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 북클럽 도서로 선정된 이 책에 특히 관심을 된 것은 어쩌면 제목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본래 프랑스어 원제는 『Derrière la grille』로, 곧 ‘철책 뒤에서’ 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아이’라는 번안이 많은 한국 독자들이 책에 더욱 주목한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른 문화권에 비해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더욱 심한 사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장 나부터도 어느정도 완벽주의적 성향과 이로인한 수행지연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부모의 양육태도로 인한 심리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려니 생 각하면서 책에 관심을 가졌고,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도서로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하여 함께 상담심리를 함께 전공한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가장 놀랍고도 소름끼쳤던 지점은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수필)이라는 점이다. 허구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부친에 대한 내용은 차마 믿기 힘든 부분이었으며 저자의 묘사나 문체가 유려하여 마치 문학작품을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몰입감이 느껴졌고 서사의 전개와 결말이 너무도 궁금해 책을 단숨에 읽어나갔다. 저자가 거대한 철책 뒤 감옥에서 그 부친만의 기준으로 설정된 규율과 규칙을 요구받으면서도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 버텨내 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사랑’ 과 ‘배움(책)에 대한 열망’ 덕이 아니었나 싶다. 심리학에서 ‘애착 이론’을 강조하는 것만 보더라도 사람은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가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저자와 같이 유년기의 결정적 시기에 부모로부터 적절한 지지와 격려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심리 내적인 문제들이 우려될 법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랑을 아르튀르나 블랑숑과 같은 다른 생명을 지닌 종(동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아이였고 또한 그녀와 함께하는 동물들로부터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아이였다. 사실 인간이야말로 타 종에 대해 가장 이기적인 존재일 법한데, 모드 쥘리앵이 다른 생명들로부터 사랑과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녀가 지닌 깊은 강점이었다고 여긴다.
동물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중에도 나에게는 그런 커다란 행복의 샘이 있다. 놀라운 행운이다. 아르튀르를 보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내 가슴은 애정과 즐거움에 부풀어오른다. 혹은 아르튀르 곁을 지나간다는, 재빠르게 지나가며 행복에 젖은 아르튀르의 눈길을 받는다는 새악만으로도 그렇다. 밤마다 나는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버티던 아르튀르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떠올린다. 나는 아르튀르를 사랑하고, 린다를 사랑한다. 린다는 아르튀르를 사랑하고, 아르튀르는 린다를 사랑한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강하고 아름답다. 물론 힘겹기는 하다. 그래도 함께하는 사랑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다.
- 모드 쥘리앵, 「아르튀르」,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83-84쪽.
나는 정원의 향기, 작은 관목, 꽃 핀 나무들과 황수선화 향기, 무엇보다 라일락 향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마당에 나가는 것도 싫다. 이따금 피투가 보인다. 이제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동물인 피투는 베란다 앞 계단이나 린다의 집 안에서 나를 기다린다. 내가 나오는지 목을 빼고 살핀다. 비가 많이 오는 서늘한 여름이다. 밖에는 차가운 물기둥이 쏟아지고, 내 마음속에는 눈물의 광풍이 몰아친다. 다른 집에서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고 춥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준다는 얘기를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혼자다.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외톨이다. 혼자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혼자만 떨어져 있는 것은 지옥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다.
- 모드 쥘리앵, 「블랑숑」,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18쪽.
이제는 기구를 타고 떠나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아르튀르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르튀르 없이 더는 사는 게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슬로모션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린다까지도, 피투까지도 그렇다. 나는 말을 듣고 있는 척, 어머니의 수업을 듣고 있는 척, 숙제를 하는 척,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척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척, 사는 척한다. 하지만 나는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 나는 없다. 나는 아무데도 없다. 아버지가 조랑말을 새로 사자고 한다. 조건은 내가 삼회전 공중제비를 사흘 연달아 성공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서는 숫자 3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삼회전 공중제비를 하고 싶지 않다. 새 조랑말도 갖고 싶지 않다. 이어지는 날들은 매일매일이 똑같다. 내 삶 전체가 길고 메마른, 끝이 보이지 않는, 자비 없는, 단 하나의 똑같은 날이다. 나는 쟁기에 묶인 소처럼 일과표에 매여 있다. 온 힘을 다해 쟁기를 끈다. 왜 끌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질문도 못한다. 숨도 거의 쉬지 못한다.
- 모드 쥘리앵, 「블랑숑」,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19쪽.
며칠 전에 알 두 개가 부화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깃털도 없는 작은 몸에 납작한 작은 부리와 쪼그라든 분홍색 다리를 보며 나는 속상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둥지에 혼자 남아 있으니 얼마나 슬플까. 하지만 하루하루 갈수록 그 작은 몸이 흰색 솜털로 덮인다. 나는 블랑숑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블랑숑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날게 될 텐데 …… 어머니는 그때쯤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한다. 나는 용기를 끌어모아 아버지가 식탁에서 일어설 때 직접 말한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 ‘아빠’라는 호칭이 너무 이상하다. 아버지의 날 카드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다. 아버지도 놀랐는지 나를 뚫어져랴 쳐다본다. “아빠, 블랑숑을 오랫동안 보살펴도 돼요?”
- 모드 쥘리앵, 「블랑숑」,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22쪽.
‘아빠’라는 호칭이 마법을 부린 걸까? 아니면, 말은 안 했어도 아버지는 내가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걸까? 아버지가 대답한다. “그렇게 해라.” 다행이다. 가슴속은 여전히 기쁨 없이 텅 비어 있지만, 나는 하얀 솜뭉치 같은 블랑숑을 보살피기로 한다. 비둘기장을 고치는 정도의 사소한 일에는 따로 조수가 필요없다 해도, 하루 두 번씩 알베르와 레미에게 맥주를 가져다줘야 할 테니 그때 블랑숑을 보살필 수 있다. 블랑숑은 멋진 흰 비둘기로 자라난다. 유모를 잊지 않는 다정한 비둘기다. 내가 정원에 나가면 블랑숑은 내 손으로 날아와서 인사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린다를 풀어놓고 블랑숑과 인사를 시킨다. 린다와 피투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린다가 블랑숑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다. 다행이다.
- 모드 쥘리앵, 「블랑숑」,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23쪽.
한편 그녀가 그녀의 부친에 대해 아주 약간이나마 기대를 하는 대목에서 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했다. 자녀들이 당연히 신뢰로운 보호자이자 든든한 지렛대로 여기고 믿고 따를 수 있는, 또한 투정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도 받아주시는 부모님이란 존재가 바로 부모님일 지인데 그러한 존재가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며 아주 사소한 호의에도 그저 ‘감사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러니라니.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난 정인이 사건과도 교차하는 지점이 있어 작품을 완독한 후에도 더욱 많은 안타까움이 들었다. 온전히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세상의 주인이라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유년기’의 결정적 시기에 ‘규율에 대한 복종’과 ‘두려움’을 먼저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은 실로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않는가. ‘결정적 시기’에 형성된 감정과 관계방식들이 평생의 삶을 좌우한다는 것을 기억해본다면 이는 삶 전체에 대한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 할 모델을, 본고리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밤에 차가운 수돗물을 아주 가늘게 흘러나오도록 틀어놓고 몰래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그레고르를 떠나 당테스가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카틀랭 공장의 노동자들이 단호한 걸음으로 일터로 향하고 어린애들이 거리에서 웃고 떠들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당테스에게 다가간다.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다. 언제나 해결책이 있다. 기필코 그것을 찾아내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함을 치며 화낼 때면 나의 자신감은 단숨에 무너지고 그레고르의 세상만이 남는다. 어머니의 눈길이 나를 향할 때면 나는 그레고르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레고르다. 등껍질을 바닥에 대고 배를 드러낸 채 일어서지 못하고 네발을 우스꽝스럽게 허우적대는 그레고르다.
