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청춘의 독서, 웅진지식하우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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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북카페 책과 콩나무'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웅진지식하우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의 소망과 수준에 맞게 말을 걸어주고 그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유시민, 후기 위대한 유산에 감사 -,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20.

 

 

 

 

 

 흔히 이르길,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즉 한 개인이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지식과 인품을 알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치료에서는 이를 자기서사작품서사를 통해 설명한다. 모든 문학작품에 인간관계의 발달 과정과 유사한 서사가 존재하여 모든 문학은 서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것이 작품서사이며, ‘자기서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서사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독자 개개인이 작품서사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자기서사가 변화되고 개선될 수 있다.

 

 

(기초서사에는 자녀서사, 남녀서사, 부부서사, 부모서사가 있으며 이러한 기초서사들은 다시 네 개의 수준으로 나뉘어 16개의 기초서사가 존재하고 있다. 문학치료, 그리고 문학치료의 서사이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에서 출간된 책이나 문학치료학회의 주요논문 특히 정운채 교수님의 저술 들을 읽어보시기 권한다.)

 근 일주일 동안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단지 여러 작가들의 명저(名著)를 소개받고 지적인 성장을 이룬 것, 독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떠올린 것을 넘어서 자기서사와 작품서사의 상호관계를 직접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가치로운 시간을 보냈다. 청춘의 독서를 일독 후의 지금,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말이 추상적인 문구가 아닌 직접 체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실 유시민 작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부모님과 비슷하신 연배의 이름 있는 정치인으로 알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읽으셨으며 지금은 내 책장에 꽂혀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두 어 권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아침으로 가는 길) 을 통해 글을 잘 쓰는, 지식 있는 정치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최근 애용하고 있는 전자책 서점에서 할인이벤트를 하기에 1년 대여로 구입한 유시민 작가의나의 한국현대사(유시민,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를 일독했으며 이후 TVN에서 방영중인 나영석 PD님의 예능 알쓸신잡’(알고보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시는 유시민 작가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유시민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그 분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방송에서 항소이유서가 소개된 후, 전자책으로 출간된 항소이유서를 일독하니 지금의 나와 같이 고작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안정된 삶의 여로를 걸어 나갈 수 있었을 터인데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신념을 지키고자 처절히 노력해 온 이 분의 삶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송 회차가 거듭될수록 유시민 작가님의 그 가치관에 진실로 매료되어 있었다. 어쩌면, 작가님께서 걸어오신 여정이 너무도 험난하여 아무나 쉽게 걸어가지 못하는 길이기에,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부끄러움이 공존하여, 작가님의 말과 글에서 배움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나갔다.

 

 

 

 

 

 그러던 차, 최근 유시민 작가가 2009년 집필했던 청춘의 독서가 리커버 되어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를 얻어 책을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되었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부터 E . H 카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대문호와 학자들의 작품이나 저술들이 여럿 소개한다. 죄와 벌, 인구론을 통해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어야만 하는가에 의문을 품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고 밝히고자 하는 지식인의 소명을 재발견하던 저자의 소회가 담겨있는가 하면, 독일 소설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인권에 대한 존중 없이 특종을 따내기에만 급급한 부도덕한 언론을 고발하는 하인리히 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이 작품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 바로 개별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고, 또한 그 안에 속한 개개인을 기억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이어지는 반공의 기치에 따라 내부에서 적을 만들어 부당함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이나 납북 어민들을 간첩으로 몰고, 부당함을 지적하는 여러 지식인과 시민들에 폭력을 행사하여 문인들의 자유로운 집필활동을 통제하고 심지어 모든 신문과 언론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보도지침을 따라야만 했던, 자유가 통제되고 인가에 대한 존중을 기대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암울했던 사회 현실을, 러시아의 소설가 푸시킨의 삶과 그의 소설 대위의 딸을 통해, 군대노동자(군인)이나 수용소에서 헹하는 죽음정치적 노동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삶을 살아나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통해 전체주의를 폭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통해,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고 허위보도를 자행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등 독일문학과 러시아문학을 비롯한 세계 고전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씁쓸하게 다가왔다. 그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렇게 씁쓸한데, 그 부당한 권력이 지배하는 삶을 살며, 그에 직접적으로 항거하다 군에 끌려가며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는 저자는, 그리고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그 모든 이들은 얼마나 더 처절히 괴로워하고 아파했을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결국 7 , 80년대 암울한 독재정권의 시기를 지나오며 올바른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한 자기서사가 청년 유시민이 애정을 가지고 읽어온, 깊은 영향을 받은 책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를 비롯해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모두 지금의 우리보다 더 용감하고 비범했기에 그러한 자기서사를 지니고 부당함에 맞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특별한 소명을 지닌, ‘남들과는 다른이들만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자기희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지녔던 초인론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방향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평범한 이들 다수가 함께할 때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윤동주 시인이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고결한 도덕성과 맑은 영혼으로 써 오신 시가 윤동주 시인의 자기 희생정신을,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보여주었듯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체제로 현실화되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벽한 권리를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 유시민, 0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2.

