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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 『변신』 을 읽고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있기에 …….’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명상 중 문득 떠올린 시의 한 구절이다. 어느 시에서 나온 구절인지, 작가가 누구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떠오른 구절이지만 이 시는 요제프 크네히트가 학창시절 지은 시였고, 요제프 스스로가 경험을 통한 각성에서 남긴 자신에 대한 성찰이자 경고로서의 글귀였다. 결국 학창시절 각성을 통해 남긴 그의 시는 요제프가 속세로 나아가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줌으로서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다시 말하면 그가 지은 시의 문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한 힘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헤세 자신에게는 『유리알 유희』를 집필한 것 자체가 바로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 해 본다. 누군가 내게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손꼽히는 작가가 누구인가’를 물으면 고민하지 않고 ‘헤르만 헤세’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 속에 드러난 그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고 묘사에 감동받는 작가인 만큼, 그는 많은 역작들을 남겼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知와 사랑)』,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 등의 작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온 그의 대표작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갈등과 정서를 쉽게 묘사한 작품인 덕분에 공감대를 가지고 많이 읽혀지는 것 같다. 반면 『유리알 유희』는 분량도 압도적으로 긴 장편소설일 뿐 아니라,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내용까지 함께 담고 있어 작품의 모든 구절을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난해하고,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인지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는 매우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유리알 유희』야 말로 헤세의 작품세계, 헤세가 써온 모든 소설들에서 다룬 삶의 고민과 갈등,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리알 유희』를 읽어 내려가면서 내 머릿속을 관통했던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카스탈리엔’ 즉 유리알 유희를 행하며 학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성적 활동을 추구하는 정신적 세계, 즉 이성적 세계,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속세’ 즉 현실세계의 대립 문제이다. 사실 ‘유리알 유희’란 진실로 어떤 것인지 그 정의(定義)를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 쌓아온 학문이나 예술로서 정해진 형식과 규범이 있고 이 형식 안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이성적이며 사색적 행위의 집합체인 것 같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문’이나 ‘음악’등이 ‘유리알 유희’의 한 종류로 포함되는 것 같다. 또한 정해진 규범 안에서 속세의 범인을 뛰어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 행위에 순종하고 그들 나름의 신앙심을 지니고 순명하기 때문에 ‘유리알 유희’가 행해지는 카스탈리엔의 세계는 다시 말해 정신적이며 이성적 세계인 반면, 속세는 물질적 세계로서 분명히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요제프 크네히트와 폴리니오 데시뇨리라는 대립구도로 나타나는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갈등은 헤르만 헤세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나타나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知와 사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지닌 이성과 감성의 대조적인 모습,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가 성장 과정에서 선(정신적, 신앙의 세계)과 악(속세)의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대립 구도는 소설 속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에서도 이어지는 부분인데, 특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나는 상황이야말로 속세의 단면이다.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가 되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게 되자 그를 내쫓으려 하는 모습은 물질을 사람 위에 두어 사람과 사람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도구화, 수단화 시키는 작금(昨今)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문의 전당이요 ‘상아탑’으로 불리던 대학(大學)이 근간학문인 인간학문을 경시하는가 하면, 세속의 요구에 맞춰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카스탈리엔의 정신적 가치를 가장 잘 이어가야 할 대학(大學) 스스로가 속세의 물질적 가치에 영합되고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 평가지수마저 교육의 내용적 질 보다는 취업률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두 세계간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양해야 할 상황인데, 그렇다면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믿고 속세의 가치는 모두 배제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 또한 극단적인 불균형에 속한다. 실례로 교회가 지배했던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중세에는 기독교의 가치관, 정신적 세계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현실의 다른 것들을 부정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종교의 폐단이 드러난 바 있다. 물론 중세시대 교회의 발달이 학교교육에 영향을 주고 서적을 남기는 등 중세의 암흑기가 폐단만을 남긴 것은 아니라고 하나, 기독교의 가르침만을 절대화하여 나타난 폐단은 정신적 세계의 극단화가 가져온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즉 정신적 세계와 속세 중 어느 한 쪽을 절대화 하는 것은 지양해야하며, 결국 두 세계간의 조화가 필요하다. 불교의 차안과 피안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차안이 지금 여기, 즉 현실의 세계라면 피안은 열반과 해탈의 경지를 이룬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세계인데, 만약 해탈한 자가 모두 차안의 세상에 남아있고 피안으로 떠나버린다면 차안, 즉 속세에 현재해 있는 많은 문제들로 인해 세계의 횡포에 억압당하는 서민, 민중들은 지그들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끊을 길이 없게 된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도 이런 문제 때문에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그의 시 속에 표현하였고, 결국 만해는 차안의 세계에 남아 민중들과 함께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부, 세리 등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고 결국 마지막까지 속세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도 만해가 차안의 세계에 남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진정한 조화는 속세의 범인(凡人)에 비해 먼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체득한 이들이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과 지혜를 세상과 나누고 전할 때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앞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와 만해와 마찬가지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대립 및 갈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정신적 세계인 카스탈리엔에서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그 