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밀란 쿤데라)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지된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선정도서는 한국소설이었다. 특히 한국문학의 기성세대가 아닌, 새로이 주목되는 젊은 작가님들의 책이 이번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기실, 한국소설의 젊은 작가들은 내게 있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서양 고전을 주로 읽어왔고,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익숙한, 검증된 작가의 작품을 읽어왔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김탁환, 엔도 슈사쿠, 에밀 아자르... 등등)
그런 의미에서 금번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주제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였고, 더불어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근래 온라인 서점 이나 도서 카페 등에서 자주 추천되곤 하여서 망설이지 않고 김세희 작가님의 『가만한 나날』 을 신청했고, 금방 책이 도착해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너무나도 난해한 문장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어서인지 몰라도 김세희 작가의 문체는 읽기에 평이했고 작품의 내용 또한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삶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친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개별 작품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 친숙하다고 하여 그 주제의식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거야」에서는 진아 를 통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속, 사회인들의 모습과는 다른 가치관이나 태도를 보이는 인물에 대해 은연중 우리 내면의 평가적 잣대를 드러내는가 하면, 「현기증」에서는 원희를 통해 자신이 절대 생각도 하지 못했고 꿈꿔본 적도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 모습에 대한 공허함과 수용의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작중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감추고 싶은 , 숨기고 싶은 모습일 것이다.
앞으로 남은 4주 동안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작품집에 나오는 여러 작중 인물들을 통해 평소 깨닫지 못하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이 되기를 진실로 희망한다.
- 본 게시물은 '창비'출판사 '눈가리고 책읽는당 활동'(버드 스트라이크 가제본 사전 서평단) 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출간 전 양서를 먼저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구병모 작가님과 창비출판사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서평 중 인용문의 쪽수(페이지)는 직접 구입한 <버드 스트라이크> 정식 단행본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다친 동물을 감싸기 위해서는 양어깨의 날개를 앞으로 모두 모아야 한다. 따라서 날개가 큰 자일수록 더 큰 동물을 보살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새의 보호를 받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그들은 때가 되거나 필요한 순간이 오면 모두 일정 크기의 이상은 날개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펼쳐 보아도 비오의 날개는 그 자신의 등을 덮기에도 모자랄 만큼 짧고 작았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6쪽.
“우리가 하는 말 …… 대강 알아듣지? 너희는 어릴 때부터 우리 말과 벽안인(碧眼人)들의 말까지 모두 배운다고 들었는데.”
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비오의 엄마의 엄마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시 사람들에게 유구한 세월 들볶이고 형태가 있는 거라면 뭐든 빼앗기는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고원 지대의 고유어를 제대로 기억하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지장을 비롯해서 열 손가락 안에나 들까. 마을 행사 때 단체로 부르는 노랫말 정도를 제외하곤 자신들의 말을 쓸 일이 없었다. 고원 지대에 남은 거라곤 이제 한 뼘의 땅과 흐드러진 꽃과 바람 같은 것들뿐. 애당초 그런 것들조차 소유하려 들지 않고 고원의 품에 되돌려주면서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들은, 도시인의 약탈로 인해 그런 꿈을 꿀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0-21쪽.
지금은 이미 구병모 작가님의 신작으로 널리 알려진 『버드 스트라이크』의 정식 출간 전, ‘눈가리고 책읽는당’ 활동의 일환으로 책을 수령하였다. 백색의 표지에 작품의 단서로 #새인간 #작은날개 #영어덜트소설(*Young Adult(YA)소설은 10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을 의미한다.)이라는 단 세 개의 해시태그(키워드)만 제시되어 있는 이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를 지닌 채 작품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내가 읽는 작품의 작가와 책의 제목도 모른 채 책장을 처음 넘겨가는 와중 ‘벽안인’과 ‘익인’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생소한 용어에 공간적 배경이나 시간적 배경이 특수한 SF소설인가? 미래소설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졌던 것도 찰나, 작품을 읽어내려가며 익인과 벽안인들의 관계, 그리고 핵심 주인공 비오(익인)와 루(벽안인)가 그들의 집단에서 자리하는 특수한 위치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과학기술과 문명을 지닌 도시에서 살아가는 ‘벽안인’들은 오늘날의 현대인들과 유사한 반면, 날개를 가진 사람들인 ‘익인’들은 도시의 벽안인과는 떨어져 그들만의 고원지대에서 살아가며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익인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벽안인들에게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심지어 벽안인들과는 달리, ‘날개를 지니고 있는’ 특수한 인종(人種)으로 여겨져 연구나 실험의 대상으로 자리하기까지 한다.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는 생활이었지만 청사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 청사 바에 사는 또래 아이들은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예를 들어 오늘 같은 경우, 책에서 사진으로나 보았던 익인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고원 지대에 모여 사는 익인은 날기에 최적화된 작고 가벼운 몸집에 성질은 순한 편이라 들었는데 어쩌다 오늘처럼 떼를 지어 청사를 공격해온 건지, 지적 수준이 도시인들과 같으며 동작이 빠르고 날기까지 해서 생포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잡혔는지 궁금했다. 낮에 그들이 천장과 벽을 두드려 대고 부수는 동안 진동을 일으키는 책상 밑에서 볼썽사납게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루는 이제 가까이서 포로를 관찰하는 특전 정도는 누리고 싶은, 아직은 천진난만하고 무신경한 나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감수성이 익인한테까지 미치지는 못했고 그들이 무언가 진귀한 대상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35쪽.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의 벽안인과 익인들 사이에서, 현 시행의 이복(異腹)동생이며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아버지의 고향에서 평화로이 살다가 갑작스레 어머니 아마라와 전(前) 시행의 재혼으로 정부청사에 들어오게 된 소외된 아이 벽안인(碧眼人) ‘루’, 그리고 날개가 있는 익인들 사이에서, 익인 어머니와 벽안인 친부(親父)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다른 익인들보다 작고 왜소한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익인(翼人), ‘비오’.
