Harper Kim)과 같은 코피노들을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하퍼는 그저 부모님 모두와 단절되었을 뿐이다.

 

가장 소중한 건 뭐지. 다리를 책상 위에 얹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선풍기가 회전하며 미지근한 바람을 흩뿌렸다.

구글 계정에서 수익을 뽑아내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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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말하는 가족, 일본에 사는 엄마도 생각났다. 엄마치곤 참 정이 안 가는 존재다. 비자도 문제없고 일년간 유효하다는 항공권도 이메일로 도착해 있다. 일주일 동안 엄마를 만나서 뭐하겠나. 아들의 목표를 듣고 나면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황당하고 소박해서.

-P61.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나는 또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어쩌다 사진 몇장, 메시지 몇 번 보내는 걸 자식과의 유대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엄마를. 더는 찾을 필요 없는 나의 엄마를.

-P80.

 

 SNS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지만 하퍼의 성장과정에서 그를 진정으로 지원하고 격려해 주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이는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하퍼와 같은 코피노 아동들 곁에서 함께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방을 구했으며,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대했고, JTV 박사장은 그에게 샤부(마약) 배달을 시키는 등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시킨 샤부(마약) 운반건을 약점 삼아 그를 협박까지 한다.

 

을 벌어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숙식을 해결하고 몰래 돈을 훔쳐내는가 하면, 유투브 계정에 올릴 만한 자극적인 영상을 훔쳐 자신이 찍은 영상처럼 포장해 가능한 많은 조회수를 얻어야만 한다. 즉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을 벌기 위해 이해관계 하에서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해 온 것으로서, 하퍼는 박사장에게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하퍼 또한 을 벌기 위해 타자/대상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습관대로 영상을 훔치는 데 주력했다. 훔치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에 당장 돈이 되는 흐름을 만들 수 없었다. 망고스퀘어에 남녀가 모여 불놀이를 하는 모습을 찍어 내 계정에 올리고 일주일동안 들락거려봤다. 서른명 정도가 불놀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년 내내 30도가 넘는 망고스퀘어에서 횃불을 목덜미 뒤로 돌리다 입에서 뿜어내는 불놀이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훨씬 더 뜨겁고 재미있는 게 필요했다. 사이트를 떠도는 뜨거운 작품들을 뒤져야 했다. 이따금 마르코 폴로 누나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접속을 차단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막아버리면 외롭고, 열어두면 귀찮은 상황에 부딪혔다.

-P17-18.

나는 박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예의 바른 사람이 어째서 나한테는 하인 대하듯 했던 걸까. 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잘못한 것 같았다.

-P86

 

블로그에 아침 풍경을 담고 글을 올렸다. 나의 일상은 돈으로 연결하기 힘들었다. 유명한 사람의 움직임은 곧 돈이었다. 호날두가 변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공을 찬 뒤 가면을 벗으면 200만명이 금세 모여든다. 필리핀의 섬을 하루 한군데씩 여행하면 20년이 걸린다. 내가 만일 20년이 걸리는 여행을 하면서 보홀섬에 초콜릿 힐이 있다는 등, 카가얀 데오로에 델몬트 농장이 있다는 등 글과 사진을 올린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거지로 전락할지 모른다. 다시 과거처럼 망고스퀘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명운을 건 뜀박질을 더는 원치 않는다.

-P90.

 

, 이제 생각났어. 숨겨둔 담배 얘기 말인데, 그런 건 천천히 찾을수록 더 값어치가 있는 거야. 필요할 때 딱 끄집어내면 더욱 좋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공유한, 숨겨둔 담배 같은 거 말이야.”

박사장은 귀엣말로 샤부라고 속삭였다.

                                                                                                                                                     -P97.

박사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망고스퀘어를 오고 가는 여자애들을 박사장의 가게인 JTV로 안내하는가 하면, 시키는 대로 샤부를 배달했다. 나는 박사장의 부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짧은 기간 박사장과 거래한 일들이 나의 십대 시절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P165.

 세부의 화려한 밤문화를 형성하는 중심에 놓인 망고스퀘어를 활보해 왔으면서도, 하퍼는 그곳에 소속되고 있지 못했다. 늘 그를 동정하거나, 이용하는 사람, 혹은 일시적인 쾌락의 대상이 되는 이들과 잘못된 관계를 맺어왔으며, 하퍼와 사랑과 신뢰 하에 진실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 하퍼의 삶에 등장한 누나베렌이라는 두 여성은 최초의 유대관계를 맺는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 대학가 복사집 일을 하다가 삶에 지쳐 세부에 자리 잡게 된 누나는 하퍼가 자신의 집에 살아도 된다고 선뜻 제안한다. 종기가 난 등을 발견하고 병원에 동행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가 하면, 그를 위해 정성 어린 요리를 해 주기도 한다. 또한 한국인 손님에 가이드로 일할 수 있게끔 기회도 마련해 준다. 하퍼에게 누나는 어머니가 해주지 못한 충분한 사랑과 애착을 전해주는 인물이었다. 단절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누나와의 관계를 통해 메꿔진다.

 

누나만이 내 몸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콘도로 반찬 재료를 가져와 요리해주었다. 동태도 구워 먹나요? 하고 물었더니 한참 동안 웃었다. 이건 메로구이라는 거야, 누나가 말했다.

