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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사 에브리데이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바이선, 에브리데이를 읽고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끔찍해 보일 거라는 걸 알지만, 난 아주 많은 걸 보아 왔어. 한 몸 안에서만 살면 삶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느끼기가 무척 어려워. 자신이 누구라는 사실에 깊이 뿌리박고 살아가니까. 하지만 자신이 누구라는 사실이 매일 바뀌면 보편적인 것을 더 많이 접하게 돼.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까지 말이야. 사람마다 체리 맛을 다르게 느낀다는 걸 알게 되지. 파란색도 다 달라 보여. 남자애들이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이상한 의식들을 알게 돼. 자신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지만.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주는 엄마나 아빠는 좋은 부모라는 것도 깨닫게 돼.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을 내지 않는 부모님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으니까. 하루가 진정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알게 되지. 매일매일이 다르니까 말이야. 만약 사람들에게 월요일과 화요일의 다른 점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저녁 식사로 무얼 먹었는지 얘기할 거야. 나는 그렇지 않아. 세상을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더 많은 면들을 느낄 수 있거든.” (<에브리데이>, 141-142.)

 

 

 매일 아침 어떤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 하루를 보내고 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이동하는 삶. A는 마치 한 곳에 정착 할 수 없는 여행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언뜻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시크릿 가든>이나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도 하루쯤 영혼을 바꿔보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다든가, 혹은 도민준과 같은 천재적이며 영생을 누리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을 꿈꾸곤 한다.

 A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존재이다. 고작 열여섯 살로, 또래 10대 친구들의 육신을 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A는 특별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꿈꾼다. 매일 똑같은 사람으로 깨어나, 그저 자신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인 리애넌과의 만남을 지속해 나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 어디서 누구의 몸으로 깨어날지 모르는 A에게 지속적인 관계는 불가능해 보인다. A에게 리애넌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고 한정된 시간일 뿐이기에, A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리애넌을 만나고 그녀와 교류해 나간다.

 

사람들은 자기 몸이 지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사랑도 당연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지속적인 만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일단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건 우리 삶에 추가된 또 하나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그런 지속적인 만남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를 지탱해 줄 토대는 늘 하나뿐이다. (<에브리데이>, 80.)

 

 그러나 A와 달리 우리는 만남이라는 것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페이스북에 접속해 지인의 계정을 확인하고 타임라인을 확인한다. 그리고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 정도를 묻는, 그리고 밥이나 한 번 먹자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곤 한다. 더욱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일상을 부러워하며 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지니게 된다. 그러나 A에게 이메일이나 SNS 계정은 우리와 그 의미가 달리 이용된다. 자기 실존을 확인하고, ‘지속적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는 유일한 소통창구인 것이다. A가 이메일과 SNS를 사용하는 목적이야 말로 그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은 몸으로 일어나지만 늘 다른 삶을 부러워하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항상 다른 몸으로 일어나지만 육체의 원래 주인의 삶을 크게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A의 모습이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A가 비록 열여섯의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삶이나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파악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은 A야 말로 오랜 관찰과 주의를 통해 삶과 관계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빠르고 편한 만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환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존재가치에 대한 인정진정성이 아닌가 싶다. 남들과는 차별화된 자기 고유의 가능성 - 그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계발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선행 될 때 A와 리애넌 같은 순수하고 진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아의 본질을 추구하며, 언제나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A이기에 폴 목사를 찾아가는 그의 다음 모습이 한편으로는 걱정되면서도, 그가 마주할 고민과 선택에 기대가 된다.

 

 

 

 

 

 

by papyros 2015. 9. 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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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사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고

 

 

눈을 떠요. 라디오에서 프랑스 남자가 말했었다.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1136-137.)

 

 

21세기가 되기까지 거대한 역사 속 한 개인의 행동은 모두 타율과 자율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역사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 갈등이 더욱 첨예했던 2차 세계대전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전쟁 막바지인 1944-1945년을 주된 배경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적 배경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러 다른 연도들이 배치된다. 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그린 과거, 그리고 전쟁이 종식된 이후 성장한 후의 모습을 그린 2014년으로 작품이 끝나는 구조를 지닌다. 또 두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진행될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불꽃의 바다라는 돌-이 돌은 소유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야기하지만, 소유자 자신은 영생을 누리게 한다. -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마치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연상하게 하면서 환상적 요소를 배가시킨다.

핵심 인물은 베르너라는 독일소년과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이다. 독일과 프랑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적대관계에 있었던 양국의 소년소녀들이 어떤 접점으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인가.

두 아이들의 접점,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내적인 힘이 무엇인가 고민하건대 아마도 바로 아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성이라고 본다. 전쟁이라는 절망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 ‘옳은 행동에 대한 중요한 가치들을 잃지 않은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은 아이들이 바로 베르너와 마리로르였기 때문에 바로 두 사람 자체가 희망이 되지 않는가 싶다. 비록 베르너는 탄광도시 졸페라인에서 광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수리하고 기계를 잘 다루는 타고는 재능을 살리기로 결심하여 엘레나 아주머니, 그리고 소중한 어린 동생 유타를 두고 나치 치하 엘리트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기술과학 분야 하우프트만 교수의 눈에 들고 미래를 보장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귄 소중한 친구 프레데리크’-새를 사랑하는 소년- 가 교수에게 부당함을 이야기 했다는 것만으로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 무자비하게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계기로, 학교에서 시키는 것’ - 타율-이 아닌, 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율-이 옳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프레데리크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굴었던 건 베르너였고, 프레데리크가 싫습니다 하면서 물이 든 양동이를 바치에 내동댕이치는 걸 보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으며, 그 결과들이 비가 쏟아지듯 몰려올 때 그저 서 있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다. (2280-281.)

 

 

선천성 녹내장 진단으로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소녀 마리로르는 비록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낸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많은 세상을 마주하도록 도와주시고 새로운 자극을 주시어, 마리로르는 앞을 볼 수 있는 여느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모든 생명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색깔, 향기를 생각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오신 덕분에 어느 곳에 사물이 있는지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박물관 열쇠 관리인인 아버지 덕분에 박물관을 구경하기도 좋아했고, 생일선물로 받은 책해저 2만 리를 탐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후 파리를 떠나 작은할아버지 댁인 생말로로 거취를 옮기면서 그녀의 삶에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전쟁의 분위기가 자욱한 회색 빛깔의 생말로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색깔은 바다에 갈 때,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이 절망을 극복하고 독일군몰래 숨겨둔 라디오를 꺼내 음악을 트는 순간이다. 마리로르는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독일군에게 저항해 라디오를 트는 작은할아버지 에티엔, 그리고 이를 전달할 수 있게 숫자를 받아오는 마네크 아주머니의 조력자임과 동시에, 작은할아버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독일에 협력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예요.”

바람이 훅 치고 들어온다. 마리로르의 마음속에서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반짝이다가, 바늘들을 끌어당겨선 그 가시들로 허공을 찌른다. 은색으로, 그 다음엔 초록색으로, 다시 은색으로.

전 방법을 알아요.” 마네크 부인이 말한다.

무슨 방법? 요새 들어 누구를 믿게 된 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믿어야 할 거예요.”

자네 옆에 있는 그 사람의 팔다리에 자네와 똑같은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자넨 그 무엇도 믿어선 안 돼. 설령 그런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치더라도 자네가 싸우길 바라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야, 마네크, 체제지. 무슨 수로 체제와 맞서 싸우겠다는 건가?”

나리가 해 보세요.”

 

(중략)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죠. 조카 손녀를 생각해 보세요. 마리로르를 생각해 보시라고요.” 커튼은 펄럭이고 서류들은 바스락거리며 두 어른은 서재에서 맞서 버틴다. 작은 할아버지의 방문 바로 앞까지 살금살금 간 마리로르 손이 문틀에 닿기 직전이다. 마네크 부인이 말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288-89.)

 

나한테 아직 희망이 있네!” 에티엔이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마리로르는 작은할아버지가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지낸 것은 아님을, 이 전쟁 전에도 그전의 전쟁 전에도 그는 나름대로 인생을 살았음을 떠올린다. 그도 한때는 세상 속에 살았고 또 그녀 못지않게 그 세상을 사랑했던 청년이었음을. (2109-110.)