- 모드 쥘리앵, 「그레고르와 에드몽」,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37쪽.
나는 충격에 빠져 읽고 또 읽는다. 늘 숨어서, 늘 몇 페이지씩 읽는다.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흔든 그 주인공은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다. 둘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세상을, 관습을 밀어낸다. 똑같이 광기 상태를, 거창한 말들을, 가혹함을 좋아한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굳은 외관 아래 아직까지 벌어져 있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 행하고 어머니와 나에게도 강요하는 것, 그 모두가, 아버지가 우리를 가두어놓은 이 세상 전부가 사실한 탁월한 통찰력이 아니라 은밀한 고통에서 나온 게 아닐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때마다 결말에 담긴 냉혹한 교훈이 나를 죄어온다. 그 교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언젠가 자신의 광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 도망쳐!”
- 모드 쥘리앵, 「지하에서」,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58-159쪽.
또한 정말 다행스러웠던 지점은 그녀가 문학작품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리고 음악을 통해 문학이나 음악의 선율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 유사한 지점들을 찾아내기도 하며 그들과 대화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강한 내향성으로 다소 외로웠던 나의 학창시절에도 ‘책’과 ‘음악’은 귀한 친구였는데, 모드에게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자기서사와 작품서사 간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 자기의 삶을 들여다보며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 셈이다. 저자가 자기 나름의 도피처이자 강력한 무기를 찾아내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점이 굉장히 다행스러웠다.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를 덜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무언가를 해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비밀을 공유하고, 같은 의문을 품고, 같은 불안과 같은 긴장을 느꼈다. 더구나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그르쳤다며 비난하지도 않았기에, 내 마음은 오히려 가볍기까지 하다. 이따금씩 나는 잠시 제자리를 떠나갔다 돌아온 호랑이들의 여행을 생각한다. 이제는 가구와 물건과 책을 모두 다른 자리로 옮겨놓고 싶다. 일과표의 일정들도 마음껏 바꾸고 싶다. 마침내 가능한 변화의 문이 열린 듯한 기분이다. 우리 머리 위로 뚜껑이 완전히 봉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만 같다. 어머니와 내가 동무가 되어 또다른 모험들을 상상해본다면 삶이 얼마나 달콤해질까? 점점 더 무거워지는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서 우리가 또다른 작은 공모를 꾸밀 수 있다면 말이다.
- 모드 쥘리앵, 「호랑이 카펫」,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73쪽.
어머니의 경우 그녀는 자신의 딸인 모드 쥘리앵에게는 가해자였으나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양산된 또다른 피해자라 할 수 있는데, 물론 그녀가 딸에 대한 학대에 방관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해자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드가 바랐던 바와 같이 어머니가 조금은 더 그녀와 함께 아버지의 폭력에 함께 싸우는 경험들이 많았으면 좋았을런만, 사실 모드의 어머니야말로 너무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어쩌면 딸에 대한 학대와 질투, 그리고 아버지의 규율 그 모든 것을 폭력이라 자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녀의 삶 전체가 남편에게 엮여 있었기에, 독립할 만한 힘을 갖추기에는 어머니 또한 아직 그 내면에 ‘학대당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떨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가정 문제의 모든 근원이 되는 지점인 부친이야말로 정신과적 치료가 가장 필요해보이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늘 아버지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어머니, 그리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져야만 했던 어린 모드 쥘리앵의 내면이 얼마나 하루하루 초조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작품을 읽으면서도 감히 나로서는 다 짐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저자의 실화임이 분명한, 수필(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사실성 있는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작품을 읽으면서도 몇번씩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끝나갈 때쯤 나는 기진맥진하다. 아버지는 나에게 블랑딘처럼 사자들을 굴복시키고, 잔 다르크처럼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그러면서 퐁파두르 부인처럼 섬세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기를 기대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들을 해낸단 말인가. 진짜 슬픔은 다른 데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초라한 삶을 동경한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한 딸이다.
- 모드 쥘리앵, 「티레의 히람」,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83쪽.
얼마 전부터 아버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언제든 원할 때 누구의 머릿속에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언제든 원할 때 누구의 머릿속에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아무도 볼 수 없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물리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절대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무얼 하든 다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자꾸 저 말을 할까? 내가 털어놓기 힘든 생각들과 계획들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나?
- 모드 쥘리앵, 「벽돌담」,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90쪽.
때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슬픔이 옥죄어온다. 나는 다정한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마치 아기를 흔들어 재우듯 내 베개를 흔들어준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입으로 소리 내보기도 한다. “아가야 울지 마, 걱정하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넌 사랑받고 있어. 알잖아. 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가 아니야. 너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곧 비난의 목소리에 밀려난다. “잘하는 짓이다! 이젠 동정이 필요해? 쇼하지 마!”
- 모드 쥘리앵, 「벽돌담」,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190-191쪽.
정말 다행스러운 지점은 저자가 성장 이후 ‘몰랭 선생님’을 만난 점이었다. 몰랭의 지혜와 재치, 그리고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드디어 모드가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을 때 독자로서 느낀 그 엄청난 다행스러움이란..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는데 저자는 그 순간 얼마나 믿기지 않고도 경이로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평생을 살아온 그 감옥같은 공간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의 해방감이었을까. 인생을 되찾은,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최근 왓챠에서 제작한 시즌드라마 <디 액트>를 관람한 바 있다. 2015년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집시 로즈 블랜처드’의 모친 살해사건은 바로 그녀가 유년시절부터 어머니께 당해온 가스라이팅(장애가 없는 자녀를 평생 장애인이라고 하며 모친의 거짓말에 이용해 온 것)으로 인해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인한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보다 차라리 감옥이 더 자유롭다고 형용했을 정도였을까. 집시 로즈 블랜처드와 모드 쥘리앵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친부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환경에서 학대당하고 학대당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드는 좋은 사람들 덕에 다행히 그 감옥과도 같은 집을 탈출했지만, 집시 로즈의 비극은 그녀 주변에 그녀에게 조금 더 관심을 쏟은 누군가가 부재했기에 야기된 것이라 하겠다. 집시 로즈에게, 그녀를 대신해 어머니를 살해하는 남자친구 대신에 모드에게 찾아온 '몰랭 선생님'같은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였던 집시 로즈가 오히려 살인자가 되는 일 없이 그녀도 직접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어쩌면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과 학대에 우리 모두가 너무 무심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하게 된다. 동시에 작은 선의와 실천적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지점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특히 저자가 오랜 기간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조력자들 덕분에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아가 공황장애, 우울, 불안, 공포증 등 수많은 심리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직면하여 치유한 뒤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담자가 되어 누군가의 지지체계가 되어주며 선을 나누는 저자를 통해 , 진실로 그녀야말로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존경스러웠다.