메로는 기름기가 많았다. 살이 두툼하면서 잘 갈라졌다. 잔뼈라곤 없어서 토막 난 메로의 원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름이 빠져나오면서 기운을 잃은 내 몸을 메로구이가 보충해준다고 누나가 말했다.

-P27.

 

누나는 국수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았다. 잘게 썬 김치, 볶은 양파는 기본으로 들어갔다. 호박, 상추, , 깨소금, 참기름을 국수에 섞었다. 뭐가 빠졌지, 하며 냉장고에서 다진 소고기를 듬뿍 넣었다.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겸손을 행사할 줄도 알았다. “별로 맛없지. 초장을 좀 더 넣을까?” 뭐 하나 더 넣지 않아도 먹어본 국수 중에 가장 맛있었다. 칭찬을 휘둘러 주고 싶을 정도로.

-P60.

 

 한편 박사장이 돈을 받아내야 한다며 잡아오라고 명령한 베렌에게는 누나에게 느낀 모성애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박사장이 보여 준 미인대회 영상을 통해 처음 이성적 매력을 느끼고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여자와 사귀고 싶다는 욕망을 떠올리게 된다면, 막탈리사이에서 베렌의 어머니를 만나고 일본에서 베렌과 함께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과 존중, 연대에 기초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하퍼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면, 일본에서 만나 들려준 베렌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기고백은 이성에 대한 욕망에서 나아가 상호 환경과 차이에 대한 공감과 존중으로 변모한다. 하퍼가 하프’, 즉 혼혈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비동일적존재로 여겨지며 한국인들에 단절되었고 부모님 두분과 모두 헤어짐을 겪어 단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렌 또한 부모님 사이가 틀어져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부친의 단절을 겪었으며, 줄곧 농장을 운영하며 집안을 유지해 왔으나 엄마가 염소나 돼지 등 가축들을 팔아 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가축들이 사라지자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한 바 있다. 더욱이 베렌이 JTV에서 일하다 한 손님에게 돈을 받은 일 때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의 의혹을 받게 되어 구금상태에 처한 적이 있는데 , 의혹을 벗고 풀려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일을 도와준 댓가로 재판에서 승소해 받은 돈의 50%를 요구하는 박사장으로 인해 곤란에 처하게 된다. 하퍼가 베렌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또한 결국 돈 때문이다. 베렌 역시 하퍼 만큼이나 내몰려진상태에 놓여 있었다.

 비록 베렌이 하퍼가 박사장과 맺은 관계로 인해 의혹을 품고 그를 거부하려 하지만, 베렌은 결국 하퍼가 보이는 진심에 화답해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의 일본 여행이 중요한 점은 베렌 뿐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 또한 회복되기 때문인데, 하퍼는 비로소 자신 뿐 아니라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리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새아버지(할아버지)와 단절되어 있었고 힘겹게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김사량의 소설에서 남선생과 하루오가 선물의 관계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일본 여행을 기점으로 하퍼와 베렌의 관계가 재설정된다. 혼혈인으로서 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지며 배제되어왔고 단절되어 누군가와 진실한 교류를 나누어 보지 못한 하퍼가 마찬가지로 단절상실을 경험했으나 이로부터 도망치고 저항하고자 하는 베렌의 삶을 통해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이제 누군가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용당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타인의 것을 훔쳐 돈을 버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아야 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진실로 삶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하퍼는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시켜 준 베렌에게 사랑해라고 고백하며, 그녀와 미래를 함께하고 가족을 구성해 이제는 신뢰와 유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지니게 된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소리, 물안개가 가득한 호수의 입김, 조용히 서 있는 숲속의 나무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이 모습이 무람없는 내 삶의 출발이다. 나를 투영한 영상이다. 베끼지 않은 진짜 계정이다. 내 채널이다.

세부로 돌아가 내 삶과 부딪히며 살고 싶다.

-P213.

다다미 방에 앉아,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P169.

 

베렌과 나는 열차 안에서 점심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나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얼마나 정성어리게 싸뒀는지 아직 밥에서 김이 올라왔다. 백미 속에 숨을 쉬는 사람이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찬통에 빨간 김치가 들어 있었다. 젓갈 냄새를 풍기는 바구옹 소스도 주름 잡힌 호일 속에 쌓여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 옆에서 맡았던 젓갈 냄새와 똑같았다. 소금과 올리브유가 발라진 까만 김을 먹으며 베렌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이제껏 길거리에서 먹었던 음식은 모두 사료가 아닌지, 이런 기분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나도 한번쯤 가족이라는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P206.

 

아떼와 로시오는 대문 옆의 약국 아에 쌀자루를 놓고 동네사람들에게 한공기씩 나눠줬다. 약국에서 아이들 손에 사탕을 쥐여주고 있었다. 사탕을 얻어먹던 시절이 생각났다. 얻어먹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P98.

 

사람은 태어나서 젖꼭지부터 물고 인생을 시작하지. 그리고 밥그릇, 술잔, 꽃병 같은 것들을 간직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분청사기를 보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변화무쌍하며 대담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 그릇에 소나무를 음각으로 새겨 넣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P204.