 

베르너마리로르그리고 이들 주변을 둘러싼 프레데리크’, ‘유타에티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 자신의 존재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한 것이라고 본다. 베르너에게는 그것이 마리로르와 에티엔의 방송을 듣고 생말로를 찾아가 마리로르를 구해주는 것이었고, 마리로르에게는 에티엔 작은 할아버지가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프레데리크에게 더 없이 귀한 것은 모든 생명이었고 때문에 한 생명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을 우선하여 사관학교의 교수에게 싫습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였다. ‘에티엔또한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 속 골방에 갇혀있었던 것을 극복하고 전쟁통에 다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라디오를 잡고 방송을 한다.

음악, , 라디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만 하는어떤 가치가 있었다는 것. 즉 타율적 삶이 아니라 자율적 삶을 살아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그 시대에 그저 순응하고 방관하며 살아갔던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참 용감해요.”

그녀가 양동이를 내린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2371.)

 

소설 마지막 장, ‘2014에서 나오듯 전쟁이 끝난 수십 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마리로르의 손자 게임기를 잡고 있는 미셸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음악, , 라디오 과거 베르너와 마리로르, 에티엥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던 데 반해 현재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고전이 되어 버렸고, 지하철을 타면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 사용에 열중하고 있다. 좀 더 빠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좀 더 빨리 정보를 찾고 단 10초만에 SNS로 소식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만약 절망이 온다면,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인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가치, 내가 추구해야 할 무엇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나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 위해, 우리가 한번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게끔 하고자 이러한 장편의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람들이 저 아래 식물원 오솔길을 걸어 다니고, 바람은 생울타리를 누비며 송가를 부르고, 미로 입구에서 자라는 크고 늙은 삼나무들은 삐걱거린다. 마리로르는 그 옛날 에티엔 할아버지가 설명해 준 대로, 전자파가 미셸의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는 것을, 그들을 싸고 감도는 것을 상상한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천 배는 많이 종횡무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100만 배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빗발치는 문자, 파도처럼 들고나는 핸드폰 메시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메일에서 광섬유와 전선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도시 위아래로 얽힌 채 건물들을 지나고, 지하철 터널 속 송신기들을 활모양으로 잇고 무선 송신 장치를 내장한 가로등 기둥에서 나오는 가운데, 카르푸와 에비앙과 미리 구워 나온 토스터 페이스트리 광고들이 허공으로 번쩍이며 쏘아졌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나 늦을 것 같은데 예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보카도를 찾아 주세요. 그가 뭐라고 말했지? 1만 번의 당신이 보고 싶어. 5만 번의 당신을 사랑해. 아르덴 위로, 라인 강 위로, 벨기에 위로, 덴마크 위로, 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페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와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 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2458-459.)

 

 

 

 

 

by papyros 2015. 8.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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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시대에 품는 소망

-방민호, 연인 심청을 읽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겉에 보이는 대로, 사랑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줄 안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실은 사랑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인 것을, 그네들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연인 심청, 166)

  

 

 

  작금의 한국 사회는 참으로 역동적이며 급진적인 사회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에서는 경영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학문이 각광받고 있으며 인문학 전공자들은 취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공부를 무엇 때문에 지속하느냐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회기에 더욱 문학과 예술을 대한 갈망 또한 기저에 잔존하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을 멘토로 초청해 좋은 강연을 듣기 원하고 멘토들이 추천하는 고전을 찾아 읽는다. 이는 우리들의 내면에 잠재된, ‘보편적 정서구조와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 여러 고전 중에서도 <심청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계 소설인 <흥부전>, <춘향전>과 함께 여러 번 접한 작품이고 적지 않은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방민호 작가의 소설 연인 심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이를 현대소설로 변용한 작품이다. 즉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근본에 두고는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변형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는 등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실 독자들에게 기존의 <심청전>에서 심청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해 인당수에 기꺼이 몸을 던진 효녀로 각인되어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의식 또한 심청이의 희생을 통해 유교적 윤리의식인 효()를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효녀 심청의 모습은 분명 도덕적으로 칭송할 만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에게 있어 죽음을 통해 효를 다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혹은 극단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거리감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조차 심청이는 과연 정말 효녀인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은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소설 연인 심청의 주인공 심청은 이와 다르다. 아버지를 위한 효성 때문에 무작정 인당수에 뛰어드는 효녀 심청과는 달리, 연인 심청의 심청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못지않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귀덕오라버니와 윤상오라버니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크다. 윤상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오랜 고민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 심학규를 위해 인당수에 뛰어든 것 또한 일방적인 효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에서 욕망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늘 쾌락을 추구하며 군자의 체면을 깎는 모습을 보이는 부친에 대해 원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는 것으로 삶의 마지막 소명을 이루자고 다짐한다.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삶의 과정에서 애증의 심정으로 부친을 원망하기도 하고, 윤상 오라버니와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는 심청의 모습은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독자는 연인 심청의 심청에게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

  부친 심학규 또한 원전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심학규가 장님이 된 사연을 추가하며 심학규가 공맹의 도리를 익히던 선비의 자세에서 이탈하여 좌절하고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게 된 계기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여 인물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든 후에도 딸의 죽음에 대해 반성하기보다 기생 애랑이와 어울리고 뺑덕어멈에게 속으며 재물을 잃고 성병을 얻는 등 나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며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나 그러한 심학규의 나약하고 이중적인 모습은 독자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이중적 자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심청, 심학규 모두 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내면 안에 두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작품 후반부로 접어들면 심청이와 심학규가 본디 천계에서 유리선녀와 유형선관으로서 사랑을 나누었으나 옥황상제의 탕약을 빼돌린 죄로 적강하여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겪으며 부녀(父女)로서 살아간다는 적강 모티프를 삽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환상성을 배가 시킬 뿐 아니라 전생에서의 사랑이 이승에서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청이 죄를 모두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구원받을 수 없어 용왕께 다시 이승으로 올라가기를 간청하는 장면에서 심청의 사랑이 더욱 극대화된다. 또한 아버지를 먼저 구할 것이냐,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구할 것이냐는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단 한 번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먼저 살려 기쁨과 겸허 속에서 삶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에서도 심청의 사랑은 극대화 된다.

  한편 연꽃을 발견하고 궁지기가 되어 심청과 재회했으나 심청을 지키고자 정희빈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윤상의 사랑 또한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부각되며 큰 여운을 남긴다.

  심청은 전생에서 유형 선관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온 선관의 연인이었음과 동시에 윤상 오라버니에게 사랑받는 윤상의 연인이었다. 물론 심청이 개인의 행복만을 바랐다면, 자신의 사랑만을 추구했다면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살리고 아버지를 뒤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심청은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부친에게 희망과 기쁨이 있는 삶을 선물할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심청이가 소설의 끝 무렵까지 아버지(유형 선관)에 대한 사랑과 윤상 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가운데 갈등을 겪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어느 한 쪽의 가치를 취하여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해야 하는 험난한 선택을 경험하게 된다. 한 쪽을 살리면 한 쪽은 죽어야 하는 매정한 현실 가운데, 심청이의 선택은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 순수한 사랑이 진정한 가치임을 시사한다. 심청이의 이러한 사랑은 애랑이나 뺑덕 어멈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소설 연인 심청의 심청이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랑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본의 논리 하에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지 못하고 수단으로 대하며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 곁에 함께 해 주기를 원한다. 고통과 좌절에서 혼자 벗어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의 모습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소망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야 말로 현대인의 옆에 자리한 진정한 연인이 아닐까.

by papyros 2015. 6. 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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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조운선 침몰사건-을 읽고

 

겸애(兼愛)! 서로 사랑하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서로 미워하면 천하가 어지러운 법이지.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 할 때, 상대가 빈자인가 부자인가, 양반인가 천인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중략)

그렇네. 하지만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네. 뺨에 닿는 이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하늘의 구름은 또 어디서 왔고? 공맹만이 오직 진리를 말한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게.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시저에 저마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몇 개의 단어나 몇 개의 문장 혹은 몇 권의 서책으로 정리했다네. 선입견 없이 두루 깨달음들을 살펴야 해. 공관병수(公觀倂受), 즉 공평한 눈으로 여러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네. 묵자도 무작정 배척부터 하지 말고 읽어 보도록 하게. 내게 도움을 준 문장이 제법 많았다네. 자네에게도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불러일으킬 걸세. 나는 지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다하고 있음도 알아주었으면 하네.” (1353-355)

