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키스, 『앨저넌에게 꽃을』, 황금부엉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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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북카페 책과 콩나무'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황금부엉이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내가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저를 빵가게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처럼 저도 찰리의 자리를 빼앗고 못 들어오게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찰리 고든이 존재하던 시간은 과거이지만, 그 과거가 현실이라는 거예요. 오래된 건물을 허물어야 그곳에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릴 수 있는데, 과거의 찰리는 지울 수가 없어요. 찰리는 지금도 존재해요. 처음에 저는 찰리를 찾고 있었어요. 찰리의 – 나의 – 아버지를 보러 갔죠. 찰리가 과거에 한 인간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저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저 자신의 존재도 정당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니머 교수가 저를 창조했다고 말했을 때, 저는 모욕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찰리가 과거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제 안에, 제 주위에 말이에요. (후략)”


- 4부 이변,「제발 인격을 존중해줘요」, 299쪽.

 

 우리 모두는 현재를,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에서 역설하는 것처럼, 무거운 돌을 열심히 굴려 산을 오르던 과거의 ‘나’와 정상에 오른 현재의 ‘나’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분절적인 관념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한 사람을 바라볼 때 과연 그 과거를 논하지 않고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지적장애인이었던 찰리 고든이 똑똑해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능이 높아지는 수술을 받은 전후 3월부터 11월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 자신이 경험하며 느낀 것을 기록한 경과보고서(일기)의 형식을 취하며 독자 자신이 찰리의 경험과 삶, 감정을 통해 이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이 작품을 꼭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06년 중학 3학년 시절, 1학년 때부터 존경하며 따르던 은사님(국어 선생님)의 소개로 찰리 고든을 접하게 되었고 그 때 구입한 ‘동서문화사’ 판본을 아직도 소장중이다. 그때와는 다른 출판사, 다른 역자에 표지도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작품이 재출간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고, 무엇보다 내 마음 한 가운데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리하고 있던 ‘찰리 고든’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무척 설레며 책장을 넘겼다. 작품 초반부를 읽으며 독자인 나 자신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장하고 변화했다는 사실을 분병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1년 전 작품을 읽을 때 로샤검사(로흐샤흐 검사)와 주제통각검사(TAT) 검사 등 투사검사가 등장하는 것도 몰랐던 중학생이 ,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국어국문-국어교육과 더불어)한 후 청소년상담사 자격을 취득하여, 소설 속에 다양한 심리 검사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반갑고도 놀라워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자그마한 성장과 변화, 10년 사이에 이루어진 지식의 확대와 넓어진 이해에도 놀랍기만 한데 그 모든 것을 단지 9개월 만에 경험한 찰리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싶다. 특히 초반부 경과보고서에서 맞춤법이 맞지 않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수술 후 폭발적으로 변화하여 180이 넘는 지능을 갖추고 몇 개국어를 하며 번역되지 않은 논문을 읽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지능을 따라가지 못하며 혼란을 느끼는 모습들에서 찰리의 혼란이 s 분명히 전해진다.
 ‘똑똑해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지녔기에 찰리 고든은 비크맨대학교 심리학 실험실의 실험에 참여하게 되어 지능을 높이는 수술을 받게 된다. 분명 스트라우스 박사님이나 니머 교수님, 그리고 심지어는 찰리가 따르던 ‘지적장애성인센터’에서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키니언 선생님까지도 찰리의 이러한 ‘동기’와 열망을 ‘다른 지적장애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좋은 것’이라면서 칭찬한다. 그러나 찰리가 깨달았듯이,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던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로, 빵집의 여러 사람들과 진정한 친구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그러한 강렬한 동기가 자리했기 때문에 그의 그런 강렬한 열망이 참으로 아프게 여겨졌다. 기실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인정’받고 싶고 기대에 ‘부응’하고픈 욕구는 누구나 어느정도 지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심리 정서적 문제인데 –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결코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그렇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 인정받고 수용되는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감정을 나눌 이들이 주변에 자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찰리는 온전히 인정받고 수용된 경험도, 또 진실되이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이도(적어도 수술 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처절히 노력해왔어야만 했으며 그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고쳐야만 하는 것’, ‘없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한 사람이라도 주위 누군가가 찰리가 장애를 겪고 있어도, 똑똑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면,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이가 주변에 있었다면, 과연 찰리가 그토록 강렬한 열망을 지닌 채 스스로 실험에 자원했을까.
              

 똑똑해지고 싶다는 흔치 않은 욕구를 강하게 지닌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든지 무척 놀라워하는데, 그런 욕구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이제는 나도 알 것 같다. 로즈 고든은 평생을 그것에 매달려 살았다. 찰리가 저능아라는 사실에서 공포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로즈의 잘못인가? 아니면 매트의 잘못인가? 이런 물음들이 따라다녔다. 노마를 낳은 뒤에야 로즈는 자신도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나를 바꾸려는 노력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엄마가 바랐던 똑똑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3부 고독, 「배울수록 이상한 점」, 218-219쪽.


 그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가게에 앉아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아이구나” 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나는 인정받기를 원했고, 오래전에 내가 신발 끈을 묶고 스웨터의 단추를 채우는 법을 익혔을 때, 만족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에 떠오르던 환한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 표정을 보고 싶어서 여기에 왔지만, 끝내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 3부 고독, 「혹시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277쪽.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자신이나 가족들보다 겉으로 비친 모습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매트는 몇 번이고,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라고 말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마는 옷을 잘 입어야 했고, 집에는 좋은 가구를 두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도록 찰리는 집 안에 있어야 했다.

- 5부 회귀, 「우리는 누군가가 필요했어」, 382쪽.


 그러나 그 열망을 이루어 지능이 높아져 천재가 되어 세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과 인지능력이 생기자, 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역차별’이다. 지능이 높아져 친구들과 대화하고 어울리고 싶었던 찰리에게 과거의 조롱에 비견할 ‘비난’과 ‘소외’가 찾아온다. 왜 그런 수술을 받아 자연을 거스르는지 지적하며 천재가 된 찰리가 자신들에게는 부담스럽다는 것을, 이질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즉 지능이 매우 뛰어나든, 혹은 지능이 매우 낮든 정규분포표의 양 극단(양 끝)에 있는 ‘특별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면서 ‘소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패니가 말했다. “찰리, 네가 뭔가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야. 네가 변한 방식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예전에 넌 착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 아주 똑똑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평범하고 솔직했어. 그런데 갑자기 똑똑해지려고 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다들 그렇게 얘기해. 그건 옳지 않다고 말이야.”


 “하지만 더 똑똑해지고, 지식을 얻고,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이야?”

 

-  2부 혼돈,「어둠속의 소년」, 164쪽.

 

 “그럼 제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랐던 거죠? 제가 여전히 순종하는 강아지처럼 지내면서 꼬리를 흔들고 나를 걷어차는 발을 핥기를 바라는 거예요? 분명히 이 모든 것은 나를 바꿔놓았고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도 바꿔놓았죠. 더 이상 사람들이 내게 건네준 쓰레기를 받아먹을 필요가 없다고요.”
 “사람들이 찰리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하진 않았어요.”