 

 

 E. H. 카가 밝혔듯 인간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 사회적 진보를 야기하는 것처럼 과거에 비해 조금 더 진보한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 과거와는 다른 시대의 화두가 놓여 있다. 저자와 같이, 혹은 부당함을 위해 몸을 던진 전태일 열사처럼 그 어떤 고문과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음이 부끄럽긴 하지만, 가톨릭을 종교로 믿으며 헤르만 헤세와 김탁환 작가에게 큰 영향을 받아온, 마틴 부버의 실존주의 교육철학에 깊이 공감하며 교직과 상담에 뜻을 두고 있는 나는 적어도 다시 부당함을 외치고 누군가 희생해야만 하는 사회가 오지 않도록 청소년들이 심리적, 정서적으로 건강성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조력하며 나의 소명을 다하고픈 소망이 있다.

 성적과 입시경쟁으로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교육, 물질과 경제적 배경에만 집착하는 욕망 등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현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표현을 빌리면 향유해야 할 것을 사용하고, 사용해야 할 것을 향유하는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 향유(존중)하며 사물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도록청소년들의 인격교육을 위해 헌신하고픈 이상이 있다.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와 두냐의 인격처럼, 약자와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하고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던 비범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놓으면 평범한 사람인 두냐는 더욱 빛난다. 속물 루쥔이 탐냈고 허무주의자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병적으로 집착했던 처녀, 결국 첫눈에 반한 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라주미힌의 삶과 반려자로 맺어진 여인. 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농밀한 애정을 쏟아가며 만든 인물이 바로 두냐라고 본다. 오빠의 하숙방에서 소냐를 처음 보았을 때, 두냐는 소냐가 을 파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한다.

 

- 유시민, 0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0-31.

 

 그래서인지 나의 자기서사의 경향성은 유시민 작가님께서 사회 정의와 분배등 사회과학 서적의 작품서사와 교차하는 것과 달리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등 독일교양소설, 교육자나 학습자에 대해 다루는 성장소설, 인류애를 보여주는 작품들 김탁환 작가님의 목격자들, 뱅크, 앵두의 시간,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와 같은 작품서사와 교차한다.

 지난 주(721) 알쓸신잡 전주편 후반부에서 논의된 바 있듯 지식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경계와 일리(一理)를 수용하는 자세를 늘 염두에 두고 진정 비판해야 할 때,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추구하는 소명과 지식, 가치관과 신념의 방향을 외면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적용한다면, 나도 엘스버그나 리영희 선생님처럼, 아니 꼭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가 존경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범인 김탁환 작가님이나 유시민 작가님과 같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의 진보에 조금은 기여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

 

월남 정책의 수립을 위한 조사 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책 수습 과정의 핵심적 지위에까지 올라갔다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폭로하는 대니얼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매머드와 한 관료 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엘스버그는 그의 객관적 인식 변천의 과정에서 로스토-맥나마라-불의 단계를 거쳐서 그 자신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엘스버그였던 것이 아니라 로스토에서 시작하는 사상 발전의 과정에서 가슴을 에는 수년간의 고민을 겪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실천의 뜻을 깊게 해 준다. 전환시대의 논리, 1920.

 

- 유시민, 0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44-45.

 

 

리영희 선생은 놀랍도록 맑은 영혼을 가진 지식인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선생의 글이 막대한 감화력을 발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 유시민, 0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45-46.

 

 

 지난 1, 영화관에서 개봉한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를 본 후 대학 시절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재독했던 바 있다. 침묵에 등장하는 기치지로처럼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상황에 따라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면에서는 신념과 가치관을 깊이 있게 보존하고자 하는지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자기서사와 작품서사의 조응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체득한 바를 작품 속에서 찾고, 작품 속에서 배운 바를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있게 숙고해 온 청년 유시민의 삶과 같이, 나는 어떤 방향으로 신념과 가치관을 지켜가며 살아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끔 자극을 준, 스물여섯 살 7월의 마지막 를 함께한 청춘의 독서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도 20여년 후, 나의 자기서사와 작품서사 간 조응이 담긴 나만의청춘의 독서책을 세상에 소개할 수 있게 되기를, 지금의 내 청년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를 진실로 바란다. 더불어 그 여로에 계속 함께 해 줄 지금까지 만나왔으며,  앞으로 만날 많은 책들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청춘의 독서뿐 아니라 유시민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앞으로의 여정에 함께하게 될 것 같다.