저자에게 앞으로 펼쳐질 노년기의 삶이 진실로 평안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그녀가 겪은 내담자로서의 경험과 상담자로서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를 더 만나고 싶다. 다음 책이 나오기를 진실로 바란다. (복복서가 출판사 관계자분들 이 글을 보신다면 꼭....!! 추진해 주세요:) )
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 모드 쥘리앵, 「산티나스 재즈밴드」,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312쪽.
철책에 가로막히지 않고 몇 시간이든 걷고 싶었고,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해변을 뛰아다니고 싶었고, 동료들과 일하면서 내 힘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여행도 하고, 가구 배치도 바꾸고,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사고, 비틀스의 음악도 듣고, 극장에도 가고 싶었다. 자지러지게 웃고도, 마음껏 울고도 싶었다.
- 모드 쥘리앵, 「에필로그」,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315쪽.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기에 내 상태를 되돌려놓기 위한 치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심리치료가 시작되었고, 그 치료가 끝날 즈음에는 나 역시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시 구렁텅이에 빠질 위험도 겪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식 치료를 하는 어느 의사를 만나러 다니던 일 년 동안, 그 의사는 내내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미 침묵 때문에 너무도 큰 고통을 겪었던 나는 다시 한 번 내쳐지는 상처를 겪어야 했다. (중략) 이런 과정을 모두 겪은 뒤에야 나는 따뜻한 열정으로 맞아주는 정신과의사를 만났고 마침내 그녀와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 모드 쥘리앵, 「에필로그」, 『완벽한 아이』, 복복서가, 2020, 318쪽.
아버지가 만들어낸 빈틈없는 체계는 반항의 싹이 돋아날 가능성 자체를 잘라버렸다. 하지만 나는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냈다. 우선 나에게는 생명 넷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개 한 마리, 조랑말 둘, 그리고 오리다. 나에게 우정을 베풀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엄격했던 피아노 선생님, 겁에 질려 있던 미용사, 바칼로레아에 떨어진 여고생 말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길을 생각과 감정과 상상력으로 열어준 책과 음악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조금씩 용기를 냈고, 돌을 하나씩 옮겨가며 나의 정신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상상의 대화 상대를 만들었고, 비밀 창고를 팠고, 금지된 이야기들을 글로 썼고, 나 스스로의 생각을 지닐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운명이 나에게 구세주를 보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몰랭 선생님은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고 삶 안에서 늘 경이를 느끼는, 무한한 선의를 지닌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 아버지와 정반대편에 선, 아버지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인간들은 훌륭하다.
3년 전쯤(2018년) 이었던가, 가장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던 <알쓸신잡> 시즌2 10회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책에 대한 화두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 중 유시민 작가님께서 ‘딸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향으로 호프 자런의 이 책, 『랩 걸 (Lab Girl)』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나도 전자책을 진즉 구입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3년 간 『랩 걸 (Lab Girl)』은 내게 있어서 수많은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을 한켠에 지닌 채,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보다.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친구들 모두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의 반열에 『랩 걸 (Lab Girl)』이 자리해 있었고, 그렇게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덕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완독할 수 있었다.
‘과학’에 대한 에세이라길래 기실 조금 걱정했는데 책은 매우 두꺼운 장편 에세이(7.8인치 전자책 ‘페이퍼프로’ 기준으로도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인 것 치고는 제법 가독성 있었고 저자의 삶을 함께 지나가는 중에 생각할 거리도, 삶에 대한 여러 문장들도 다수 등장했다.
특히 저자의 삶에 가장 큰 양분이 되어 준 것은 바로 부친의 실험실을 놀이터삼아 유년기를 보낸 일이다. 또한 학위과정을 마치고자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한 어머니의 모습도 호프 자런에게는 모델링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자랐다. 화학 실험도구가 늘어서 있는 실험대에 키가 닿지 않을 때는 그 밑에서 놀았고, 키가 큰 다음에는 실험대에서 놀았다. 아버지는 미네소타 시골 한가운데에 있는 전문대학에 자리한 실험실에서 물리학과 지구과학 입문을 42년에 맞먹는 시간 동안 가르쳤다. 아버지는 자신의 실험실을 사랑했고, 나와 오빠들도 그곳을 사랑했다.
해마다 5월제(유럽 각지에서 5월 1일에 하는 봄 축제—옮긴이) 날이 되면 엄마와 나는 땅에 씨를 하나하나 심었고, 일주일 후 싹을 틔우지 못한 것들을 파내고 새 씨앗을 다시 심었다. 6월 말이 되면 모든 작물이 왕성하게 자라고 주변이 모두 초록빛으로 둘러싸여서, 그렇지 않은 시절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7월이 되면 이 모든 식물들이 흘리는 땀으로 공기가 가득 차서 그 습기 때문에 공중을 가로지르는 전선들이 윙윙거렸다.
엄마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빠와 결혼을 했고, 네 아이를 낳은 후 20년을 자녀 양육에 전념했다. 막내가 유치원에 갈 무렵, 학사 학위를 따겠다는 집념을 불태우며 엄마는 미네소타 대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엄마는 통신 과정밖에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문학을 택했다. 내 일과의 대부분을 엄마와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 공부에 참여했다.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유치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반 아이들보다 수준이 높은 책을 읽고, ‘상냥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그러나 호프 자런의 유년시절부터 뿌리깊게 자리해 온 여성에 대한 성 차별은 그녀의 삶에서 너무나 크나큰 ‘장벽’으로 느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과학계’(이공계)에서 여성으로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해왔으며 심지를 굳건히 했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작년에 관람한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도 여성과학자로서 그녀가 경험한 고군분투를 작품을 통해 생생히 느낀 바 있었다. 소르본대학에 입학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험실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고 화장실도 없었기에 분투해야만 했고, 어느정도 업적을 거둔 후에도 자녀들의 육아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마리 퀴리. 19세기를 살았던 ‘마리 퀴리’의 시대가 그러했을지인데 20세기를 살아간 ‘호프 자런’의 삶도 마리 퀴리의 시대와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19세기가 아닌 20세기였기에 호프 자런이 ‘여성 연구자’로서 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녀에게는 ‘유리천장’이 존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여긴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게 무엇이든 남자아이보다는 못한 건 확실했다.
여자아이인 척하는 동안 나는 솜씨 좋게 몸단장을 하고 다른 여자아이들과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관해 수다를 떨었다. 줄넘기를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고, 내 옷을 스스로 꿰맬 수도 있었으며 누구든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처음부터 모두 내 손으로, 그것도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늦은 저녁이 되면 나는 아빠와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건물들은 텅 비어 있었지만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서 나는 어린 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내 경우는 반대 방향의 변신이긴 했지만.
