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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을 읽고

 

우리에게 확신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있다면, 이 세상의 학문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뚜렷하게 분별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보다 큰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사용하면 됩니다.’ (336.)

 

 

 1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면,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에서 그 중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신앙의 실천적 측면이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곧 신학과 철학의 양립 가능성 여부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특히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며 변증론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 주장하는 변증론자들과, ‘철학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신학의 시녀라고 주장하면서 이성을 경시한 반변증론자들을 중심으로 그 대립이 이어져 왔다.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쿠스 사이의 논쟁 또한 이 맥락에 서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신학과 철학, 즉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58.)라며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펼친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날카로운 이성의 도움을 받고자 한 아벨라르두스(86.)의 노력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 과정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회 내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이성신앙의 문제가 대두되어 왔으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고 하면서, 이성을 지닌 인간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이 이를 채워주고 완성시켜 주는 것이라 보았다. 즉 이성과 신앙은 하나의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며 철학과 신학은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것임을 주지한 바 있다.(213-215.)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에 대한 교회의 인정 및 수용 문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학문적인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서로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점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들에 대해 이를 일방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수용할 만한 장점을 찾아 기존의 문제(단점)를 보완하며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회 내의 여러 입장 차이 - 가령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교회 내 보수와 진보 문제의 패러다임 에 대한 편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상대 당의 약점만을 찾으며 배척하고 밀어내려는 여러 정치인들, 다른 종교를 배격하고자 하는 일부 이단이나 극단주의자들, 그리고 나의 가치관이나 입장과 다르다고 하여 누군가를 배척하고 배격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시각이 전제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실천또한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세리와 죄인, 과부 등 소외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먼저 돌보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한 이들이 있는데 청빈, 정결, 순명을 강조하며 시토회를 창설한 로베르투스, 그리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소유를 경계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수도회 규칙으로 청빈정결을 몸소 실천하며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보여주신 그 본보기는 세속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귀족적인 수도회의 행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즉 신앙을 단지 학문적으로, 그리고 명예를 떨치는 데에 사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배움과 학습을 넘어서 행동과 실천을 추구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현재 사제들의 자발적 참여로 활발히 운영되는 프라도 사제회또한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2권을 통해 우리들 그리스도인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깨우칠 바가 있다면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신앙의 정반합正反合을 확립하고, 확립된 굳건한 신앙을 단지 지식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이라 여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것이 바로 건전한 양심이다. 마땅히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의 두 극단을 모두 피하고 이성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통해 건전한 양심을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의식을 통감하고 교회 내에서 자성과 실천을 주도하시는 등 가장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분이 바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바로 현 프랑치스코 교황님이 아닐까 싶다. 교황님께서 보이시는 모범은 주교, 사제, 수도자, 심지어 평신도까지도 감화시키고 있다. 특히 626(2016)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라는 현재 교황명에 담긴 그 의의 교회 내의 과오를 반성하고, 현안을 검토하며 필요하다면 수용하며, 가치를 지향하고 몸소 실천하는 노력-를 상기해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아시아 주교단과의 만남

by papyros 2016. 6. 2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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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조선마술사>

 

마술사는 마술을 통해 관객들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옵니다. 가난이 없는 세계, 아픔이 없는 세계, 전쟁이 없는 세계, 원통함이 없는 세계, 분노가 없는 세계이옵니다.”

그 세계는 거짓이 아니더냐? 환상일 뿐이지 않느냐?”

고통 가득한 현실보다 행복 넘치는 거짓이 때론 삶을 버티게 하옵니다.”

(<조선마술사> 155-156.)

 

부자들은 마술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즐길 기회가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가난하고 미천한 백성들에게 물랑루 공연은 정말 큰맘 먹고 오는 자리이옵니다. 빈궁한 이들에게까지 비싼 입장료를 받아 배를 채우고 싶진 않사옵니다. (중략) 마술 앞에선 만인이 평등하옵니다.”

(<조선마술사> 156.)

 

내일이 오늘보다 밝다면, 배성들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옵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어둡고, 내일이 오늘보다 어둡다면 그건 곧 하루하루 죽음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특히 작년부터는 조운선 침몰에 돌림병에 가뭄이 이어져 더욱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저는 그들이 잃어버린 그 내일을 제 부족한 마술로나마 찾아 주고 싶사옵니다.

(<조선마술사> 157.)

 

현실을 견디기 힘든 사람은 저마다 황당한 꿈을 꾸옵니다. 이뤄지기 힘들지만 그 꿈을 꾸는 동안엔 위로를 받사옵니다. 마술은 그들의 꿈을 판 위에 잠시 옮겨 보여주옵니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마술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마술을 만드는 것이옵니다.”

(<조선마술사> 158.)

 

 

 작품 속 (정조로 추정되는) 임금과 물랑루의 마술사 환희의 대화 중 일부이다. 위의 인용구절에 볼 수 있듯 환희는 마술사로서 남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다. 마술 공연은 부자富者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빈자貧者들을 위한 자리라는 것, 그리고 물랑루 공연에서 마술이 펼쳐지는 그 순간만큼은 반상班常의 구분이 없는 것. 이는 분명 조선이라는 당대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가치관이다. 특히 환희에 따르면 마술의 의미는 마술을 관람하는 관객들, 바로 그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마술을 보는 이 자신이 마술이라는 환상을 통해 삶의 고통과 시름이 덜어진다고 믿는 순간 마술은 사실이 된다.

 그런데, 이는 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환희가 이야기한 마술의 의미와 동일한 역할을 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다. 작중 배경인 조선 후기 당대 사회 속에서 민중들, 심지어 규방 여성들의 삶에 시름을 잊게 해주는 것이자 유일한 낙은 바로 소설 읽기였다. 이덕무의 저서를 보면, 전기수가 <임장군전>을 낭독하던 도중 이에 청자가 이에 몰입하고 심취해 담배 써는 칼로 전기수를 살해했을 정도이니 이는 당시 소설이 민중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부녀자들은 세책(소설 대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비녀나 팔찌를 팔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빚을 내어 이를 감당하느라고 가산을 기울인 자도 있을 정도였으며, 작품 속에서 청명옹주가 부왕父王을 위로하기 위해 심청전 필사본을 별당에 두고 온 것처럼, 조선 후기 어느 아비도 시집가는 딸을 위해 임경업전을 밤새 필사해 아비 그리울 때 보라며 딸의 손에 넘겨준다.