 

청전과 화광. 그들과 8년 만에 조우를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중학시절이다. 중학 시절 처음 백탑 서생들과 만난 후, 고등학생 시절 열하광인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것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물론 목격자들의 출간소식을 들은 후, 화광과 청전을 다시 맞이할 준비에 설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것이, 작년 봄의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목격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조우는 참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픈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조운선이 침몰한 때문에 청전이 급하게 밀양으로 민심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얽히고 얽힌 일련의 사건들 소운 조택수의 사망, 혀가 잘린 채 발견된 악공 고후, 차돌이의 죽음과 그를 밝히기 위해 밀양에서 한양까지 먼 길을 달려와 신문고를 친 어미 선영 , 향교의 밤쇠, 그리고 사건을 파헤치던 과정에서 살해당한 두명의 참상도사 이순구와 정수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죽음 뒤에는 마치 관행처럼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위로는 영의정부터 아래로 목수 선풍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책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작금의 시대 현실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경쟁으로 인한 비리와 부정부패. 특히 차돌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끓는 심정을 가지고 상경하여 어렵게 신문고를 치는 선영의 모습에서 근 1년이 다 되도록 아니 평생 동안 아픔을 짊어져야만 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그 눈물이 떠올라 진실로 울컥했다. 저자인 김탁환 선생님께서도 사고 후 근 한 달 동안이나 작품을 쓰지 못하다 시작한 소설이라 하시니 아마 집필기간 내내 이런 심정을 지니셨으리라.

목격자들을 읽으며 느낀 감정과 생각, 지식들을 모두 글로 정리하는 데 한계가 있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 하나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다. 아마 유미주의- 즉 철저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금동 김동인이었다면 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겠으나 나는 문학이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에 적절한 목소리를 낼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약 10 년 주기의 사건들로 인해 각 문학작품이 시대마다 다른 사회를 반영할 수 있었다. 현진건, 최인훈, 박태원, 이상, 김승옥 등의 주요 작가들과 그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문학이 당대 사회와 그 현실을 적절히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목격자들도 추후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당대 사회를 제대로 반영한 한편, 다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관한 것이다.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조운선 침몰은 여러 관원들의 협잡과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하오나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다른 이들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침몰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람보다 배를 중히 여기고 배보다 쌀을 중히 여기는 담당 관원들의 마음가짐 때문이옵니다. 왕실과 조정도 조운선에 실린 세곡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그 세곡을 실어 나른 배와 그 배를 조정하는 조군들 그리고 그 세곡을 나라에 바친 농부들의 피와 땀을 하찮게 여기옵니다. 서강 광흥창에 도착한 세곡만 목적이 되고 나머지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법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조운선은 또다시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고, 관원들은 사사롭게 배를 채울 것이고, 이 땅의 백성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쏟을 것이옵니다. 벼슬아치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세곡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벼슬아치가 할 일은 결국 1년 동안 공들여 농사를 지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백성이 불행하면 아무리 세곡이 많이 걷힌다 해도 그 나라가 어찌 행복하겠사옵니까? 세곡보다는 그 배를 아껴야 하고, 그 배보다는 조군을 챙겨야 하고, 조군보다는 1년 꼬박 농사를 지어 바친 이 나라의 백성을 널리 사랑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박애의 마음만이 지금의 불행과 절망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2363-364.)

 

저자 김탁환 선생님께서 작품을 집필하시면서 던진 세 가지 질문이 있는데, 생명에 대한 문제와 인간존엄의 회복 그리고 고통을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데 대한 문제라고 한다. 담헌의 위 대사야 말로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우위에 두고 자체로 가치 있는 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일진대, ‘’, ‘권력’, ‘명예등 수단이 되어야 할 가치가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즉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비단 담헌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방식을 향유와 사용을 통해 설명한 바 있고 칸트 또한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경계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빈번히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은 인격교육의 부재로 인한 가치질서의 전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학교교육에서는 협력과 상호존중, 배려보다는 경쟁과 학벌주의가 팽배하고 있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경쟁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전반 및 교육의 경쟁적 문화가 협력과 존중의 문화로 바뀌어야 하며 특히 교사들은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가치관의 질서를 바로 세워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여 타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충분히 갖춘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격교육을 우선해야 한다.

76년 후, 다시 우리에게 헬리혜성(빛자루별)이 돌아 올 때 즈음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하기를. 화광과 주혜가, 청전과 옥화가 웃으며 함께 혜성을 바라보며 영원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마지막으로, 목격자들이라는 멋진 작품으로 귀환하시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안겨주시고, 언제나 혜성같이 자리하고 계신 오래도록 존경하는 작가이자 내 마음 속 스승 김탁환 선생님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by papyros 2015. 3. 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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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민음사, P331)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은 언뜻 낭만적으로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선상 여행이 어찌 행복하고 달콤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이고 행복한 결말일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사랑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만은 못한 것 같다.

사실, 플로렌티노 수십년의 세월 동안 페르미나 한 사람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그가 페르미나와의 사랑을 이루기 전에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가 페르미나에 대한 사랑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지켰다고 할지 몰라도 그의 행동으로 인해 페르미나 다사가 느낄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숙고한다면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페르미나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은 단지 플로렌티노의 애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여인들로서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되고 힘든 삶을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서 위로받고 자존감을 얻었을 터인데, 플로렌티노는 여인들을 단지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았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올림피아 술레타와의 관계였는데, 플로렌티노가 그녀의 배에 남긴 ‘This is Mine’이라는 표식 때문에 술래타는 남편으로부터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살해되고 마는 사건이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다른 여인들은 모두 수단으로서만 바라보는 것 두 측면 모두 과연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페르미나 다사 또한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했음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애초에 젊은 시절 한 때 나마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결별을 선언한 이유는, 아버지 로렌소 다사로부터의 압력을 제외한다면 단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순간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자기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와 처음으로 가까이 있었던 자정미사의 군중 틈에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와는 달리 사랑의 감동이 아닌 환멸의 심연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런 망상을 키워왔는지 모르겠다고 놀란 마음으로 자문했다.’ (민음사, P181)

 

물론 아버지가 둘의 사랑에 미치는 압력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결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단지 순간적인 느낌만으로 사랑을 저버린다는 것은 플로렌티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또한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그림자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결국 페르미나를 사랑하지만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며 기다리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한 것도 진실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사로서 상류층의 지위를 누리는 데다인,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플로렌티노 아리사,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 모두 진실하고 건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남녀 주인공 모두의 가치관이나 감정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물론 저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에 담아내고자 했던 부분이 19세기 말 사회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사상에 의한 제도적 억압, 결혼제도에 의해 개인의 욕망이 억압되는 측면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나 사회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제도와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구운몽> 또한 유교 윤리의 억압적 측면과 사대부의 욕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이 단적인 예이다. 페르미나 다사를 둘러싼 그리스도교 사상 하의 결혼제도, 그리고 상류계급의 욕망. 결국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제도적 억압을 심화시키는 것은 사회에 속한 인간들 자신인 것 같다. 플로렌티노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관계를 맺는 여인들을 배려하고 신중했더라면 술래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가 사회적 권력이나 신분에 예속되지 않았더라면 우르비노와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진실로 중요한 것은 종교나 사회 제도로부터의 억압보다도,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아닌가 싶다. 감각적 쾌락이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제도의 억압을 심화시키고 다시 자신을 예속 시킬 뿐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인 것 같다. 작품 안에서 노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온갖 시련과 갈등 속에서도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레라의 위험이 닥치고 있는 혼돈의 시대에서, 지나치게 빨리 전염되는 콜레라 같은 사랑. 이는 결국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없는 사랑은 그 위험이 치명적인 콜레라와 같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똑같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함께 살 수도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민음사, P110)

 

-콜레라 시대의 사랑. 명작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으면서 크게 공감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아직 내 자신이 경험적으로 미숙한 바가 큰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공감되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물론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겠고, 필자의 부족함 탓에 작품에 대해 오독을 했을 여지가 있으니 널리 이해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by papyros 2013. 9. 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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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영화 <그랑블루>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민음사, 104)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해(2012)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풀린 이후 노인과 바다의 번역본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노인과 바다소설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문구였다. 패배와 파멸, 파멸은 육체와 물질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패배는 정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아픔을 겪을지라도 정신적 가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강인함과 인내인데, 산티아고야 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과 인내, 의지, 도전정신을 보여준 인물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생태계의 일부에 속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대자연 안에 속한 생명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노인과 바다가 쓰인 시대에, 많은 어부들이 최신식 기계장치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으려 했다는 것은 대자연 위에 올라서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이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그 어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낚싯대에 미끼를 걸어 고기를 건져올리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서 대자연의 광활한 바다를 가능한 훼손시키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 파도와 청새치, 상어와의 사투에 동등한 생명체로 그 스스로가 직접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 앞에서 한계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모습, 산티아고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의 많은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자연을 끝없이 지배하고 정복하고 개발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많은 비극들 -원전비리 사태로 인한 전력부족,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지구 온난화 등-이 수없이 많은 이 때, 대자연 속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지닌 산티아고의 태도를 타산지석 삼아야 함은 명백한 것 같다.