 “선생님이 뭘 알아요? 잘 들어요. 그중에서 가장 나은 사람들도 잘난체하면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생색을 냈죠. 자신들이 우월해 보이면서 부족한 점을 감출 수 있도록 저를 써먹으면서 말이죠. 누구든지 바보 곁에 있으면 자신이 똑똑한 것처럼 느껴지죠.”

-3부 고독, 「나는 왜 벌을 받고 싶었던 걸까?」, 188-189쪽. 


  더욱이 비크맨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로서 찰리의 실험을 주도한 니머 교수는 수술 전의 찰리 고든을 ‘부정’하곤 한다. 수술 후 찰리가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그는 ‘지적장애인’ 시절 찰리의 인격, 찰리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지능이 낮은 지적장애인인 찰리 고든은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부재했기에, 자신과 같은 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으나 지능이 생긴 후 세상에 대한 인지능력이 갖춰졌으니 이제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니머 교수가 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비록 ‘니머 교수’라는 한 개인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찰리에 대한 니머 교수의 시선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비단 찰리를 포함한 지적장애인 뿐 아니라,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 장애인 분들, 이방인(외국인) 등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지니고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청소년상담사 연수 때 네팔 이주배경 여성 ‘찬드라 꾸마리’씨가 겪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주노동자인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잠시 인근마을에 외출을 갔는데, 지갑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식사 후 값을 지불하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한국인과 너무 닮았다는 점에만 포착해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 감금해, 그녀는 그 곳에서 6년을 보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해 단지 그들이 우리와는 다르고(이질적이고), 우리와 같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우리 내부에서 그들에 대한 가치관을 낙인찍은 후 우리가 행동양식이나 가치관 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힘겹게 내려는 목소리를 억누른 것이 아닌지,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통제하려고 하며 정작 그들이 필요로 하는, 소망하는 것에는 ‘경청’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과리노 박사에 대한 재미난 사실. 그가 내게 했던 것에 대해. 로즈와 매트를 속인 것에 대해 나는 마땅히 그에게 화를 내야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첫날 이후로 그는 항상 나를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항상 어깨를 토닥여주고, 미소를 지어주고, 용기를 주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것이다.
 과리노 박사는 그때 나를 한 인간으로 대했던 것이다.
배은망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내가 화가 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나를 실험동물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니머 교수는 자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계속해서 언급하거나 언젠가 앞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진짜 인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니머 교수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적장애인을 보며 웃을 때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머 교수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3부 고독, 「배울수록 이상한 점」, 219쪽.

 


 그때, 니머 교수가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크맨 대학교에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우리들은 우리의 신기술로 자연이 낳은 오류를 우수한 인간으로 창조해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만족스럽습니다. 찰리가 우리에게 왔을 때 그는 사회에서 벗어나 있었고, 돌봐줄 친구나 친척도 없이 대도시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으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정신적 능력도 없었습니다. 과거도 기억하지 못했고, 현재와도 동떨어져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실험하기 전에는 찰리 고든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개인금고에 넣어둔 새로운  귀중품처럼 취급할 때 왜 그토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확신하건대, 우리가 시카고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맴돌며 메아리치던 바로 그 생가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니머 교수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 부모도 있고, 지난 일도 기억하고, 과거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저 수술실로 옮기기 전부터 난 존재했다고요!”

 

- 3부 고독,「나만의 공간」, 241-242쪽.

 
 "자넨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고 있군. 늘 그랬지만, 우리가 항상 잘 대해주었다는 건 자네도 알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모든 걸 하셨지만, 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진 않으셨죠. 제가 실험에 참여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당신은 몇 번이나 큰소리를 쳤죠. 네, 저도 압니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날 만들었다는 뜻이 될 테고, 주인님에 창조주까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매순간마다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시는군요. 교수님이 믿든 안 믿든,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한 일이 – 아무리 근사한 것이더라도 – 저를 실험실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습니다. 지금 제가 한 인간이듯이 실험실에 걸어 들어오기 전부터 찰리도 한 인간이었죠. 충격을 받으셨나 보군요! 네, 제가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갑자기 알게 되었군요. 훨씬 전부터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런 진실을 아이큐가 100을 넘지 않는 사람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는 교수님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겁니다. 니머 교수님, 저를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찔리실 겁니다.”

 

- 4부, 이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364-365쪽. 

 
 
 ‘인권감수성’, 개개인이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 타인치 처한 환경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려면 그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보다도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뒷받침 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1959년에 출간된 것을 고려했을 때, 아마 저자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등장하면서 학문과 이성, 지능을 우선시하면서, 심리학 실험에서도 개개인의 인권을 도외시하는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의 미국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을 2017년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학교 성적이 뛰어난 우등생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밝혀지는 상황은 여전히 성적, 결과를 지향하며 ‘인권감수성’, ‘공감능력’에 대한 교육 더욱 진전하지 못하고 답보하고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대변한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비하)하는 단어들이 사용되어 오고 있으며 특정성별이나 소수자, 약자에 대한 혐오발화 등이 인터넷 상에서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도 인권감수성 부재의 심각한 문제라 여겨진다. 특히 세월 호 사건 당시 유족들을 비하했던, 혹은 아직도 그 얘기냐고 하던 사람들과 같이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은 것은 이를 환기하게 한다. 특히 세월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초등생에 대해 같은 반 친구들이 조롱했다는 기사는 정서적, 심리적인 지원과 교육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유년시절 공감교육, 가치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진정한 공감/가치관 교육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전공서로 이론을 배우며 머릿속을 ‘이론적 지식’이라는 내용물 만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니며,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경험적으로 실천’하고, 직접 그들과 만나 대화하며 찾아가는 등 ‘소통과 교류’라는 내용물로 채울 때 가능한 것이라 여긴다.
 가장 낮은 곳이라 여겨지는 – 성매매 여성들에게도 찾아가 위로와 격려, 공감적 한 마디를 건넨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수단의 톤즈 아이들의 교육과 의료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들이 이러한 분들이시며, 작품의 후반부에 찰리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찾아간 워렌 주립보호소의 윈슬로우와 같은 이를 주목할 만하다.

 


 "돈과 물질적인 것을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시간을 내서 애정을 주는 사람은 아주 드물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고, 그는 방을 가로질러 선반 위에 놓인 빈 아기 우윳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병이 보이시죠?"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궁금했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다 자란 남자를 두 팔로 안고, 저 병으로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환자들이 누는 오줌과 똥을 뒤집어 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말이죠? 제 말에 놀라신 것 같군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저 고상하고 높다란 상아탑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환자들처럼 모든 인간의 경험에서 차단되어 떨어져있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도대체 뭘 알죠?"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그는 갑자기 대화를 끝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여기에 돌아와 머물게 되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해할 것이다. 그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 4부 이변,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38-339쪽.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도- 심지어 찰리와 같은 지적장애인 분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지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낮음을 인지하신다고 한다. - 자신만의 개성과 가치관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주인공 ‘오웬 서스킨드’ 씨 또한 자폐성 장애를 지니고 있으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세상에 이야기를 하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계시며 그 가치관과 철학으로 아름다운 삶을 꾸려가며 성장해 나가고 계신 분이다. 나와 다른 이들 – 장애인, 외국인, 성 소수자 등 –의 존엄성과 인격, 고유한 능력과 개성을 존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은 지능과 더불어 가장 고귀한 능력임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자신과 같은 수술을 받아 ‘실험실’에서 인간의 손에 고통 받고 있는 생쥐 앨저넌의 상황과 행동을 이해하고, 그의 무덤에 ‘꽃을’ 놓아달라는 그 아름다운 부탁을 전하는 찰리를, 그 어느 누가 지능이 떨어진다 하여 무시할 수 있을까.