세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물론 카스탈리엔은 속세에 속한 또 하나의 세계이며, 어느 한 쪽의 논리가 완벽히 옹호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고 머지않아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해 그 후유증을 방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의 역할이라 보았고 교육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느껴 유희의 명인 자리를 포기한 채 속세로 나아가 정신적 가치를 속세에도 가르쳐 두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헤세의 다른 소설인 『데미안』에서는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던 에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이성적인 존재를 만남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받아 두 세계를 조화시켜서 자신을 성장시켜 알을 깨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知와 사랑)』에서도 감성이 풍부했던 골드문트가 이성적 존재인 나르치스를 만나 우정을 나누며 교류하며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 또한 두 세계 간 조화를 이룬 부분이다. 즉 대립되는 두 세계를 조화시키는 데는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인 지식인들이 세상에 나아가 진심을 다하고 그가 배운 지식과 지혜를 나누고 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지식인들이 속세에 영합하여 그들이 대학(大學)이라는 곳에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여 얻은 지식을 그들 스스로만 쥐고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정신적 가치 대신 물질적 가치를 더욱 추구하게 되어 불균형과 양극화가 벌어지고 마침내는 그들이 얻은 정신적 가치마저 경시되고 대학(大學)의 기능마저 무너진 것이라 본다. 진정으로 사회의 갈등과 모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타인과 나누려는 지식인이자 지도자가 간절히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 본인이 세계대전에 반대하며 반전(反戰)문학운동에 참가한 지식인으로서 속세의 문제를 두 세계 간의 조화로서 풀어나가려 노력한 지식인이었는데, 지식인자 작가로서 정신적 가치를 전하고자 했던 헤르만 헤세의 가치관이 그의 소설들 속에 담길 수 있었던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주제는 소명(사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요제프가 속세로 나아가기 전, 명인의 자리를 포기하기 위해 알렉산더와 나누는 대화에서 소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이 보이는데, 카스탈리엔에서는 직업의 사명을 진실로 천직이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 반면, 결국 요제프는 자신이 더욱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쪽은 유희의 명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교육자의 길이라 여겨 이를 천직으로 여기며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통한 자기 선택을 통해 속세에서 교육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명인자리를 포기하는데, 과연 자유의지와 소명은 대립적이며 모순적인 것일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소명(召命)이란 즉 어떠한 직업에 끌림 의식을 느끼고 천직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끌림 의식, 천직으로 느낀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직업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열망 안에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에서는 천직과 자유의지를 대립시키고 있는 것 같이 보여 혼돈과 의구심이 들었는데,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생각해 본 결과, 이는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여 질 수 있는 부분이다. 카스탈리엔에 속한 이들처럼, 운명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천직이란 한 개인의 능력에 가장 맞는 직분으로서 태초부터 주어진 운명이라 한다면 자유의지는 개인의 선택이 가능한 것으로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읽혀질 수 있지만, 이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 존재하기는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즉 중요한 것은 본인이 소명의식을 지님으로서 자신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그 길에 사명감과 확신을 갖는 것이다. 때문에 천직이라는 의미 안에 개인의 선택, 즉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비록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천직과 자신이 생각하는 천직이 다를 수도 있고 그 와중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가며 진정으로 자신이 소명의식을 느끼고 천직으로 확신하는 길에 나아가는 데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반추하고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만드는 것인 것 같다. 즉 소명이라는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때문에 소명과 자유의지는 합치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르만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열심한 신앙인이자 뛰어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사제의 길을 걸어갈 환경과 능력이 충분했으나 수도원의 분위기에 혼란을 느끼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겨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즉 작가인 헤세 본인도 자신의 천직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 할 수 있으며, 요제프 크네히트가 작가의 분신이며 자신의 천직을 찾은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경우인 것 같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의 경우 천직과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결과적으로 좌절하고 실패한 경우로서 한 때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억압되고 강제된 삶의 부정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체험한 초기 그의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결국 헤르만 헤세는 한스 기벤라트의 결과로 나아가 평생 좌절하며 살아가지 않고,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요제프 크네히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자신이 삶과 직분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일을 해 나가면서 주변의 타인에게 긍정적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천직으로서 의미가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주제는 교육에 대한 것인데, 교육자로서 보여야 할 모범과 자질, 그리고 학생들과 맺어야 할 인격적 관계 및 교육이 학생들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나 자신의 소명의식이 교육자에 닿아 있기도 했고 실제로 존경하는 교수님의 교직 수업에서 배우고 느낀 바를 소설 『유리알 유희』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기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갔다. 책의 문구들 곳곳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교육자와 학생이 수평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하에서 소통할 때 상호 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상대를 통해 스스로의 배움을 넓혀갈 수 있다. 즉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나-너’의 교육을 강조한 Martin Buber의 실존주의 교육철학이 교육자와 학생 사이의 관계맺음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인격적 관계를 통한 상호 존중이 전제되어 있을 때 진심으로 교감하고 가치관을 나눔으로서 교육자와 학생 모두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든다.