 

착한 놈들이지. 놈들은 함께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저 돌고래들도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들이지.” (민음사, P49)

 

그러나 이러한 산티아고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 그리고 강인함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는 결국 상어 떼와의 싸움에서 파멸한다. 패배는 하지 않았으나 결국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상어 떼와의 전투를 통해 남은 것은 애써 잡은 청새치의 뼈대뿐이었고 늙은 산티아고의 기력은 소진되어 녹초가 되었고 결국 육체적으로는 파멸한 것이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와 공허(空虛)함만을 남긴 상어와의 전투. 파멸을 부른 원인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 인 채움에 대한 욕심(욕망)’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산티아고가 만선을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청새치라는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이 또한 생존을 위한, 채움의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범인(凡人)들과 산티아고의 차이점을 들자면, 범인(凡人)들은 채움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반면, 산티아고는 채움의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낚시를 하지만 어부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양심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고기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며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고기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대한 미안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으로서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어부라는 직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낚시를 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바탕으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자세, 그리고 비록 채움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고기를 잡고자 갈구하고 있지만 정당하게 맞서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그의 자세가, 비록 파멸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진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산페드로도 저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의 아버지처럼 어부였지. 그러나 노인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모든 걸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읽을 책도 없었고 들을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했고, 또한 죄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네가 그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죽인거야. 너는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또 녀석이 죽은 뒤에도 사랑했지. 만약 네가 그놈을 사랑하고 있다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걸까? (민음사, P106)

 

결국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통해 비움의 자세를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에 채움의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조급함과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를 내맡기는 것.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행복을 쟁취하려 하기보다는 욕망과 행복에 대한 생각을 내려둘 때, 이와 멀어질 때 진정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 단 한 마리의 청새치를 잡으려 했던 산티아고에게도 채움의 욕망은 존재했고 그 욕망 때문에 고기와 산티아고 모두에게 파멸을 불러왔다.

 

차라리 이 일이 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또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고기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던 거야.” (민음사, P111)

노인과 바다가 주는 이러한 메시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최근에 감독 판으로 재개봉한 영화인 <그랑블루>가 있다. 노인과 바다<그랑블루>가 주는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잠수사고로 잃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대자연인 바다와 바다의 소중한 생명체 돌고래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작크와, 작크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엔조. 작크가 잠수를 했던 것이 바다와 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향연이었다면 엔조에게 바다는 생존을 위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기록을 내야만 하는, 넘어서야 할 극복과 갈구의 대상이었다. 물론 엔조 또한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바다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의 차이가 작크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아니었을까. 결국 엔조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야 기록을 위한 잠수가 아닌, 바다 속 깊은 공간에 대한 향연과 사랑을 느끼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작크도 결말부분에서, 바다 밑의 더 깊은 공간과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 향연을 이기지 못하고 잠수를 결심하게 된다. 남겨진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남긴 작크의 태도가 모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작크의 입장에서는 인간으로서 영위하고 누릴 수 있는 채움의 욕망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바다 앞에서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채움의 욕망을 버리고 비움의 자세,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은 행복에 취해 있다가 상어 떼로부터 화를 당한 것이나 작크가 잠수사고로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지만 결국 그로 인해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 향연이 더 깊어지는 것 등이 이 속담에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 결국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채우기 위한 욕심을 가지고 조급하게 달려 나가는 일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채움의 자세보단 비움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누릴 수 있는 현재의 작은 행복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소중한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천천히 나아갈 때 비록 파멸할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라 믿는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그리고 참, 침대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는 내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참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P121)

 

소년은 테라스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뜨겁게 해 주세요. 우유랑 설탕도 듬뿍 넣어 주시고요.” (중략)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이거 드세요.” 소년은 유리자에 커피를 조금 따랐다. (민음사, P124)

 

그는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민음사, P125)

 

산티아고가 사랑해 마지않는 귀여운 소년 마놀린과 같이, 정말 힘겹고 외로울 때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힘을 낼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이의 따뜻함이 있다면, 작크와 엔조같이 서로 간에 위안이면서 동시에 자극이 되는 소중한 이가 있다면,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느낀다면 분명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없을지언정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 믿는다. 인생의 굴곡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소중한 이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행복에, 그 따뜻함에 감사하면서 비움의 자세로, 쉼의 여유를 가질 때 그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더욱 강인한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민음사, 128)

 

by papyros 2013. 8.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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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고

 

갓 구워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빵 냄새, 한 달에 단 하루인 보름을 제외하고 24시간 문을 여는 제과점, 마법으로 빵을 굽는 마법사 점장과 낮에는 사람, 밤에는 파랑새로 변하는 소녀. 베일에 감춘 듯 비밀스러우면서도 포근함을 갖추고 있는 위저드 베이커리. 이 책은, 14년 전의 어린 시절, 해리 포터를 처음 접하던 그 순간처럼 읽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마법을 부리는 동화(童話)였다.

그러나 동면의 양면과도 같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마법으로만 보이는 동화 이면에 개인의 선택과 책임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상기하게 한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위저드 베이커리 P134, P200)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존재한다. 매번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못하기에, 삶의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다시 말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아파하고 후회하는 그 모든 과정들이 이후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장통인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후회와 아픔을 남기는 선택들이 인생의 더 귀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데 대해 심한 자책을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 이후의 책임감에 달려있다. 함께 읽어 내려간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책임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학 실천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상,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P122 실천이성비판)

 

즉 선택이란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인 정언명령에 따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한 것이고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은 마땅히 자유롭게 행동한 자신이 지녀야 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면 타인에게 책임전가(責任轉嫁)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선택이란 것 자체가 자신의 이성에 따른 판단으로 선택한 자율적 행동인데 막상 선택의 결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 그 책임을 자신의 선택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타인에게로 전가하며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시킨다. 즉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서 무작정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너 이 쿠키에 매겨진 별점이랑 사용 후기 안 봤어? 효과 백 프로인 거 안 봤어?”

봤죠. 제품을 띄워주려는 알바생들의 댓글인 줄 알았죠.”

그럼 이것도 묻자. 사용 시 경고 사항 안 봤어?”