 

 처음으로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베렌을 박사장에게 결코 넘겨줄 수 없는 하퍼는 결국 베렌과 함께 일본에서 세부로 귀국한다. 귀국 직후 마지막 장에서 그가 누나의 집에서 거주하던 시절 가이드일을 했듯이 가이드로서 하퍼의 새로운 삶이 펼쳐진 줄로 알았으나, 기실 그것은 감옥에 있는 하퍼에게 베렌의 동생이 보낸 편지였다.

 ‘필요한 순간에 숨겨둔 담배를 꺼낸다고 했던 박사장의 협박대로, ‘마약운반책이라는 죄목으로 입국심사 중 공항에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부 지방 교정·갱생 센터’(CPDRC)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하퍼는 박사장의 조작으로 인해 체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억울해 하며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베렌과 베렌의 가족이 면회를 오고, 베렌의 남동생이 편지를 써 준다. 교도소에서 열리는 댄스 공연에서 베렌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Dance Again춤을 추고 싶어, 사랑도, 그리고 다시 춤을이라는 노래 가사는 하퍼의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 박 사장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와 같은 사람이 한인회 대표가 되어 교도소에 방문해 연단에 올라 위압적인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하고 서러워 할 법 한데,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기다림을 말하는 태도, 연단에 손을 짚고 서 있는 박사장을 똑바로쳐다 볼 수 있는 것은 하퍼의 변화와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뢰와 유대에 기초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희망이 실현될 날을, 다시 자유가 찾아올 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부 시내 망고스퀘어에서 외곽 언덕으로 밀려난 셈이었다. 갱생의 강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갱생하려면 주는 대로 먹고, 춤을 추며 웃고 난 뒤 돌아서서 울어야 했다. 자식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적게 울었다.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기다림을 익혔다. 지난해 성탄절에 레천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운동장에 시식대를 진열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회적 배려가 찾아왔다. 동료 죄수들이 밥과 레천을 서로 입에 던지며 헐떡거릴 정도로 먹었다. 나는 기다리다 맨 마지막에 먹었다. 기다림이 후천적 천성으로 자리잡아가는 것 같았다. 베렌을 기다렸고, 프러포즈 춤을 기다렸다. 엄마를 기다렸고, 내가 자유를 찾을 날을 기다렸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P251-252.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구가 문득 떠오른다. 베렌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그에게 닥친 시련을 감내하고 겪어낸 이후에는, 유투브에서 영상을 훔쳐 돈을 벌기 급급했던, 동정과 연민의 차별적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어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을 이루어 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퍼가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자신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목적 그 자체로서 자리해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아닐까.

 

 

나는 벌써부터 부활절을 기다렸다.

관례대로 누군가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가길 간절히 희망했다.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P25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에서.

 

 

 

 

 

 

by papyros 2016. 11. 27. 23:13

손끝으로 문장읽기 4주차 - 「삼포 가는 길, 객지客地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11월의 넷째 주, 단편집돼지꿈의 마지막에 수록된 삼포 가는 길, 객지客地를 읽어내려갔다. 삼포 가는 길은 국어/문학 교과서의 정전(正典)으로서, 주지하듯이 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상실한 민중들의 애환을 그리며 그들 간의 유대와 연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객지客地는 간척지 현장에서 일용노동자들이 겪는 애환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의 노동쟁의를 벌이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삼포 가는 길(1973) 에서는 고향을 상실해 어느 곳에서든 정착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영달이 등장한다. 영달은 고향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자신의 고향 삼포로 돌아가려는 정씨를 만나 이와 동행하게 되고, 정씨와 영달은 삼포로 돌아가려는 여로에서 백화를 만나게 된다. 정씨와 영달이 서울식당 부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백화를 잡지 않은 것은 그 짧은 시간 동행하며 느낀 동류의식과 연대감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공사장 노동자, 노무자, 술집 작부 등으로 모두 직업도 다르고 연배도 성별도 다르지만 그들이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근거는 셋 모두 그 방식은 다르지만 저마다 고달픈 삶의 애환을 지니며 고향을 상실하고 떠돌아 다녀야 일을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소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에게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가명으로만 자신을 소개하던 백화가 고작 스물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술집 작부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일을 정씨와 영달에게 고백하며 삶을 공유할 뿐 아니라 이별에 앞서 정씨와 영달에게만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유의미한 부분인데, 산업화 시대에 고향을 상실할 만큼 극단의 처지까지 내몰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휩쓸려 사람을 불신하며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중히 여기며 목적으로 대하는 물 밑의 연대를 통한 사랑의 윤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와 영달은 그녀가 서울식당이라는 주점에서 도망친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녀가 술집 작부로 일 해온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러한 신분이나 처지로 인해 그녀 자체를 격하시킨 적이 없으며 그들이 가진 돈을 들여 표와 삼립빵 두 개, 그리고 계란을 전해주기까지 한다.