처음엔 후배들에게서 시작하여 나중엔 차츰 선배들에게도 미치게 된 자신의 인격이 지닌 영향력을 이 젊은이가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자 그는 동료들과 후배들이 보내오는 적극적인 우정이요,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대할 때 보여 준 호의적인 태도였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01)
두 사람을 잇는 그 무엇이,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석 같은 것이 매우 강력하게 두 사람에게 작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퍼셀의 소나타로 시작된 그날 저녁 이후 실제로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무엇이 존재하게 되었다. 야코부스 신부는 훈련이 잘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형성 과정에 있는 젊은 지성과 교제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 만족이 그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크네히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역사가와의 교제와 그 교제를 통해 시작된 배움은 각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가 되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것을 그렇게 각성해 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크네히트는 신부를 통해 역사를 배웠다. 역사를 연구하고, 그것을 집필하는 법칙과 모순을 알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역사적 현실로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민음사 유리알유희1, P219)
크네히트가 저 유명한 야코부스 신부와 종종 만나는 허물없는 사이일 뿐 아니라 마침내 우정 어린 교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이 교제는 여러 가지 결실을 가져왔다. 그 이야기를 미리 앞거러서 하나 하자면, 우선 크네히트가 무엇보다 반가워할 결실에 대해 말해야 하리라. 그 열매는 아주 서서히 익어 갔다.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의 씨를 비옥한 저지대에 가져다 뿌렸을 때처럼 그것은 서두르지 않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조심스레 자랐다.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에 내맡겨진 이 씨는 그 조상이 가지고 자란 조심스러움과 의심스러운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었다. 성장하는 속도가 느린 것은 유전적인 성질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믿지 못하고 일단 이리저리 다루어 보는 습관이 있는 그 현명한 노인은 반대 방향의 동료인 젊은 친구가 카스탈리엔의 정신이라며 그에게 가져온 모든 것을 망설여 가며 그저 아주 조금씩만 자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놔두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차츰차츰 싹을 틔워나갔다. 크네히트가 수도원 시절에 체험한 가장 좋고 귀중한 일은 경험 풍부한 이 노인이 그렇게 가까스로나마 신뢰해 주며 가슴을 열어 준 일이었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25)
그는 야코부스 신부의 가르침을 받고 그 신부를 사귀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일은 부차적인 일로 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제자가 되는 것, 배우고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육성하는 것이 그 무렵 그가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제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교사로서 취임 초기의 가장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즉 권위를 획득하고 개인과 직무를 합치시키기 위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그 일을 해내면서 그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나 빛을 발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 즉 가르치는 기쁨이었다. 다른 하나는 연구생이나 학생의 인격과의 싸움으로, 권위와 지도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일, 즉 교육하는 기쁨이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별개로 나누는 법이 없었다. 명인의 자리에 있는 동안 그는 최고의 유리알 유희자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례와 모범을 통해, 경고를 통해, 강인한 인내를 통해, 또 그가 지닌 본질적인 힘을 통해 제자들 대부분을 각자의 능력에 맞춰 최상의 개성적인 인격으로 뻗어나가게 해 주었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313)
교육자와 학생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육자와 학생 사이의 신뢰가 필요한 것인데, 학생의 교육자에 대한 신뢰는 교육자 스스로가 자격과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학생 앞에서 모범을 보일 때 가능 해 진다. 즉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사전 책임감, 즉 도덕적 책임감과 관심을 지니고 학생의 필요에 귀기울여주며 응답함으로서, 또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며 스스로 앞에 나서 학생의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될 때 학생은 교육자의 태도와 삶 자체를 닮기 노력하고 modeling하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교육자가 도덕적 책임감을 통해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자세로 모범을 보일 때 학생들에 대한 긍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은 본질적으로 교사나 교육자의 재능에 속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위험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00)