벽안인들의 청사에 납치되어 취조를 받던 비오가 고원으로 도망치기 위해 루를 납치한 다소 기이한 만남으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인종(人種)간의 경계를 넘어 루와 비오가 갖게 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자연스런 이끌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집단)에서 누구보다 약하고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타인과 동일시(同一視)한다는 것이 위험요소도 분명히 있겠으나, 비오와 루의 경우 이를 통해 외로운/소외된 이들 간의 연대와 유대로 이어졌고 그 외로움을 이해하고 품어 주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선물’과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기실 우리 모두가 누군가로부터 평가받거나 판단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축복이나 선물과 같은 귀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부끄럽지도 않아. 사실 축제 날 나 말고 다른 두 친구는 뜨거운 불 앞에서 이미 다른 이들의 청혼을 받았는데, 나한테만 아무도 청혼해 온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람이 도시에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이름뿐이었으니까. 서로를 부르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부르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평화의 친밀감과 흥분을 동시에 주는 이름. 단지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체취를 상기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의 껍질 안쪽에 자리한 영혼이 돌출되고 마는, 그런 이름 말이야.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07쪽.
“아주 잠깐이라도, 그 인연을 귀하게 여기세요.”
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기에 루는 엉거주춤 일어서려고 했으나 지장은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든 간에,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 만나 연결된 데에는 이치가 있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론 설명되는 연결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살아 있는 이유랍니다. 그러니 이어진 끈을 섣불리 자르려 하지 말고 그리로 마음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지내는 동안 루, 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26쪽.
작품 내에서 벽안인들과 익인들 사이의 불평등한, 차별적 관계와 루와 비오의 소외된 위치에 대한 내용과 메시지들이 유독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큰 목소리)로 들려오고 그만큼 마음에 남았던 것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2019년을 살아가는 현재까지 이러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하며 읽어 온 우리 세대의 명작, 해리포터(Harry Potter)만 해도 마법세계에서 순수혈통과 혼혈, 머글 간의 차별이 핵심이슈로 등장하며 머글 출신이기에 차별받거나 심각한 욕설을 듣기도 하고, 집요정과 같은 존재는 생명체로서의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한다. 최근 10주년을 맞이한 구병모 작가님의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2009) 또한 말을 더듬고 집안에서 마음 줄 곳이 없는 소외되고 외로운 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 있다. 그만큼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다시금 차별의 실체와 소외된/외로운 이들 간의 연대와 유대, 존재의 필요에 대해 역설한 『버드 스트라이크』의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사회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고 동시에 고맙기까지 했다. 비단 다문화가정이나 난민문제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성별(여성/남성), 장애유무, 성적 등 다양한 방면, 어떠한 상황에서 약자이며 소수자일 수 있고 소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빠, 어떻게 좀 해 봐요. 내 작은 날개로는 이 아이를 덮을 수 없어요.
죽어 가는 다람쥐를 안고 속을 끓였던 그 때, 아버지는 뭐라고 했더라.
사막의 밤바람이 부러진 뼈마디를 속속들이 핥고 지나간 비오는 이제 상반신을 완전히 일으켜서 버티고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날개 따위 신경 끄렴.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냥 그대로, 꼭 안아 주면 돼.
그것이 뭐든 간에 자신이 가진 것을 주면 된다고, 아버지는 그랬던 것 같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56쪽.
“베푸는 겁니다. 무엇이든 나눠 주는 거지요. 자기가 가진 거라면, 하다 못해 한 줌의 체온이라도 말입니다. 조각 내서 나눠 줄 수 없으니 그 순간 눈앞에 있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해서 마음의 전부를 주는 것,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58쪽.
한편 작품이 영 어덜트(Young Adult) 소설, 즉 성장소설이자 교양소설(입사식 교양소설)로서 정체성을 지니고 자리할 수 있는 ‘성장’에 대한 화두‘ 또한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익인들의 사회에서 성인이 되는 열여덟 살을 맞는 ’이행식‘은 굉장히 중요한 순간으로 다가오는데 루의 항의로 인한 지장의 내적 갈등과 변화 전까지 비오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작은 날개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여덟살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행식에 참석할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였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를 통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고 예속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성장’이라 볼 수 있을까?
2019년 대한민국의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성인들이 20-30대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리적, 경제적 독립이 되어있지 않으니 완벽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이르기에도 어렵다. 주요 애착대상이었던 가족, 부모에게서 온전히 독립하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혼자 비행하기 위한 ‘독립’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작품은 비오의 일화를 통해 이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비오에 대한 차별에 대한 지장이 지니는 문제의식과 비오의 정체성 확립은 익인들 모두와 비오의 성장에 주요하게 자리한다.
우리는 열여덟 살을 맞이하는 해에 날을 정해 놓고 다 같이 모여서 이행식을 한단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일.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날. 그 도약을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날. 그해에 열여덟 살을 맞이하는 사람이 비록 한두 명에 불과하더라도 그 날은 마을 전체의 축제일이란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한 해에 한 명은 꼭 있어. 많을 때는 아홉 명까지도 있었고 나 때는 세 명이었지. (중략) 사실 내게는 별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단다. 내 몸의 달맞이는 이미 한참 전에 시작했고, 그날의 축제는 나이를 한 살 다 먹는다는 의미일 뿐 사람의 인생에 어떤 경계나 구획이 명확히 그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축제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 누구도 내가 다음에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지 않는데, 그 시간과 함께 아이의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행위가 나한테는 새삼스럽게 여겨졌단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05-106쪽.
“그 애는 아닙니다.”
“예?”
“비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되긴 하지만 비오는 우리 안에서 온전한 어른으로 지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그런 비난에 가까운 폭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도 비오의 앉은 자세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중략)
“……우리 비오라면서요.”
(중략)
“그래도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 전 제 얘기를 코로 들으셨나 봐요. 웅장하고 경직된 청사 안에서 아무도 저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숨 쉬는 것 말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갈 수 있는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었어요. 제가 원해서 그곳으로 간 게 아닌데도요. 그런 저한테도 축복을 이야기하시고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비오에게는 이러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28-130쪽.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지나치게 잘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규격에 맞도록 어깨를 움츠린다는 게,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안 그래도 작은 날개가, 비오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 더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크게 활짝 펼칠 자격이 없다 하면서.
지장은 비오에게서 어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초원조는…….”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옛사람이 문득 입을 열어 소리를 내자 지장은 고개를 들었다.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든 간에…… 생긴 그대로 품어 주었네.”
다른 사람들의 불안과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조치가, 생각보다 너무 길고 가혹한 대가가 되어 그 애에게 영원한 유목민 내지는 이주자의 낙인을 찍어버린 걸까. (중략)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45-147쪽.