또한 과거 술집 갈매기집에 처음 팔려 가 군 감옥에 수용된 군 죄수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등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은 앞서 읽었던몰개월의 새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될 군 장병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미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삼포 가는 길의 결말부에서 영달과 백화와 마찬가지로, 결국 정씨마저도 산업화로 인해 고향 삼포를 상실함으로써 마지막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려 공허함을 느끼게 하지만, 정씨와 영달이 같은 처지에서 경험하는 동류의식, 그리고 백화와 나눈 이간적 유대와 교류는 결국 몰개월의 새가 그러했듯이 소외되고 희생된 민중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존재의 자기증명이었던 것이다. 백화가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것도, 그리고 정씨가 마지막까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마음의 정처를 잃지 않고자 갈구했던 것도 결국 존재의 근원을 향한 깊은 갈망이라 할 수 있겠다.

(나선욱,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2-42쪽 참조.)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째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 삼포 가는 길, P240.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 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대.”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 삼포 가는 길, P241-242.

객지客地(1971)는 간척지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노동자들이 노동쟁의를 벌이게 되는 과정을 상술하고 있는 중편소설이다. 객지客地공장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지니고 있는야근과 달리 노동쟁의에서 성공적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객지客地야근과 같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으며 기계같이 일해야만 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야근의 노동자들이 기능공으로서 숙련된 기술이 있어 쉽게 해고 할 수 없는 존재인 반면, 객지客地의 노동자들은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라는 점에서 그 위치가 더욱 불안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는 점에서 죽음정치적 노동의 속성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삼포 가는 길에서 정씨와 영달, 백화가 그러했듯 고향을 상실하고(떠나) 객지客地에서 일해야만 하는 현실로 인해 노동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행동을 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소설은 회사 측, 즉 자본가 측의 회유에 넘어가 감독조로서 회사측에 협력하는 인물, 패배의식으로 인해 떡밥이 되는 인물들 등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의 존재방식을 택하는 이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국 이미 요구조건을 이행해 휴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쟁의에 참가한 이들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떡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지 않겠냐는 명목 하에 국회의원들이 도착하기 전날 저녁까지 내려오라는 회사 측의 권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내려가게 되며 결국 동혁 혼자 남는다. 내려간 이후 상황이 소설 속에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회사 측의 계획대로 국회의원들의 방문에는 보여주기식으로 치장 된 이후 점진적으로 다시 노임과 휴가시간을 줄여나가 쟁의가 실패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혁은 강렬한 희망이 솟구침을 느낀다는 것으로 결말이 끝나는데, 비록 쟁의에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회사측의 회유에 넘어가며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모습이 비관적으로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꼭 내일이 아니어도 좋다.’며 전망과 희망을 제시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나선욱,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48-56쪽 참조.)

누구나 객지 나올 땐, 그렇게 시작한다네. 나도 머슴살일 해봤다구. 부농이나 호농이나 매한가지야. 소작붙이 해 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질세. 토지 수득세, 수리비, 공과금, 뭐 어쩌구 하는 터에 곡가는 형편없이 싸지, 거기다 어디 땅 파먹는 놈들이 한둘인가. 식구 작은 집에서도 쉴 틈 없이 부업으로 잔푼벌이를 해야 되네. 땅을 더 사야지, 자기 땅을 말이야. 부농도 별 수는 없지. 농번기 핑계로 우리네 같은 뜨내기들이 붙어 있긴 하지만 오래 못 가. 인근의 품팔이 농군들이 많거든. 그 사람들도 얼마 안 가 우리네처럼 대처로 꺼질 게 뻔하단 말일세. 날품팔이를 해야 할 촌놈들이 많으니, 아무려나 대처엘 가든 공사판엘 가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 객지客地, P309.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구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불만을 터뜨려 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 객지客地, P344.

 

그는 바위를 등지고 함바를 향해 앉았는데, 독산을 내려가는 인부들의 모습이 몇 명씩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제방이 보였고, 그 너머로 무한하게 펼쳐진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숙부가 타고 있던 이민선이 바다 바깥을 다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

- 객지客地, P377-378.

결국 삼포 가는 길객지客地는 두 작품 모두 산업화(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고향을 잃고, 타관을 전전하며 하루를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인물들의 처지를 형상화해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결국 삼포 가는 길은 정씨마저도 고향을 잃음으로써, 그리고객지客地는 회사 측의 회유에 못 이겨 산을 내려가 쟁의에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비관적으로 제시되는 듯 보이나, 그러한 비관적 결말 이면에는 물밑의 연대와 유대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자리함을 제시하여,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by papyros 2016. 11. 23. 23:58

손끝으로 문장읽기 3주차 - 밀살密殺, 야근夜勤,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11월 셋째 주, 단편집돼지꿈밀살密殺, 야근夜勤, 세편의 수록작을 읽어 내려갔다. 세 작품 모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는데, 밀살密殺에서는 생존을 위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가축()을 도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시민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으며, 야근夜勤에서는 노동3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1970년대 공장노동자들의 소작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 간의 문제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또한 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수행해야만 했던 군인들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밀살密殺의 경우 야밤을 틈타 소를 키울 정도로 제법 살림이 넉넉한 집의 소를 훔쳐내어 도축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소를 기둥에 묶고, 도망치고자 발버둥치는 소를 도축하는 모습이 소설 안에 끔찍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암소를 도축한 후 보니 그 안에 미처 세상 빛을 보지 못한 한 생명(송아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비록 동물이지만 아내의 해산이 코앞인데도 어린 생명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산등성이를 올라가는데, 기실 새끼를 밴 암소를 도축하는 과정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방도가 없다는 그들을 둘러싼 현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이구, 이런 등신 좀 보소. 얀마, 읍내선 고기가 필요하다니께, 고기가.”