과학 교수들은 내가 여자아이였음에도 나를 받아들였고, 내가 이미 의심하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해줬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한 번 나는 아빠의 실험실에서처럼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의 근본은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번도 살아 있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없었다. 여성 과학자로서 나는 여전히 그다지 평범하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 번도 다른 것이었던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는 세 개의 실험실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완성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고 “고마워” 하고 말하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했다. 소개받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기 때문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이제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들은 나도 그들과 동등한 학자로서 이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연구 자금을 댄 기관에서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의 눈에 나는 괴상한 사람을 달고 와서 20킬로그램 정도의 짐도 들지 못하는 지저분한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그 이미지를 없애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인정받는 자기상에 비중을 두고 삶을 살아가지 않았나 싶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비중에 둔다면 여러 한계와 장벽이 존재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비중을 둔다면 연구자로서 실험을 설계하고 변인을 통제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등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 계획에 따라 세상을 탐구할 수 있으며 사회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아버지와 보낸 유년시절에서 느낀 행복감과 연결되어 었다.
실험실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날에 가는 곳이다. 세상 모든 곳이 문을 닫는 휴일에도 내 실험실은 열려 있다. 내 실험실은 도피처이자 망명처이다. 그곳은 직업상 전투를 벌이다가 후퇴해서 몸을 쉬는 곳이자, 내 상처를 돌아보고 갑옷을 보수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자라난 내가 진정으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과학자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진정한 과학자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불안한 첫걸음을 떼서 오솔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오솔길은 도로가 되고, 그 도로는 고속도로가 되고, 그 고속도로는 언젠가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비단 여성과학자로서의 한계 뿐 아니라 실험실의 책임자로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로서의 어려움도 호프 자런의 이 에세이에 여실없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미국사회도 연구자에게 ‘연구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임이 강조되며, ‘빌’이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이라 할지라도 그의 계약과 보험 등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지점이 그러하다. 어쩌면 호프 자런은 이 에세이를 통해 ‘과학계’를 비롯한 연구 환경에 솔직하고도 따끔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연구자이자 가족과도 같은 깊은 친구(마치 전우戰友와도 같은) ‘빌’과 연대하며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낸다. 그리고 이는 단지 호프 자런 그녀의 안위安慰나 명예名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대 연구자들을 위한 호프 자런의 기꺼운 걸음이기도 했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호프 자런, 「2부. 나무와 옹이」,『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빌은 실험실에 필요한 연구 자금을 말하고 있었다. 연방 정부에서 받은 계약이 몇 개 있어서 2016년 여름까지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실험실을 접어야 할 위험이 여전히 있었다. 환경 과학에 대한 연구 기금은 매년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종신 계약을 맺은 상태지만 빌은 그렇지 않다. 종신 계약은 교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과학자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과학자가 장기적 직업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기금을 받지 못하면 나도 그만두겠다고 위협하는 것뿐이다. 아마 그러면 우리 둘 다 거리로 나앉게 되겠지만 말이다. 연구 과학자의 직업을 가진 우리는 절대, 영원히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호프 자런에게 더 경의를 표하고 싶으며 그녀가 부딪혀 온 과정에 놀라왔던 점은 결혼 이후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내담자로서 호프 자런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매우 불안해한다. 사실 이는 저자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이다. ‘경력단절’에 이어 아이를 위해 ‘내 삶’ 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우리 사회의 현재에 있어서도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산모로서, 임신 25주차까지 항정신성 약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공포로 다가왔을지 –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라 여긴다.
그러나 호프 자런은 해냈고,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수용해낸다. 어쩌면 그것이 가능했던 건 저자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뿌리깊은 사랑이 저자의 내면 한 가운데 양분이 되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나는 2002년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붙잡고 도대체 왜,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묻고 또 묻지만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필요한 약을 먹어도 괜찮은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날짜를 세는 것밖애 없다. 임신 26주차라는 것은 마술 같은 날이다. 그때부터 나는 임신 7개월에 접어들고, 그때부터는 산모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항정신성 의약품을 사용해도 된다고 미국식약청이 승인했기 때문이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그때 학과장 월터가 걸어들어왔고 나는 상관을 만난 군인처럼 자동으로 일어섰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받기 직전이던 나는 임신에 동반되는 어떤 육체적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도 내가 행복하고 기대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쇼핑하고, 아기 방을 꾸미고, 배 안의 아기에게 사랑을 담아 말을 건네면서, 사랑의 결실을 기뻐하고, 내 자궁이 그득 찼다는 사실을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슬퍼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신비로운 정체에 대해 꿈을 꿔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 아기가 남자아이고, 그의 아빠처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는 혼란스럽게 말을 더듬는다. “전 모유 수유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말은,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약을 먹어야 하거나 그러면-”
“괜찮아요.” 의사가 내 말을 가로막는다. “아기는 조제분유로도 잘 자랄 거예요. 전 그 걱정은 하지 않아요.”
아기에 대한 내 첫 번째 실패를 이토록 너그럽고도 쉽게 받아들이는 의사의 용서가 내 심장을 관통한다.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희망이 꿈틀거린다. 어쩌면 이 여자는 내게 관심과 애정이 있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 차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무서워요.” 내가 말한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것이라고 늘 확신해왔다.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외할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삼촌이나 이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 죽지 않고 성장한 삼촌, 이모만 해도 열 명이 넘었지만 말이다. ‘Diskutere fortiden gir ingenting(과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실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을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나와 아들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삶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온 나로서는 정말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귀중한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경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 하나하나는 내가 그토록 절실히 원했지만 받지 못했던 모든 입맞춤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이 말을 이제는 할 수 있다)지만 오직 내가 기대했던 엄마 노릇의 관념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킨 후에야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딸에 대해서는? 나는 이 감정이 딸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딸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계혈통은 한 세대를 건너뛰어야 다시 이런 어려운 관계가 반복되는 것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손녀를 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내 욕심은 늘 너무 앞서 나가곤 한다. 내 계산에 따르면 이렇게 기다리는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죽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특히 이 혈통이 건너뛰는 것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럼에도 햇살이 눈부신 오늘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병을 띄워 보내고 싶다. 누군가 기억해주길. 누군가 언젠가 내 손녀를 찾아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부엌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창밖을 보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는 결정을 내리느라 바빠서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도, 창틀에 쌓인 먼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결국 할머니는 수십 년 먼저 손녀를 사랑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햇빛을 받고 앉아서 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꿈꿨다고 누군가가 말해줄 수 있기를.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아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라고요? 처음에는 ‘그’라고 했잖아요. 호랑이는 남자예요.”
“호랑이가 여자면 왜 안 되지?” 내가 물었다.
아들은 너무도 뻔한 사실을 내게 설명했다.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몇 초 후 물었다. “오늘 밤에도 실험실에 갈 거예요?”
“응, 하지만 네가 깨기 전에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빠가 바로 방 밖에 있고, 네가 자는 동안 코코가 너를 지켜줄 거야. 이 집은 널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나는 아이를 재우며 날마다 하는 말을 반복했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 – 옮긴이)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온실 안에서 빌과 내가 함께 앉아있던 그날, 우리는 희망과 목표에 대해서, 그리고 식물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한 것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 얼마 가지 안아 우리는 서로에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20년에 걸쳐 벌어졌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 호프 자런, 「3부. 꽃과 열매」,『랩 걸 (Lab Girl)』, 알마, 2017.