비오는 그 전까지 형식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던 이행식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실은 자신이 이 문을 통과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얼룩의 자리를 옅은 기대감이 채워나갔다. 비오는 한 명의 당연한 익인이었다. 도대체 날개가 있는데 익인이 아니라면 뭐란 말일까?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87쪽.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방영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본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잊을 수 없다. 그 드라마의는 대한민국의 사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 결국 자녀의 인생이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핵심 메시지로 강조하고 있었다. 구병모 작가의 <버드 스트라이크> 또한 맥을 같이한다. ‘루’는 비오를 구하면서 자신이 지닌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유영기 조종사의 직업을 선택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비오는 어머니와 가족, 익인 사회의 품을 떠나 완벽한 독립을 위한 비행을 시작했다.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청소년, 청년들의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고 그들이 그 가능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끔,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10년간 오랜 사랑을 받은 구병모 작가의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선택과 ,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바 있다.
최신작 『버드 스트라이크』에서도 이 주제의 맥이 다른 언어와 서사로 그려진다. 루와 비오의 성장을 통해 다시금 청(소)년들에게 성장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 구병모 작가님에게 진실로 감사드리며 10주년을 축하하고 싶다.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성찰과 선택하는 삶을 통한 성장에 대한 작품들을 더욱 오래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보며 차기작을 다시금 기다린다.
엄마와 나를 그 집에 두고 먼저 떠난 비오가 원망스럽기도 해. 하지만 그것이 비오의 선택이라면, 존중해 주려고. 비오는 결코 원해서 그와 같은 몸을 하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니까.
출발하기 전날까지 지장 어른을 비롯해서 아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오랫동안 인사를 나눴어. 그걸 보니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는 걸, 일시적이며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완전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꼭 그렇게 우리 옆에서 멀어지고 홀로 되어야만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나아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날아가고 싶은지……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 수 있는 거냐고, 마지막 날 밤까지도 나는 묻지 않았어.
아이들이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는 게 맞는 거라고 엄마가 허락한 걸, 내가 무슨 자격으로 따질 수 있겠어.
아쉬운 점은 약 100페이지 (6부와 7부)만을 남겨둔 채 필사 후기와 독서 후기를 작성하는 것이랄까.
기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서사가 확실하고 인물 간의 관계가 뚜렷한 소설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쿤데라의 문체가 익숙치 않거나 나와 맞지 않은 것인지,
혹은 이 작품이 특별히 어려운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다른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불멸>의 진정한 매력은
개별적으로 보이면서도 함께 엮여 이어지는 서사 속에서
인간 내면의 핵심을 짚고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이번 주차에 5부 마지막까지 읽으며 다시금 그것을 느꼈다.
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이 삶을 숨가쁘게 질주해야 하는 '도로의 세계'를 살고 있다. 도로의 세계에서 벗어나 길의 세계의 풍경을 둘러볼 수 있을 때,
삶 자체보다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둘 때
진정으로 의미있는 삶, 조금이나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2월 말 여러 곳의 학교에 기간제 원서를 넣느라 지쳐있는 내게 조금은 쉬어가도 된다고, 위로를 전하는
조언을 해 주는 중요한 메세지들이 눈에 유독 밟혔다.
아직 쿤데라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늘 존재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했을 그와, 그의 작품 <불멸>의 깊은 가치가 더욱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3부 투쟁」, 『불멸』, 민음사, 2011, 412쪽.
길들은 풍경에서 사라지기에 앞서, 먼저 인간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인간은 걸으려는 욕망을 느끼지 않고, 걷는 데서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 역시, 인간은 길처럼 보지 않고 도로처럼 본다.
(중략)
도로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경치란 아름다운 작은 섬 하나, 긴 섬이 다른 아름다운 섬들과 연결하는 그런 섬을 의미한다. 길의 세계에서는 아름다움이 지속적이요, 언제나 변한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걸음을 멈추라'라고 말한다.
쿤데라의 문장 자체가 익숙치 않아서일까, 아니면 유독 이 소설인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난이도 높은 작품이어서 그럴까... 그의 작품 중에서는 처음 접하는 소설인지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책의 내용을 내면화 하는 데에 있으니...
다음주까지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 못하더라도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읽고 후기를 남기고자 한다.
3부 「투쟁」 뒷부분을 모두 완독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 브리지트의 피아노에 대한 일화에서는 '스카이캐슬'에서 그렇게도 차교수가 외치던 '피라미드 꼭대기'를 부숴버리던 장면이 겹쳐보였다. 학습자에게 그 학습이 자발적이거나 행복하지 않다면, 비자발적이거나 강요된 무언가라면 과연 그것이 아무리 좋은것이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일까?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핵심적 질문이 브리지트로부터 등장했다.
로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녜스의 집에 들렀다. 그녀는 브리지트를 친딸처럼 보살폈고,
언니에게 피아노를 사 준것도 조카가 피아노 연주를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브리지트는 피아노를 싫어했다.
로라가 마음 상할까봐, 아녜스는 딸에게 좀 힘이 들더라도 흑백 건반들에 애착을 가져 보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브리지트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렇담 이모를 즐겁게 해주려고 제가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 밀란 쿤데라, 「3부 투쟁」, 『불멸』, 민음사, 2011, 168쪽.
헤밍웨이의 일화를 통한 '기자'라는 직군이 지녀야 하는 직업적 태도에 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언론이, 언론인들이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많은 양의 정보를 다량으로 만들어내기에만 급급하기에.... 현실의 씁쓸함을 다시한 번 느낌과 동시에 기자라는 직업이 본디 이러해야 하는 구나를 다시금 통찰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기자라는 직군 외 다른 직업에도 통용될 것이다. 직업윤리를 지키며 도덕성을 추구하는 태도..)
예전에는 기자의 영예를 가리키는 상징을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는 위대한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간결하고 허식 없는 문체는 물론이요, 그의 작품 전체가, 사실은 청년시절 그가 캔자스시티 신문들에 보냈던 취재 기사들에 그 뿌리를 뒀다.
당시 기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숨겨진 구석들을 파헤치고, 거기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어 스스로를 더럽히기도 하면서, 그 어떤 직업보다 더 현실의 삶 가까이 다가간다는 걸 의미했다.
헤밍웨이는 그토록 삶의 밑바닥에 있음과 동시에 그토록 예술의 하늘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그런 책들을 쓴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 밀란 쿤데라, 「3부 투쟁」, 『불멸』, 민음사, 2011, 168쪽.
또한 인권을 위한 투쟁이 대중화되면서 모든 욕구가 권리로 변화되었다는 문장에 매우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행복추구권,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자유와 권리는 물론 분명 보장되어야 하고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과거 이 권리를 위해 절실히 투쟁하고 노력하던 그 시기만큼이나
우리는 사회의 약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성해야 할 문제라고 여긴다.
