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욱, 정치의 시대 -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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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게시물은  창비출판사 『정치의 시대 소책자 사전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중략)

유일하게 주권자인 국민에게만 권력을 딱 한 번 쓴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헌법이 권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헌법의 정의대로라면 주권자가 인정하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닌 셈입니다. 권력은 주권자에게만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떻습니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헌법이 그 사실을 보장하고 있다는 게 의외라고 여겨질 정도로 헌법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고, 오남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헌법에서 규정한 권력에서 크게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그들을 옹호하는 구체적인 판결을 예로 들 것도 없습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6-7.

 

나는 고등학생 때 수능 사회탐구 선택과목 중 하나로 법과 정치를 공부하고, 대학 신입생 때 법학과 전공기초 과목인 법학개론을 수강했을 정도로 -심지어 법학과를 부전공하고자 했다. 물론 심리학 복수전공과 교직수업의 방대함으로 인해 취소하고 말았지만- 법학이나 정치 등 사회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다소간의 관심을 가져온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의 대한민국을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행정부 수반이 주체적으로 자기 몫을 하지 못하고 한 개인에 의존하는 모습, 심각한 정경유착 등이 공개되고 난 후 충격을 금치 못했다. 물론 정치인이나 법조인들의 관행이나 관습,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암흑기(독재정치)를 역사책으로 공부한 내게 있어 행정부의 수반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심각성이 피부로 와 닿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정치인들에 특히 국정운영의 중심을 이루는 행정부의 수반(대통령)-대한 국민(책에서 인민이라는 단어의 필요성에 대해 더 명확히 나오지만, 편의상 국민으로 통칭한다.) 들의 기대가 높은 편이다. 이게 나라냐는 자조 섞인 질문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헌법 제 1조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듯 보이는 국가. 사리사욕에 앞서 국민들을 우선하지 않는 국가.

많은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며 매우 추운 겨울을 견디어 올해 초 헌재의 탄핵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이 책의 제목을 질문으로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최강욱 변호사)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 이는 한국 사법의 구조적인 문제탓이다. 실망스러울지 모르나 생각을 전환시켜 본다면 사법의 구조적인 문제가 변화된다면 법이 정치를 심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사법의 두 축인 검찰법원조직의 구조적 문제를 제시한다. 두 조직 모두 위계질서에 따른 서열화가 핵심 문제로 등장한다. 우선 검찰의 경우, 검사들이 지니고 있는 막강한 권력인 기소권이 이와 관련해 쟁점이 되는데 이 기소권의 행사에 있어 대상에 따라 기준이 바뀌거나 검찰 조직 내부의 윗사람(검사장 등)의 개입이나 압력에 의해 검사 개인의 법적 판단이 침해 될 수 있다. 법원(사법부)의 경우 법관들의 임명에 있어서, 특히 대법관의 임명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 그리고 여야합의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는 만큼 정치적 성향에 대한 고려가 이미 선출에 있어 고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두 조직 모두 서열화문제는 심각한데 가령 성적이 좋지 못하거나 윗선의 눈 밖에 나게 되면 서울중앙지검에 다시 돌아오지 못해 검사로서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승진의 기회가 막혀버리며 판사(법관)의 경우에도 초기 발령을 성적순에 따라 획일적으로 배치할 뿐 아니라, 고등법원 부장판사라는 요직에 승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뒤따른다.

이렇듯 저자가 지적한 법조계의 문제는 몇 달 전 읽었던 김두식 선생님의 불멸의 신성가족의 화두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국민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법조인들이 소수의 국민들에게만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정치인 뿐 아니라 판사나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이 지나치게 신성화 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특히 성적이나 조직 내 순위에 의해 서열화 되어 같은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두는 것은 그 권력과 권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신성화작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과 일부 판사들은 정의의 여신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은 눈을 떠서 당사자의 사정을 세세하게 살피고 헤아리며, 그런 후에 저울에 달아서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판단을 해보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책을 펼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정확한 판결을 내린다.

(중략)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은 당사자의 신분과 지위를 확인해서 봐줄 사람인가 아닌가를 식별한 후에 형식적으로 저울에 다는 척을 하다가, 손에 든 장부를 보고 나에게 뭘 갖다준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한 다음 심판한다.