 이처럼 당대 조선에서 소설은 시름을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환희의 마술과 교차되어 청명옹주의 소설쓰기(소설 필사)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작품 자체도 마술을 소재로 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청명과 마술을 하는 환희의 만남, 이들의 만남과 사랑이 의미가 있는 것은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늘 응달에서 그림자처럼 어둠속에 숨어 살아온 청명옹주는 소설로서 무료함을 달래 왔다. 그리고 환희를 통해 궁궐 담장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마주하며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오래도록 시달리며 성장해 온 환희는 청명이라는 여인을 만나며 혼자 지니고 있던 자신의 서사를 풀어 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청명과 환희의 만남은 소설과 마술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지 않을까. 분명 우리 삶은 소설이나 마술처럼 모든 것이 환상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내 삶에 소설이나 마술이 들어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사랑이라는 환상또한 실현되리라 믿는다.

지금도 유럽 어딘가를 떠돌며 마술 공연을 펼치고 있을 카타리나와 그녀의 조수 이븐 폴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다.

 

 

    

 

2. 영화 <조선마술사> & 시네마토크


 20151230. 2015년 한 해 동안 많은 영화들을 보았지만 해를 장식하는 마지막 영화가 된 <조선마술사>. 소설을 먼저 읽었고, 그 때문인지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각색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고 시사회를 관람했다.

영화에 등장한 물랑루의 화려한 모습. 7억짜리 세트를 지은 만큼 영화로 구현된 마술 공연장, 물랑루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원작과 비교해 삭제되거나 달라진 점이 많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영화 도입부에서 여왕의 대관식 장면을 제거하고, 정조임금의 청명에 대한 부친의 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 등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앞선 배경이나 상황이 제거되고 청나라로 떠날 위기에 처한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은 작품의 초반 내용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배경설명이 불친절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환희가 마술이라는 것을 대하는 자세(귀족만을 위한 마술이 아닌, 시름 있는 백성들이 잠시라도 현실을 잊기 위한 그러한 마술)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소설 전체에서 누누이 마술은 그 환상을 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핵심 메시지를 삭제한 것이기에 영화 스스로 추구할 가치를 제거해 버린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특히 사랑이야기의 핵심이 되자, 두 사람 간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마술 장면인 낙분술과 오작교 신을 왜 삭제했는지 퍽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두 장면이 존재했더라면 영화의 장면구현으로서도 충분히 관객들을 사로잡았으리라 보는데, 이 장면을 삭제한 것은 매우 아쉽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환희와 귀몰의 마술대결을 삭제 해 버린 점, 그리고 환희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마술사적?) 존중을 한 귀몰을 영화에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지키지 않는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그려냈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 매우 아쉬웠다.

 김탁환 선생님과 이원태 감독님께서 시네마토크에서 말씀하셨듯이, 정말 소설 전체를 제대로 구현해 낸 뮤지컬로 작품이다시금 재개봉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결국 영화로서의 각색에서 가장 큰 패착요인은 마술의 외적인 것에 치중해 마술이 지니는 가치와 내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두 제외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스크린 및 여타 자본의 한계가 있기에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구현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행 요인은 외적인 것 단 하나보다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가치를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공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by papyros 2016. 1. 1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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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읽고

 

교회 안에서도 때로는 자신의 사욕을 탐하는 사람들이 있고, 국가 안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지에 따라서 두 나라 중에서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가 정해집니다.’ (280.)

 

 

 위 구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신국론의 핵심 내용이다.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나라가 곧 교회이고 땅의 나라가 바빌론, 국가라고 동일시하는 세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있다. 즉 몸이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어도 땅의 나라에 마음이 가 있는 이들이 있고, 몸이 땅의 나라에 있어도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가 있는 이들이 있는데 물론 전자보다는 후자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을 만하다.

 기실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에서, 그리고 세계사 전체 - 아니, 우리 사회의 단면만 보더라도 세상의 많은 문제는 마음을 땅의 나라, 세속적인 것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한다. 보에티우스를 모함한 이들이 그러했으며 베네딕투스를 독살하고자 하던 이들이 그러했다. 또 굳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재 일부 대형 교회의 사목자들, 혹은 정치인들이 마땅히 사용해야 할 대상을 향유하려고 하는 바, 그들의 목적,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하고 분명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나 적어도 박승찬 교수님의 책,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은 이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신격과 인격의 대립과정 속에서 발달해온 철학과 신학의 완성은 그리스도교가 오랜 논리와 고민 끝에 만들어진 종교라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삶을 통해 낡은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변화, 회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으며 향유사용을 통해 가치의 질서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에티우스 성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모습은 고난에 쉽게 좌절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더욱이 높은 학문적 위치에 올랐음에도 늘 한결같았던 예로니모 성인의 자기성찰, 베네딕투스 성인의 겸손함, 그리고 수도 공동체 안에서 고행을 자처하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헌신하여 세상에 한 줄기 빛이자 소금이 되었던 여러 수도회들의 모습은 진정한 가치가 세속과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 국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이 이어진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이 책은 이러한 신앙의 유산 그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이 유산을 잘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 줄 수 있 을지, 그 실천적 방향을 포함하고 있다.

 전 세계가 그릇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로 인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유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신앙, 그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닿아 있는가에 대해 반추하는 자세라 하겠다. 그 지점에서 바로 절망 한편의 희망이 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좌절하지 마세요. 신국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에티우스도 사형수로 갇혀 있으면서도 끝까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그 문을 붙잡으며 매달릴 때, 하느님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 문이 아닌 다른 문을 열어 놓고 준비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에 그 문을 발견할 수 있나요? 지금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붙잡은 것들을 놓아 버릴 때만 하느님이 열어 놓으신 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10-311.)