더불어 알쓸신잡 감독판 마지막 화(7/28 9회 방송분)를 시청한 뒤 한 줄의 생각을 더 추가해 보자면, 결국 책을 읽는 그 본질은 지식의 함양도, 여가생활 즐거움을 위한 것도 아닌 공동체의 삶을 위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타자들과 이 세상과 교류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많은 일리들이 모여 진리를 이루기에....... 그리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치들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소중한 가치나 대상이 수많은 타자들에게까지 감응을 주며 뻗어나갈 때, 그 가치들이 전수되어 항존성을 지녀, 더욱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항존주의 교육철학에서 고전을 강조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바로 여러 저자들이 책을 쓰는 이유 아닐까.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조건이나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 ‘자유와 사회정의를 소중히 여기며 전수하고자 하신 작가님의 가치가, 나의 가치에 온전히 녹아들기를 진실로 바란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25년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유시민, 09. 슬픔도 힘이 될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201.

 

 

 

 

by papyros 2017. 7. 29. 00:34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3. 필사 3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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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 3회차를 맞았다. 이번 주에는 지난주에 미처 다 읽지 못한 2장의 남은 부분에 이어, ‘3.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일독하고 필사했다. 드디어 3장에 이르러 개인 수양과 성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글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의 삶을 아우르고 있는 핵심주제 중 하나라서 그런지 더욱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먼저 2장의 학림옥로라는 시는 참으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늘 고군분투하는 삶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시였기 때문이다. 늘 삶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간절히 바라는, 바라온 바를 이루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너무도 쉼 없이 달려왔고, 지금도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여 어렵게 찾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아주 지척에 있을지도, 아니 이미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이 시를 읽고는 포근함, 따뜻함을 느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이 보이지 않아

짚신 신고 산꼭대기 구름 속을 다 밟고다녔네

돌아와 우연히 매화 가지 잡고 향기 맡으니

봄은 나뭇가지 끝에 이미 와 있었네.

 

 - 나대경, 학림옥로

 

- 장유승, 046. 봄은 이미 와 있었네,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10-111.

 

 사실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오기 때문에 학림옥로라는 시의 한 구절이, 책 한 권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심리적, 정서적 휴식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이어진 휴식에 대한 논의처럼, 대한민국 사회는 피로사회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늘 경쟁 속에 놓여있으며 긴장상태에 살아가는. 얼마 전 알쓸신잡에서 논의된 커피’(카페인)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커피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사회인 것이다. 유럽 여느 국가들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휴가를 간다는데 휴가를 한번 다녀오려고 해도 연차일수를 헤아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피로도 높으며 휴식 없는 모습이 아래 글에 잘 드러난다.

 

 

 사람은 쉬지 못해서 고생하는데, 세상은 쉬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 때문인가? 사람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아서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은 만에 한둘도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와 늙어서 병들 때를 제외하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사오십년에 불과하다. 거기서 또 영예와 치욕을 겪으며 부침하고, 이익과 손해를 기뻐하고 슬퍼하며 느긋하게 즐거워하고 마음껏 쉴 수 있는 날은 수십일에 불과하다. 더구나 백년도 못 살면서 끝없는 근심 걱정을 겪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우환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쉴 기약이 없는 까닭이다. 얼마 안 되는 복을 탐내서 위험한 곳에 두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허리를 굽힌 채 고생스럽게 일을 하고 노심초사하며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마음속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억지로 마음을 다 잡으며 늙어 죽은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쉬는 것인데, 도리어 문제로 여기니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숙재집

 

- 장유승, 047. 쉬지 못하는 까닭,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12-113.

 

 

 어쩌면 이렇게 피로사회가 된 것은, 개개인의 삶 속에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만연한 이유는 결국 개개인 간의 경쟁을 야기하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있지 않은가 싶다.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좋은 직장에 가서 안정적인 자리에 오르고, 높은 위치에 올라 성공해야 하는 그 과정에서 향유해야 할 사람 간의 관계와 도리수단으로서 사용하는 목적전도의 현상이 뒤따른다. 그렇기에 3장에서 보여주는 관계에 대한 메시지들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네가 아침저녁으로 집안살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렇게 노비 한 사람을 보내니 네가 나무하고 물 긷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잘 대해주거라.

 

- 남사(南史)』 『도연명전(陶淵明傳)

 

- 장유승, 065. 이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50-151.