 

 

 앨저넌은 멋진 쥐이다. 털은 솜처럼 부드럽다. 눈을 깜빡이는대 눈을 뜨면 눈동자는 검정색이고 둘레가 분홍색이다. 앨저넌에게 먹이를 줘도 좃냐고 난 버트에게 물어따. 왜냐하면 그를 이겨서 난 기분이 좋지 아나꼬 상냥하게 대하고 친구가 되고 시퍼끼 때문이다. 버트는 안 된다고 해따. 앨저넌은 나처럼 수술을 바든 무척 특별한 쥐라고 해따. 앨저넌은 노픈 지능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한 최초의 동물이라고 버트가 말해꼬, 아주 똑똑해서 밥을 먹으러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앨저넌이 들어갈 때마다 바뀌기 때문에 앨저넌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해따. 버트의 말을 드꼬 난 슬펐는대 앨저넌이 뭔가를 배우지 모타면 먹을 수 없어서 배고플 거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통과해야만 먹을 수 있는 건 올치 안타고 생가칸다. 버트라면 입장을 바꿔서 뭔가를 머글 때마다 시험을 치고 시플까. 난 앨저넌과 친구가 될 생각이다.

 

 

 - 1부 꿈, 「의식과 잠재의식」, 54-55쪽.

 

  추신. 혹시 기해가 있으면 뒷마당에 있는 앨저넌의 무덤에 꼿을 좀 놓아주세요

- 5부 회귀, 「혹시 기해가 있으면」, 453쪽.

 

 교육학과 문학, 심리학을 공부하는 내게 다시금 귀한 의미로 10년 만에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내면을 감응시켰다. ‘공감할 수 있는’ 고귀한 마음을 지녔기에 가장 아름다운 청년, 찰리 고든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의 전공분야인 심리학을 문학에 형상화시킨 저자 대니얼 키스의 다른 작품들 – 특히 『빌리 밀리건』- 또한 기대가 된다.

 

“하지만 지능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당신들의 대학에서는 지능과 교육과 지식을 모두 숭배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모두 놓친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능과 교육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 4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366쪽.

 

 

 

by papyros 2017. 8. 26. 20:53

칼 뉴포트, 딥 워크, 민음사, 2017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민음북클럽 서평 이벤트-열공x열일을 위한 추천도서 활동의 일환으로,  민음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볼링겐 탑.  융이 이원적 딥워크를 가능하게 해 그의 사상적 연구를 발전시킨 공간이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그는 바쁜 생활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무의식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가쁜 취리히의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더 깊고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융은 일에서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볼링겐에 안식처를 만들었다.’

 

- 칼 뉴포트, 딥 워크,민음사, 2017, 8.

 

정신분석학자로 널리 알려진 칼 융은 취리히 대학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 상담을 지속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실상 분석심리학의 핵심인 의식과 무의식, 전의식 등의 개념을 더 폭넓게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곳은 취리히대학의 연구실이 아닌, 볼링겐의 안식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도심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머리를 맑게 하여 과로한 업무에서 벗어났기에 당연히 수반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마치 몇 년 전 방송되었던 예능 <인간의 조건>이나 나영석 PD의 예능 삼시세끼에서 그려지듯,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그저 여유를 즐기는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융에게 볼링겐은 단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연구에 더욱 몰입하게 해 주는 공간이었다. ‘해리 포터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조앤 롤링 역시 죽음의 성물을 집필할 당시 번잡한 환경을 피해 밸모럴 호텔에서 집필에 몰입했다고 한다.

저자 칼 뉴포트는 복잡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온전히 일에 몰입하는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딥워크(Deep Work)’라고 부른다.

 

 

딥 워크(Deep Work) : 인지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완전한 집중의 상태에서 수행하는 직업적 . 딥 워크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며 따라하기 어렵다.

 

- 칼 뉴포트, 딥 워크,민음사, 2017, 9.

 

 칼 융과 같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자신의 일, 업무분야에 완전히 몰입하거나 몰두하여 딥 워크 상태를 누리기는 쉽지 않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일 이외에 업무를 보면서 처리해야 하는 부가 업무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교사나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교과(학문)분야에 대한 연구 및 교재개발을 지속하는 일 외에도 과도한 행정업무를 떠맡곤 한다. 특히 한국사회는 2015년 기준으로 OECD 국가 연 평균 근로시간 중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기본 근로시간이 결코 적지 않은데다 대부분의 직장에서 야근이나 주말 출근 등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더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온라인 공간에 등장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또한 온전한 딥워크를 방해하는 대표적 요인이라 이를 수 있다. 분명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온라인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유용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SNS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되면 SNS로부터 자신의 본래 업무로 돌아오기 힘들어 주의집중능력을 약화시키곤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만해도, 스마트폰의 등장 이전 학창시절에 여가시간 대부분을 책을 읽는 데 들인 반면, 대학 입학 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페이스북에 가입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틈틈이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자주 사용하다보니 페이스북에서 많은 관심사와 취미활동, 다양한 이벤트 정보 및 지인들의 소식을 확인하는 데 여가시간이 분산되어 오히려 학창시절 보다 순수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느낀다. 또한 많은 대학생들, 혹은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가장 유혹을 받기 쉬운 것이 스마트폰-특히 SNS의 확인에 있다.

 조지타운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칼 뉴포트또한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연구 과제를 무사히 수행해서 교수직의 종신재직권을 얻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이었다. 즉 저자는 그 자신이 딥 워크의 핵심적 사고와 실천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 결과를 독자들에게 공유한다.

 그는 딥 워크의 네 가지 방식으로 하나의 큰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도승 방식(피상적 일들을 없애거나 크게 줄임), 여러 목표를 병행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이원적 방식(칼 융과 같이, 평소에는 교수직, 상담 득 바쁜 일상업무를 수행했으나 볼링겐에 안식처를 만들어 온전히 연구와 집필에 집중한 방식), 어려운 일을 꾸준히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운율적 방식(딥워크를 일상적 리듬처럼 습관화하는 것,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딥워크를 위해 확보하는 것) 그리고 빠르게 딥 워크로 전환할 수 있는 프로를 위한 기자방식(일과 중 자유 시간이 날 때마다 딥 워크를 하는 방식) 등 네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기실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자신의 직업 특성이나 직장 환경,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 등에 맞추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방식을 적절히 선택해 딥 워크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핵심은 어떤 방식을 활용하는가가 아닌,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과제의 목표나 기준에 따라 원칙을 세우고,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있다고 여긴다. 저자는 SNS (혹은 피상적인 인터넷(이메일)작업)를 가급적 완전히 차단할 것을 요구하지만, SNS를 온전히 끊기 힘들 경우 SNS 사용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고 딥 워크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역설한다.