모든 마법은 부메랑이 어쩌고 하는 거? 그것도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죠. 그런 걸 진지하게 믿고 사는 애들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위저드 베이커리, P90)

작품 속에서 시나몬 쿠키를 산 교복 입은 여학생이 보이는 사후책임감의 부재가 비단 소설 속 상황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미혼 부모들의 영유아유기, 학교폭력 등의 많은 사회문제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후책임감의 부재는 사전책임감의 부재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후책임감이 과거의 사건과 관련된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이라면 사전책임감은 미래 활동의 기대감이나 사건의 사전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으로 타인에 대한 자발적인 보살핌을 하는 도덕적 책임감이다. 즉 내재화된 도덕적 책임감인 사전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과 타인, 사물에 대한 책세 가지 측면으로서의 책임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공동체 전반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사후책임감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즉 도덕적 책임감을 중심에 둘 때 사후 책임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사람을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며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교복 입은 여학생이 질투하던 친구에 대해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악마의 시나몬 쿠키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부두 인형을 구매하러 온 여자가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체인 월넛 프레첼을 구매하여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여 그 결과가 다시 자신에게로 미치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타인에 대한 배려와 그 관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부재했고 때문에 사람을 결국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라면 마법의 빵을 먹여서라도 제거하고 조종해야 할 수단으로서만 취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 선생 또한 주인공 를 제거해야 할 전부인의 자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 어머니로서 아들에 대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욕구에 반응하고 헌신하여 보살폈다면 , 또한 주인공의 아버지 또한 배 선생과 그녀의 딸 무희를 단지 그 자신의 욕구충족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사전책임감을 가졌더라면 가정이 틀어지는 잘못된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선택의 결과가 틀어지더라도 사후책임감을 지닌 채 질서를 바로잡고 결과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점장에게 받은 타임 리와인더를 통해 주인공 앞에는 시간을 돌려 배 선생을 만나지 않는 선택과 시간을 돌리지 않고 삶을 살아나가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이게 된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혹자들은 Y의 경우는 현실에서의 도피이기 때문에 N의 경우가 더욱 바람직한 결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Y의 경우, N의 경우 두 가지 결말 중 어떤 쪽이 옳은 선택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대한 사전책임감사후책임감이다. Y의 경우를 택하면 주인공이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자유의지를 표현함으로서 배 선생으로부터 학대받는 경험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위저드 베이커리에서의 추억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그의 삶,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희생이 따른다. N의 경우를 택할 경우 아버지와 배 선생의 이혼, 사건으로 인한 전학 등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게 될 수밖에 없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내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한 가지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기회비용. 운명이나 필연적 법칙은 없다고 하지만,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점장과 같이 인생의 귀인과 마주칠 수도 있고 배 선생과 같은 악연을 마주칠 수도 있다. 때문에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 여부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후회를 일삼고 선택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배 선생 같은 악연과의 만남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만 선택의 책임을 돌리는 인물이라면 그야말로 사전책임감과 사후책임감 모두 결여된 채 완벽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환상에 고착되어 자아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위저드 베이커리, P248)

 

중요한 것은 수많은 마주침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자신과 타인 및 이를 둘러싼 환경을 관심 깊게 바라봄으로서 마주침이 아닌 헤아림의 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혹여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되돌아올지라도 소 사후책임감을 견지한 채 묵묵히 그 다음 일을 해내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며, 소중한 이와의 인격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얻은 소중한 기억을 통해,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깨달음을 통해 인격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추는 것이라 본다.

 

낚싯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싯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철학이 필요한 시간, P259)

결국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닐 것인지 또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나는 후자를 선택해 매 순간 선택의 결과를 통해 배우고 노력함으로서 교육자이자 인격자로 성장하고자 한다.

 

 

 

 

 

by papyros 2013. 8. 2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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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을 읽고

 

나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의 예술은 순수한 예술, 자율적 예술, 천재라 불리는 예외적 개인의 예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이 아니다. 단언컨대 그런 예술은 죽었다.

 

(중략)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

 

 책을 대표하는 문구프롤로그에 나온 작가의 선언은 단호하다. 단호한 선언만큼이나 그을린 예술은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저자 심보선의 문학과 사회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식이 담긴 책이었다. 국문학도인 나로서는 사회학 분야의 전문용어나 지식들을 모두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가 책을 통틀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양하고 사람을 위한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의 삶 안에 녹아있는 예술, 즉 두리반에서의 예술이 그리고 한충자 시인과 같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예술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아닐까.

 

 저자의 말대로 문학이 단지 문단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작가의 지식체계를 표출하려는 작품으로 수단으로서만 사용된다면 그러한 상황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싶다. 그 예로 김동인 같은 유미주의(唯美主義)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를 살펴보면 음악가 백성수는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살인, 방화, 시체 간음 등의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끔찍하고도 잔인한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비평가 K씨는 백성수 같은 천재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위대한 예술창작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행동들은 죄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며 주장을 한다. 즉 사람이 예술 아래에서 수단이자 도구로 사용되는 극단적인 예술지상주의를 뜻한다.

 

 어쩌면 예술 자체의 수준과 그 향유 계층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는데 예술지상주의의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삶과 괴리되어 있는 작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단적인 예로 우리 문학사를 살펴보면, 박영희의 사냥개와 같은 카프(KAPF)의 자연발생적 신경향파 문학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인과관계에 따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말이 아닌, 감정적이고 본능에 치우친 작품들로서 비판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카프(KAPF) 내 프롤레타리아 작품에 대한 대중화 논쟁 과정에서도 작품을 프롤레타리아 사상, 즉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정작 일제강점기 하의 노동자 계급의 현실적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카프(KAPF)는 지나치게 경직된 채 볼셰비키화 되고 말았다. 즉 일제 강점기 하의 지나친 억압적 분위기,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노동자층의 상황을 카프(KAPF)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카프(KAPF)도 지식인 그룹으로서,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는 부르주아의 속성을 카프(KAPF)의 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역설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절한 천재들로 불리는 이상과 랭보는 속물적인 근대사회를 부정하며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현실사회에서의 도피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낳았고 그들은 그 씁쓸함을 인정하며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홍기돈, 문학권력 논쟁, 이후, 예옥, 2012, 43쪽 참조)즉 차안의 현실과 민중들을 부정하고 피안(彼岸)의 세계로 도피한 것과 다름없으며 현실세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학이 사회 우위의 입장에서 사회를 지도하며 대중추수적 입장을 취하는 것도, 근대의 속물성을 부정하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모두 지양해야한다면,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현실과 예술의 관계는 무엇이며, 문학의 진정한 윤리성과 정치성이란 어느 곳에 자리할까. 방현석 작가와 비평가 홍기돈 선생님의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방현석 소설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작품으로 그려내기 위해 스스로가 직접 위장취업을 하여 노동현장에 뛰어든 바 있다. 실제로 70~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사회 지식인들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노동현장에 취업하던 현상이 존재했는데 방현석은 작품을 위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직접 노동자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과 고충을 이해하였기에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새벽출정과 같은 소설에서 근로자들의 현실을 묘사해내 공감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양귀자 작가의 원미동 사람들이 소시민들의 삶을 그려낸 작품들로서 오래도록 공감대를 받으며 국어교과서에 70-80년대 사회를 그려낸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결국 현실의 애환에 공감하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방현석 작가의 사례와 같은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홍기돈 선생님께서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반대하고, 희망버스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등 그을린 예술의 저자 심보선 시인과 마찬가지로, 문인으로서 진정으로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지키려 하시며 사회 약자들의 편에 서서 지나치게 억압적이며 이기적인, 비상식적인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시고 비판하시는데 결국 이렇게 부도덕하고 모순적이며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사회일지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이들과 함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할 때 문학이 우리 삶 속에 함께 자리하여 긍정적으로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유일무이한 개별자라든가 파천황의 감각과 미증유의 언술같이 겉으로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새로움만을 좇아 현실의 깊이를 벗어난 허상을 지양해야 하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이며 수단적인 -그것의 관계에서 탈피하고 -의 관계로 인식 한 채, 사회현실의 문제점을 간파하여 문제점을 메울 수 있는 장차 도래할 인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한 스스로 사회현실에 모순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스스로를 성찰하여 이미 도래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 나갈 때 사회현실에 대한 공감과 저항, 성찰이 문학 안에서 이루어져 문학의 윤리성과 정치성이 모두 확보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순을 느끼면서도 작가로서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했던 김수영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 등이 문학의 윤리성과 정치성을 실현한 문인이 아닌가 싶다. 결국 문학이 사회의 현실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깊은 우정을 나눌 때 삶 속에서 문학의 자리가 확보되어 되살아난다. (홍기돈, 문학권력 논쟁, 이후, 예옥, 2012, 16-31쪽 참조)

 