인권을 위한 투쟁이 대중화될수록 점점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한 채,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통된 태도가 되었고,
모든 욕구를 권리로 바꿔놓는 일종의 에너지가 되어 버렸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인권이 되었고,
모든 것이 권리로 바뀌었다.
사랑의 욕구는 사랑의 권리로, 휴식의 욕구는 휴식의 권리로, 우정의 욕구는 우정의 권리로, 과속으로 달리고 싶은 욕구는 과소그로 달릴 권리로, 행복의 욕구는 행복의 권리로, 책을 출판하고 싶은 욕구는 책을 출판할 권리로, 야밤에 길거리에서 소리치고 싶은 요구는 야밤에 길거리에서 소리칠 권리로
바뀌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3부 투쟁」, 『불멸』, 민음사, 2011, 223-224쪽.
다음 주차에도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문장들을 이 책에서 많이 마주하고 싶고, 무엇보다 어떤 방식으로 작품이 마무리될지 매우 궁금하기에...부지런히 열독하고자 한다:)
제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3주차. 이번 주차에는 『투쟁』 부분을 읽었다. 최근 기간제교사 원서를 접수하러 다니기도 했고 3부인 『투쟁』이 너무 길기도 해서 이번 3주차에는 그리 많이 책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급히 읽지 않더라도 천천히 , 깊이 읽는 것이 독서의 의미라 생각하기에..
얼마 안 되는 3주차의 독서 후기이지만 글을 올린다.
3부 초반에는 다시 아녜스와 로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2부에서 잠시 옆길로 새었다가 돌아온 느낌이랄까.
3부를 읽는 도중 로라의 아녜스를 향한 외침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아마 내가 로라처럼 살아와서 그럴까.. 사범대 입학에 아쉽게 실패했음에도 교직이수를 위해 편입을 향해 최선을 다했고 국어 임용의 길이 너무 힘들어보인다고 교직을 포기하지 않고 플랜비인 전문상담 임용 쪽도 마련해 두고 있을 만큼... 삶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아녜스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로라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아녜스의 삶의 방식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로라의 말처럼 단 한번뿐인 삶이기 때문에 그만큼 시행착오를 누구나 겪기 때문에.... 20대 후반까지 열심히 공부하며 애를 쓰고 있는 내게, 특히 기간제교사 원서를 접수하며 2월을 참 복잡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 내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난 노래를 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언니는 자신의 야망을 제 발로 차버렸잖아. 난 패배했지만 언니는 항복했다고."
"한데 내가 왜 꼭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는 거지?"
"언니! 인생은 한 번뿐이야! 피할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뭔가 우리 뒤에 남겨둬야 하지 않겠어!"
- 밀란 쿤데라, 「3부 투쟁」, 『불멸』, 민음사, 2011, 156쪽.
한편 자아의 유일성, 독창성을 가꾸는 아녜스와 로라의 두 가지 방식도 흥미로웠다. 과연 나는 자아를 어떤 방식으로 가꾸고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자아를 가꾸어갈지 고찰하고 필요한 방식을 적절히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아녜스와 로라의 방식 그 중간지점 어딘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차에는 조금 더 힘을 내서 3부를 마무리하고 4부,5부... 완독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싶다 :)
밀란 쿤데라의 책을 처음 접하는 거지만... 독서 중간의 개인적인 소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철학적인 작가인 듯 하다.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눈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제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도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이번 주차에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 중 제 2부 <불멸> (민음사 p75~p144) 까지 일독하고 필사를 진행하였다. 기이하게도 지난 주에 일독했던 1부의 얼굴과 완전히 다른 서사가 전개되었다.
우선 괴테와 나폴레옹과의 만남을 통한 작은 불멸과 큰 불멸의 차이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가 삶을 마치고 우리를 기억해주는 이들에 회자되는 작은 불멸, 그리고 좁은 차원이 아니라 그 사후에까지 많은 영향력을 떨치는 예술가와 정치인들의 큰 불멸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일전에 관람하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의 서사가 생각나기도 했고, 지금 이렇게 작품을 접하고 있는 밀란 쿤데라를 비롯해 헤르만 헤세, 괴테, 헤밍웨이, 셰익스피어... 소위 고전을 쓴 작가들의 작품이나 빈센트 반 고흐 , 모네 등 화가들의 작품..그리고 작년 말 대한민국을 강타한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이 반증하듯이 음악까지도.. 그 사후 더욱 많이 회자되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불멸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 (모리비아 마을의 그 시장이 꿈꾸던 불멸)과 큰 불멸,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을, 도무지 사실 같지 않고 있음직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론의 여지 없이 가능한 그런 엄청난 불멸에 맞닥뜨리게 하는 생애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정치가의 생애가 그렇다.
- 밀란 쿤데라, 「2부 불멸」, 『불멸』, 민음사, 2011, 82쪽.
그리고 괴테와 그의 연인 베티나에 대한 서사를 통해 그 안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인생의 전개 과정에서의 '불멸'에 대한 수용이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특히 죽음이란 것이 너무도 먼 일인 것만 느껴지는 , 가장 행복한 1단계, 곧 청춘기를 보내고 있는 20대로서 내가 죽음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더불어 내가 인생의 말년인 제 3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도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의 태도를 향해 성장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음 주차에 일독하게 될 3부 <투쟁>에서는 또 어떤 문장들이 내 심장을 뛰게 할지 기대가 된다.
인생이라는 시간의 전체 틀을 이해해야 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까지는 신경 쓰고 근심하기엔 죽음이란 것이 너무나 먼 일로 여겨진다. 죽음에 대한 전망도 없고, 죽음이 보이지도 않는다.
가장 행복한, 인생의 1단계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는 목전에 다가선 우리의 죽음을 보게 되며, 우리 시야에서 떼어낼 수 없게 된다.
- 밀란 쿤데라, 「2부 불멸」, 『불멸』, 민음사, 2011,119쪽.
잠시도 죽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인생의 이 2단계가 지나면, 가장 짧고 은밀한,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얘기도 하지 않는 세 번째 단계가 온다. 우리의 기력이 쇠하고 견디기 힘든 피로가 삶을 사로잡는다.
피로라는 것, 그것은 사람을 삶의 기슭에서 죽음의 기슭으로 나르는 침묵의 다리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으므로, 이제는 죽음을 바라보는 것조차 지겹다. 그래서 예전처럼 다시, 죽음에 대한 전망도 없고 죽음이 보이지도 않는다.