 최근 인맥 다이어트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카톡이나 SNS 등의 메신저/SNS 상에서 피상적이며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관계만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피상적이며 피로감을 안겨주기도 하며 더욱 중요한 업무의 몰입을 방해하는 SNS의 단점은 과연 자신이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추하도록 만든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서 맺은 관계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것은 아닌지, 하루의 대부분을 SNS 확인에 쏟느라 진정으로 자신에게 생산적이며 의미있는 활동 독서, 학업, 연구, 직장 내 업무 등-을 뒤로 미루며 SNS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불어 과연 SNS를 통해 맺은 관계를 진정한 관계로, SNS를 통해 확인확인하는 기사를 진실된 사회적 지식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 SNS를 하면서 진실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진짜 감정인지 가짜 감정인지, 그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SNS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나 또한 SNS를 완전히 차단하기 어려운(여러 정보들의 파악이나 관계 면에서), 나약한 한 개인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중요한 문제를 되짚을 수 있었으며 SNS를 차단하고 몰입시간을 확보하는 딥워크의 의미에 대해 배우고 성찰적 깨달음을 통해 딥워크를 삶에 적용하고자 조금씩 노력해 나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었다.

 

 

 ‘물론 모두가 몰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노력을 통해 습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속한 이메일 교류와 소셜 미디어 활동에 따른 인위적인 분주함을 편안하게 느낀다. 그러나 몰입하는 삶을 살려면 이런 일들을 대부분 등져야 한다. 또한 능력을 다해 최선의 성과를 내려는 노력을 둘러싼 불안이 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직은) 별로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처럼 링에 올라 능력과 씨름하기보다 우리의 문화에 대해 의견을 내는 편이 안전하다.

  그러나 이런 편안함과 불안을 뿌리치고 온전한 지적 역량을 발휘하여 중요한 성과를 이루려 노력하면 앞서 그 길을 간 다른 사람들처럼 몰입이 생산성과 의미로 가득한 삶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칼 뉴포트, 딥 워크,민음사, 2017, 246.

 

 

 

 

 

 

by papyros 2017. 8. 13. 22:50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5. 서평과 필사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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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제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도서 일일공부를 읽고 필사하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흘렀다. 이번 주 6장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일독하면서 참으로 많은 구절들을 읽어왔다. 개인에 대한 성찰, 국가정치를 하는 이들의 올바른 태도 등 ……

기실 2017년의 대한민국은 OECD 국가로서 경제력은 이미 50-60년대의 경제수준을 이미 뛰어넘어 경제대국이라 불리며, IT강국일뿐더러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유시민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난민촌을 벗어나 병영시대를 겪은 후 광장으로 나아간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 사회이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모두를 해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는 개개인의 생활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 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시민, 늙어가는 대한민국,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 E-book 336.

 

 

그러나 과연 진정한 광장이 도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지난 주(82), 필사 4회차 당일, 나는 개봉작인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영화에 대해 날조설을 펴는 전() 대통령 모()씨가 진실을 왜곡하고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 당은 -내게 인생작으로 남게 된- 나영석 PD님의 예능 <알쓸신잡>에서 방송된 정재승 교수님과 유시민 작가님께서 체르노빌 사고를 언급하시며 원전의 위험성과 심각성에 대한 경계와 성찰을 논의하신 것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방송심의를 신청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논의를, 근현대사의 아픔에 대해 (과거사에 대한) 더 이상 폭력에 의한 희생이 발발하지 않도록  성찰하고 기억하는 데 의미가 있는 한 작품을 , 그러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진정성있게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이다.

 

 사회적 현안이나 과거사 성찰에 있어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를 왈가왈부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수많은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 그리고 이념논쟁이라는 색안경을 낀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사회가 진정한 광장을 이룩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4.19, 5.18에서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픔들을 기억하고 그 비극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가 보였던 물질만능주의와 인격(생명)에 대한 경시, 성찰 없는 행동들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사회적, 개인적 측면 모든 면에서)이 수반될 때 우리 사회가 진정한 광장으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이 책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개인적, 사회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 모두에게 사유의 힘과 성찰적 의미를 제공하는 거울과 같은 책이었다. 치우침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경도되지 않도록 늘 이 책의 문장들을 되새기며 살아가고자 한다.

 

 

조정에 일이 있으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의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왈가왈부하여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의 의견은 각자 다르기 마련이니, 왈가왈부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나랏일은 한 사람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왈가왈부하여 지당한 결론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중종실록

 

사람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국가의 중대사일수록 왈가왈부는 필수적입니다. 중대한 국가의 일이니까 개인이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며,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유는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 장유승, 128. 왈가왈부는 아름답다, 일일공부, 민음사, 2017, 282-283.

 

 

by papyros 2017. 8. 9. 15:58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4. 필사 4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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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번 4주차에는 치국(治國), 즉 나라를 다스리는 일, ‘정치에 대한 도()가 담긴 문장들이 많았다.

 

 

 2017년 8월 2일, 오늘은 광주 5.18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의 개봉일이다. 퇴근 후 영화관에 들러 개봉 당일 저녁, <택시운전사>를 관람하고 이번 주차의 글을 되새기며 더욱 많은 생각이 든다.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정치인들이 권력을 남용할뿐더러 과오를 지적하는 국민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며 학살을 자행한 군부독재정권의 만행....... 심지어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2017년 까지 그 누구하나 과오에 대해 제대로 용서를 비는 사람이 없으니 양심이 있다면,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할 수 있는 일인 것인가.

 

 

 (), (), (), ()는 나라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다. 관자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습니. 사과하고 책임지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으려는 염치없는 행동입니다. 여론은 염치를 지키는 사람에게 관대한 법입니다.

 

- 장유승, 077. 염치를 지킨다는 것, 일일공부, 민음사, 2017, 176-177.

 

 

 더욱이 잘못된 국가 권력에 비판하는 이들을 ()’으로 간주하여 억울하게 모진 고문을 받게 만드는 그들이 어찌 국시(國是)를 구실로 삼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이들이 아니랴. 민주사회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비정상적인 투표율을 얻고 당선된 정치인들이 과연 진실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론이 성행하자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국시가 나타나자 옳고 그름이 바뀌었다. 한 사람이 있으면 온 나라 사람의 절반은 좋아하고 절반은 미워한다. 이것이 국시라고 하는 사람은 소견이 좁아서 옳다고 하는 사람만 보인다. 이것이 국시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 역시 소견이 좁아서 아니라고 하는 사람만 보인다. 한 사람이 억측하면 천 사람 만 사람이 부화뇌동한다.

열 사람이 옳다 하고 한 사람이 그르다 하더라도 국시가 될 수 없거늘, 하물며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열 사람도 못 된다면 어떻겠는가. 당파가 백성을 선동하며 시비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말이 국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나라를 망치는 자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국시를 구실로 삼아 위아래를 협박하며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 하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장유승, 092. 국시란 존재하는가, 일일공부, 민음사, 2017, 206.

 

 

 이제는 소수를 위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아닌, 진실로,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어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펴며 늘 소통성찰을 향해 바람직한 방향을 고민하며 필요 시 방향을 재설정하는 그런 정치인이 등장하기를 진실로 바란다.