어떻습니까?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릴 듯한데, 바로 이 점이 대한민국 사법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21-22.

 

 

 

검경 조직이 자신의 법적인 양심에 따라 기소권을 행사하고, 법원이 약자들의 편에서 공정한 재판을 가할 때, 즉 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때 비로소 판사로서, 그리고 검사로서 이상적 모범이 되는 법조인들이 증가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법조계 내부의 자성적 기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기에, 사법 조직 개혁을 단행하려면 행정부나 국회 등 정치권의 문제의식이 자리해야하며, 법조계와 이해관계가 없는 인물이 개혁을 진행해야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조국교수의 민정수석 임명은 첫 단추가 잘 꿰매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검경수사권 조정을 통해 수사절차와 행정절차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데 그 방향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개혁이 다시금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충돌에 있어 국민들의 건전한 법 상식을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과 법조인의 유착과 정경유착 등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에서 해결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겠다. 법조인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나 모범생’, ‘우등생으로 불리는 이들이었고,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끊임없이 내부의 서열화가 자행되어 있어 우수한 인재로 상급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즉 학창시절 우등생으로서 급우들을 통제하는 한편 교사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당연히 해야 될 것이기에, 명령을 따라야 인정받을 수 있기에 그 어떤 비판의식 없이 상급자(대통령, 검사장, 부장판사 등)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제 2의 아이히만을 양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다. 때문에 법조인들이나 정치인들의 그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고자 할 때 이를 제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국민들의 시선, 그리고 법조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나와는 멀리 있는저 너머의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법적 도움을 제공하는 조력자일 뿐이며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신성화의 해체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서열화되어 있으며 획일화된 학벌위주의 교육 현실을 바로잡고 대학진학 및 직업 선택에 있어 특정 직업군의 이들이 지나치게 신성화되지 않고 고유한 직업윤리를 지닐 수 있도록 윤리 및 가치관교육, 직업의식, 그리고 교육 평준화가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특목고나 자사고 등 학습자 간 교육 격차를 확대할 수 있는 학교들의 폐지 또는 전환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단적으로 의사 면허는 합법적 살인 면허라는 한 의대생의 발언은 특정 직업을 신성화하며 특권화 해 온 우리 사회의 부정적 단면이라 하겠다. 서열화를 통해 학습자들을 줄 세우고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유하고 토론하고 논의하여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 가치를 지니고 있는 타자의 의견을 조화롭게 반영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문화를 변화시켜 나갈 때 법조계와 정치계의 문제도 해결되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법이 정치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보다 정치를 통해 올바른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집행하거나 법을 통해 판단하는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주권자의 입장에서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민주주의의 길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주권자의 뜻이 그대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법은 당연히 정치의 아래에 놓여야 하지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법이 올바로 만들어지고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주권자에겐 일종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최강욱, 정치의 시대, 창비, P111.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by papyros 2017. 5. 25. 13:50

 2017515. 스승의 날이다. 이번 스승의 날은 청소년 상담사 연수를 마친 후이기도 하고, 4월에 바빠 못 다 읽어 열심히 독서하고 있는 김탁환 선생님의 책,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를 읽는 중 제주도에서 온 편지이야기에 나온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김초원 선생님과 이지혜 선생님의 희생이 순직으로 인정된 뜻깊은 날인 만큼 이 날을 기록하고 새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더욱 들었다.

 김탁환 선생님의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그러나 세월호를 겪은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사실에 기초에 허구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분별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내용, 본질에 있음이다.

 교육자이자 상담자를 목표로 하는 내게 있어서 이 작품... 본문에 옮겨 둔 내용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다. '사소함에 대한 예민성/관심'과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한편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교육자에게, 그리고 상담자에게 매우 중요한/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다.

 비록 같은 반에 묶여있지만, 같은 학년으로, 같은 나이로 묶여 있지만 개별 학생(청소년들) 한명한명이 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들인 만큼 아이들 한명한명에 개별적인 집중과 경청을 해야 하며, 그들이 교사나 상담자에게 호소하는 내용- 주된 감정과 생각-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 다루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한쪽의 시각 뿐 아니라 열린 시각으로 내 앞에 있는 학생/청소년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성.. '여행하는 교사는 어떨까?'라는 한 문장에, 아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를 많이 느꼈다. 이를 위해선 가능한 많은 선입견을 제거하고 교사/상담자 자신이 많은 경험을 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

여행도 그렇고.. 일상 속에서 보다 많은 아이들을 가까운 자리에서 만나고 대화할 필요성...