 

 

by papyros 2015. 11. 3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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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사 에브리데이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바이선, 에브리데이를 읽고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끔찍해 보일 거라는 걸 알지만, 난 아주 많은 걸 보아 왔어. 한 몸 안에서만 살면 삶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느끼기가 무척 어려워. 자신이 누구라는 사실에 깊이 뿌리박고 살아가니까. 하지만 자신이 누구라는 사실이 매일 바뀌면 보편적인 것을 더 많이 접하게 돼.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까지 말이야. 사람마다 체리 맛을 다르게 느낀다는 걸 알게 되지. 파란색도 다 달라 보여. 남자애들이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이상한 의식들을 알게 돼. 자신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지만.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주는 엄마나 아빠는 좋은 부모라는 것도 깨닫게 돼.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을 내지 않는 부모님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으니까. 하루가 진정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알게 되지. 매일매일이 다르니까 말이야. 만약 사람들에게 월요일과 화요일의 다른 점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저녁 식사로 무얼 먹었는지 얘기할 거야. 나는 그렇지 않아. 세상을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더 많은 면들을 느낄 수 있거든.” (<에브리데이>, 141-142.)

 

 

 매일 아침 어떤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 하루를 보내고 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이동하는 삶. A는 마치 한 곳에 정착 할 수 없는 여행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언뜻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시크릿 가든>이나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도 하루쯤 영혼을 바꿔보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다든가, 혹은 도민준과 같은 천재적이며 영생을 누리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을 꿈꾸곤 한다.

 A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존재이다. 고작 열여섯 살로, 또래 10대 친구들의 육신을 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A는 특별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꿈꾼다. 매일 똑같은 사람으로 깨어나, 그저 자신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인 리애넌과의 만남을 지속해 나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 어디서 누구의 몸으로 깨어날지 모르는 A에게 지속적인 관계는 불가능해 보인다. A에게 리애넌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고 한정된 시간일 뿐이기에, A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리애넌을 만나고 그녀와 교류해 나간다.

 

사람들은 자기 몸이 지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사랑도 당연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지속적인 만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일단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건 우리 삶에 추가된 또 하나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그런 지속적인 만남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를 지탱해 줄 토대는 늘 하나뿐이다. (<에브리데이>, 80.)

 

 그러나 A와 달리 우리는 만남이라는 것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페이스북에 접속해 지인의 계정을 확인하고 타임라인을 확인한다. 그리고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 정도를 묻는, 그리고 밥이나 한 번 먹자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곤 한다. 더욱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일상을 부러워하며 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지니게 된다. 그러나 A에게 이메일이나 SNS 계정은 우리와 그 의미가 달리 이용된다. 자기 실존을 확인하고, ‘지속적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는 유일한 소통창구인 것이다. A가 이메일과 SNS를 사용하는 목적이야 말로 그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은 몸으로 일어나지만 늘 다른 삶을 부러워하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항상 다른 몸으로 일어나지만 육체의 원래 주인의 삶을 크게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A의 모습이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A가 비록 열여섯의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삶이나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파악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은 A야 말로 오랜 관찰과 주의를 통해 삶과 관계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빠르고 편한 만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환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존재가치에 대한 인정진정성이 아닌가 싶다. 남들과는 차별화된 자기 고유의 가능성 - 그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계발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선행 될 때 A와 리애넌 같은 순수하고 진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아의 본질을 추구하며, 언제나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A이기에 폴 목사를 찾아가는 그의 다음 모습이 한편으로는 걱정되면서도, 그가 마주할 고민과 선택에 기대가 된다.

 

 

 

 

 

 

by papyros 2015. 9. 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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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사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고

 

 

눈을 떠요. 라디오에서 프랑스 남자가 말했었다.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1136-137.)

 

 

21세기가 되기까지 거대한 역사 속 한 개인의 행동은 모두 타율과 자율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역사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 갈등이 더욱 첨예했던 2차 세계대전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전쟁 막바지인 1944-1945년을 주된 배경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적 배경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러 다른 연도들이 배치된다. 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그린 과거, 그리고 전쟁이 종식된 이후 성장한 후의 모습을 그린 2014년으로 작품이 끝나는 구조를 지닌다. 또 두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진행될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불꽃의 바다라는 돌-이 돌은 소유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야기하지만, 소유자 자신은 영생을 누리게 한다. -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마치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연상하게 하면서 환상적 요소를 배가시킨다.

핵심 인물은 베르너라는 독일소년과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이다. 독일과 프랑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적대관계에 있었던 양국의 소년소녀들이 어떤 접점으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인가.

두 아이들의 접점,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내적인 힘이 무엇인가 고민하건대 아마도 바로 아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성이라고 본다. 전쟁이라는 절망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 ‘옳은 행동에 대한 중요한 가치들을 잃지 않은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은 아이들이 바로 베르너와 마리로르였기 때문에 바로 두 사람 자체가 희망이 되지 않는가 싶다. 비록 베르너는 탄광도시 졸페라인에서 광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수리하고 기계를 잘 다루는 타고는 재능을 살리기로 결심하여 엘레나 아주머니, 그리고 소중한 어린 동생 유타를 두고 나치 치하 엘리트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기술과학 분야 하우프트만 교수의 눈에 들고 미래를 보장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귄 소중한 친구 프레데리크’-새를 사랑하는 소년- 가 교수에게 부당함을 이야기 했다는 것만으로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 무자비하게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계기로, 학교에서 시키는 것’ - 타율-이 아닌, 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율-이 옳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프레데리크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우리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굴었던 건 베르너였고, 프레데리크가 싫습니다 하면서 물이 든 양동이를 바치에 내동댕이치는 걸 보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으며, 그 결과들이 비가 쏟아지듯 몰려올 때 그저 서 있기만 했던 것도 베르너였다. (2280-281.)