칼잡이도 신마이를 달랬다.

이 사람아, 워쩔 거여? 대처로 나갈 터일즉슨 쐬가 있겠어, 양식이 있는가. 이삭이나 영글면 헹편 필래나 했더니만…… 요 짓으로 이력이 났지만, 자넨 딱 한 번뿐여, 알겄나?”

여편네 배때지를 봐서라두…… 허긴 그럴 도리밖에 없구만이라우.”

밀살密殺, P129.

세 사람은 몇 번이나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잠 깬 참새들이 아직은 어두운 숲 속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늘에 새벽빛이 가득했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칼잡이가 불쑥 말했다.

자네 대처엘 가서 살아보면 안다니께.”

칼잡이는 지게 멜빵을 추켜올리고서 신마이 쪽을 바라보았다.

예서야 사는 게 그저 해 뜨고, 해 지면 하루지마는…… 게서는 하루에 억만 겁을 사는 셈인디.”

조수가 끼어들었다.

살 방도가 많다는 얘기라우? 아니면 당최 없응께 질다는 말이오?”

쌀려면 못할 짓이 없고 잉? 못 헐 짓 허자니 목숨이 질다는 이약이랑게.”

밀살密殺, P139.

거 꼴사나운 놈, 버리고 가더라고.”

송아지 말여요? 냅두슈. 지집아덜처럼 왜 그런다요?”

조수의 말에 칼잡이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래두 재수가 없을 거 같어.”

재수가 이 판국에 워딨대여. 염라대왕도 먹어야 대왕인디.”

갑시다 얼릉. 워쩐지 상스런 생각이 드누먼요. 마누라가 몸을 풀었을지도 모르겠네.”

신마이의 말에 조수가 발끈했다.

이런 지미 붙을…… 어떤 놈, 새끼 없는 중 아나. 줄줄이 딸린 게 새끼여. 낳고 먹고 죽고 하는 것이 자그마치 일곱이다 말여.”

밀살密殺, P139-140.

한편 야근夜勤(1973)의 경우 공장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직공들은 공장의 부당한 근로조건과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기계를 동시에 멈추는 노동쟁의를 계획하게 된다. 노동쟁의 과정에서 한 사내가 죽게 되는데, 공장 측은 이 죽음을 쟁의와 관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기도 하고, 십오 번 기계의 공원이 공장의 임직원에게 많은 도움을 얻고 있는 터라 혼자 기계를 멈추지 않고 쟁의 사실을 공장 측에 보고하는 등 다른 직공들을 배반하는 등 쟁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중요한 점은 한 개인의 배반을 귀책하기보다는 한명의 직공의 죽음 즉 쟁의과정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나약해진 공원(배반한 직공)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하며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그들의 기계적인 삶, 부당한 노동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낸다.

(나선욱, 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6-60쪽 참조.)

결국 이 작품은 19701113일 전태일이 부당한 근로기준법의 변화를 요구하며 분신한 이후 이 작품이 발표된 1973년까지도 부당한 근로기준법이 제시되고 공장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현실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연대의식을 기반으로 한 포용과 용서,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부조리하고 어려운 현실을 변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며, 실제로 파업에 승리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여자는 아교칠을 마치고 일어났다. 어떤 여공은 못 세게 박는 일을 그쳤고, 또 다른 여공은 페이퍼질을 그쳤다. 여자는 이 년 동안이나 합판의 네 귀퉁이에 아교칠을 하는 똑같은 일만 해왔었다. 그 여자가 자기의 뜻대로 일손을 멈추고 일어섰을 때, 그제야 여자는 그 풀칠의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야근夜勤, P149.

가족을 만나자구 그런다며?”

죽은 사람과 쟁의를 관련시키지 말자는 거야.”

납품반장이 침울하게 말했고, 기능공이 거들었다.

가족을 꼬이려는 수작일걸.”

틀림없어. 무슨 얘기 할 게 있으면 우릴 통해서 전하라구 그래.”

직장은 초록색 운동모자를 벗어서 바닥에 깔고 앉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그 친구가 우리하구 관련이 없나. 그리구, 우리에게 노조가 어디있어?”

노조는 언제나 말끔한 사무실 저 높다란 곳에 있었다.

뭐라구, 가족이 늘었어? 너무 많이 낳았단 말이지. 우리두 실력을 행사할 체면이 서는가. 자네, 우리가 위에 있었다는 걸 언제 알았나. 그럼 그전대루 모른 척하든지, 자네 자신들이 노력해 보는 길밖에 없네. 우리는 자네들 같은 노무자는 이미 아니니까. 허어 살기가 어떻다구…… 그건 여기 모든 기업의 전반적인 조건이야. 그러면 우리들의 노조는 어디 있습니까. 이봐, 자네는 집이 좀 헐었다구 그걸 두드려 부수구야 새 집을 짓는다구 생각하나. 시간가는 대루 수리를 해야지.

그건 집이구…… 이건 사람 얘깁니다.

야근夜勤, P153.