 특히, 암울하고 두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신 한국사회의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며, 그러한 분들이, 소시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사복 택시운전사님, 위르겐 힌츠페터기자님을, 그리고 광주에서 독재권력에 저항하신 그 모든 분들을, 광주에서 연대 속에 함께하신 그 모든 개개인 한명한명을 다시금 기억하고 싶다. 어쩌면 김사복 선생님께서 이미, 독재권력 시절에 희생당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에 먹먹함이 남는다.

 

천지 사이에 있는 온갖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 장유승, 083. 천하에 가장 귀중한 존재, 일일공부, 민음사, 2017, 189.

 

 

 

 

by papyros 2017. 8. 2. 23:45

유시민, 청춘의 독서, 웅진지식하우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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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북카페 책과 콩나무'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웅진지식하우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의 소망과 수준에 맞게 말을 걸어주고 그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유시민, 후기 위대한 유산에 감사 -,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20.

 

 

 

 

 

 흔히 이르길,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즉 한 개인이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지식과 인품을 알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치료에서는 이를 자기서사작품서사를 통해 설명한다. 모든 문학작품에 인간관계의 발달 과정과 유사한 서사가 존재하여 모든 문학은 서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것이 작품서사이며, ‘자기서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서사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독자 개개인이 작품서사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따라 자기서사가 변화되고 개선될 수 있다.

 

 

(기초서사에는 자녀서사, 남녀서사, 부부서사, 부모서사가 있으며 이러한 기초서사들은 다시 네 개의 수준으로 나뉘어 16개의 기초서사가 존재하고 있다. 문학치료, 그리고 문학치료의 서사이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에서 출간된 책이나 문학치료학회의 주요논문 특히 정운채 교수님의 저술 들을 읽어보시기 권한다.)

 근 일주일 동안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단지 여러 작가들의 명저(名著)를 소개받고 지적인 성장을 이룬 것, 독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떠올린 것을 넘어서 자기서사와 작품서사의 상호관계를 직접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가치로운 시간을 보냈다. 청춘의 독서를 일독 후의 지금,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말이 추상적인 문구가 아닌 직접 체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실 유시민 작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부모님과 비슷하신 연배의 이름 있는 정치인으로 알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읽으셨으며 지금은 내 책장에 꽂혀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두 어 권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아침으로 가는 길) 을 통해 글을 잘 쓰는, 지식 있는 정치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최근 애용하고 있는 전자책 서점에서 할인이벤트를 하기에 1년 대여로 구입한 유시민 작가의나의 한국현대사(유시민,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를 일독했으며 이후 TVN에서 방영중인 나영석 PD님의 예능 알쓸신잡’(알고보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시는 유시민 작가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유시민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그 분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방송에서 항소이유서가 소개된 후, 전자책으로 출간된 항소이유서를 일독하니 지금의 나와 같이 고작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안정된 삶의 여로를 걸어 나갈 수 있었을 터인데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신념을 지키고자 처절히 노력해 온 이 분의 삶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송 회차가 거듭될수록 유시민 작가님의 그 가치관에 진실로 매료되어 있었다. 어쩌면, 작가님께서 걸어오신 여정이 너무도 험난하여 아무나 쉽게 걸어가지 못하는 길이기에,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부끄러움이 공존하여, 작가님의 말과 글에서 배움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나갔다.

 

 

 

 

 

 그러던 차, 최근 유시민 작가가 2009년 집필했던 청춘의 독서가 리커버 되어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를 얻어 책을 읽고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되었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부터 E . H 카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대문호와 학자들의 작품이나 저술들이 여럿 소개한다. 죄와 벌, 인구론을 통해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어야만 하는가에 의문을 품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고 밝히고자 하는 지식인의 소명을 재발견하던 저자의 소회가 담겨있는가 하면, 독일 소설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인권에 대한 존중 없이 특종을 따내기에만 급급한 부도덕한 언론을 고발하는 하인리히 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이 작품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 바로 개별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고, 또한 그 안에 속한 개개인을 기억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이어지는 반공의 기치에 따라 내부에서 적을 만들어 부당함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이나 납북 어민들을 간첩으로 몰고, 부당함을 지적하는 여러 지식인과 시민들에 폭력을 행사하여 문인들의 자유로운 집필활동을 통제하고 심지어 모든 신문과 언론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보도지침을 따라야만 했던, 자유가 통제되고 인가에 대한 존중을 기대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암울했던 사회 현실을, 러시아의 소설가 푸시킨의 삶과 그의 소설 대위의 딸을 통해, 군대노동자(군인)이나 수용소에서 헹하는 죽음정치적 노동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삶을 살아나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통해 전체주의를 폭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통해,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고 허위보도를 자행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등 독일문학과 러시아문학을 비롯한 세계 고전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씁쓸하게 다가왔다. 그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렇게 씁쓸한데, 그 부당한 권력이 지배하는 삶을 살며, 그에 직접적으로 항거하다 군에 끌려가며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는 저자는, 그리고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그 모든 이들은 얼마나 더 처절히 괴로워하고 아파했을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결국 7 , 80년대 암울한 독재정권의 시기를 지나오며 올바른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한 자기서사가 청년 유시민이 애정을 가지고 읽어온, 깊은 영향을 받은 책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를 비롯해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모두 지금의 우리보다 더 용감하고 비범했기에 그러한 자기서사를 지니고 부당함에 맞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특별한 소명을 지닌, ‘남들과는 다른이들만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자기희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지녔던 초인론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방향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평범한 이들 다수가 함께할 때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윤동주 시인이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고결한 도덕성과 맑은 영혼으로 써 오신 시가 윤동주 시인의 자기 희생정신을,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보여주었듯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체제로 현실화되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벽한 권리를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 유시민, 0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2.

 

 

 E. H. 카가 밝혔듯 인간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 사회적 진보를 야기하는 것처럼 과거에 비해 조금 더 진보한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 과거와는 다른 시대의 화두가 놓여 있다. 저자와 같이, 혹은 부당함을 위해 몸을 던진 전태일 열사처럼 그 어떤 고문과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음이 부끄럽긴 하지만, 가톨릭을 종교로 믿으며 헤르만 헤세와 김탁환 작가에게 큰 영향을 받아온, 마틴 부버의 실존주의 교육철학에 깊이 공감하며 교직과 상담에 뜻을 두고 있는 나는 적어도 다시 부당함을 외치고 누군가 희생해야만 하는 사회가 오지 않도록 청소년들이 심리적, 정서적으로 건강성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조력하며 나의 소명을 다하고픈 소망이 있다.

 성적과 입시경쟁으로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교육, 물질과 경제적 배경에만 집착하는 욕망 등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현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표현을 빌리면 향유해야 할 것을 사용하고, 사용해야 할 것을 향유하는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 향유(존중)하며 사물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도록청소년들의 인격교육을 위해 헌신하고픈 이상이 있다.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와 두냐의 인격처럼, 약자와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하고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던 비범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놓으면 평범한 사람인 두냐는 더욱 빛난다. 속물 루쥔이 탐냈고 허무주의자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병적으로 집착했던 처녀, 결국 첫눈에 반한 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라주미힌의 삶과 반려자로 맺어진 여인. 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농밀한 애정을 쏟아가며 만든 인물이 바로 두냐라고 본다. 오빠의 하숙방에서 소냐를 처음 보았을 때, 두냐는 소냐가 을 파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한다.