타인과 함께 삶을 나눌 때, 인간은 ’(“너를 돌봐 줄게.”)행동’(기어이 돌아오려 함)을 통해 가까스로자신의 존재를 보다 나은 존재로 갱신하고 고양시킨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내포한다. 텅 빈 우정의 정치는 친구와의 약속을 위선과 허세로 축소시키는 속물화의 강박에 저항하며, 동시에 친구와의 약속을 엄두도 못 내게 하는 동물화의 압력에 저항한다. 또한 텅 빈 우정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그 곁에 머물려 하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 준다. (우정으로서의 예술, P28)

by papyros 2013. 8. 2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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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 변신을 읽고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있기에 …….’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명상 중 문득 떠올린 시의 한 구절이다. 어느 시에서 나온 구절인지, 작가가 누구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떠오른 구절이지만 이 시는 요제프 크네히트가 학창시절 지은 시였고, 요제프 스스로가 경험을 통한 각성에서 남긴 자신에 대한 성찰이자 경고로서의 글귀였다. 결국 학창시절 각성을 통해 남긴 그의 시는 요제프가 속세로 나아가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줌으로서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다시 말하면 그가 지은 시의 문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한 힘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헤세 자신에게는 유리알 유희를 집필한 것 자체가 바로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 해 본다. 누군가 내게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손꼽히는 작가가 누구인가를 물으면 고민하지 않고 헤르만 헤세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 속에 드러난 그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고 묘사에 감동받는 작가인 만큼, 그는 많은 역작들을 남겼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사랑),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등의 작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온 그의 대표작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갈등과 정서를 쉽게 묘사한 작품인 덕분에 공감대를 가지고 많이 읽혀지는 것 같다. 반면 유리알 유희는 분량도 압도적으로 긴 장편소설일 뿐 아니라,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내용까지 함께 담고 있어 작품의 모든 구절을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난해하고,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인지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는 매우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유리알 유희야 말로 헤세의 작품세계, 헤세가 써온 모든 소설들에서 다룬 삶의 고민과 갈등,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리알 유희를 읽어 내려가면서 내 머릿속을 관통했던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카스탈리엔즉 유리알 유희를 행하며 학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성적 활동을 추구하는 정신적 세계, 즉 이성적 세계,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속세즉 현실세계의 대립 문제이다. 사실 유리알 유희란 진실로 어떤 것인지 그 정의(定義)를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 쌓아온 학문이나 예술로서 정해진 형식과 규범이 있고 이 형식 안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이성적이며 사색적 행위의 집합체인 것 같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문이나 음악등이 유리알 유희의 한 종류로 포함되는 것 같다. 또한 정해진 규범 안에서 속세의 범인을 뛰어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 행위에 순종하고 그들 나름의 신앙심을 지니고 순명하기 때문에 유리알 유희가 행해지는 카스탈리엔의 세계는 다시 말해 정신적이며 이성적 세계인 반면, 속세는 물질적 세계로서 분명히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요제프 크네히트와 폴리니오 데시뇨리라는 대립구도로 나타나는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갈등은 헤르만 헤세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나타나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사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지닌 이성과 감성의 대조적인 모습,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가 성장 과정에서 선(정신적, 신앙의 세계)과 악(속세)의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대립 구도는 소설 속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에서도 이어지는 부분인데, 특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나는 상황이야말로 속세의 단면이다.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가 되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게 되자 그를 내쫓으려 하는 모습은 물질을 사람 위에 두어 사람과 사람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도구화, 수단화 시키는 작금(昨今)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문의 전당이요 상아탑으로 불리던 대학(大學)이 근간학문인 인간학문을 경시하는가 하면, 세속의 요구에 맞춰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카스탈리엔의 정신적 가치를 가장 잘 이어가야 할 대학(大學) 스스로가 속세의 물질적 가치에 영합되고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 평가지수마저 교육의 내용적 질 보다는 취업률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두 세계간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양해야 할 상황인데, 그렇다면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믿고 속세의 가치는 모두 배제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 또한 극단적인 불균형에 속한다. 실례로 교회가 지배했던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중세에는 기독교의 가치관, 정신적 세계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현실의 다른 것들을 부정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종교의 폐단이 드러난 바 있다. 물론 중세시대 교회의 발달이 학교교육에 영향을 주고 서적을 남기는 등 중세의 암흑기가 폐단만을 남긴 것은 아니라고 하나, 기독교의 가르침만을 절대화하여 나타난 폐단은 정신적 세계의 극단화가 가져온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즉 정신적 세계와 속세 중 어느 한 쪽을 절대화 하는 것은 지양해야하며, 결국 두 세계간의 조화가 필요하다. 불교의 차안과 피안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차안이 지금 여기, 즉 현실의 세계라면 피안은 열반과 해탈의 경지를 이룬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세계인데, 만약 해탈한 자가 모두 차안의 세상에 남아있고 피안으로 떠나버린다면 차안, 즉 속세에 현재해 있는 많은 문제들로 인해 세계의 횡포에 억압당하는 서민, 민중들은 지그들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끊을 길이 없게 된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도 이런 문제 때문에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그의 시 속에 표현하였고, 결국 만해는 차안의 세계에 남아 민중들과 함께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부, 세리 등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고 결국 마지막까지 속세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도 만해가 차안의 세계에 남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진정한 조화는 속세의 범인(凡人)에 비해 먼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체득한 이들이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과 지혜를 세상과 나누고 전할 때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앞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와 만해와 마찬가지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정신적 세계와 속세의 대립 및 갈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정신적 세계인 카스탈리엔에서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그 세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물론 카스탈리엔은 속세에 속한 또 하나의 세계이며, 어느 한 쪽의 논리가 완벽히 옹호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고 머지않아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해 그 후유증을 방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의 역할이라 보았고 교육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느껴 유희의 명인 자리를 포기한 채 속세로 나아가 정신적 가치를 속세에도 가르쳐 두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헤세의 다른 소설인 데미안에서는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던 에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이성적인 존재를 만남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받아 두 세계를 조화시켜서 자신을 성장시켜 알을 깨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사랑)에서도 감성이 풍부했던 골드문트가 이성적 존재인 나르치스를 만나 우정을 나누며 교류하며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 또한 두 세계 간 조화를 이룬 부분이다. 즉 대립되는 두 세계를 조화시키는 데는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인 지식인들이 세상에 나아가 진심을 다하고 그가 배운 지식과 지혜를 나누고 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지식인들이 속세에 영합하여 그들이 대학(大學)이라는 곳에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여 얻은 지식을 그들 스스로만 쥐고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정신적 가치 대신 물질적 가치를 더욱 추구하게 되어 불균형과 양극화가 벌어지고 마침내는 그들이 얻은 정신적 가치마저 경시되고 대학(大學)의 기능마저 무너진 것이라 본다. 진정으로 사회의 갈등과 모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타인과 나누려는 지식인이자 지도자가 간절히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 본인이 세계대전에 반대하며 반전(反戰)문학운동에 참가한 지식인으로서 속세의 문제를 두 세계 간의 조화로서 풀어나가려 노력한 지식인이었는데, 지식인자 작가로서 정신적 가치를 전하고자 했던 헤르만 헤세의 가치관이 그의 소설들 속에 담길 수 있었던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주제는 소명(사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요제프가 속세로 나아가기 전, 명인의 자리를 포기하기 위해 알렉산더와 나누는 대화에서 소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이 보이는데, 카스탈리엔에서는 직업의 사명을 진실로 천직이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 반면, 결국 요제프는 자신이 더욱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쪽은 유희의 명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교육자의 길이라 여겨 이를 천직으로 여기며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통한 자기 선택을 통해 속세에서 교육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명인자리를 포기하는데, 과연 자유의지와 소명은 대립적이며 모순적인 것일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소명(召命)이란 즉 어떠한 직업에 끌림 의식을 느끼고 천직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끌림 의식, 천직으로 느낀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직업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열망 안에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에서는 천직과 자유의지를 대립시키고 있는 것 같이 보여 혼돈과 의구심이 들었는데,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생각해 본 결과, 이는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여 질 수 있는 부분이다. 카스탈리엔에 속한 이들처럼, 운명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천직이란 한 개인의 능력에 가장 맞는 직분으로서 태초부터 주어진 운명이라 한다면 자유의지는 개인의 선택이 가능한 것으로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읽혀질 수 있지만, 이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 존재하기는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즉 중요한 것은 본인이 소명의식을 지님으로서 자신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그 길에 사명감과 확신을 갖는 것이다. 때문에 천직이라는 의미 안에 개인의 선택, 즉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비록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천직과 자신이 생각하는 천직이 다를 수도 있고 그 와중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가며 진정으로 자신이 소명의식을 느끼고 천직으로 확신하는 길에 나아가는 데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반추하고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만드는 것인 것 같다. 즉 소명이라는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때문에 소명과 자유의지는 합치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르만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열심한 신앙인이자 뛰어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사제의 길을 걸어갈 환경과 능력이 충분했으나 수도원의 분위기에 혼란을 느끼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겨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즉 작가인 헤세 본인도 자신의 천직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 할 수 있으며, 요제프 크네히트가 작가의 분신이며 자신의 천직을 찾은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경우인 것 같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의 경우 천직과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결과적으로 좌절하고 실패한 경우로서 한 때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억압되고 강제된 삶의 부정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체험한 초기 그의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결국 헤르만 헤세는 한스 기벤라트의 결과로 나아가 평생 좌절하며 살아가지 않고,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요제프 크네히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자신이 삶과 직분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일을 해 나가면서 주변의 타인에게 긍정적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천직으로서 의미가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주제는 교육에 대한 것인데, 교육자로서 보여야 할 모범과 자질, 그리고 학생들과 맺어야 할 인격적 관계 및 교육이 학생들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 나 자신의 소명의식이 교육자에 닿아 있기도 했고 실제로 존경하는 교수님의 교직 수업에서 배우고 느낀 바를 소설 유리알 유희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기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갔다. 책의 문구들 곳곳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교육자와 학생이 수평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하에서 소통할 때 상호 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상대를 통해 스스로의 배움을 넓혀갈 수 있다. 즉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의 교육을 강조한 Martin Buber의 실존주의 교육철학이 교육자와 학생 사이의 관계맺음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인격적 관계를 통한 상호 존중이 전제되어 있을 때 진심으로 교감하고 가치관을 나눔으로서 교육자와 학생 모두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든다.