호프 자런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즉 개인마다 고유한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는 셈인데, 나는 호프 자런의 자기서사가 문학치료학적 이론에 근거하면 ‘부모서사’와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서사는 스승이나 부모 등의 위치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위치에서, 양육을 통해 자녀의 성장과 독립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호프 자런이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한 실험실을 양분 삼아, 그리고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을 발판삼아 여러 장벽을 넘어 성장했듯이, 그녀도 그녀의 아들에게 양분이 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시민 작가님이 이 책을 자신의 딸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에 있지 않을까. 과학자(연구자)로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한계 극복이라는 호프 자런의 삶에 주요한 키워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양분 삼아 네 길을 올곧이 걸어가고 이루어 나가라고.
그런 점에서 나도 이 책을 통해 깊은 위로를 받는다. 또한 나는 나의 청년기를 어떤 모습으로 보낼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여러 한계를 어떻게 넘어 나갈지 깊이 고민하며 앞으로의 삶을 재조망해보게 된다.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에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덧 16기 1회차(10회차)를 맞이한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입니다. 리뷰를 업로드하는 시기가 좀 늦었네요. 16기 1회차 모임은 지난해 12월 연말에 진행하였으며, 내용 정리 후 뒤늦게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 바, 지난 12월 저희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은 ZOOM으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오프라인으로 모임을 진행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다가올 포스트코로나시대에 더욱 활성화된 독서모임을 희망해봅니다.
12월의 도서로 <청춘의 책탑>에서 함께 읽은 책은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입니다. ‘부모면접’이라는 참신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청소년문학인 만큼, 교육 분야를 전공/종사하고 있는 청춘의 책탑 멤버들이 이 책을 매개로 부모-자녀의 관계 및 청소년의 성장에 대해 폭넓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며, 비단 청소년문학을 넘어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과 ‘관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모임 후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
1. 『페인트』를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구병모작가님, 손원평작가님의 작품 등 창비 청소년문학에는 좋은 작품이 참 많은데, 이희영 작가님의 페인트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청소년기’를 거쳐온 우리가 이제는 어른으로서 해당 작품의 내용과 주제의식을 어떻게 내면화할 수 있는지 논의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허구성을 지닌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어 주어, 깊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 이성으로 이루어진 결혼관계의 가족형태가 등장하는데, 동성혼 등 다양한 가족형태를 포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 우리 사회의 대다수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기에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2. 『페인트』 에서 인상깊었던 내용과 구절을 나누어 주세요.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 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 아닐까? 왜 사람들은 NC 출신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 이희영,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페인트』, 2019.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 이희영, 「기다릴게, 친구」, 『페인트』, 2019, 종이책 178쪽.
: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도 함께 공존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하나의 이야기 - 하나의 어머니에 대한- 가 마음에 많이 남았는데,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고유한 ‘나’를 분리하는 시간이 많은 딸들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 상담이론 중 ‘가족상담’ 파트에서도 배우게 되는 부분인데,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적절한 '경계선'을 지켜줄 때 각자의 고유한 내면을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와 해오름은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와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두 사람은 부모 준비가 끝난 사람들이었다. "실은, 제가 좋은 아들이 될 자신이 없더라고요."
"왜 부모에게만 자격을 따지고 자질을 따지세요? 자식 역시 부모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꼼꼼하게 따지셔야죠. 부모라고 모든 걸 알고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버리라고 하셨잖아요. 부모라고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요."
- 이희영, 「마지막으로 물어봐도 돼요?」, 『페인트』, 2019.
: 부모나 자녀 둘 중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맞추는 ‘일방향적’인 관계는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 문장을 통해 들었어요. 부모-자녀 관계도 함께 만들어가는 쌍방향적인 관계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문장을 통해 다시금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요.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고두심이 강하늘한테, ‘자식은 부모가 뭘 해주든 부족하다 부족하다 얘기한다’고 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았는데, 부모님들께 무조건적 희생을 바라는 자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에 <페인트>의 저 문장이 다시금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모의 일방적인 희생을 곱씹게 했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족한테서 가장 크게 상처를 받잖아. 그래서 우리는 아이 낳지 않기로 한 거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아이의 성격과 가치관, 나아가서는 인생까지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거든. 아기를 키우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닐 테고. 어쨌든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어.
- 이희영,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페인트』, 2019, 종이책 117-118쪽.
: 하나의 이 대사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어요.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그만큼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이가 바로 가족관계고, 그만큼 더욱 귀히 여기며 서로를 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만약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정말 잘해 드릴 거야. 어버이날도 챙겨 드리고, 두 분의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도 꼭 선물이랑 꽃을 드리고 싶어.”
“…….”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 이희영,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페인트』, 2019.
: 이 작품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이 ‘아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키와 같은 맑은 아이의 마음에 어른인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 어른인 우리가 해야 할 일 같아요.
3. 만약 자신에게 부모님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 바라는 부모상이 있나요?
-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맞춰줄 수 있는 부모님. 특히 열일곱,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자녀 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한 어느정도 자녀를 위해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부모님이어야겠지요.
-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거나 자녀에게 집착하지 않고, 당신들의 삶을 잘 꾸려나가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분들이 건강한 부모님이고 자녀의 행복한 삶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아요.
- 사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 실수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실수를 지적하는 자녀들에게 ‘화’를 내거나 어디서 ‘말대꾸’를 하냐는 반응이셔요. 그런 반응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부모님들을 만나고 싶고, 추후 그런 부모가 되고 싶어요.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이희영,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페인트』, 2019.
4. 이외 『페인트』를 통해 논의하고 생각해 봄직한 화두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사실 NC출신이라는 ‘낙인’은 우리 사회에 고아원이나 보육원 등의 형태를 비유한 것 같아 요. ‘낙인’과 ‘차별’이란 것이 너무 일상 속에서 만연하고, 그 사회현실을 잘 비유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경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 사실 이 작품에서는 이성혼을 통해 가정을 이룬 부모를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결혼이나 가족의 형태가 다원화된 것을 고려한다면, ‘좋은 부모’ 혹은 ‘좋은 자녀’, ‘가족’의 형태를 꼭 규정지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이상한 정상가족』 이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 ‘완벽한’, ‘완벽히 행복한’ 사람이나 가족(가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요. 진짜 가족은 ‘갈등’ 속에서 서로 성장해나가는 관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 결말부 제누301의 대사처럼 ‘좋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고민해보건대 나는 좋은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결말부 “NC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건, 오직 NC 출신들 밖에 없어요.” 라는 대사는 사실 제누301이 앞으로 마주할 미래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암시하기에 씁쓸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부분이겠지요.
5. 『페인트』 에 대한 전체적인 총평
H.J ★★★★★ 5점
- 무해하고 선한 인물들이 등해 읽는 내내 좋았던 작품. 청소년 문학의 강점과 한 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나 강점이 더욱 눈에 들어온 작품이었다.
S.H ★★★★☆ 4.5점
- 가독성 있는 문학작품으로, 상담자로서 생각할 부분들이 많았다.
S.H ★★★★☆ 4점
- 가족이나 부모-자녀관계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들에 대해 성찰적 사유를 가능 하게 하는 작품.