 

- 유시민, 0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30-31.

 

 그래서인지 나의 자기서사의 경향성은 유시민 작가님께서 사회 정의와 분배등 사회과학 서적의 작품서사와 교차하는 것과 달리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등 독일교양소설, 교육자나 학습자에 대해 다루는 성장소설, 인류애를 보여주는 작품들 김탁환 작가님의 목격자들, 뱅크, 앵두의 시간,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와 같은 작품서사와 교차한다.

 지난 주(721) 알쓸신잡 전주편 후반부에서 논의된 바 있듯 지식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경계와 일리(一理)를 수용하는 자세를 늘 염두에 두고 진정 비판해야 할 때,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추구하는 소명과 지식, 가치관과 신념의 방향을 외면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적용한다면, 나도 엘스버그나 리영희 선생님처럼, 아니 꼭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가 존경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범인 김탁환 작가님이나 유시민 작가님과 같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의 진보에 조금은 기여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

 

월남 정책의 수립을 위한 조사 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책 수습 과정의 핵심적 지위에까지 올라갔다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폭로하는 대니얼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매머드와 한 관료 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엘스버그는 그의 객관적 인식 변천의 과정에서 로스토-맥나마라-불의 단계를 거쳐서 그 자신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엘스버그였던 것이 아니라 로스토에서 시작하는 사상 발전의 과정에서 가슴을 에는 수년간의 고민을 겪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실천의 뜻을 깊게 해 준다. 전환시대의 논리, 1920.

 

- 유시민, 0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44-45.

 

 

리영희 선생은 놀랍도록 맑은 영혼을 가진 지식인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선생의 글이 막대한 감화력을 발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 유시민, 0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45-46.

 

 

 지난 1, 영화관에서 개봉한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를 본 후 대학 시절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재독했던 바 있다. 침묵에 등장하는 기치지로처럼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상황에 따라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면에서는 신념과 가치관을 깊이 있게 보존하고자 하는지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자기서사와 작품서사의 조응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체득한 바를 작품 속에서 찾고, 작품 속에서 배운 바를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있게 숙고해 온 청년 유시민의 삶과 같이, 나는 어떤 방향으로 신념과 가치관을 지켜가며 살아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끔 자극을 준, 스물여섯 살 7월의 마지막 를 함께한 청춘의 독서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도 20여년 후, 나의 자기서사와 작품서사 간 조응이 담긴 나만의청춘의 독서책을 세상에 소개할 수 있게 되기를, 지금의 내 청년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를 진실로 바란다. 더불어 그 여로에 계속 함께 해 줄 지금까지 만나왔으며,  앞으로 만날 많은 책들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청춘의 독서뿐 아니라 유시민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앞으로의 여정에 함께하게 될 것 같다.

더불어 알쓸신잡 감독판 마지막 화(7/28 9회 방송분)를 시청한 뒤 한 줄의 생각을 더 추가해 보자면, 결국 책을 읽는 그 본질은 지식의 함양도, 여가생활 즐거움을 위한 것도 아닌 공동체의 삶을 위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타자들과 이 세상과 교류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많은 일리들이 모여 진리를 이루기에....... 그리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치들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소중한 가치나 대상이 수많은 타자들에게까지 감응을 주며 뻗어나갈 때, 그 가치들이 전수되어 항존성을 지녀, 더욱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항존주의 교육철학에서 고전을 강조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바로 여러 저자들이 책을 쓰는 이유 아닐까.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조건이나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 ‘자유와 사회정의를 소중히 여기며 전수하고자 하신 작가님의 가치가, 나의 가치에 온전히 녹아들기를 진실로 바란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25년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유시민, 09. 슬픔도 힘이 될까,청춘의 독서, 2017, 웅진지식하우스, 201.

 

 

 

 

by papyros 2017. 7. 29. 00:34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3. 필사 3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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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 3회차를 맞았다. 이번 주에는 지난주에 미처 다 읽지 못한 2장의 남은 부분에 이어, ‘3.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일독하고 필사했다. 드디어 3장에 이르러 개인 수양과 성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글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의 삶을 아우르고 있는 핵심주제 중 하나라서 그런지 더욱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먼저 2장의 학림옥로라는 시는 참으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늘 고군분투하는 삶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시였기 때문이다. 늘 삶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간절히 바라는, 바라온 바를 이루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너무도 쉼 없이 달려왔고, 지금도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여 어렵게 찾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아주 지척에 있을지도, 아니 이미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이 시를 읽고는 포근함, 따뜻함을 느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이 보이지 않아

짚신 신고 산꼭대기 구름 속을 다 밟고다녔네

돌아와 우연히 매화 가지 잡고 향기 맡으니

봄은 나뭇가지 끝에 이미 와 있었네.

 

 - 나대경, 학림옥로

 

- 장유승, 046. 봄은 이미 와 있었네,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10-111.

 

 사실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오기 때문에 학림옥로라는 시의 한 구절이, 책 한 권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심리적, 정서적 휴식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이어진 휴식에 대한 논의처럼, 대한민국 사회는 피로사회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늘 경쟁 속에 놓여있으며 긴장상태에 살아가는. 얼마 전 알쓸신잡에서 논의된 커피’(카페인)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커피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사회인 것이다. 유럽 여느 국가들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휴가를 간다는데 휴가를 한번 다녀오려고 해도 연차일수를 헤아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피로도 높으며 휴식 없는 모습이 아래 글에 잘 드러난다.

 

 

 사람은 쉬지 못해서 고생하는데, 세상은 쉬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 때문인가? 사람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아서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은 만에 한둘도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와 늙어서 병들 때를 제외하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사오십년에 불과하다. 거기서 또 영예와 치욕을 겪으며 부침하고, 이익과 손해를 기뻐하고 슬퍼하며 느긋하게 즐거워하고 마음껏 쉴 수 있는 날은 수십일에 불과하다. 더구나 백년도 못 살면서 끝없는 근심 걱정을 겪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우환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쉴 기약이 없는 까닭이다. 얼마 안 되는 복을 탐내서 위험한 곳에 두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허리를 굽힌 채 고생스럽게 일을 하고 노심초사하며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마음속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억지로 마음을 다 잡으며 늙어 죽은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과 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쉬는 것인데, 도리어 문제로 여기니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숙재집

 

- 장유승, 047. 쉬지 못하는 까닭,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12-113.

 

 

 어쩌면 이렇게 피로사회가 된 것은, 개개인의 삶 속에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만연한 이유는 결국 개개인 간의 경쟁을 야기하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있지 않은가 싶다.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좋은 직장에 가서 안정적인 자리에 오르고, 높은 위치에 올라 성공해야 하는 그 과정에서 향유해야 할 사람 간의 관계와 도리수단으로서 사용하는 목적전도의 현상이 뒤따른다. 그렇기에 3장에서 보여주는 관계에 대한 메시지들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네가 아침저녁으로 집안살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렇게 노비 한 사람을 보내니 네가 나무하고 물 긷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잘 대해주거라.

 

- 남사(南史)』 『도연명전(陶淵明傳)

 

- 장유승, 065. 이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150-151.