 

처음엔 후배들에게서 시작하여 나중엔 차츰 선배들에게도 미치게 된 자신의 인격이 지닌 영향력을 이 젊은이가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자 그는 동료들과 후배들이 보내오는 적극적인 우정이요,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대할 때 보여 준 호의적인 태도였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01)

 

두 사람을 잇는 그 무엇이,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석 같은 것이 매우 강력하게 두 사람에게 작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퍼셀의 소나타로 시작된 그날 저녁 이후 실제로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무엇이 존재하게 되었다. 야코부스 신부는 훈련이 잘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형성 과정에 있는 젊은 지성과 교제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 만족이 그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크네히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역사가와의 교제와 그 교제를 통해 시작된 배움은 각성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가 되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것을 그렇게 각성해 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크네히트는 신부를 통해 역사를 배웠다. 역사를 연구하고, 그것을 집필하는 법칙과 모순을 알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역사적 현실로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민음사 유리알유희1, P219)

 

크네히트가 저 유명한 야코부스 신부와 종종 만나는 허물없는 사이일 뿐 아니라 마침내 우정 어린 교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이 교제는 여러 가지 결실을 가져왔다. 그 이야기를 미리 앞거러서 하나 하자면, 우선 크네히트가 무엇보다 반가워할 결실에 대해 말해야 하리라. 그 열매는 아주 서서히 익어 갔다.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의 씨를 비옥한 저지대에 가져다 뿌렸을 때처럼 그것은 서두르지 않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조심스레 자랐다.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에 내맡겨진 이 씨는 그 조상이 가지고 자란 조심스러움과 의심스러운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었다. 성장하는 속도가 느린 것은 유전적인 성질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믿지 못하고 일단 이리저리 다루어 보는 습관이 있는 그 현명한 노인은 반대 방향의 동료인 젊은 친구가 카스탈리엔의 정신이라며 그에게 가져온 모든 것을 망설여 가며 그저 아주 조금씩만 자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놔두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차츰차츰 싹을 틔워나갔다. 크네히트가 수도원 시절에 체험한 가장 좋고 귀중한 일은 경험 풍부한 이 노인이 그렇게 가까스로나마 신뢰해 주며 가슴을 열어 준 일이었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25)

 

그는 야코부스 신부의 가르침을 받고 그 신부를 사귀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일은 부차적인 일로 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제자가 되는 것, 배우고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육성하는 것이 그 무렵 그가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제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교사로서 취임 초기의 가장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즉 권위를 획득하고 개인과 직무를 합치시키기 위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그 일을 해내면서 그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나 빛을 발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 즉 가르치는 기쁨이었다. 다른 하나는 연구생이나 학생의 인격과의 싸움으로, 권위와 지도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일, 즉 교육하는 기쁨이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별개로 나누는 법이 없었다. 명인의 자리에 있는 동안 그는 최고의 유리알 유희자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례와 모범을 통해, 경고를 통해, 강인한 인내를 통해, 또 그가 지닌 본질적인 힘을 통해 제자들 대부분을 각자의 능력에 맞춰 최상의 개성적인 인격으로 뻗어나가게 해 주었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313)

 

교육자와 학생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육자와 학생 사이의 신뢰가 필요한 것인데, 학생의 교육자에 대한 신뢰는 교육자 스스로가 자격과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학생 앞에서 모범을 보일 때 가능 해 진다. 즉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사전 책임감, 즉 도덕적 책임감과 관심을 지니고 학생의 필요에 귀기울여주며 응답함으로서, 또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며 스스로 앞에 나서 학생의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될 때 학생은 교육자의 태도와 삶 자체를 닮기 노력하고 modeling하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교육자가 도덕적 책임감을 통해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자세로 모범을 보일 때 학생들에 대한 긍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은 본질적으로 교사나 교육자의 재능에 속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위험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민음사 유리알유희1, P200)

 

즉 도덕적 책임감을 지니고 교육자가 스스로 모범을 보일 때 상호 신뢰와 존중, 인격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며 이후에 발휘되는 교육의 파급효과, 긍정적 영향력은 그 힘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학생 안에 교육자의 삶이 내재하여 교육자의 가치가 전수되고 학생이 이를 실천하여 그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해줄 때, 바로 학생의 삶 안에 교육자 현신(現身)하며 영속(永續)되는 것이다.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미성숙자에게 전수하거나 전달함으로서 학생의 잠재적 가능성을 끄집어내어 발전시키는 동시에 전인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과정이라는 교육의 정의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며, 피터스(R.Peters)가 주장한 대로, 교육이란 교육받은 사람이 장차 거기에 헌신할 가치 있는 것을 전수해 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설의 마지막에 요제프 크네히트는 비록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의 제자 티토가 요제프 크네히트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여 요제프가 티토의 삶 안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즉 전수하고 교육할 만한 가치는 불변한다는 항존주의 교육철학의 진정한 의의와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소년 자신은 열광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춤은 그가 이미 알고 있거나 언젠가 한번 추어 본 적 있거나 시도해 본 일이 있는 춤이 아니었다. 태양과 아침을 경배하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의식도 아니었다. 자신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의 춤과 마술에 홀린 듯한 광란에는 산속의 공기나 태양이나 아침이나 자유에 대한 감정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거기엔 자기의 젊은 생명의 변화와 단계가 다정하면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명인이라는 인물 속에 나타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음사 유리알유희2, P148)

 

이 빛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이제껏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민음사 유리알유희2, 152)

 

 즉, 소설 유리알 유희안에는 Martin Buber-의 만남을 통한 인격적 관계, 즉 실존주의 교육철학과 항존주의 교육철학 및 교육자로서 보여야 할 모범 등을 요제프 크네히트의 소명과 야코부스 신부와의 관계 등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5가지 교육원리-사랑의 원리, 가능성의 원리, 본보기(modeling)의 원리, 각성(깨달음)의 원리, 인격적인 만남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구본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론에 근거한 전인 교육과정 연구, 가톨릭大學校 大學院 석사학위논문, 1999, 31-39 참조)

 내용이 매우 길어졌는데, 그만큼 소설 유리알 유희는 가장 존경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글일 뿐 아니라, 교육자의 길에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는 내게 교육학의 내용과 교육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수 있게 했고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녀야 할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책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 소설을 읽으며 종합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교육자이자 인격자의 모습을 정리 할 수 있었는데, 교육관으로는 실존주의 교육철학과 항존주의 교육철학을 지니고, 스스로 도덕적인 책임감으로 모범을 보이고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가치 있는 것을 전하고 학생의 삶에 영향을 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 즉 단지 내 앎을 자신의 명예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허비하지 않고 학생들, 그리고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는 데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나의 소명인 교육자의 꿈을 이루는 데 많은 현실적 제약과 좌절이 있지만, 직선이 아닌 곡선의 길을 그리고 있고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이루느냐가 아닌 자신이 소명을 느끼고 선택한 일을 진정한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지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즉 이 책은 내가 지니고 있는 이상적 교육자이자 인간상에 대한 종합일 뿐 아니라, 약간 늦어진 것으로 인해 조급함을 느끼고 너무 쉼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한 경종(警鐘)인 것 같다. 때문에 속세의 삶에 쫓기지 않고, 두 세계의 조화에 기여하는 진정한 교육자로 성장하기 위해, 유리알 유희에 대한 감상을 종합하면서 나는 다음 문구를 명심하고 싶다.