S.R ★★★☆☆ 3.5점
- 현실에 부딪히는 이야기였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청춘의 책탑의 다음 모임 도서는,
[호프 자런 , 『랩걸』 , 알마, 2017.]입니다.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자의 삶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는 에세이로서, 삶에 대한 여러 논의를 거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여름, 국어과 기간제교사로 근무하던 중, 7월 8일에 인천 부평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페인트> 온라인 북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페인트를 1회독한 이후, 청춘의책탑에서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진행하기 위해 5개월 만에 다시 이희영 작가님의 <페인트>를 재독했다. 청소년문학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역시 짧고 후루룩 읽을 수 있긴 하지만 , 작품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고민의 내용들은 참 풍부한 작품이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는 '부모면접'이라는 작품의 주요 소재 자체는 어쩌면 소설을 읽는 어린이/청소년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효과를 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그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결말부쯤엔 부모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끔 한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바로 그 지점이 이 책이 청소년문학인 이유이기도 하리라.)
작품에서 주요 장면과 인상적인 부분들을 짚어보자면 센터장 '박'의 서사, 제누301과 하나&해오름의 페인트 과정과 관계설정, 아키와 아키의 부모면접, 그리고 NC에 대한 사회적 차별, 이렇게 네 부분을 들고 싶다.
우선 박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전형이라 여겨진다. 친부모에게서 버려지거나 부모와 이별하게 되어 NC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부모면접(페인트)을 통해 좋은 부모를 만나 NC출신이라는 낙인을 제거하고 평범한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한 아이의 삶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부모면접과정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페인트를 연결해주는 사람은 센터장 '박'인데, 그는 비록 NC출신은 아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매우 큰 상처를 지니고 있다. 센터장 '박'이라는 인물은 낳아준 부모와 함께 살고있지만 그 부모들로부터 불행했으며 NC아이들은 부모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불안한 삶을 겪어내고 있다. 결국 한 개인의 삶에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자녀 관계의 유무보다는 그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었는지가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수동적인 관계인지 혹은 함께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관계인지에 부모-자녀관계의 방점이 자리한다고 여긴다. 박은 자신이 전자의 관계를 경험했기에, 아이들 각자에게 적합한 '최고의', '완벽한' 부모를 찾아주고자 부단히 애쓴다. (물론 완벽한 부모는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NC센터의 상식 기준에서는 자격미달인 부모가 제누301에게는 이상적인 부모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박'의 모습은 결국 그 본인 자체가 자신의 상처를 발판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감싸려는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기능하기에 , 박이라는 인물이 참으로 많이 마음에 남았다.
물론 직업에 몰두하는 만큼 가정 안에서의 그는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NC아이들에게 그는 좋은 부모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여긴다.
"가장 어려운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어. 부모를 만난다는 게, 십 년 넘게 센터 생활만 해 온 아이들이 부모를 만난다는 게 마냥 신나고 좋기만 한 일이 아니잖아. 실적이 낮다는 건 부모 만나기를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지. 그만큼 더 사랑해줘야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고."
- 이희영,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페인트』
' 박은 누구보다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범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생활했으리라 믿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박에게서 불우하고 끔찍한 어린시절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이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아이들에게 최고의 부모를 소개해 주고자 애쓰고, 단 한 명의 아이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속에는, 채 자라지 못한 아이의 상처를 감싸 안아 보려는 안간힘이 있었다......'
- 이희영,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페인트』
'어째서 박이 센터를 찾아오는 프리 포스터들에게 그토록 엄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자신과 같은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부모에게 상처받고 학대받은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닐 테니까. 그것은 어쩌면 NC출신이라는 꼬리표보다 더욱 감당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박은 강한 사람이었다. 이토록 올곧은 어른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센터장은 분명 밝은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 이희영,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페인트』
작품의 주인공인 제누301과 해오름&하나의 페인트 면접과정은 매우 흥미로운데, 나는 제누301이 하나와 해오름에게 마음을 연 것이 바로 '진솔성'의 힘에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다른 여타의 프리포스터들과는 달리 '완벽한' 부모로 자신들을 포장하지 않았다. 아이를 향한 듣기 좋은 말이나 환심을 사려는 노력 대신 그들이 지닌 상처와 있는그대로의 환경을 그대로 개방했다. '완벽'하기 보다는 '부족한' 사람들임을 전했다. 나는 그 지점이 바로 이들이 바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부모라고 여겼다. 완벽히 착한 자녀가 존재하지 않듯 '완벽히 좋은 부모' 역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여겨진다. 하나와 해오름은 그들 의 부족함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숨기지 않음으로서 제누301과 진정한 라포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는 상담장면에서 상담자 또한 내담자에게 이러한 태도, 진솔성 어린 태도와 자기개방이 강조되는 것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로저스님 찬양합니다..:) )
"더 듣고 싶어요, 저분들의 이야기." 모두들 얼마나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해는지 자랑하기에 바빴다. 자신들도 뒤늦게나마 그런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가족이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니 우리가 따뜻한 가족이 되어 주겠다, 선심 쓰듯이 말했다. 자신이 부모에게 상처받았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 이희영,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페인트』
한편 제누와 친밀한 관계인 귀여운 동생인 아키라는 인물과 아키의 부모면접과정도 마음에 많이 남았다. 제누301이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 어른스러운 아이라면 아키는 아이다운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다. 아키가 그에게 맞는 부모를 찾아갈 수 있었던 점이 매우 다행스러웠는데, 한편으로 우리가 아키의 그 어린아이다운 순수성과 그 아이 내면의 사랑과 신뢰를 지켜 줄 수 있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지 한편으로 고민하게되었다. 아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만들고픈 욕심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 묘사되는 NC출신에 대한 차별과 낙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지점들이 여러모로 있었는데, 어쩌면 NC센터는 비단 소설 속 허구의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는 고아원/보육원에 대한 어느정도의 선입견이 있으며, '부모가 없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동정/걱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과연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그 사실이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언젠가 부모와 이별하게 되는데 유년시절 부모와 이별/상실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가엾음/동정의 대상이되고 차별적 요인이 되는 사회현실에 자성하게 된다. '부모의 부재'여부보다는 우리 사회의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으며 어떤 내적 문제를 겪고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깊은 초점을 맞추는 사회로 변모하길 소망한다.
"어른으로서 이런 말,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 힘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연약한 존재들을 짓밟지. 특권 의식을 누리려는 거다. 힘 있는 자들만이 아니다. 힘이 약한 사람들도 그런 특권의식을 지니고 있어. 자신도 약하면서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들을 짓밟는 거다.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 누구나 기피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친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국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너희들에게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너는 영리하고 매력적인 아이다. 누구라도 너를 보면 호감이 생길 거야. 그러나 네가 NC 출신임을 밝히는 즉시 사람들은 너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거다. 그건 제누, 너도 잘 알잖아. 이곳에서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차별 속에 살아가는지."
- 이희영, 「마지막으로 물어봐도 돼요?」, 『페인트』
책을 2회독한 지금, 초독때 부모면접이라는 소재의 참신성에 대해서 생각했던 반면 지금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좋은 자녀인가? 내일로 정말 한국나이 서른이 되는데, 서른이 되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어머니께 '따뜻함'만을 바라고 내가 상정하는 부모에 대한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속상해하는 아이같은 면모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정작 나는 어머니께, 그리고 아버지께 항상 따뜻하지만은 않은 자녀이면서도.