 

 

 

 도연명이 집안에 노비 한사람을 보내며, 아들에게 전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 어떤 신분질서가 없는 평등한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서비스직 종사자, 회사의 부하직원 등에 갑질을 일삼는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3장에 나오는 여러 마음에 남는 문구들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자신에 대한 타인의 비판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메시지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결국 평가나 비판에 민감한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도, 어쩌면 있는 그대로 사람-(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향유의 방식으로 대하기보다는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상의 질서가 견고했던 시대임에도 도연명이 노비(머슴) 한 사람까지 귀하게 대접했듯이, 우리 사회 또한 성공이나 성취’, ‘결과’,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그 개인의 본질을 바로 보고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한다.

 

by papyros 2017. 7. 26. 16:27

제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2.  필사 2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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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손끝으로 문장읽기 2회차에 접어들었다.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를 통해, 일독하고 있는 『일일공부』 라는 책은 주제별로 총 6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난 1주차에 일독하고 필사한 글이 '내 마음 들여다보기' 였고, 이번 2주차에는 '나를 바꾼다는 것'을 주제로 한 문구들을 읽었다. 즉 성찰에 대한 글에 이어 구체적으로 자신을 '변화'할 수 있게끔 돕는 문구들을 소개해 준다.

 

  2장의 22번째 글, 「달아나는 마음잡기」에서부터 마음 한구석이 '쿵'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내 자신의 문제, 현재 내가 당면한 문제에 적중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중학 시절부터 늘 교직에 목표를 두어 왔고 당연히 임용고시를 치러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왔으나 근래들어 교직 뿐 아니라 상담분야에 대한 생각도 더욱 커졌고,  임용고시 외의 다른 길들 또한 자꾸 생각하며 어떤 것이 더 행복한 길일지를 탐색하게 된다.

 학부시절 존경하신 교수님 말씀대로..., 너무 어려운 시험이니 방어하고 회피하고 싶은 심리기제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달아나는 마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우선은 내 앞에 놓인 가장 큰 목표에 집중할 밖에. 춘추전국 시대를 살아갔던 맹자께서 시대를 뛰어넘어 내게 들려주는 조언처럼 여겨진다.

 

 맹자는 달아나는 마음을 잡는 것이학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디론가 달아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한곳에 고도로 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목표가 막연하면 스펙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이라는 안일한 마음보다 '주일무적', 곧 오직 이것뿐이라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실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달아나는 마음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장유승, 「 022. 달아나는 마음 잡기」,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62-63.

 

 더불어 25번째 글, 「오늘이 있을 뿐이다」 에서 정약용 선생님의 '오늘(현재)'을 살아가라', Carpe Diem을 상기해 볼 수도 있었다.



 

 2장을 읽으며 좋은 글들이 참으로 많았으나 특히 마음에 남았던 글을 꼽으면, 33번째 글인 「누구를 위해 사는가」 였는데,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항상 인정받으려고,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종종 지치는 감정을 느껴 왔는데, 결국 욕심과 습관 탓임을, 그리고 이러한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서 내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금 상기해 본다. 강신주 선생님의 『감정수업』 에서도 삶의 주인으로서의 감정, 그리고 노예와 같이 살아갈 때의 감정에 대해 읽고 강연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결국 타인의 평가에, 인정받는 것에 욕심을 부린다면 타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어 주인의 삶에 들 수 없을 것이므로 늘 경계하고 비워내며 내 자신 안에 들어있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만의 형형색색 빛깔을 계발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색의 크레파스 중 한 번도 쓰지 못한 크레파스를 골라 써보며 , 이게 나에게 맞는 색인지, 내가 좋아하는 색인지 알아갈 수 있듯이..

 

 

 

 

 나와 남을 비교하면 나는 가깝고 남은 멀다. 나와 사물을 비교하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거꾸로 가까운 것이 먼 것의 명령을 따르고, 귀한 것이 천한 것을 위해 일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욕심이 지혜를 가리고 습관이 진실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성내는 감정과 모든 행동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남을 따라서 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고 얼굴 표정을 꾸며 가면서 남에게 심심풀이를 제공한다. 정신과 육체 하나 나에게 속한 것이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중략)

 

이용휴는 이렇게 나를 잊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원인으로, 욕심과 습관을 지목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 그리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는 습관 탓에 결국 나의 몸과 마음이 남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지혜를 쓰고, 내 안의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나를 위한 삶을 되찾는 방법입니다.

 

- 장유승, 「 033. 누구를 위해 사는가」,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84-85.

 

by papyros 2017. 7. 19. 22:34

 

제 4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1. 배송 인증 + 필사 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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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역시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온라인 필사모임에 참여했다. 좋은 책을 읽고, 필사하고 사유하는 것 만큼 더 의미있는 일이 있을까 싶다.

 

 붓펜이 조금 늦게 오기는 했으나, 멋진 책과 노트, 그리고 붓펜까지... 필사준비 완료! 노트는 좀 아끼고 예전에 민음사에서 받은 다른 노트를 먼저 사용할 생각이지만...!

배송 후 어느덧 <일일공부> 한 챕터를 완독했다. (57페이지까지).

그저 편안히 하루에 한두장씩을 읽으며 필사하다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글이 참 많았다.

 

 

 

 

필사한 모든 문장이 마음에 남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은 11장, '없어야 할 하나의 감정'이라는 부분이었다.

후회라는 감정이 없는 그것에 대해 필사하면서, '아- 나는 얼마나 칠정을 절도에 맞게 지켜왔는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게 한 문장이었다.

 따로 게시글을 올리고자 하지만 최근에 읽은 유시민 작가님께서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인 스물일곱에 옥중에서 쓰신 <항소이유서>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 본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 유시민,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돌베개, 2017, E-book 38쪽

 

슬픔과 노여움이라는 칠정의 자연스런 감정을 지니고, 인권을, 국가의 윤리와 양심을 되찾고자 투쟁하셨기에, 그 감정에 충실한 절도를 지키셨기에 지금의 2017년이 왔고, 비록 사회적으로는 아직 미비한 부분이 분명 많지만 유시민 작가님 개인적으로는 부당한 것에 비판하고 저항한 데에  후회가 없으시지 않을까.

 

나도 이와 같이.. 끊임없이 사유하고, 이 세계를 사랑하면서 후회없는 삶을 지향하며 성장해 나가고 싶다. 

 

 

'후회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인께서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신 이유는

 일곱가지 감정이 모두 절도에 맞는다면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은 다음에야 후회가 생긴다. 그러니 후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 장유승, 「 011. 없어야 할 하나의 감정」, 『일일공부』, 민음사, 2017, P38-39.

 

 

 

 

 

by papyros 2017. 7. 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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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게시물은  창비 책읽는당 『아몬드 사전 서평단활동의 일환으로,

  창비 출판사에서 출간 전 비매품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17.

 

*본문의 인용구 페이지는 출간된 도서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위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애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아몬드는 어딘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 손원평, 아몬드, 29.