어떤 대상에 너무나 친숙하고 그 대상을 너무나 잘 알 때는, 그것에 대한 전망도 없어지는 법이다.
피로에 지친 인간이 창문을 통해 나뭇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
마로니에, 포퓰러, 단풍나무. 이 이름들은 존재 자체처럼 아름답다. 키 큰 포퓰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올린 운동선수 같다. 화석이 된 긴 꼬리 불꽃 같기도 하다.
포퓰러, 아, 포퓰러.
불멸은 덧없는 환상이요, 깨어진 말 [言]이요, 나비 채를 들고 좇는 바람의 숨결이다.
피로에 지친 노인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포퓰러의 아름다움에 불멸을 견주어 본다면 말이다.
불멸, 피로에 지친 노인은 이제 더는 불멸을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귀찮은 쇠파리"라는 말은 그의 작품에는 물론이요 그의 인생이나 불멸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말은 수수한 자유에서 온 말이다.
오직 인생의 3단계에 도달한, 그리하여 더는 불멸을 관리하지도, 중요한 일로 여기지도 않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쓸 수 있다. 그런 극한까지 이른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일단 거기 도달한 사람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음을 안다.
제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의 작가는 다름 아닌 밀란 쿤데라였다.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이나 #농담 같은 유구의 소설들로 이미 잘 알려진 밀란 쿤데라의 명성은 모르지 않았고 실제로 아직 완독하지 못했으나 쿤데라의 책들도 몇 권 소장하고 있던 차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 처음으로 도전할 구실로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프로그램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이번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에도 지원을 하고 말았다.
쿤데라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정독을 시작한 <불멸>이라는 이 소설은... 문체가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서사 전개가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그런지 소설이라기 보다 좋은 문장들로부터 사유를 이끌어주는 인문학 서적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자아에 대한 아녜스의 사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부분...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아녜...스에와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마음을 울렸다. 아직은 낯설고 새롭기만 한 쿤데라의 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다음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이 소설에 더욱 몰입할 수 있기를, 매료되기를 기대한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E-book cafe<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매직하우스 출판사'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김연정 작가님과 매직하우스 출판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H. Carr.
역사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접했을 에드워드 카의 문장이 있다. 도서를 읽으며, 에드워드 카의 이 유명한 문장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2016년 촛불정국 이후의 대한민국과 안중근이 살아가던 1900~1910년대 즈음을 넘나들며 서사를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2016-2017년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 속에서 저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즈음, 여러 강대국들에게 위협을 받는 와중에서도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조선, 대한제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왜 특별히 안중근이었을까. 안중근에 대해 다룬 역사서나 문학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책의 제목은 나를 특별히 매료시켰다. 안중근과의 데이트라니, 이 책을 통해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고 그에게 더 깊이 감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소간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나갔다.
작품은 저자의 자전적인 내용(수필)이 반영된 현대사회의 서사와 허구화된 내용이 가미된 소설로서의 안중근 의사의 서사를 교차시킨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삶이나 일생보다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조선-대한제국의 국내외 정세와, 조선 사회가 타국의 종교나 문화를 수용하기까지 발생한 근본배경과 가치관에 대해 더욱 비중을 두어 지면을 할애한다. 언뜻 의아해 보일 수 있으나, 작품을 읽으며 저자가 서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추구하게 된 가치관과 종교관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내면에 깊이 와 닿은 부분 몇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우선 만국공법에 의거해 의병군 동지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포로들을 풀어주려고 한 안중근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조선인들을 수탈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기에 앞서, 개개인으로서 생명이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한 사람으로 대우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제강점기 당시뿐 아니라 당대에서도 너무나도 어렵고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독일, 일본 등 전체주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대조적으로 개개인을 중시하는 안중근의 가치관을 통해 안중근이 진정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안중근에 대한 일화도 인상적이었는데,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군중들을 ‘폭도’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런 억압에 동조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을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꿎은 민초들까지 모두 폭도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분명 잘못 되었음을 나는 다시 말하고 싶다. 그때 안중근은 16세였고, 아직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쩌면 어른들에게서 들은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그들을 폭도라고 규정한 건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에게 그런 생각을 가르친 기득권 세력이었을 것이다. 아직 열여섯살밖에 도지 않은 아이에게 ‘쟤들은 폭도야. 그러니 잡아 죽어야 해’라고 가르친 어른들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중략) 백성이 어째서 폭도인가. 내 사정을 들어달라고 소리쳤을 뿐인데, 그런 말을 하면 폭도란 말인가. 민주주의를 내놓으라며 시위한 광주 사람들이 폭도인가. 추운 겨울에 광화문 한복판으로 뛰어나와 촛불을 들고 있는 저들이 폭도인가.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평범한 부모들이 과연 폭도란 말인가.
- 김연정, 「4. 을사오적」,『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156쪽.
서구열강의 야욕, 일본의 식민치하. 조국을 강탈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는 혼란스럽고 상황 속에서 분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특히 더욱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일수록 부끄러움을 알고 더욱 깨끗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라 한다. 맹자가 주장한 수오지심(羞惡之心)과도 같은 이치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고, 너무도 분개하고 비탄하여 그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조국에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가 나라를 팔아 넘긴 을사오적과이나 친일세력들과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가치관과 신념(특히 동양평화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신뢰)을 믿고 사형 직전까지도 그가 지닌 사명을 다하고자 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강인함이 문장 너머로 깊이 전해져 왔다.
“지난날에 드러난 나의 행위는 내 나라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충심에서 비롯되었소. 여러분은 부디 동양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하여 전력으로 힘써 주시길 바라오. 그런 의미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중근의 제의에 지켜보던 일본인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수근거렸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 중근의 태도에 그들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74쪽.
특히 작품 속에서 가장 내면을 울렸던 구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기 직전에 올린 기도가 묘사된 부분이었다.
비슷한 시기, 문학(시)이라는 장르를 통해 일제 식민치하에서 창씨개명까지 하며 유학을 가 시를 짓고자 하는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윤동주 시인이나 조국 독립을 애타게 그리며 ‘백마타고 온 초인’을 기다린 이육사 시인과 달리 적극적인 방법의 조국 독립(무장투쟁의 일환)을 택했을 뿐,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이육사 시인 …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의 본질은 모두 같은 데에 있다고 여긴다.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던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십자가」를 통해 ‘교회당 꼭대기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하며 희생을 숙명으로 여겼듯이, 격살 직전 안중근 의사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주여….”