자녀로서의 내가 불완전하고 부족하듯이, 부모님들도, 그분들도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비록 부모님들의 자녀인 나 앞에서 직접 그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미리 헤아려 생각하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조금 더 넓혀간다면.. 나의 부족함처럼 부모님들도 부족함 많은 한 사람임을 생각하고 그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갈등의 상당한 부분들이 줄어가지 않을까 싶다.
좋은 면만 바라고, 좋은면만 보여주기보다는 'Good Enough' - 충분히 좋은 부모 그 자체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부모님의 부족함까지 통합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녀가 되기를..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도 통합적으로 수용할 수 건강한 부모자녀관계를 맺어갈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이희영,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페인트』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 이희영, 「기다릴게, 친구」, 『페인트』
"기다릴게, 친구."
하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를 안아 준 프리 포스터는 단 한명도 없었다. 포옹이 가능한 단계까지 페인트를 이어 온 적이 없었으니까. 하나는 나와 단둘이 산책을 하고, 포옹을 해 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아니, 친구였다.
- 이희영, 「기다릴게, 친구」, 『페인트』
"이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좋기만 한 사람은 없어. 그분들이 너한테 항상 밝고 예쁜 모습만 요구한다면, 너 그럴 수 있어?"
"네가 할 수 없는 걸 그분들에게 강요하지 마. 나랑 아옹다옹하는 것처럼 그분들과도 마음 안 맞는 일이 분명히 생길 거야. 그분들에게서 좋은 면만 찾지 마. 너도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그러지 않으면 그게 너와 그분들 모두를 힘들게 할 테니까."
- 이희영, 「Parents' Children」, 『페인트』
하나와 해오름은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와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두 사람은 부모 준비가 끝난 사람들이었다. "실은, 제가 좋은 아들이 될 자신이 없더라고요."
"왜 부모에게만 자격을 따지고 자질을 따지세요? 자식 역시 부모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꼼꼼하게 따지셔야죠. 부모라고 모든 걸 알고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버리라고 하셨잖아요. 부모라고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요."
[독립북클러버 9기- 청춘의책탑] 8회차(9기 3회차)-「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모임 후기
한성희,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개정증보판), 메이븐, 2020.
2020.07.18. 土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9회차 리뷰(9기 3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어느덧 9기 3회차(9회차)를 맞이한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입니다. 5월에 채널예스 인터뷰를 했던 것도 바로 엊그제같은데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 어느덧 7월말이 되었고, 8월을 하루 앞두고 있네요. 북클러버 활동을 해오면서 늘 '책'을 매개로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고 다채로운 논의를 할 수 있어 즐겁기만 합니다. 7월 도서로 <청춘의 책탑>에서 함께 읽은 책은 Yes24 북클럽 (E-book) 에도 등재되어있는 책으로, 한성희 작가님의『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개정증보판) 입니다. 상담전문가인 저자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전하는 편지형식으로 구성된 에세이인 이 책은 20대후반-30대 초반으로 구성된 저희 <청춘의 책탑> 멤버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위안을 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도 자리해 다채로운 모임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광교중앙역 인근 아브뉴프랑의 <스트릿 츄러스>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요, 달달한 츄러스와 커피를 마시며 의미있고 풍요로운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모임 후엔 맛난 시카고피자를 저녁으로 함께 먹었답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많은 모임이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에 유의하며 모임을 진행하였답니다:)
그럼 본격적인 후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1.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심리학을 주제로 여러 생각할 거리가 주어지는 에세이이자,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추천했습니다.
- 책에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자기표상과 대인표상을 통해 내적 작동모델을 이루고 그것이 중요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반복된다는 대상관계이론에 대해 흥미를 지니게 되었고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어졌습니다.
- 책에 대한 첫정신과 의사인 어머니가 갓 30을 지나고 결혼을 한 30대 딸에게 전하는 편지글의 형식이다보니 문체면에서 가독성이 좋았고, 독자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독자가 내담자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로 책을 통해 위안/위로가 되고 정서적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자아로 커 나가려면 누구나 자기 대상을 가져야 하는데,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그 기능을 해 주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자기대상이 꼭 인격체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충일감을 제공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고 지켜 주는 안전판이 되어 견고하고 통합된 자기cohsieve self로 기능하도록 해 준다면 가치관, 취미, 활동, 직업, 모두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91쪽.)
- 저자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보니 아무래도 ‘엄마’로서의 자신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 사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기대가 많이 드러났기 때문인 듯 합니다.
2.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에서 인상깊었던 내용과 구절을 나누어 주세요.
-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저자가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아 온 과정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그 내용에 깊이 공감되어 마음 한 켠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애잔함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9기 1회차(7회차) 모임 때 읽었던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라는 단편이 다시 생각나는 부분이었는데, 워킹맘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과정들이 눈앞에 그려져 무언가 안타까웠어요..다시금 사회 구조의 본질을 생각하게끔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나도 능력 있는 의사,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친구, 괜찮은 며느리, 좋은 딸, 훌륭한 상사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딘가에는 꼭 빈틈이 생겼고 문제가 발생했다. 병원 일이 무사히 넘어가나 싶으면 네가 속을 썩였고, 네가 잘한다 싶으면 갑자기 친정에 문제가 생겼고, 친정이 조용하다 싶으면 시가에 일이 생겼지. 그러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특히나 네가 어렸을 때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에 푸념이라도 할라치면 사람을은 그랬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일한다고 고생이에요. 집에서 아이나 키우지." (23-24쪽.)
- 저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저자의 언어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저희 어머니가 워킹맘이셔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책의 프롤로그에 '만약 너를 낳지 않았더라면 더 큰 성공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분명 허했을 것이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사실 이 문장은 저자에게 있어 딸을 낳아 키운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내용이겠지만, 사실상 딸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폭력적인 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마흔이 넘어, 쉰이 넘어, 예순이 넘어서 더 아름다워지는 너를 보고 싶다.' (320쪽) 같은 문장도 사실 어머니가 또 딸에게 바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적어놓은 것 같아요. 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의 독립을 수용한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털어놓지 못하는 저자의 심리가 곳곳에 엿보였어요. '스무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나의 공적이다'(317쪽.)같은 문장도 타인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 슬픔과 애도과정에 대한 문장이 마음에 많이 남았는데, 우리의 눈물은 각자가 내부에 지니고있는 '미해결과제'가 아직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직 자신이 완전히 수용하고 처리하지 못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치유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너무 빨리 강제로 그 미해결과제를 억압한 채 어른이 되게끔 만드는 것 같습니다.
눈물은 내면의 아이가 아프다고 보내는 신호다. 기쁠 때도 울지만 슬플 때 더 많은 눈물이 나는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아픔 때문이다. 애도는 상실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병적인 슬픔과는 다른 정상적인 슬픔이다. 그리고 애도 과정이란 상실된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다. 상실한 대상을 계속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그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회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31쪽.)
- 모임을 하는 우리 모두가 사실 완벽주의를 어느정도 지니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완벽주의가 분명히 우월추구와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분명히 어느정도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서 완벽주의에 대한 문장에 많이 공감했어요. 대학 때에 이어 대학원에서까지 학점을 내려놓지 못하는 현실에 스스로 씁쓸합니다.