애초에 원자재부터 파손될 위험이 있는 물건이 작업 과정에서 상한 것이 어째서 공원들의 책임인가 하는 게 그들의 최초의 물음이었다. 당연히 원자재를 들여온 쪽일 것이었다. 아니면 바다 건너편의 책임이었다. 도급제에 관한 물음도 그랬다. 법정 노동 시간은 여덟 시간인데,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배가 임금에 의해서 두 시간을 추가할 수 있다는 선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본 노임은 싸고, 도급제로 바꿔놓으니까 실상은 몇 푼을 더 벌어보려고 남은 시간을 뺏기는 셈이었다.

우리두 잠을 자구 쉬어야 다시 일을 하지. 그러니 시간 계산을 하구 휴일두 노임을 붙여달란 거지. 기계에두 기름을 쳐주는데 말이야. 여기, 일요일에 놀아본 사람 있어?”

야근夜勤, P155.

직장은 주먹을 쥐고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여럿이 모이면 책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친구의 죽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동등한 이익, 불행을 함께 나눠서 감수하는 용기, 하는 모든 것들은 비겁하고 나약해진 친구에게까지도 끝까지 책임을 요구하고 보여주어야만 했다.

야근夜勤, P16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1970)은 베트남전에서 미국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신체적 훼손(죽음)을 전제로 미국의 전쟁을 대리하는 한국군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듯이, 한국군은 이념(이데올로기)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베트남전에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기실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위치는 미국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위치인 동시에, 베트남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월남인들에게 한국군은 월남인들의 자연스런 삶과 일상을 파괴하는 파괴자이자 가해자이다.

우리는 산개해서 마을을 지나갔다. 주민들이 뒷문을 살짝 열어젖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적의가 깃든 시선을 던졌다. 노인들은 음흉스러워 보였고, 아이들은 교활해 보였으며, 여인네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고, 남자들은 모두들 밤에는 게릴라로 변하는 적인 것 같았다. 그들의 고요한 마을에 침입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여긴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 P197-198.

땀구멍들이 모두 막혀버릴 것 같았다. 남의 땅, 남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는 뭐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냐. 도피로 차단된 일곱 마리의 쥐새끼였다.

, P205.

그러나 월남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적대자이자 이방인인 한국군은 미군에게도 환영받는 존재로 자리하지는 못한다. 한국군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사수한 을 손쉽게 파괴하고 마는 미합중국 군대의,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모습과 세계의 도처에서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중위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미군에게 있어 한국군은 그저 미군이 수행해야 할 군사노동을 대리해 주며,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쉽게 져버려도 되는 대상일 뿐이다. 결국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은 이러한 한국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 소설은 베트남이라는 타국에서, 타국의 전쟁을 대신해 싸워야 하는 중간국으로서의 한국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위치에 있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소외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뭐 하는 겁니까?”

장교가 얼구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바나나 숲을 밀어내야겠어. 짐프와 토치커를 지을 걸세. 저 해병이 막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우리는 작전 명령에 따라서 저 탑을 지켰습니다.”

나는 초라하게 서 있는 작은 석탑을 가리켰다.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탑이라구? 나는 저런 물건에 관해서 명령받은 일이 없는데.”

아직 통고되지 않은 겁니다. 아군은 월남군에게 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인민해방전선은 저것을 빼앗아 옮겨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으나, 불교와 주민들의 관계참모들의 심리적인 판단이며 마을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말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깨끗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누구의 것인가. 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불교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단순한 서양 친구는 으흥,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가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버려야지. 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네. 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장교는 자기가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전형임을 내세우고, 탑에 대한 견해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안다.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 P212-213.

(안남일,황석영 소설과 베트남전쟁,한국학연구11,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268-273쪽 참조.)

(이승우, 황석영 중단편 소설 연구 : 소설집 客地를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30-33쪽 참조.)

(김명희,황석영의 베트남 전쟁 소설 연구,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0-16쪽 참조.)

 결국 앞서 돼지꿈, 몰개월의 새, 종노,철길이 그러했듯이 이번 11월 셋째 주에 읽은 세 편의 작품 또한 결국 1970년대 현실 속에서 노동자, 농민(소시민), 군인들이 겪었던 삶의 비극과 애환을 잘 형상화해내고 있었다. 황석영 문학이 지닌 리얼리즘의 강력한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by papyros 2016. 11. 16. 17:01

손끝으로 문장읽기 2주차 - 「철길」, 「종노」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11월의 첫 주, 어느덧 겨울이라 느껴질 만큼 부쩍 추워진 가을날, 황석영 작가님의 철길, 종노를 읽어내려갔다.

두 작품 모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는데 앞서 돼지꿈이나 몰개월의 새와 마찬가지로 70년대 사회 소시민의 모습을 잘 형상화 해내고 있다.