세월호에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헌신하신 선생님들 , 그리고 나의 은사님들, 대학원 동기쌤 들에 비하면, 늘 많이 부족하여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많다. 그 중 유니나 선생님의 삶을 통해 늘 상기해야 할 부분으로 '사소함에 대한 예민성''선입견 없이/충분한 기다림을 갖는 경청의 태도' 그리고 '열린 시야'를 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며 함양해 가도록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늘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전세계의 많은 교육자/상담자 그 모든 스승들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사람은 모두 한 그루 나무란다.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자라는 나무. 이 나무가 결코 저 나무가 될 수 없고, 저 나무가 또한 이 나무가 될 수 없지. 그 둘은 하나로 만드는 모든 시도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어왔어.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우리 둘!"

실망하는 학생들을 보며 이렇게 살짝 희망도 주셨지요.

"각각의 자리를 지키며 , 저마다의 가지를 뻗고 꽃과 열매를 맺지만, 땅속 깊은 곳에선 두 나무의 뿌리가 만나 인사 나누고 엉켜 평생을 보내기도 한단다. 내게 '사랑'은 땅속 뿌리들과 같아.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37.

 

 

 모든 교사가 학생의 삶에 영향을 끼치진 않겠지만, 어떤 교사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학생의 미래를 바꿔놓는답니다.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40.

 

 

 스물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많다면 많지만 적다면 매우 적은 나이에요. 제가 그 나이에 이르고 나니, 과연 제가 선생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선생님처럼 끝까지 배에 남아 학생을 찾아다녔을까 스스로 묻곤 한답니다. 이 차이가 학생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또한 두려웠어요.

 

 지난 2, 선생님의 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는 기차에서 두 가지 추측을 해보긴 했어요. 제 부족한 생각일 뿐이니, 혹시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는대도 속상해하진 마세요.

먼저 사소함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과 그 사소함들을 알아차리는 선생님만의 예민한 감각이 배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반을 맡고 겨우 한 달 반이 흘렀는데, 선생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취미와 장래희망은 물론이고, 식성과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멤버까지 아셨어요.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조금 다른 말투와 걸음걸이와 눈빛을 보내도, 선생님은 금방 알아차리셨죠. 그리고 표시나지 않게 그 학생에게 다가가선 관심을 드러내셨어요.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죠. 언제 한번 같이 네가 좋아하는 쫄면 먹으러 가자는 관심, 다음 달에 네가 좋아하는 보이그룹이 컴백한다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는 관심.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어요. 매일 이 교실에서 같은 공부를 반복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모두 다르다고. 완전히 일치하는 똑같은 반복은 이 세상에 없다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내일과 모레가 다른 법이라고. 그러니 누군가 반복이라서 시시하고, 반복이라서 관심 두지 않아도 잘 안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라고. 우리가 죽는 날까지, 완전히 겹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반복 속에서, 혹시 선생님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신 건 아닐까요. 15도 배가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45도 배가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 75도 기울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없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여섯 글자라고 해도, 상황이 바뀌면 의미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배의 각도에 따라, 우리 반 객실의 유리창에 비친 바닷물의 출렁임과 색깔이 달라지듯이 15도는 객실을 벗어날 수 있어도 가만히 있는 것이지만, 45도가 넘어가면 가까스로 움직여야 나갈 수 있는 것이며, 75도를 넘겼을 땐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사소함은 사소하니까 흔히 지나치죠. 저는 지금도 그래요. 교사가 되고 나선, 학생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으려 하지만, 잠깐만 딴생각을 해도 사소함을 놓치거든요. 사소함에 대한 관심과 예민한 감각을 늘 열어두고 지내신 선생님이니까, 반복되지 않는 차이로부터 비롯된 오해나 갈등 혹은 화해를 문장으로 옮긴 작가들을 제게 권하기도 하신 선생님이니까, 어쩌면 그 긴박한 순간에 전문가들 판단보다 선생님이 느낀 사소한 그렇지만 중요한 차이를 움켜쥐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하고 또 확인하셨던 것이고요. 배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렇게 외쳤더라면, 더 많은 친구들이 살았을 거예요. 선원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해경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교사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저는 선생님까지 원망할 마음은 없어요. 선생님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바삐 경심이를 찾으며 3층 식당으로 향하기 직전, 제게 눈길을 주셨어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셨죠.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널 믿어!