 

 

 

 도연명이 집안에 노비 한사람을 보내며, 아들에게 전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 어떤 신분질서가 없는 평등한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서비스직 종사자, 회사의 부하직원 등에 갑질을 일삼는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3장에 나오는 여러 마음에 남는 문구들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자신에 대한 타인의 비판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메시지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결국 평가나 비판에 민감한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도, 어쩌면 있는 그대로 사람-(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향유의 방식으로 대하기보다는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상의 질서가 견고했던 시대임에도 도연명이 노비(머슴) 한 사람까지 귀하게 대접했듯이, 우리 사회 또한 성공이나 성취’, ‘결과’,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그 개인의 본질을 바로 보고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한다.

 

by papyros 2017. 7. 26. 16:27

제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2.  필사 2회차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어느덧 손끝으로 문장읽기 2회차에 접어들었다.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를 통해, 일독하고 있는 『일일공부』 라는 책은 주제별로 총 6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난 1주차에 일독하고 필사한 글이 '내 마음 들여다보기' 였고, 이번 2주차에는 '나를 바꾼다는 것'을 주제로 한 문구들을 읽었다. 즉 성찰에 대한 글에 이어 구체적으로 자신을 '변화'할 수 있게끔 돕는 문구들을 소개해 준다.

 

  2장의 22번째 글, 「달아나는 마음잡기」에서부터 마음 한구석이 '쿵'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내 자신의 문제, 현재 내가 당면한 문제에 적중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중학 시절부터 늘 교직에 목표를 두어 왔고 당연히 임용고시를 치러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왔으나 근래들어 교직 뿐 아니라 상담분야에 대한 생각도 더욱 커졌고,  임용고시 외의 다른 길들 또한 자꾸 생각하며 어떤 것이 더 행복한 길일지를 탐색하게 된다.

 학부시절 존경하신 교수님 말씀대로..., 너무 어려운 시험이니 방어하고 회피하고 싶은 심리기제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달아나는 마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우선은 내 앞에 놓인 가장 큰 목표에 집중할 밖에. 춘추전국 시대를 살아갔던 맹자께서 시대를 뛰어넘어 내게 들려주는 조언처럼 여겨진다.

 

 맹자는 달아나는 마음을 잡는 것이학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디론가 달아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한곳에 고도로 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목표가 막연하면 스펙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이라는 안일한 마음보다 '주일무적', 곧 오직 이것뿐이라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실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달아나는 마음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장유승, 「 022. 달아나는 마음 잡기」,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62-63.

 

 더불어 25번째 글, 「오늘이 있을 뿐이다」 에서 정약용 선생님의 '오늘(현재)'을 살아가라', Carpe Diem을 상기해 볼 수도 있었다.



 

 2장을 읽으며 좋은 글들이 참으로 많았으나 특히 마음에 남았던 글을 꼽으면, 33번째 글인 「누구를 위해 사는가」 였는데,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항상 인정받으려고,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종종 지치는 감정을 느껴 왔는데, 결국 욕심과 습관 탓임을, 그리고 이러한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서 내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상기해 본다. 강신주 선생님의 『감정수업』 에서도 삶의 주인으로서의 감정, 그리고 노예와 같이 살아갈 때의 감정에 대해 읽고 강연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결국 타인의 평가에, 인정받는 것에 욕심을 부린다면 타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어 주인의 삶에 들 수 없을 것이므로 늘 경계하고 비워내며 내 자신 안에 들어있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만의 형형색색 빛깔을 계발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색의 크레파스 중 한 번도 쓰지 못한 크레파스를 골라 써보며 , 이게 나에게 맞는 색인지, 내가 좋아하는 색인지 알아갈 수 있듯이..

 

 

 

 

 나와 남을 비교하면 나는 가깝고 남은 멀다. 나와 사물을 비교하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거꾸로 가까운 것이 먼 것의 명령을 따르고, 귀한 것이 천한 것을 위해 일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욕심이 지혜를 가리고 습관이 진실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성내는 감정과 모든 행동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남을 따라서 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고 얼굴 표정을 꾸며 가면서 남에게 심심풀이를 제공한다. 정신과 육체 하나 나에게 속한 것이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중략)

 

이용휴는 이렇게 나를 잊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원인으로, 욕심과 습관을 지목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 그리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는 습관 탓에 결국 나의 몸과 마음이 남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지혜를 쓰고, 내 안의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나를 위한 삶을 되찾는 방법입니다.

 

- 장유승, 「 033. 누구를 위해 사는가」,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84-85.

 

by papyros 2017. 7. 19. 2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