 

 

선천성 녹내장 진단으로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소녀 마리로르는 비록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낸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많은 세상을 마주하도록 도와주시고 새로운 자극을 주시어, 마리로르는 앞을 볼 수 있는 여느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모든 생명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색깔, 향기를 생각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오신 덕분에 어느 곳에 사물이 있는지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박물관 열쇠 관리인인 아버지 덕분에 박물관을 구경하기도 좋아했고, 생일선물로 받은 책해저 2만 리를 탐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후 파리를 떠나 작은할아버지 댁인 생말로로 거취를 옮기면서 그녀의 삶에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전쟁의 분위기가 자욱한 회색 빛깔의 생말로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색깔은 바다에 갈 때,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이 절망을 극복하고 독일군몰래 숨겨둔 라디오를 꺼내 음악을 트는 순간이다. 마리로르는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독일군에게 저항해 라디오를 트는 작은할아버지 에티엔, 그리고 이를 전달할 수 있게 숫자를 받아오는 마네크 아주머니의 조력자임과 동시에, 작은할아버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독일에 협력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예요.”

바람이 훅 치고 들어온다. 마리로르의 마음속에서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반짝이다가, 바늘들을 끌어당겨선 그 가시들로 허공을 찌른다. 은색으로, 그 다음엔 초록색으로, 다시 은색으로.

전 방법을 알아요.” 마네크 부인이 말한다.

무슨 방법? 요새 들어 누구를 믿게 된 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믿어야 할 거예요.”

자네 옆에 있는 그 사람의 팔다리에 자네와 똑같은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자넨 그 무엇도 믿어선 안 돼. 설령 그런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치더라도 자네가 싸우길 바라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야, 마네크, 체제지. 무슨 수로 체제와 맞서 싸우겠다는 건가?”

나리가 해 보세요.”

 

(중략)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죠. 조카 손녀를 생각해 보세요. 마리로르를 생각해 보시라고요.” 커튼은 펄럭이고 서류들은 바스락거리며 두 어른은 서재에서 맞서 버틴다. 작은 할아버지의 방문 바로 앞까지 살금살금 간 마리로르 손이 문틀에 닿기 직전이다. 마네크 부인이 말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288-89.)

 

나한테 아직 희망이 있네!” 에티엔이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마리로르는 작은할아버지가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지낸 것은 아님을, 이 전쟁 전에도 그전의 전쟁 전에도 그는 나름대로 인생을 살았음을 떠올린다. 그도 한때는 세상 속에 살았고 또 그녀 못지않게 그 세상을 사랑했던 청년이었음을. (2109-110.)

 

베르너마리로르그리고 이들 주변을 둘러싼 프레데리크’, ‘유타에티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 자신의 존재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한 것이라고 본다. 베르너에게는 그것이 마리로르와 에티엔의 방송을 듣고 생말로를 찾아가 마리로르를 구해주는 것이었고, 마리로르에게는 에티엔 작은 할아버지가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프레데리크에게 더 없이 귀한 것은 모든 생명이었고 때문에 한 생명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을 우선하여 사관학교의 교수에게 싫습니다.’ 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였다. ‘에티엔또한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 속 골방에 갇혀있었던 것을 극복하고 전쟁통에 다시 희망을 전하기 위해 라디오를 잡고 방송을 한다.

음악, , 라디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만 하는어떤 가치가 있었다는 것. 즉 타율적 삶이 아니라 자율적 삶을 살아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그 시대에 그저 순응하고 방관하며 살아갔던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참 용감해요.”

그녀가 양동이를 내린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2371.)

 

소설 마지막 장, ‘2014에서 나오듯 전쟁이 끝난 수십 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마리로르의 손자 게임기를 잡고 있는 미셸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음악, , 라디오 과거 베르너와 마리로르, 에티엥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던 데 반해 현재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고전이 되어 버렸고, 지하철을 타면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 사용에 열중하고 있다. 좀 더 빠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좀 더 빨리 정보를 찾고 단 10초만에 SNS로 소식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만약 절망이 온다면,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인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가치, 내가 추구해야 할 무엇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나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 위해, 우리가 한번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게끔 하고자 이러한 장편의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람들이 저 아래 식물원 오솔길을 걸어 다니고, 바람은 생울타리를 누비며 송가를 부르고, 미로 입구에서 자라는 크고 늙은 삼나무들은 삐걱거린다. 마리로르는 그 옛날 에티엔 할아버지가 설명해 준 대로, 전자파가 미셸의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는 것을, 그들을 싸고 감도는 것을 상상한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천 배는 많이 종횡무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100만 배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빗발치는 문자, 파도처럼 들고나는 핸드폰 메시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메일에서 광섬유와 전선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도시 위아래로 얽힌 채 건물들을 지나고, 지하철 터널 속 송신기들을 활모양으로 잇고 무선 송신 장치를 내장한 가로등 기둥에서 나오는 가운데, 카르푸와 에비앙과 미리 구워 나온 토스터 페이스트리 광고들이 허공으로 번쩍이며 쏘아졌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나 늦을 것 같은데 예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보카도를 찾아 주세요. 그가 뭐라고 말했지? 1만 번의 당신이 보고 싶어. 5만 번의 당신을 사랑해. 아르덴 위로, 라인 강 위로, 벨기에 위로, 덴마크 위로, 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페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와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 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2458-459.)

 

 

 

 

 

by papyros 2015. 8.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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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시대에 품는 소망

-방민호, 연인 심청을 읽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겉에 보이는 대로, 사랑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줄 안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실은 사랑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인 것을, 그네들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연인 심청, 166)

  

 

 