완벽한 작품을 내려다가 졸작을 내는 역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수나 결점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과도한 요구를 받아 온 경우가 많다. 이들은 대개 성취 지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면서 자신이 완벽하게 무언가를 수행했을 때만 사랑과 인정을 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자신이 잘못했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들은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키우게 된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기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압박한다. 결국 완벽주의자는 이룰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항상 '루저Loser'로 남겨지는구나. (138쪽)
3.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에 대한 전체적인 총평
- 내 삶이랑 맞닿아 있는 공감되는 이야기들.
- 상투적인 표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표현들이 많아 포근했던 책
- 상투적인 이야기 – 그럼에도 술술 읽혔던 –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야기
- 독자로서 읽었지만, 상담자로서 상담장면에서 활용하고 싶은 효용성이 많았던 책
3개월 동안 독립 북클러버 9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이번 기수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로 2020년 상반기를 보낸 근래, 소중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좋은 책을 읽고 나누는 의미를 다시한 번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기수에 다시 함께하길 기원하면서
저희 <청춘의 책탑> 모임은 꾸준히 성장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춘의 책탑의 다음 모임 도서는,
[이희영 , 『페인트』 , 창비, 2019. ] 입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더불어 청소년에 대한 시각을 다시금 새롭게 정립하게 해줄 책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안녕하세요. 독립 북클러버 1기와 4기에 이어, 9기에도 함께하게 된 독서모임<청춘의 책탑>입니다어느덧 5월 31일인데, 우선 이번 리뷰를 쓰기 앞서 너무나 과분하겓 채널예스 5월호에 저희 모임의 인터뷰가 실리는 영광스런 기회를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려 펭수가 표지사진!! 이라 기뻤습니다.)
참, 이번 9기에는 멤버가 한 명 추가되었는데요, 본래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친구들 셋이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참여해 왔는데, 다른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쌓아 온 모임장의 친한 친구가 새로 합류하면서, 91~94년생이 다 모여 완전한 90년대 초반생의 독서모임이 되기도 했고 모임에도 새로운 활력이 생겼답니다. 인원이 한명 추가된 것 만으로도 더욱 다채로운 의견들이 쏟아졌으며, '책'을 통한 관계의 이어짐의 의미를 재발견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매년 문학동네에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고는 있지만 특히 올해 작품집은 SNS를 통해 여성서사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은 만큼, 사회문제를 작품에 반영해낸 최근 문학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되나 궁금함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도서를 선정하게 되었답니다.
특히 이번 모임은 죽전역 인근에 소재한<제이플라워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단편선이라는 특징점이 있기도 했으나 모든 작품이 그 나름대로 의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게 많아서 , 여유를 지니고 모든 작품에 대해 천천히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꽃을 피웠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모임 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매년 나오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어야겠다고 생각지도 못하다가 '여성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쇼코의 미소>로 알려진 최은영 작가님과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알려진 장류진 작가님의 각각의 작품들을 이미 읽어왔기에 더더욱 해당 작가님들의 글이 궁금해졌습니다.
- 저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정말 좋아해서, 매년 읽어왔고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년에 비해 여성서사가 더욱 넓은 지평과 인식으로 확대된 점이 눈에 띄었답니다.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는 대상의 의미가 딱히 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길 작가님이 대상을 받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장류진 작가님의 <연수>의 경우 창비에서 사전서평단으로 먼저 접하고 낭독회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반가움이 들었고 다시 읽어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집에 몇권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있지만 미처 다 완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아무래도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따로 있다보니 신진작가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소수자의 서사를, 특히 현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옮긴 좋은 문학이 있다는 데 대해 매우 기뻤고 동시에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도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2.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각 단편에 대한 단평 (인상깊은 내용과 구절 중심으로)
1) 강화길, 음복(飮福)
- 작품을 다 읽고, 처음드는 느낌은 이건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평소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건 정말 - 주인공을 따라 상황을 이해해야 이 작품이 진정한 스릴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공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사랑이란 뭘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씁니다.작가의 서사구성능력이 정말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 뭐랄까, 생각을 많이하게 된 작품이고..... 많이 신박했어요. 계급을 깨부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인데 그 때문에 더욱 소름돋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 다른 먼 곳이 아닌, 우리 집안의 바로 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서 너무도 깊게 몰입되었어요. 사실 책 속에서 제일 답답한 건 고모도 , 할머니도 아니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성인데, 현실도 그렇거든요. 여성들에게만 너무나 많은 부담을 지우고 이걸 문제시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 '네가 날 이해해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깊게 와 닿았어요. 사실 장녀라서 어머니에게 가장 유대되어 있고 그렇기에 어머니의 심리적 고충을 듣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기에 남동생이 몰라도 되는, 몰라서 편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저는 많이 알고있고 심리적으로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 저뿐 아니라 많은 여성, 맏딸들이 겪는 고충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처음으로 나는 고모가 짜증나지 않았다. 그 대화, 한 명은 계속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쾌활하게 웃는 그 기괴한 대화가 이들 사이에 아주 여러 번 반복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어요. 사실 저는 인터넷에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쓰는데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SNS에도 회의적인 부분이 분명 있는데,글쓰는 행위를 통해 사유하고 표현하는 의미에 대해 이 작품을 통해 많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 이 작품은 '용산 참사'의 주인공이 에둘러 쓴 글이잖아요.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의 =용산참사에 대한 트라우마와 부채의식이 공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용산참사 시절 고등학생이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예로 세월호를 생각해보면 , 우리 모두 '세월호 사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들은 사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동의 아픔과 PTSD를 겪었잖아요. 주인공을 통해 그런 부분이 형상화되어있어서 감정적으로 많이 슬펐던 작품입니다.
- 무엇보다 여성들 간의 연대성을 단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인상깊었어요. 이미 여성으로서 어려운 길을 걸어보았기에 더욱 더 그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을 치르게 될 학생과 강사가 동일시되는 느낌이었달까요. 사실 TVN 드라마<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채송화 같은 인물이 특별해 보이며 이상향이 되는 것도 송화는 송화 그자체로 빛나는데, 여성으로서의 한계 따위 없는데 -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남아있지요.
- 앞으로의 현실에 대해 이 작품 속 강사님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엿보였는데 그 점에서 무언가 씁쓸했어요.
3) 김봉곤, 그런 생활
- 퀴어문학을 너무 많이 접해서인가, 또 퀴어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 작가의 일기장을 읽은 느낌이었어요. 수필 같은 소설이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이 작품은 일상성과 특수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고 여겨지는데, 퀴어의 정체성-아웃팅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퀴어문학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어머니나 연인과의 관계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다름이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 퀴어문학에 대해 그동안 선입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퀴어라고 해서 그 관계까지 특별/특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저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4)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가장 충격적인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통해 시각을 확대해 준 작품이었어요.
- 동생과의 대화가 인상에 많이 남아요. "내는 그냥 행복하고 싶더라. 언니야도 안 그렇나?" 어떤 선택을 하든 여성 혼자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당연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 희진이 이야기한 '도덕적 우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뜻 어렵기도 하고... 많은 곱씹음이 필요하지만 마치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물었듯, 더 큰 선이 무엇인지 - 딜레마 상황은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 임신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중략) "…… 임신중지가 언제나 예외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써내려갔습니다. "……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 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