즉 도덕적 책임감을 지니고 교육자가 스스로 모범을 보일 때 상호 신뢰와 존중, 인격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며 이후에 발휘되는 교육의 파급효과, 긍정적 영향력은 그 힘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학생 안에 교육자의 삶이 내재하여 교육자의 가치가 전수되고 학생이 이를 실천하여 그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해줄 때, 바로 학생의 삶 안에 교육자 현신(現身)하며 영속(永續)되는 것이다. 즉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미성숙자에게 전수하거나 전달함으로서 학생의 잠재적 가능성을 끄집어내어 발전시키는 동시에 전인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과정’이라는 교육의 정의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며, 피터스(R.Peters)가 주장한 대로, 교육이란 교육받은 사람이 장차 거기에 헌신할 가치 있는 것을 전수해 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설의 마지막에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의 제자 티토가 요제프 크네히트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여 요제프가 티토의 삶 안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즉 전수하고 교육할 만한 가치는 불변한다는 항존주의 교육철학의 진정한 의의와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소년 자신은 열광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춤은 그가 이미 알고 있거나 언젠가 한번 추어 본 적 있거나 시도해 본 일이 있는 춤이 아니었다. 태양과 아침을 경배하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의식도 아니었다. 자신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의 춤과 마술에 홀린 듯한 광란에는 산속의 공기나 태양이나 아침이나 자유에 대한 감정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거기엔 자기의 젊은 생명의 변화와 단계가 다정하면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명인이라는 인물 속에 나타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음사 유리알유희2, P148)
이 빛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이제껏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민음사 유리알유희2, 152)
즉, 소설 『유리알 유희』 안에는 Martin Buber의 ‘나-너’의 만남을 통한 인격적 관계, 즉 실존주의 교육철학과 항존주의 교육철학 및 교육자로서 보여야 할 모범 등을 요제프 크네히트의 소명과 야코부스 신부와의 관계 등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5가지 교육원리-사랑의 원리, 가능성의 원리, 본보기(modeling)의 원리, 각성(깨달음)의 원리, 인격적인 만남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구본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론에 근거한 전인 교육과정 연구」, 가톨릭大學校 大學院 석사학위논문, 1999, 31-39쪽 참조)
내용이 매우 길어졌는데, 그만큼 소설 『유리알 유희』는 가장 존경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글일 뿐 아니라, 교육자의 길에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는 내게 교육학의 내용과 교육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수 있게 했고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녀야 할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책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 소설을 읽으며 종합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교육자이자 인격자의 모습을 정리 할 수 있었는데, 교육관으로는 실존주의 교육철학과 항존주의 교육철학을 지니고, 스스로 도덕적인 책임감으로 모범을 보이고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가치 있는 것을 전하고 학생의 삶에 영향을 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 즉 단지 내 앎을 자신의 명예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허비하지 않고 학생들, 그리고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는 데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나의 소명인 교육자의 꿈을 이루는 데 많은 현실적 제약과 좌절이 있지만, 직선이 아닌 곡선의 길을 그리고 있고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이루느냐’가 아닌 자신이 소명을 느끼고 선택한 일을 진정한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지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즉 이 책은 내가 지니고 있는 이상적 교육자이자 인간상에 대한 종합일 뿐 아니라, 약간 늦어진 것으로 인해 조급함을 느끼고 너무 쉼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한 경종(警鐘)인 것 같다. 때문에 속세의 삶에 쫓기지 않고, 두 세계의 조화에 기여하는 진정한 교육자로 성장하기 위해, 『유리알 유희』에 대한 감상을 종합하면서 나는 다음 문구를 명심하고 싶다.
우리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고, 또 그때그때의 과제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명상이라는 힘의 원천에, 정신과 영혼의 끝없이 새로워지는 화해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밖에도 그런 예를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어떤 과제에 몰두하게 되어 흥분하고 격앙되고 피로해지고 압박받는 정도가 심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이 원천을 소흘히 하기 쉬운 법이라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떤 정신적인 일에 깊게 빠져들게 되면 육신과 그것을 돌보는 일에 소흘해지기 쉬운 것과도 같지. 세계 역사에 진실로 위대했던 인물들은 모두 명상할 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명상을 통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힘이 있었다 해도 결국은 모두 실패하고 패배했지. 과제나 야망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눈앞의 현실적인 것에서 벗어나 늘 그것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자네도 이미 알겠지. 그런 건 처음 연습할 때 배우는 것이니까. 피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것이 얼마나 엄연한 사실인가 하는 것은 한번 길을 잃어 보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되지(민음사 유리알유희, P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