깨끗하게 방을 정돈하던 중근이 문득 무릎을 꿇었다. 가슴 위로 성호를 그리는 그, 손에 쥔 묵주의 무게를 느끼며 가만히 읊조렸다.
“마침내 심판의 날입니다. 조국을 걱정하는 이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소서. 쓸모를 다하였을 때, 비로소 하느님 곁으로 나아가겠나이다.”
아멘, 눈을 뜨는 순간 중근은 빛을 보았다. 방안을 비추는 전등의 맹목적인 충성과 다른 전혀 새로운 빛이다. 하얼빈의 살인적인 추위마저 녹여버릴 그 하얀 빛을 끌어안으며 중근은 미소지었다. 마침내 오늘, 비로소 나는 내 조국의 포근한 빛이 되리라.
- 김연정, 「7. 안중근, 마침내 쏘다」,『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96쪽.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해나가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세상, 윤동주 시인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이들이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관과는 대비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도록 내몰리지 않는 세상. 그런 세계가 진정 그들이 소망했던 평화가 자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소망을 품고, 그런 세계가 오기를 바라며 자신의 소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던 안중근 의사.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그 희생을 통해 반추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희생 위에 미약하나마 지금의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 여긴다.
단지 역사소설을이라는 장르를 넘어 현재를 통해 과거의 중요한 지점을 발견하고 그 지점 속에서 중요한 발자국을 남긴 한 개인으로서의 안중근을 재조명함으로써 현대 사회에 끊임없는 ‘노력’을 촉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리고 희망을 놓지 않는 이 책은 소설보다는 인문사회학 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게 이 책은 소명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사회 변화를 통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게 하는 잔물결을 남기며 내면에 깊은 영향을 남긴 소설로 자리하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지금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이 행복해졌을 때, 그간의 바람처럼 우리 국민 모두에게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을 때, 두 마리의 나비가 되어 그들이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 나란히 앉아 ‘야! 기분 좋다!’하고 소리쳤으면 좋겠다.해피엔딩이란 원래 그런 거다. 행복한 결말을 마주하기까지 수많은 아프고 괴로운 날들을 마주하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단지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말하고 싶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99쪽.
저 아이들이 살아갈 세사은 지금보다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더 이상 시위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나처럼 시위에 참여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제발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 김연정, 「1. 그해, 겨울의 촛불.」,『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3쪽.
『회색노트』는 민음사 홈페이지에서 7월의 ‘첫 번째 독자’ 서평 프로그램공고가 올라왔을 때 가장 눈길이 간 제목이었다. 12년 전, 중학 3학년 시절 지금까지도 안부를 여쭙고 종종 뵙곤 하는 국어과목 은사님께서 내게 직접 추천해 주신 책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소설이긴 하지만 아마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일 것이라고.
당시의 나는 아마 헤세와 김탁환 작가, 그리고 독서토론 수업에서 읽던 책들이 우선되었는지 언젠가 선생님께서 권해주신 책을 읽어보아야겠다고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고, 그렇게 12년이 흘렀다.
특히 도서 정보를 확인하니 두 소년의 우정과 성장, 교육에 대한 화두가 작품 속에 다루어져 있다고 하여 교육자를 목표로 정진하는 이로서, 도서를 접하기 전부터 기대가 매우 컸던 바이다.
왜인지『회색노트』라는 도서를 이미 소장중이었던 것 같아, 방을 살펴보니 언젠가 이사를 가시며 장서를 정리한 이웃분의 서가에서, 그리고 헌책방에서 판매하던 책 각기 다른 출판사의 『회색노트』 서적이 총 두 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만큼,『회색노트』라는 책이 뇌리에 남았고 마음 한켠에 항상 읽어야 할 책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책을 수령한 뒤 깔끔한 책 표지에 매료되었고, 책 속에 금방 몰입될 수 있었다. 책을 완독한 후에는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크와 다니엘의 우정이 마치 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 같기도 하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우정 같기도 하고. 또한 일전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책,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에 등장한 소년들의 우정도 생각났다.
헤세의 작품, 프레드 울만의 작품, 그리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자크와 다니엘의 우정에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청소년기(사춘기)를 보내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동경’을 기반으로 우정을 가꿔나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경이 마치 열망처럼 느껴지다보니 마치 우정을 넘어 사랑과 같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동경.
기실 그러한 동경은 자신의 내면이나 외적 환경에 부재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일수록 더욱 강렬하기 마련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서로 이성과 감성의 속성을 부러워하듯. 자크와 다니엘 또한 다니엘은 그가 가지지 못한 자크의 열망과 감수성에, 자크는 그가 가지지 못한 다니엘의 모범적이고 이성적인 면에 이끌렸기에, 서로가 친구의 소망을 이해해 주는 존재였기에 그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 교사들의 눈을 피해 회색 노트에 시를 통해 마음을 터놓고 강렬한 우정을 나눈 것이 아니었을까.
자크는 가톨릭 학교의 준기숙생이며, 종교적 생활 형식을 중요시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또 한번 뛰어넘어본다는 쾌감 때문에 이 프로테스탄트 소년의 관심을 사려고 했다. 그는 그 소년을 통해 자기의 세계와는 대립되는 세계를 이미 예감했다. 그리고 몇 주일 안 가서 그들의 우정은 불길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변했으며, 각자 자신도 모르게 괴로워하고 있던 정신적인 고독에 대한 위로를 상대방에게서 찾아내게 된 것이다. 청순한 사랑, 신비한 사랑, 그 속에서 그들의 청춘은 미래를 향해 똑같은 설렘으로 융합되었다. 그들 열네 살짜리 소년의 마음을 휩쓸던 격렬하면서도 서로 모순되는 온갖 감정, 누에 키우기나 글자 맞추기 놀이에 대한 열정에서부터 그들 내부의 은근한 비밀들,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삶에 대한 열광적인 호기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이 두 소년에게 공통되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91-92쪽.