  작금의 한국 사회는 참으로 역동적이며 급진적인 사회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에서는 경영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학문이 각광받고 있으며 인문학 전공자들은 취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공부를 무엇 때문에 지속하느냐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회기에 더욱 문학과 예술을 대한 갈망 또한 기저에 잔존하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을 멘토로 초청해 좋은 강연을 듣기 원하고 멘토들이 추천하는 고전을 찾아 읽는다. 이는 우리들의 내면에 잠재된, ‘보편적 정서구조와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 여러 고전 중에서도 <심청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계 소설인 <흥부전>, <춘향전>과 함께 여러 번 접한 작품이고 적지 않은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방민호 작가의 소설 연인 심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이를 현대소설로 변용한 작품이다. 즉 고전소설 <심청전>의 서사구조를 근본에 두고는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변형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는 등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실 독자들에게 기존의 <심청전>에서 심청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해 인당수에 기꺼이 몸을 던진 효녀로 각인되어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의식 또한 심청이의 희생을 통해 유교적 윤리의식인 효()를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효녀 심청의 모습은 분명 도덕적으로 칭송할 만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에게 있어 죽음을 통해 효를 다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혹은 극단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거리감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조차 심청이는 과연 정말 효녀인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은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소설 연인 심청의 주인공 심청은 이와 다르다. 아버지를 위한 효성 때문에 무작정 인당수에 뛰어드는 효녀 심청과는 달리, 연인 심청의 심청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못지않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귀덕오라버니와 윤상오라버니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크다. 윤상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오랜 고민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 심학규를 위해 인당수에 뛰어든 것 또한 일방적인 효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에서 욕망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늘 쾌락을 추구하며 군자의 체면을 깎는 모습을 보이는 부친에 대해 원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는 것으로 삶의 마지막 소명을 이루자고 다짐한다. 인당수에 뛰어들기까지 삶의 과정에서 애증의 심정으로 부친을 원망하기도 하고, 윤상 오라버니와의 사랑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는 심청의 모습은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독자는 연인 심청의 심청에게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

  부친 심학규 또한 원전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심학규가 장님이 된 사연을 추가하며 심학규가 공맹의 도리를 익히던 선비의 자세에서 이탈하여 좌절하고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게 된 계기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여 인물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든 후에도 딸의 죽음에 대해 반성하기보다 기생 애랑이와 어울리고 뺑덕어멈에게 속으며 재물을 잃고 성병을 얻는 등 나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며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나 그러한 심학규의 나약하고 이중적인 모습은 독자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이중적 자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심청, 심학규 모두 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내면 안에 두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작품 후반부로 접어들면 심청이와 심학규가 본디 천계에서 유리선녀와 유형선관으로서 사랑을 나누었으나 옥황상제의 탕약을 빼돌린 죄로 적강하여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겪으며 부녀(父女)로서 살아간다는 적강 모티프를 삽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환상성을 배가 시킬 뿐 아니라 전생에서의 사랑이 이승에서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청이 죄를 모두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구원받을 수 없어 용왕께 다시 이승으로 올라가기를 간청하는 장면에서 심청의 사랑이 더욱 극대화된다. 또한 아버지를 먼저 구할 것이냐,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구할 것이냐는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단 한 번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먼저 살려 기쁨과 겸허 속에서 삶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에서도 심청의 사랑은 극대화 된다.

  한편 연꽃을 발견하고 궁지기가 되어 심청과 재회했으나 심청을 지키고자 정희빈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윤상의 사랑 또한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부각되며 큰 여운을 남긴다.

  심청은 전생에서 유형 선관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온 선관의 연인이었음과 동시에 윤상 오라버니에게 사랑받는 윤상의 연인이었다. 물론 심청이 개인의 행복만을 바랐다면, 자신의 사랑만을 추구했다면 윤상 오라버니를 먼저 살리고 아버지를 뒤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심청은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부친에게 희망과 기쁨이 있는 삶을 선물할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심청이가 소설의 끝 무렵까지 아버지(유형 선관)에 대한 사랑과 윤상 오라버니에 대한 사랑 가운데 갈등을 겪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어느 한 쪽의 가치를 취하여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해야 하는 험난한 선택을 경험하게 된다. 한 쪽을 살리면 한 쪽은 죽어야 하는 매정한 현실 가운데, 심청이의 선택은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 순수한 사랑이 진정한 가치임을 시사한다. 심청이의 이러한 사랑은 애랑이나 뺑덕 어멈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소설 연인 심청의 심청이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랑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본의 논리 하에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지 못하고 수단으로 대하며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 곁에 함께 해 주기를 원한다. 고통과 좌절에서 혼자 벗어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의 모습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소망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잡아주는 심청이야 말로 현대인의 옆에 자리한 진정한 연인이 아닐까.

by papyros 2015. 6. 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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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조운선 침몰사건-을 읽고

 

겸애(兼愛)! 서로 사랑하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서로 미워하면 천하가 어지러운 법이지.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 할 때, 상대가 빈자인가 부자인가, 양반인가 천인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중략)

그렇네. 하지만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네. 뺨에 닿는 이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하늘의 구름은 또 어디서 왔고? 공맹만이 오직 진리를 말한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게.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시저에 저마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몇 개의 단어나 몇 개의 문장 혹은 몇 권의 서책으로 정리했다네. 선입견 없이 두루 깨달음들을 살펴야 해. 공관병수(公觀倂受), 즉 공평한 눈으로 여러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네. 묵자도 무작정 배척부터 하지 말고 읽어 보도록 하게. 내게 도움을 준 문장이 제법 많았다네. 자네에게도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불러일으킬 걸세. 나는 지금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다하고 있음도 알아주었으면 하네.” (1353-355)

 

청전과 화광. 그들과 8년 만에 조우를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인 중학시절이다. 중학 시절 처음 백탑 서생들과 만난 후, 고등학생 시절 열하광인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것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물론 목격자들의 출간소식을 들은 후, 화광과 청전을 다시 맞이할 준비에 설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것이, 작년 봄의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목격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조우는 참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픈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조운선이 침몰한 때문에 청전이 급하게 밀양으로 민심을 살피러 내려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얽히고 얽힌 일련의 사건들 소운 조택수의 사망, 혀가 잘린 채 발견된 악공 고후, 차돌이의 죽음과 그를 밝히기 위해 밀양에서 한양까지 먼 길을 달려와 신문고를 친 어미 선영 , 향교의 밤쇠, 그리고 사건을 파헤치던 과정에서 살해당한 두명의 참상도사 이순구와 정수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죽음 뒤에는 마치 관행처럼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위로는 영의정부터 아래로 목수 선풍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책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작금의 시대 현실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경쟁으로 인한 비리와 부정부패. 특히 차돌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끓는 심정을 가지고 상경하여 어렵게 신문고를 치는 선영의 모습에서 근 1년이 다 되도록 아니 평생 동안 아픔을 짊어져야만 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그 눈물이 떠올라 진실로 울컥했다. 저자인 김탁환 선생님께서도 사고 후 근 한 달 동안이나 작품을 쓰지 못하다 시작한 소설이라 하시니 아마 집필기간 내내 이런 심정을 지니셨으리라.