 

우리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고, 또 그때그때의 과제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명상이라는 힘의 원천에, 정신과 영혼의 끝없이 새로워지는 화해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밖에도 그런 예를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어떤 과제에 몰두하게 되어 흥분하고 격앙되고 피로해지고 압박받는 정도가 심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이 원천을 소흘히 하기 쉬운 법이라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떤 정신적인 일에 깊게 빠져들게 되면 육신과 그것을 돌보는 일에 소흘해지기 쉬운 것과도 같지. 세계 역사에 진실로 위대했던 인물들은 모두 명상할 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명상을 통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힘이 있었다 해도 결국은 모두 실패하고 패배했지. 과제나 야망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눈앞의 현실적인 것에서 벗어나 늘 그것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자네도 이미 알겠지. 그런 건 처음 연습할 때 배우는 것이니까. 피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것이 얼마나 엄연한 사실인가 하는 것은 한번 길을 잃어 보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되지(민음사 유리알유희, P136-137)

 

 

 

 

 

by papyros 2013. 8. 13. 18:40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배케트의 연극을 부조리 연극이라고 최초로 이름붙인 마틴 에슬린은 베케트를 <유쾌한 허무주의자>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에슬린이 베케트에게 붙여 준 명칭 때문일까, 정말로 이 희곡을 다 읽고 난 뒤 지극한 허망함을 느꼈다. 문학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서사구조가 없었고, 흥미로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고도라는 인물이 후반부쯤에는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의 끈을 아주 놓아버리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고도는 등장하지 않았고,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바보 같은 대화만이 남았고 이건 무슨 우스운 개그인가, 라는 생각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몇몇 표현들이 쉽지 않았고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찾으려,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특별한 것이 주어지지 않은 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난해함과 많은 의문점들을 지닌 채 책을 덮었다.

그러나 부조리극’, ‘허무주의’, 그리고 작품이 쓰인 당시의 시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한 데가 있다는 뜻을 지닌 의뭉스럽다는 단어에 걸맞은 작품인 듯하다.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이어가는 한 편의 희곡은 그야말로 희극적인 콩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인간과 사회현실의 단면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1952년에 출간된 베케트의 이 희곡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망함과 좌절만이 남은 가운데 피폐해진 사회의 모습, 사유하기를 거부한 당대 사회의 모습, 즉 부조리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출간된 이 희곡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의 희극적 행동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굳이 오래 전의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아도, 지난 해 대선 때를 회고해 보자. 비록 지지하는 후보자는 다르지만, 모두가 이번에 뽑히는 제 18대 대통령 때는 사회가 조금이나마 바람직한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출범한지 100여일이 지난 지금도 이전 정부가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작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가 없고 여전히 신문기사의 정치, 사회면에는 씁쓸한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다. 강도, 살인, 위선, 너무나도 비윤리적이고 부조리한 행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그 중 남양유업의 갑-을관계와 윤창중 사건이 확대되어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조명되었을 뿐이지 이미 현대사회의 부조리는 오래 전부터 비일비재해왔다. 즉 많은 이들이 한마음으로 기다리고 추구하는 바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과 정의로운 세계질서 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적 관계를 이루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사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언제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되고 진정한 지도자가 출현하여 바람직한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고도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많은 이들의 열망이고 소망이며 이육사의 시 광야청포도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요, ‘청포를 입고 찾아 올 손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는 이러한 소망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서민들 그 자체이며, 거만한 노인과 늙은 짐꾼의 관계로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형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관계, 불평등한 사회구조로서 사회 전반의 억압, 틀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정리해 보자면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포조와 럭키의 관계) 안에서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되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서민들이 존재하지만(에스트라공과 볼라디미르) 아직 서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이상세계, 구원(고도)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비단 현대 사회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억압적 사회 구조 하에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변화에 대한 열망, 혹은 지도자의 출현에 대한 소망을 가진 민중들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단적인 예로 고려시대 최충의 노비가 주도했던 만적의 난, 조선후기 동학농민운동으로부터 시작해 지금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준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명동성당에 모여 항거했던 6.10 민주항쟁 까지....... 만적의 난의 경우는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예외로 치더라도, 동학농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경우,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볼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이나 현 시대 우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인데 , 우리는 볼라디미르, 에스트라공과 함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사회 현실에 체념하고 안주한다. ‘고도가 오면 살 수 있지만 오지 않으면 그저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거나 혹은 극단적인 방법(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볼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볼라디미르 내일 목이나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볼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민음사, P158)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달랐다. ‘고도를 기다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비판의식과 능동적 실천을 조화시켜 직접 고도를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습과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 사회의 부도덕이나 불평등에 부조리함과 모순을 느끼고도 누군가 나서겠지, 하는 생각에 자신은 현실에 안주해버리곤 한다. 심지어 자살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 현실에 치여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비단 고도를 사회 개선에 대한 열망, 소망이라는 점과 연관 짓지 않아도 개인의 상황이나 현실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데, 이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실현하지 못한 자신만의 목표가 있고 꿈이 있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혀 꿈에 다가가기도 전에, 도전 해 보기도 전에 쉽게 포기해 버리곤 한다.

진정으로 고도를 만나고 싶다면,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만 말고 이제는 고도를 찾아나서 거나 그 자신이 고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혁명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바로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고 조화시키려는 노력, 자신의 의견만이 절대적 진리이며 가치라고 오판을 내려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 대표적 예랴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로부터 발생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비판함으로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한 비판적, 대항적 혁명이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자본주의의 장점을 모두 부정했고 자신들과 다른 가치관에 대해서는 모두 배격하고 축출한 바 있다. 그러한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오판이 사회주의 혁명의 저항정신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이다.

즉 우선적으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지녀야 하는데, 단지 사회 현실에 대한 감정적 불만이 아닌 이성적이며 합리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단 한 번 있었던 럭키의 대사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되었던 점이 이를 시사한다.

 

럭키 (단조로운 어조로) 프왕송과 와트만의 최근의 공동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 인격신은 공간의 시간 밖에 존재 하고 있어 하늘의 무감각과 무공포와 침묵 위 높은 곳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사랑하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터이고 하늘의 미랑다의 본을 떠서 고뇌와 불 속을 헤매는 자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겪는데 그 까닭은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이하 생략)

(민음사, P69-72)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합리적 비판의식이 마련된 후에 능동적인 실천이 가능한데, 능동적 실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가치 질서의 체계 안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구체적이며 바람직한 가치관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망은 정신적 행복이 아닌 육적 쾌락으로 사람들을 빠지게 하고 쾌락에서의 같은 좌절은 폭력과 범죄를 낳는다. 즉 가치아노미 현상이 발생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인데, 즉 가치관의 분석과 점검을 통해 가치 질서를 재정립, 재구조화 하여 다양한 가치관을 포용하고 통합해 나아가며 가치관의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고도를 직접 찾아나감으로서 혹은 자신이 고도를 직접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하고 삶의 방향을 주도적으로 전환, 조정 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며 반항적 자아로서 능동적 실천과 참여가 가능하며, 프로라이프의 생명대행진 등 낙태를 반대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는 것이 생명경시풍조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 실천적 참여로서의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합리적인 비판의식과 능동적 실천을 통해 고도를 찾아나서는 개인과 사회를 돕기 위해서 교육의 의미가 중요해지며, 도덕적이고 윤리적 책임감을 지닌 교육자 혹은 지도자가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 지식과 지혜, 그리고 영감을 불어넣어 줄 때 개인과 사회 전체의 능동적인 변화가 가능해 진다고 본다.

 

 

 

by papyros 2013. 6. 2.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