1976년 발표된 철길의 경우 군인계급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대대장을 살해한 죄로 사령부로 호송되는 죄수는 이미 결혼해 부인과 아내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대대장을 쏘아버리게 된 자세한 이유는 작품 내에서 발견하기 힘들지만, 인질극을 벌이며 병장에게 남은 총탄을 헤아리게 하는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내, 애새끼, 휴가증, 고향편지, 부쳐온 떡, 아까 지나간 기차등은 군인으로서가 아닌 정을 지닌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요소이다. 즉 그를 호송하는 하사나 병장과 마찬가지로 인간적 유대를 갈망하는 개인이다. ‘철조망, 군번, 계급장, 영창, 중령의 속옷등은 신체의 훼손을 전제로 하는 죽음정치적 속성을 지닌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떠오르게 한다. 병장이 상급자를 죽인 이유에 대해 묻자 돈짝만한 계급장을 쐈는데 ……그게 사람이잖아.’라는 답변을 한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에서 이해된다. 즉 죄수는 죽음정치적 속성을 지닌 군인이라는 신분과 군대조직에 환멸감을 느꼈으며, 이에 그를 둘러싼 군대조직이라는 현실적 환경에 대한 분노와 회의를 표출한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죄수와 그를 호송하던 말년 병장 간의 유대관계이다. 두 사람 모두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군인신분이며 집에 돌아가고 싶은공통적인 소망을 지녀왔다. 즉 죄수와 병장과 같은 인물은 명령에 복종하거나 비판의식을 상실한 인물들이 아니다.

(박진만, 「1970년대 황석영 중단편 소설 연구 : 주요인물의 전형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8쪽-40쪽 참조.)

 즉 군인계급이 지니고 있는 죽음정치적 속성에 대한 환멸과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군대라는 조직이 모습을 숨긴 채 은밀한 영역에서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지배하는 비가시적 미시권력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듯 군인계급의 규율화된 권력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전망은 개개인과의 유대 관계존재론적 고민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먼 곳에서 디젤 기관차의 경적 소리가 짧게 한 번 그리고 길게 들려왔다.

들리냐? 기차가 들어오구 있어.”

죄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쪽문을 조금 더 열고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신호등에 불이 켜졌다.”

결국은 잡힌다.”

저 기차를 우선 타구 봐야겠군.”

집에 갈 테냐?”

가는 데까지 간다.”

병장이 말했다.

나두…… 집에는 가구 싶다.”

                                            - 철길, P93-94.

 

잠깐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기차 소리를 듣구 애들 생각을 했어. 언제나……놓치기만 했다.”

이윽고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탁가닥 탁 탁가닥 타, 하면서 선로의 연결 부분에 걸리는 바퀴 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죄수는 벽에 기대앉아 그 소리가 아주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다시 빗소리만이 창고의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 철길, P95-96.

종노의 경우 70년대 산업화가 한창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백암이라는 한 농촌마을에서 웃전 노릇을 하며 소작을 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어 훗집에 살게 하며 필요 시 마다 소작인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조그마한 농촌마을 소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소작인들은 조선시대에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타조법(打租法)으로 지대를 낼 뿐만 아니라 서방님, 아씨, 나리……로 주인집 사람들을 호칭하는 등 마치 종, 노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동이 노인의 차남 규호와, 서씨의 장남은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이해하고 비판하며 백암을 떠나는 인물로 등장한다. 자본과 토지의 부재로 인해 주인집을 마치 상전처럼 모시는 것을 오랜 관행처럼 여겨 온 동이 노인은 장남 규철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아파트를 짓기 위해 훗집을 허물고 훗집에 거주하는 소작인 절반 이사을 내칠 것이라 예고하는 주인집에 결정에 항의를 표하는 서씨의 장남에게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규철을 말리며 이 순간 차남 규호가 집을 나가며 했던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라는 마지막 말을 상기한다.

종노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며 산업화가 가속되던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도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종과 노비와 같은 위치로 자처할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애환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삶의 주체로서 자리한다는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웃집 사람들 여전하죠?”

서씨는 다시 말을 잃고 우물쭈물했고, 아들이 말했다.

내일이 추석이라구 어머니가 일 도우러 가셨으니, 아무 때나 툭하면 하인으로 데려다 부려먹는 거지. 뭐 달라진 게 있겠습니까.”

그 집이 여기선 상전인데 어떡하겠냐.”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서방님, 아씨, 나리…….”

땅이 없는 탓이다.”

서씨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그대로 일 년 만에 보는 자식 앞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 그래두 여기선 느이 동생들이 배 곯은 적은 없다.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 적두 있지만 대처보다야 한결 낫지. 아직은 시골이 어수룩하더라. 나두 열 마지기 농사여. 요새느느 정말 사추리에서 찬 바람이 나도록 일을 한단다.”

아들은 도시살이에 간만 부풀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까짓 열 마지기에 지대는 얼마나 바치구요?”

역시 서씨는 담배만 피우는데 아들이 말했다.

반반이죠? 도둑놈들 같으니…… 아무리 빈손이라지만 농구에 비료에 영농비 몽땅 들이고 식구들 노임까지 들여서 지어놓으면 손가락에 흙덩이 한번 대어보지 않은 놈들이 가져가잖아요. 그러니 다시 말짱 헛것이지요.”

반타작은 옛날부터 원래 법이 그렇다는 걸 모르니.”

어느 옛날요…….”

왜정 때…… 아니 그전에두 그랬다더라. , 땅 가진 사람들두 속이 썩을 게다. 뭐 남는 게 없겠더라.”

그건 가진 놈들 사정이구요. 반반이 대체 뭐예요. 제 앞가림두 못하면서 남의 걱정을 해요. 참 답답해서.”