목격자들을 읽으며 느낀 감정과 생각, 지식들을 모두 글로 정리하는 데 한계가 있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 하나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다. 아마 유미주의- 즉 철저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금동 김동인이었다면 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겠으나 나는 문학이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에 적절한 목소리를 낼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약 10 년 주기의 사건들로 인해 각 문학작품이 시대마다 다른 사회를 반영할 수 있었다. 현진건, 최인훈, 박태원, 이상, 김승옥 등의 주요 작가들과 그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문학이 당대 사회와 그 현실을 적절히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목격자들도 추후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당대 사회를 제대로 반영한 한편, 다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관한 것이다.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조운선 침몰은 여러 관원들의 협잡과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하오나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다른 이들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침몰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람보다 배를 중히 여기고 배보다 쌀을 중히 여기는 담당 관원들의 마음가짐 때문이옵니다. 왕실과 조정도 조운선에 실린 세곡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그 세곡을 실어 나른 배와 그 배를 조정하는 조군들 그리고 그 세곡을 나라에 바친 농부들의 피와 땀을 하찮게 여기옵니다. 서강 광흥창에 도착한 세곡만 목적이 되고 나머지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법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조운선은 또다시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고, 관원들은 사사롭게 배를 채울 것이고, 이 땅의 백성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쏟을 것이옵니다. 벼슬아치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세곡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벼슬아치가 할 일은 결국 1년 동안 공들여 농사를 지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백성이 불행하면 아무리 세곡이 많이 걷힌다 해도 그 나라가 어찌 행복하겠사옵니까? 세곡보다는 그 배를 아껴야 하고, 그 배보다는 조군을 챙겨야 하고, 조군보다는 1년 꼬박 농사를 지어 바친 이 나라의 백성을 널리 사랑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박애의 마음만이 지금의 불행과 절망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2363-364.)

 

저자 김탁환 선생님께서 작품을 집필하시면서 던진 세 가지 질문이 있는데, 생명에 대한 문제와 인간존엄의 회복 그리고 고통을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데 대한 문제라고 한다. 담헌의 위 대사야 말로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우위에 두고 자체로 가치 있는 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일진대, ‘’, ‘권력’, ‘명예등 수단이 되어야 할 가치가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즉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비단 담헌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방식을 향유와 사용을 통해 설명한 바 있고 칸트 또한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경계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빈번히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은 인격교육의 부재로 인한 가치질서의 전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학교교육에서는 협력과 상호존중, 배려보다는 경쟁과 학벌주의가 팽배하고 있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경쟁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전반 및 교육의 경쟁적 문화가 협력과 존중의 문화로 바뀌어야 하며 특히 교사들은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가치관의 질서를 바로 세워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여 타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리고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충분히 갖춘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격교육을 우선해야 한다.

76년 후, 다시 우리에게 헬리혜성(빛자루별)이 돌아 올 때 즈음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존재하기를. 화광과 주혜가, 청전과 옥화가 웃으며 함께 혜성을 바라보며 영원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마지막으로, 목격자들이라는 멋진 작품으로 귀환하시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안겨주시고, 언제나 혜성같이 자리하고 계신 오래도록 존경하는 작가이자 내 마음 속 스승 김탁환 선생님께 진실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by papyros 2015. 3. 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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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민음사, P331)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은 언뜻 낭만적으로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선상 여행이 어찌 행복하고 달콤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이고 행복한 결말일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사랑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만은 못한 것 같다.

사실, 플로렌티노 수십년의 세월 동안 페르미나 한 사람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그가 페르미나와의 사랑을 이루기 전에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가 페르미나에 대한 사랑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지켰다고 할지 몰라도 그의 행동으로 인해 페르미나 다사가 느낄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숙고한다면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페르미나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은 단지 플로렌티노의 애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여인들로서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되고 힘든 삶을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서 위로받고 자존감을 얻었을 터인데, 플로렌티노는 여인들을 단지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았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올림피아 술레타와의 관계였는데, 플로렌티노가 그녀의 배에 남긴 ‘This is Mine’이라는 표식 때문에 술래타는 남편으로부터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살해되고 마는 사건이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다른 여인들은 모두 수단으로서만 바라보는 것 두 측면 모두 과연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페르미나 다사 또한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했음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애초에 젊은 시절 한 때 나마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결별을 선언한 이유는, 아버지 로렌소 다사로부터의 압력을 제외한다면 단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순간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자기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와 처음으로 가까이 있었던 자정미사의 군중 틈에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와는 달리 사랑의 감동이 아닌 환멸의 심연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런 망상을 키워왔는지 모르겠다고 놀란 마음으로 자문했다.’ (민음사, P181)

 

물론 아버지가 둘의 사랑에 미치는 압력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결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단지 순간적인 느낌만으로 사랑을 저버린다는 것은 플로렌티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또한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그림자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결국 페르미나를 사랑하지만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며 기다리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한 것도 진실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사로서 상류층의 지위를 누리는 데다인, 잘생기고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플로렌티노 아리사,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 모두 진실하고 건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남녀 주인공 모두의 가치관이나 감정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물론 저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에 담아내고자 했던 부분이 19세기 말 사회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사상에 의한 제도적 억압, 결혼제도에 의해 개인의 욕망이 억압되는 측면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나 사회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제도와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구운몽> 또한 유교 윤리의 억압적 측면과 사대부의 욕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이 단적인 예이다. 페르미나 다사를 둘러싼 그리스도교 사상 하의 결혼제도, 그리고 상류계급의 욕망. 결국 개인의 욕망에 대한 제도적 억압을 심화시키는 것은 사회에 속한 인간들 자신인 것 같다. 플로렌티노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관계를 맺는 여인들을 배려하고 신중했더라면 술래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가 사회적 권력이나 신분에 예속되지 않았더라면 우르비노와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진실로 중요한 것은 종교나 사회 제도로부터의 억압보다도,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아닌가 싶다. 감각적 쾌락이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제도의 억압을 심화시키고 다시 자신을 예속 시킬 뿐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인 것 같다. 작품 안에서 노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온갖 시련과 갈등 속에서도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레라의 위험이 닥치고 있는 혼돈의 시대에서, 지나치게 빨리 전염되는 콜레라 같은 사랑. 이는 결국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없는 사랑은 그 위험이 치명적인 콜레라와 같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똑같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함께 살 수도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민음사, P110)