그러나 기실 그들이 가출을 하게 된 가장 강력한 배경은 그들의 강렬한 우정보다도 가정, 학교, 사회의 환경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현대에 와서는 이미 고전(古典)으로 널리 읽히는 루소의 『참회록』을 금기시하는 시대적 분위기(교육환경),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크를 과도하게 보호하고 통제하려 하는 교사들의 태도, 그리고 시를 짓는 아들의 감수성과 관심사에 무관심한 가족환경(형을 제외하고). 자크가 가장 애정을 지니고 있는 친구와 함께 그러한 학교와 가족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어했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될 만큼 자크의 성장에 외부 환경은 매우 억압적이었다. 다니엘의 경우 같은 사회적 환경(교육환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자크와 다니엘의 가족환경이 가출 이후 그들의 삶에 결정적 차이를 빚은 것으로 보인다.
늘 아들 다니엘을 신뢰하고 필요한 순간엔 그녀의 아들과 딸을 보호하고자 강인해지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던 퐁타냉 부인. 특히 그녀가 아들의 노트를 증거물이라며 제시하는 비노 신부의 행동에 보인 언행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녀가 아들을 마음 깊이 신뢰하고 독립된 인격으로서 아들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부모의 태도라고 느꼈기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러한 어머니가 있기에, 타인을 존중하는 어머니가 있기에 소중한 친구의 제안을 수락하여 함께 가출하긴 하였으나 가출 기간 동안 내내 어머니를 그리며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러분, 저는 단 한 줄의 글도 읽지 않겠어요. 그 애의 비밀이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애 모르게 폭로되고, 그 애에게는 변명할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다니요! 전 그 애에게 이런 대우를 받도록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38-39쪽.
다니엘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었을까? 부인은 늘 하던 버릇대로 뜨거운 차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차에서 무럭무럭 올라오는 김 속에서 미소를 지으면서 불빛을 등진 그 얼굴은 확실히 좀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보아 온 그 얼굴이었다! 아, 이 미소, 이 오랜 눈길…….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129쪽.
주님은 언젠가는 남편이 선의의 길로 가도록 그를 돕게 하려고 방종한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 죄이 곁에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까? 아니다. 급선무는 가정과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다. 그녀의 생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자신이 더 굳센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제롬이 없는 동안에 기도로써 밝혀진 그녀의 마음속에 내린 판단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138쪽.
한편 자크는 비록 젊은 의사인 형, 앙투안이 그나마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좋은 형제이긴 하지만 앙투안을 제외하고서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가 가족 내에 없었을뿐더러, 아버지 티보씨의 엄격한 통제와 억압에 내몰리고 있었다. 특히 유력가 집안의 후손이고 정치인인 티보씨로서는 그의 아들을 엄격히 교육해 제대로 성장하게 하여 가문의 명예를 지켜나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티보씨가 자크에게 엄한 아버지였으며 아들의 관심사에 무심했을지 모르나, 그 또한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속으로는 아들이 달려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들을 위해 그리스도께 기도를 바치는 신실한 신앙인이자 나약한 한 개인이었다. 티보씨가 조금만 더 그의 아들이 무엇에 흥미를 갖고 관심을 보이는지, 힘든 점은 무엇인지 감정을 잘 헤아리고 보살폈다면, 아니- 자크가 가출 후 귀환했을 때라도 아버지로서 진심을 비추어 그를 어루만져주고 아들을 반기었다면, 자크의 비극적인 선택을 결심하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자크를 보는 순간 티보 씨는 마음의 동요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응접실에 그 복사판이 걸려 있는 그뢰즈의 그림처럼 죄지은 이들이 그의 무릎 앞으로 달려와 엎드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서재 역시 꼭 잔칫날처럼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때 마침 부엌 문앞에 두 하녀가 나타났으며, 더구나 티보 씨는 저녁에 입는 가벼운 재킷을 걸치고 있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 모든 예사롭지 않은 광경이 자크를 마비시켜버렸다. 자크는 유모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자기도 모르는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심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서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토록 애정이 복받쳐 있었다!
그러나 티보 씨의 첫마디는 그를 이미 이 가정에서 쫓아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자크가 보인 그 태도가 관대해지려던 티보 씨의 생각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아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기 위해 철저하게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아, 너 왔구나.” 그는 앙투안만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거기 일은 다 제대로 되었느냐?” 그가 내민 나른한 손을 잡은 앙투안으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자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얘야. 나 대신 그런 일을 처리해 줘서……. 그런 창피한 일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때까지도 죄 지은 아들이 달려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녀들을 흘끗 쳐다보고 나서 다시 자크를 쳐다보았다. 자크는 우울한 표정으로 양탄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티보 씨는 결정적으로 화난 말투로 말했다.
“다시는 그런 추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일 당장 방침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151-152쪽.
그곳에서 홀로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이 뚱뚱한 신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피로의 가면이 벗겨져 내리는 것 같았고, 얼굴 윤곽이 소박한 표정으로 변하여 어렸을 때의 사진 속 모습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는 기도대 앞으로 다가가 몸을 던져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툼한 두 손을 익숙한 몸짓으로 재빨리 마주 잡았다. 이곳에서의 그의 일거일동에는 무엇인가 편안하고 비밀스러운 자기 혼자만의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생기 없는 얼굴을 들었다. 지금 하느님에게 자신의 실망과 이 새로운 시련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모든 원한을 풀어 버린 그는 지금 아버지로서 길 잃은 자식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기도대 아래에 있는 종교 서적들 틈에서 묵주를 꺼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노트』, 민음사, 2018, 153-154쪽.
자크의 모습에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가 겹쳐보였다. 한스 기벤라트 또한 학업에 내몰린 교육적 환경 속에서 고되고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못하며 힘든 길을 지나가다가 종국에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도 마지막 과수원에서 만난 이의 손길이 있었다면 다른 선택지가 열렸을지도 모른다. 굳이 문학작품에서 찾지 아니하더라도, 사도세자의 비극은 또 어떠한가. 사도세자또한 지나치게 엄한 부친 영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몸을 ‘옹송그리며’ 살다가 병에 걸리지 않았던가.
결국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성장 중에 내면의 생각과 가치와 사회체계의 가치 사이에서 여러모로 혼란을 겪고 방황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어른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까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재능과 개성, 관심사와 선호에 반하는 것들을 억압하면서 무언가를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경청으로 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격려하는 것.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바로잡아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동등한 인격’으로서 대우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교육(敎育)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기실『회색노트』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8부작 장편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의 서두가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학교교육의 불합리성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가출을 결행하는 자크와 앙투안의 행동 속에는 그들의 가정환경 뿐 아니라 신교에 대한 가톨릭(구교)의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 또한 배경으로 등장했는데, 『회색노트』 이후 앙투안의 내면과 삶, 티보씨의 행동들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스포가 될지 모르겠으나 검색중에 알게 되었는데, 결국 자크는 비극적인 선택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를 결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좋은 작가를 마주하고 앞으로 완독하고픈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되어 진실로 기쁘고 이후의 서사가 참으로 기대된다.