또 하나는 선생님 부모님을 뵙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깨달은 거예요. 선생님이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적해주고 싶은 부분이 있더라도, 끝까지 이야기하도록 뒀다고 하셨어요. 혹시 잘못되거나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이야기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요. 중요한 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요.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며 그 말씀을 듣고 있자니, 한 달 반 동안 선생님과 나눈 특별한 오후가 떠올랐어요. 선생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학생은 종례 후 남으라고 하셨죠. 그리고 한 사람씩 차례차례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비밀 이야기라고 하면 단 둘이, 딴 사람이 들어도 상관없다고 하면 함께 둘러앉아서, 학생은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은 들으셨죠. 저도 두 번 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딱히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기보다는 도대체 선생님이 방과 후에 학생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했답니다. 친구들 이야긴 솔직히 지루했어요. 꼭 선생님 앞에서 할 이야기일까 고개를 젓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죠. 선생님은 무슨 이야기든 끝까지 들으셨어요.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거짓말을 했어요. 부모님은 제게 교사가 되라고 하시는데, 저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요. 교사란 직업은 너무 따분해 보인다고, 그래서 저는 여행가가 되고 싶다고요. 이야길 하면서도 선생님 표정을 계속 살폈어요. 혹시 선생님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거나 눈귀가 올라간다면, 그 순간 이야기를 중단하거나 방향을 틀었을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끝까지 듣고만 계셨어요.

그날 바로 의견을 주시진 않았어요.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안에 반드시 의견을 주시긴 하셨죠. 길지는 않지만 핵심을 찌르는 의견이었습니다. 제게도 열 줄 정도 문자를 주셨어요. 그중에서 제 가슴을 찌르는 문장은 이것이에요.

 

-여행하는 교사는 어떨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맡기 전에 일본과 스페인을 여행하셨더군요. 교사와 여행가를 대립시킨 제 한심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 대신 유쾌한 절충안을 제시하셨고요. 여행하는 교사,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교사를 그만두고 여행가의 길로 나설 수도 있겠죠. 혹시 선생님도 이런 미래를 그리신 건 아닌가요.

 

부모님이 단 한 번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막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제게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함께 생활하는 교사들도 천차만별이에요. 학생을 공평무사하게 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교사도 또한 인간이니까요. 상처를 치유하고 넘어서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어요. 가령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봄에 침몰선에서 탈출했고, 민아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을 그 배에서 잃었으며, 담임선생님과도 재회하지 못하는 상처를 평생 지닌 교사죠. 이런 참혹한 경험이 있는 교사와 없는 교사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사소함에 대한 관심과 그 사소한 차이를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능력, 그리고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라도 거리낌 없이 하는 성격. 이것들을 선생님은 지니셨던 것입니다.

 

(중략)

 

언젠가 선생님이 그러셨죠. 편지를 손으로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 편지를 직접 가져가 단 한사람의 귀에 대고 가만히 읽어주는 것 또한 무척 특별하다고.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행복을 잊기 힘들다고.

 스물아홉 살 여교사의 모습을 제게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또 그러셨죠. 누군가에겐 고맙습니다란 말이 사랑합니다란 말보다 더 사랑스러운 법이라고. 제겐 봄꽃과 같은 선생님이 그래요. 정말 고맙습니다.