 

-콜레라 시대의 사랑. 명작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으면서 크게 공감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아직 내 자신이 경험적으로 미숙한 바가 큰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공감되고 이해가 잘 되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물론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겠고, 필자의 부족함 탓에 작품에 대해 오독을 했을 여지가 있으니 널리 이해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by papyros 2013. 9. 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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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영화 <그랑블루>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민음사, 104)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해(2012)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풀린 이후 노인과 바다의 번역본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노인과 바다소설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문구였다. 패배와 파멸, 파멸은 육체와 물질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패배는 정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아픔을 겪을지라도 정신적 가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강인함과 인내인데, 산티아고야 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과 인내, 의지, 도전정신을 보여준 인물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생태계의 일부에 속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대자연 안에 속한 생명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노인과 바다가 쓰인 시대에, 많은 어부들이 최신식 기계장치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으려 했다는 것은 대자연 위에 올라서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이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그 어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낚싯대에 미끼를 걸어 고기를 건져올리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서 대자연의 광활한 바다를 가능한 훼손시키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 파도와 청새치, 상어와의 사투에 동등한 생명체로 그 스스로가 직접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 앞에서 한계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모습, 산티아고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의 많은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자연을 끝없이 지배하고 정복하고 개발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많은 비극들 -원전비리 사태로 인한 전력부족,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지구 온난화 등-이 수없이 많은 이 때, 대자연 속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지닌 산티아고의 태도를 타산지석 삼아야 함은 명백한 것 같다.

 

착한 놈들이지. 놈들은 함께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저 돌고래들도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들이지.” (민음사, P49)

 

그러나 이러한 산티아고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 그리고 강인함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는 결국 상어 떼와의 싸움에서 파멸한다. 패배는 하지 않았으나 결국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상어 떼와의 전투를 통해 남은 것은 애써 잡은 청새치의 뼈대뿐이었고 늙은 산티아고의 기력은 소진되어 녹초가 되었고 결국 육체적으로는 파멸한 것이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와 공허(空虛)함만을 남긴 상어와의 전투. 파멸을 부른 원인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 인 채움에 대한 욕심(욕망)’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산티아고가 만선을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청새치라는 단 한 마리의 고기를 잡았지만, 결국 이 또한 생존을 위한, 채움의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범인(凡人)들과 산티아고의 차이점을 들자면, 범인(凡人)들은 채움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반면, 산티아고는 채움의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낚시를 하지만 어부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양심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고기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며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고기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대한 미안함을 지니고 있다. 인간으로서 현실적 제약과 생존을 위해, 어부라는 직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낚시를 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바탕으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자세, 그리고 비록 채움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고기를 잡고자 갈구하고 있지만 정당하게 맞서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그의 자세가, 비록 파멸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진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산페드로도 저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의 아버지처럼 어부였지. 그러나 노인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모든 걸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읽을 책도 없었고 들을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했고, 또한 죄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네가 그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죽인거야. 너는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또 녀석이 죽은 뒤에도 사랑했지. 만약 네가 그놈을 사랑하고 있다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걸까? (민음사, P106)

 

결국 헤밍웨이는 산티아고를 통해 비움의 자세를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에 채움의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조급함과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를 내맡기는 것.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행복을 쟁취하려 하기보다는 욕망과 행복에 대한 생각을 내려둘 때, 이와 멀어질 때 진정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 단 한 마리의 청새치를 잡으려 했던 산티아고에게도 채움의 욕망은 존재했고 그 욕망 때문에 고기와 산티아고 모두에게 파멸을 불러왔다.

 

차라리 이 일이 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또 이 고기를 잡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고기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던 거야.” (민음사, P111)

노인과 바다가 주는 이러한 메시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최근에 감독 판으로 재개봉한 영화인 <그랑블루>가 있다. 노인과 바다<그랑블루>가 주는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잠수사고로 잃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대자연인 바다와 바다의 소중한 생명체 돌고래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작크와, 작크의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 엔조. 작크가 잠수를 했던 것이 바다와 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향연이었다면 엔조에게 바다는 생존을 위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기록을 내야만 하는, 넘어서야 할 극복과 갈구의 대상이었다. 물론 엔조 또한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바다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의 차이가 작크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아니었을까. 결국 엔조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야 기록을 위한 잠수가 아닌, 바다 속 깊은 공간에 대한 향연과 사랑을 느끼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작크도 결말부분에서, 바다 밑의 더 깊은 공간과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 향연을 이기지 못하고 잠수를 결심하게 된다. 남겨진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남긴 작크의 태도가 모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작크의 입장에서는 인간으로서 영위하고 누릴 수 있는 채움의 욕망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바다 앞에서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채움의 욕망을 버리고 비움의 자세,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산티아고가 고기를 잡은 행복에 취해 있다가 상어 떼로부터 화를 당한 것이나 작크가 잠수사고로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지만 결국 그로 인해 바다에 대한 열정과 사랑, 향연이 더 깊어지는 것 등이 이 속담에 너무나도 잘 부합한다. 결국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채우기 위한 욕심을 가지고 조급하게 달려 나가는 일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채움의 자세보단 비움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누릴 수 있는 현재의 작은 행복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소중한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천천히 나아갈 때 비록 파멸할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라 믿는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그리고 참, 침대는,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는 내 친구거든. 침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란 참 좋은 물건이지. 녹초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편안하게 해 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물건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P121)

 

소년은 테라스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뜨겁게 해 주세요. 우유랑 설탕도 듬뿍 넣어 주시고요.” (중략)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이거 드세요.” 소년은 유리자에 커피를 조금 따랐다. (민음사, P124)

 

그는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민음사, P125)

 