『회색노트』는 나의 내면에 경종을 울리는, 짧고도 굵은 단편이자 장편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알리는 긴 여정의 출발점과 같은 작품으로 남았다.
「은전 한 닢」(226p)에서부터 시작해, 작품집 후기로 등장한 박준, 박완서 시인과 피천득 시인의 장남인 의사 피수영 선생님께서 피천득 시인께 보내는 애정어린 고백 내지 서편을 지나,「작가연보」(295p)까지 읽어내려갔다.
『인연』이라는 한 권의 수필집을 모두 완독한 주차인 만큼, 많은 소회가 밀려왔다. 5주라는 기간동안 읽어온 피천득 시인의 여러 수필들을 통해 느껴지는 그분의 가치관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시인이자 수필가로서의 피천득', '소박한 한 개인으로서의 피천득'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5주차에 읽은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순례」, 「여린마음」, 「기도」, 「우정」, 「만년」 과 같은 작품들이 가장 마음속에 남았다.
「순례」에서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읽고 그 문학작품을 현실, 외부세계에서 재인식하여 여러 감정과 가치, 생각에로 뻗어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순례'와 같다고 표현하신 부분이 참으로 마음에 많이 남았다. 나 또한 헤세를 통해 독일 교양소설 내지 성장소설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김탁환 작가님을 통해 백탑파 실학자들을 알아가게되었듯이, 문학은 다른 문학작품으로, 그리고 또다른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로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시켜 준다는 데 진실로 공감했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豐裕)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耘谷)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나무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바이런의 소네트가 아니라면 쉬옹의 감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요, 수십 년 전에 내가 크레인의 「다리(橋)」를 읽지 않았던들 작년에 본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가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보였을까.
- 피천득, 「순례」, 『인연』, 민음사, 2018, 239쪽.
「여린마음」에서는 한 사람으로서의 모든 개개인들에 대한 신뢰가 인상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팽배해질수록 개개인 간의 불신이 심해지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도 불구하고, 피천득 선생님께서는 보편적인 대다수의 소시민들이 지닌 '정'에 대해 강한 믿음을 지니시며 애정어린 시선으로 품어내셨다. 이 부분이 인상깊었던 것이, 실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사이 우리 내면에 깊은 정(情)과 선(善) 등의 가치가 있는데, 다른 가치를 추구하려다가 이렇듯 중요한 가치를 자주 잊고 산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지역 시민사회의 깊은 연대와 유대로 이어져 있던 것이 아니었는가. 몇년 전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우리가 울고 웃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본시 연한 정으로 만들어 졌다. 이런 연민의 정은 냉혹한 풍자보다 귀하다.
소월도 쇼팽도 센티멘털리스트였다.
우리 모두 여린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인생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 피천득, 「여린마음」, 『인연』, 민음사, 2018, 254쪽.
「기도」는 이미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녀온 신자이기에 더욱 와 닿았던 수필인지도 모르겠으나, 나 자신의 물질적 복락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닌 그저 마음을 비운 진실성 있는 기도, 인격적 성장과 내면의 행복과 지혜를 추구하는 기도가 더욱 의미있는 기도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하고 우리는 기도의 끝을 맺습니다. 어찌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 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타고르의 「기탄잘리」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의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그 힘을 저에게 주옵소서."
내가 읽은 짧고 감명 깊은 기도가 있으니 "저희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 피천득, 「기도」, 『인연』, 민음사, 2018, 260-261쪽.
「우정」과「만년」에서는 오랜기간 지속되는 벗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우정」에서 우정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 바, 벗 사이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데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만년」의 마지막 문단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나이가 점차 들어감에 따라 실질적으로 자주 교류할 수 있는 벗들이 점차 적어지겠으나, 마음 깊이 연결되어 있다면,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글로 그 사랑을 마음 깊이 전한 사람이라면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기에.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 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익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 피천득, 「만년晩年」, 『인연』, 민음사, 2018, 282-283쪽.
5주간 피천득 시인의 수필을 통해 피천득 시인을 간접적으로 마주해 왔다. 5주간 꾸준히 정독하고 필사하며 느낀 바, 피천득 시인은 참으로 겸허하고 소박하며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있는 분이셨다. 학부 시절 모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윤동주 시인의 내면이 다른 그 어떤 이들보다도 더 깨끗했으며 한 점 부끄럽지 않았기에 그만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즉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 더욱 겸허하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마주한 피천득 시인도 그러하다. 시와 수필을 통해 진정 중요한 가치를 담아내시고, 독자들, 제자들이 그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해 줄 수 있는 선한 마음과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셨음이 느껴진다. 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많이 사랑하셨고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들이 잘못되거나 떠나가는 듯 보일 때 아파하고 외로워하셨을 피천득 시인...
그렇기에 수필집을 읽으며 나의 내면도 안온해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박준 시인의 발문에 이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있다고 여긴다. 언젠가 피천득 시인의 수필과 시들로 문학치료 수업을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독서모임에서도 함께 읽고 싶다.
피천득 시인의 『인연』을 통해, 나도 또다른 누군가와,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좋은 문학작품과 좋은 인연을 맺기를 진실로 소망하게 되는 밤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상처들이 점처럼 찍혀 있고 물론 저에게도 숨겨지지 않는 큰 점같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때의 글은 사람의 상처와 얼마나 마주해야 할까요. 아니 꼭 글을 쓰지 않더라도 말을 뱉거나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어떻게 직면하거나 외면해야 할까요. 조선 땅에서 태어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나온 선생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더욱 자주 가지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법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도 생각합니다.
『인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작은 분명 외로움이나 슬픔인데 아무도 외롭지 않게 그리고 아무도 슬프지 않게 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선생님 특유의 천진과 소박은 그 여정에서 줄곧 가장 큰 빛을 내고 있고요. 아마 선생님이 화가였다면 그의 옆으로 가서 초상을 그리셨을 것입니다. 점이 보이지 않는 옆모습을 그린다고 해서 소흘히 하거나 왜곡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옆모습을 그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바람도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날려 줄 것입니다. 혹은 선생님이시라면 별이 많은 밤, 바닥에 누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림을 그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밤과 숱한 별을 담고 얼굴과 점도 함께 그려 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별이 점 같고, 점은 별처럼 보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