                                                                                                                                                 - 「종, P120-121.

by papyros 2016. 11. 9. 22:38

손끝으로 문장읽기 1주차 - 「돼지꿈」, 「몰개월의 새」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10월의 끝과 11월의 시작에 황석영 작가님의 돼지꿈단편집에 실린돼지꿈몰개월의 새를 읽었다. 돼지꿈에서는 70년대를 살아가는 서민들 특히 노동자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특히 손을 다쳤음에도 3만원을 받고 노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좋아하는 근호의 모습, 그에 더해 가족들은 손을 다쳤다는 사실보다는 누이 미순의 혼사에 보탤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모순적으로 느껴지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이외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며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슬픈 것 마음은 미래의 살고,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운 것’ (돼지꿈, P41.)이라는 글귀를 붙이곤 공장일을 하며 자취방 대금을 마련하는 여공의 모습도 참으로 아련하게 다가왔다. 70년대 근대화가 진행되던 그 시절 노동자 계급의 죽음정치적 속성이 이 소설에 여실히 드러나고 싶다. 포장마차를 하는 이도, 공장의 노동자도 모두 돈을 버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들이 탐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너무 절실하기 때문인 것이다.

 

몹쓸 짓이지.”

돈 벌자는 게 뭐가 나쁩니까?”

살아보면……. 알게 되네. 자넨 손 다쳐 목돈을 만지니 기분이 좋은가?”

근호는 그제야 붕대 감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렇다. 운이 약간 나빴을 뿐이다. 그리고 돈이 안 생긴 것보다는 낫다.

기분이 안 좋으면 어쩝니까. 내 실순걸.”

얼마 받았는데……

한 개에 만 원씩, 삼만 원요.”

삼만 원에다, 공장 병원의 치료비 무료, 한 달 동안의 노임도 공짜로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친다면 높은 사람쪽도 성의가 없는 건 아니라고 근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돼지꿈, P46-47.

 

 「몰개월의 새20152학기, 나병철 교수님의 <한국현대소설론> 수업에서 낙타누깔과 함께 비중있게 다룬 적이 있는 작품이며 깊이있게 배운 바 있지만 전문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미자와 사이의 미묘한 심리적 교류를 보여주는데, 몰개월이라는 공간은 베트남 전쟁 출병 이전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체류하는 군인들과 막판까지 이리로 끌려와 밤새 병사들의 시달림을 받는 이들이 몰개월이라는 공간에 함께 자리하며 애착을 느끼는 것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는 그들과 소통·교류함에 더해 동일시를 느끼기까지 이르러,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식구를 먹어주는 놈이 어디있겠는가.’라는 문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몰개월의새, P73)

 

나병철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군인들과 몰개월 여성들... 이들 사이의 공통점인 죽음정치적 노동에 주목한 바 있다. 즉 군인들의 군사노동과 기지촌 여성들의 성 노동이 공통적으로 죽음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유대를 느끼고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 파병 병사는 본디 미군들이 수행해야 할 전장을 대신하는 것이고, 미자 역시 병사들을 위로해야 할 누군가를 대신하는 대리노동자이다. 이들은 너무나도 먼 데 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군인이나 창녀라는 직업 모두 산업노동과 달리 생명의 훼손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즉 계급적 위치와 군사화된 환경의 유사성과 함께 친연성의 근거로서, 군사노동과 성 노동이 공유하는 지점은 노동하는 신체 자기 신체의 순수한 대리성에 보상을 받는, 타인의 신체를 대신하는 신체 가 절대적으로 피수불가결한 동시에 명백히 처분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몰개월의 새에서 월남 파병을 앞두고 목숨을 내맡긴 채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의 처지나 밑바닥 인생을 살아 온 미자의 처지는 사회현실의 구조적 모순에서 형성된 굴절의 삶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 있는 것은, 미자가 보이는 병사들에 대한 헌신과 자기희생을 통한 무조건적 사랑나의 인식변화’(성적대상에서 가족애로 변모)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1970년대 신체와 성, 그리고 생명까지도 교환가치로 상품화되어 죽음정치적 노동으로 훼손되는 그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소외되고 희생된 민중들의 선물(타자와의 인간적 교류)은 폭력의 근대화 속 존재의 자기증명이자 인간애의 과정을 보여준 점에 있다.

 

 (나병철 , 이진경 서비스 이코노미, 소명출판, 2015, 118-137쪽 참조.)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 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에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 몰개월의 새, P76

 

by papyros 2016. 11. 2. 23:38

 

 

지난 10월 13일 목요일, 신청이 열리자 마자 신청하여,

담당자님의 말에 의하면 선착순 중 가장 먼저 신청한,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키트가 도착했다. 그만큼 지난 시 필사 모임 때 신청을 못한 것이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신청한 책은 황석영 작가님의 <돼지꿈>인데, 나병철 교수님 수업 때   <몰개월의 새>를 비중있게

다룬 바 있었고 그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리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는 작가님이라고

생각되어서 작가님의 중단편집을 깊이있게 정독해 보고자 이 책을 신청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책을 정독하고 꾸준히 책의 문장들을 필사해 나가며

감상을 향유하고자 한다.

 

 

by papyros 2016. 10. 26. 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