산티아고가 사랑해 마지않는 귀여운 소년 마놀린과 같이, 정말 힘겹고 외로울 때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힘을 낼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이의 따뜻함이 있다면, 작크와 엔조같이 서로 간에 위안이면서 동시에 자극이 되는 소중한 이가 있다면,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느낀다면 분명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없을지언정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 믿는다. 인생의 굴곡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소중한 이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행복에, 그 따뜻함에 감사하면서 비움의 자세로, 쉼의 여유를 가질 때 그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더욱 강인한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민음사, 128)

 

by papyros 2013. 8.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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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고

 

갓 구워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빵 냄새, 한 달에 단 하루인 보름을 제외하고 24시간 문을 여는 제과점, 마법으로 빵을 굽는 마법사 점장과 낮에는 사람, 밤에는 파랑새로 변하는 소녀. 베일에 감춘 듯 비밀스러우면서도 포근함을 갖추고 있는 위저드 베이커리. 이 책은, 14년 전의 어린 시절, 해리 포터를 처음 접하던 그 순간처럼 읽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마법을 부리는 동화(童話)였다.

그러나 동면의 양면과도 같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마법으로만 보이는 동화 이면에 개인의 선택과 책임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상기하게 한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위저드 베이커리 P134, P200)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존재한다. 매번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못하기에, 삶의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다시 말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아파하고 후회하는 그 모든 과정들이 이후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장통인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후회와 아픔을 남기는 선택들이 인생의 더 귀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데 대해 심한 자책을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 이후의 책임감에 달려있다. 함께 읽어 내려간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책임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학 실천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상,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P122 실천이성비판)

 

즉 선택이란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인 정언명령에 따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한 것이고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은 마땅히 자유롭게 행동한 자신이 지녀야 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면 타인에게 책임전가(責任轉嫁)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선택이란 것 자체가 자신의 이성에 따른 판단으로 선택한 자율적 행동인데 막상 선택의 결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 그 책임을 자신의 선택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타인에게로 전가하며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시킨다. 즉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서 무작정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너 이 쿠키에 매겨진 별점이랑 사용 후기 안 봤어? 효과 백 프로인 거 안 봤어?”

봤죠. 제품을 띄워주려는 알바생들의 댓글인 줄 알았죠.”

그럼 이것도 묻자. 사용 시 경고 사항 안 봤어?”

모든 마법은 부메랑이 어쩌고 하는 거? 그것도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죠. 그런 걸 진지하게 믿고 사는 애들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위저드 베이커리, P90)

작품 속에서 시나몬 쿠키를 산 교복 입은 여학생이 보이는 사후책임감의 부재가 비단 소설 속 상황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미혼 부모들의 영유아유기, 학교폭력 등의 많은 사회문제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후책임감의 부재는 사전책임감의 부재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후책임감이 과거의 사건과 관련된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이라면 사전책임감은 미래 활동의 기대감이나 사건의 사전 전망에서 오는 책임감으로 타인에 대한 자발적인 보살핌을 하는 도덕적 책임감이다. 즉 내재화된 도덕적 책임감인 사전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과 타인, 사물에 대한 책세 가지 측면으로서의 책임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공동체 전반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사후책임감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즉 도덕적 책임감을 중심에 둘 때 사후 책임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며, 또한 사람을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며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교복 입은 여학생이 질투하던 친구에 대해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악마의 시나몬 쿠키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부두 인형을 구매하러 온 여자가 사전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체인 월넛 프레첼을 구매하여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여 그 결과가 다시 자신에게로 미치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타인에 대한 배려와 그 관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부재했고 때문에 사람을 결국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라면 마법의 빵을 먹여서라도 제거하고 조종해야 할 수단으로서만 취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 선생 또한 주인공 를 제거해야 할 전부인의 자식으로 바라보지 않고 , 어머니로서 아들에 대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욕구에 반응하고 헌신하여 보살폈다면 , 또한 주인공의 아버지 또한 배 선생과 그녀의 딸 무희를 단지 그 자신의 욕구충족 수단으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사전책임감을 가졌더라면 가정이 틀어지는 잘못된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선택의 결과가 틀어지더라도 사후책임감을 지닌 채 질서를 바로잡고 결과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점장에게 받은 타임 리와인더를 통해 주인공 앞에는 시간을 돌려 배 선생을 만나지 않는 선택과 시간을 돌리지 않고 삶을 살아나가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이게 된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혹자들은 Y의 경우는 현실에서의 도피이기 때문에 N의 경우가 더욱 바람직한 결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Y의 경우, N의 경우 두 가지 결말 중 어떤 쪽이 옳은 선택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대한 사전책임감사후책임감이다. Y의 경우를 택하면 주인공이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자유의지를 표현함으로서 배 선생으로부터 학대받는 경험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위저드 베이커리에서의 추억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그의 삶,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희생이 따른다. N의 경우를 택할 경우 아버지와 배 선생의 이혼, 사건으로 인한 전학 등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게 될 수밖에 없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인공은 내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한 가지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기회비용. 운명이나 필연적 법칙은 없다고 하지만,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점장과 같이 인생의 귀인과 마주칠 수도 있고 배 선생과 같은 악연을 마주칠 수도 있다. 때문에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 여부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Y의 경우와 N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후회를 일삼고 선택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배 선생 같은 악연과의 만남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만 선택의 책임을 돌리는 인물이라면 그야말로 사전책임감과 사후책임감 모두 결여된 채 완벽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환상에 고착되어 자아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위저드 베이커리, P248)

 

중요한 것은 수많은 마주침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사전책임감을 지니고 자신과 타인 및 이를 둘러싼 환경을 관심 깊게 바라봄으로서 마주침이 아닌 헤아림의 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혹여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되돌아올지라도 소 사후책임감을 견지한 채 묵묵히 그 다음 일을 해내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며, 소중한 이와의 인격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얻은 소중한 기억을 통해,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깨달음을 통해 인격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추는 것이라 본다.

 

낚싯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싯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철학이 필요한 시간, P259)

결국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닐 것인지 또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나는 후자를 선택해 매 순간 선택의 결과를 통해 배우고 노력함으로서 교육자이자 인격자로 성장하고자 한다.

 

 

 

 

 

by papyros 2013. 8. 21.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