 

2025416

제주에서

윤현진 올림

 

- 김탁환, 제주도에서 온 편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돌베개, 149-157.

by papyros 2017. 5. 15. 20:49

 

 

 드디어 장장 9일 간의 71시간 연수의 마지막 날을 잘 마무리하고, 수료식을 마지막으로 연수가 종료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언제 9일이 흘러가려나 막막했는데 집단상담, 개인상담을 거치며 조원분들과 같이 눈물도 흘리고 웃고 속내도 터놓으며 시간이 너무도 빨리 흘러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특히 조장을 맡으며 조원분들께서 너무 과분할 만큼 격려를 해 주시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큰 힘이 되었다. 사실 조원분들이 아니었다면 뭐 하나 제대로 못했을 것 같은데도..! 정말로 감사한 지지자원(친구, 스승, 동료...)을 많이 얻은 건 이번 연수 중 제일 감사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

 특히 같이 식사를 한 번 더하고 싶었는데 저녁때 다들 일정이 있음을 아쉬워했더니 김밥을 20명분 싸오신 우리 조원분께 진실로 감동을 받았다..ㅠㅠ 집에서 만든 김밥을 먹어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중에서파는 김밥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아, 물론 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측의 운영진 선생님들께서도 너무 고생이 많으셨고... 불편하지 않게 배려해 주시는 세심한 모습들에 감동받았다..ㅎㅎ

 

 정신없는 하루였는데, 오전에는 전화상담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 강의를 듣고 실습을  진행했다. 3인 1조가 되어 조별실습을 할 때 나는 상담자 역할을 했는데, 상담자 역할을 해 보니 전화상담 시에는 게시판상담이나 채팅상담보다도 더 순발력이 필요함을 느껴서 훈련이 참 많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졌다.

 

 상담현장론 시간은 사전과제 때 조사한 5개 기관 중 세부분석한 1개기관이 같은 유형인 사람들이 한 그룹으로 모여 분석한 내용을 정리 및 의논하고, 대표기관을 중심으로 PPT를 만들어 8분 이내의 발표를 진행해야 했다. 나는 '쉼터' 를 조사했기 때문에 쉼터 그룹에 들어갔는데 혼자 조사했을 때보다 확실히 함께 논의하는 시간 속에서 배운 점이 참 많았다. 

특히 일전에 논문에서도 보았듯, 일시이동형-일시고정형-단기-중장기 등 기간별로 유형이 분류되는 쉼터의 경우 청소년들에 대한 지속적인 안정적 서비스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기에 쉼터 유형을 대상별로, 중점 사업 별로 체계화 할 필요가 있고 단기와 중장기가 점차 통합되어야 함을 여실히 느꼈다.

발표 준비를 위해 서기를 맡아 타이핑을 했는데, 좀 힘들긴 했지만 토론내용이 알찼기에 진실로 좋은 시간이었다.

 

 최근 나름대로 쉼터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 김하종신부님께서 대표로 계시는 '안나의 집' 청소년쉼터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로 임용고시를 치르지 않더라도 상담자로 활동하면서 공부를 지속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임용고시가 쉬운 길이 아닌 만큼 여러모로 고민을 해 보아야 하는 부분이겠고.. 욕심일 수도 있기에... 최근 몰려드는 생각을 물론  정리해야겠지만.. 

수료식 마친 후 바로 명동성당 청년미사에 참석하여 미사보는 중 느낀것은.. 특히 성소주일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주어진 소명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실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충실히 살아가며 주님께 몸을 맡긴다면 괜찮지 않을까..싶기도 하고.. 여튼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시점이다.

 

그리고 대망의 수료식까지 마쳤으니!!

이제 6월말에서 7월초면 집으로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이 배송될 것이다.

9일 동안 고생한 나 자신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한번쯤 전해주고 싶고..., 또 앞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으니 너무 조급히 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

 

 남은 건 교육자이자 상담자(특히, 대상관계+문학상담쪽을 더 공부하고 싶다..)의 꿈에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경로를 선택해야 할까.. 그 경로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가를 점검하면서, 실천하고 책임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뿐!! 잘할 수 있을거라 스스로를 더 믿어보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얻은 3급 연수였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감사함이 든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산재해 있기에 다 풀어낼 수는 없지만.... 일단 개인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부터 좀 알아보아야겠다.

 

사실 청소년기본법의 만 24세 청소년까지는 상담서비스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청소년기의 연장을 논하면서도 만 25세 이후 청년들은 청소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성인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인 듯한 느낌이다.. 고작 한 살 차이로...ㅠㅠ

만 25세 이후의 청년들을 위한 상담서비스도 - 단지 그 상담서비스가 '취업상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상담 및 집단상담 등 다양한 상담복지 서비스가 지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by papyros 2017. 5. 7. 2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