 

이 작품에는 편도체-아미그달라의 이상으로 감정-특히 공포나 불안,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조금 특별한 17세 소년 윤재(선윤재)의 성장과정이 그려져 있다. 유년 시절 눈앞에서 한 아이의 죽음을 보고도,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의 열일곱 생일날 한 남자의 무차별 살인으로 인해 갑작스레 닥친 할멈(할머니)의 죽음과 칼에 찔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도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윤재를, 사람들은 마치 이상한 괴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대한다.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인해 학교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윤재의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윤재가 정상적인’, ‘평범한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감정과 감정의 반응에 대해 교육시켜왔다.

‘-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범주에 속할 거야.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 손원평, 아몬드, 38.

 

 

- 엄마도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걸 원하시지는 않았을 거다.

- 엄만 제가정상적으로 살길 원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 바꾸어 말하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 평범…….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

-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이루기 가장 어려운 가치란다.

- 손원평, 아몬드, 89-90.

 

 한편 곤이(윤이수) 또한 윤재와 같이 사람들에게서 괴물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곤이는 유년 시절 놀이동산에서 부모님과 헤어져 이후 보호시설에서 지내다 입양 후 다시 파양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여러번 사고를 쳐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살아가 부모님을 다시 만난다. 걸핏하면 폭력을 휘드르고, 교사들의 수업 진행을 방해하거나 잦은 욕설을 사용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곤이는 소위 문제아로 불리며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윤재는 비록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할지언정 그 누구보다도 타인과 소통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독서량이 풍부해 지식이 많을뿐더러 성장과정에서 할멈과 엄마로부터 받은 충만한 사랑을 늘 추억하고 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손원평, 아몬드, 171-172.

 

 

곤이 또한 그가 정말 천성이 나쁜아이라서, 폭력을 행사하고 반항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한 후 곤이는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파양당하며 버려진 경험이 있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부모님을 찾았지만 친어머니의 임종도 떳떳하게 보지 못했고 , 아버지는 자신과 소통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버려지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내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곤이는 다시 고통 받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버려지지 않기 위해 강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강함을 어른들이 규정해 둔 세계에 반항하고 질서를 위반하는 과시적 욕구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곤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들에게, 혹은 학교/청소년상담사와 상담을 받으며 유기되는 것에 대한 불안’, ‘이해와 소통의 욕구를 해소한다면 곤이의 문제행동 또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고통이라는 감정에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나비의 날개를 찢으면서까지 윤재와 소통하고자 하는 장면을 통해 곤이의 진실성과 순수성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윤재의 내면을 이해하며 곤이를 좋은 아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윤재뿐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곤이는 윤재와 단 둘이 있을 때만은 다른 누구에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깊이 터놓을 수 있었다.

 

 

- 그 남자는 말이야…….

곤이가 말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이 날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강남에 있는 학교에 날 처넣은 거였어. 거기 가면 내가 모범적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라도 갈 줄 알았나봐. 근데 첫날 가보니까 나 같은 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인거야. 날 보는 눈빛 하나하나에 그렇게 써있더라고. 그래서 깽판을 좀 쳐 줬지. 거긴 얄짤 없더라. 하루 만에 쫓겨났어.

곤이가 콧바람을 불었다.

간신히 전학시킨 게 여기야. 그나마 인문계라 체면은 섰겠지.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그런 애가 아닌데…….

- 손원평, 아몬드, 166-167.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이 아련하게 머릿속을 오갔다.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 아무런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싶어.

눈물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기엔 넌 너무 감정이 풍부하거든. 넌 차라리 화가나 음악가가 되는 편이 더 어울릴걸.

곤이가 웃었다. 물기 어린 웃음을.

- 손원평, 아몬드, 248.

 

 

윤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과 곤이의 마음 깊은 곳 진실한 내면을 바라보면서, 한 개인이 지닌 외적인 부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해 그 내면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성급히 낙인찍는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특히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타인의 고통, 타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나서서 돕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범인凡人들과 달리 윤재는 곤이가 위험에 마주했을 때 진심을 전하고 곤이를 구해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직접 위험과 대면하는 용기를 보인다.

즉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편도체의 크기와 같은 장애나 질환, 혹은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실천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음을 되새기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나 실직(해고)된 노동자 등 사회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문제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공감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에만 품고 있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 나 또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행인 중 한명이 아니었던가 싶은 마음에 부끄러워진다.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략)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뻔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것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기세가 너무나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손원평, 아몬드, 244-245.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가 칼에 찔린 그 사건 뒤로 심박사에게 삶의 조언을 얻고, 곤이와 소통하며 진실한 우정을 배우고 고통과 두려움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으며 도라(이도라)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특별한 존재가 된 도라에게는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내밀한 마음을 고백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누군가가 가게로 들어왔다. 도라였다.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말하고 싶었다. 마음에 떠오른 불씨가 꺼지기 전에.

- 나 언젠간 글을 쓸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 도라의 눈망을이 뺨을 간질였다.

- 나도 이해 못하는 나를,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 이해.

- 손원평, 아몬드, 206-207.

 

 

즉 기존의 세계에서 가족을 상실한 후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도 기적적으로 회복되며 마무리된다. 편도체의 문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의사들의 확정적 진단을 넘어서 윤재의 소통하고 이해하며 진심을 다하고자 하는 내면의 노력이 결국 뇌(편도체)의 문제를 극복해낸 것이다.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사가 웃었다.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나는 곤이와 도라와 함께 보낸 지난 몇 개월을 짧게 회상했다. 그리고 곤이가 후자로 자라고 변하기를 바랐다. 그 전에 좋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 손원평, 아몬드, 252-253.

 

책장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너무나 마음을 울리는 문구들이 많았던 이 소설은 인간관계를 통해 사랑, 우정, 고통과 두려움, 불안 등 감정들을 다룰 뿐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란 실천적 행동의 수반에 있음을, 그리고 삶의 좋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찾은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을 위해 노력해 나갈 때 변화성장을 이룰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좋은 방향을 고민하며 그저 달리는 개개인 모두의 삶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청소년들, 새로운 관계를 마주하며 청소년기에 마주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변화와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청년들, 외적인 문제행동만으로 학습자(청소년)들을 쉽게 낙인찍으려하는 일부 교사들을 비롯해 선입견을 지니고 타인을 바라보는 어른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 그들 모두와 함께 읽고 소통하며 성장해나가고 싶다. 삶을 살아가며 그 삶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는 만큼, 자신이 느끼는 것 그대로 행동하는 만큼 어느 새 한 발짝 나아가 있을 것이다.

 

누워있는 동안 같은 꿈을 자주 꿨다.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이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태양 아래 나와 곤이가 서 있다. 무척 뜨겁다. 앞에서 달리기 시합이 펼쳐지고 있다. 곤이가 씩 웃으며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을 펼치자, 반투명한 구슬이 손바닥 위를 또르르 구른다. 중간에 웃는 표정 같은 둥근 선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구슬을 굴리자 붉은 선이 방향을 바꾸며 울었다 웃었다 한다. 자두 맛 사탕이다. 사탕을 입안에 넣는다. 달콤하고 새콤하다. 침이 고인다. 혀로 사탕을 굴린다. 이따금씩 사탕이 이빨과 부딪혀 딱딱 소리를 낸다. 갑자기 혀가 저릿하다. 짭짜름하고 시큰하다. 비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 사이로 다디단 향이 올라와 나는 정신없이 코를 킁킁댄다.

, 어디선가 출발 신호가 공기를 울린다. 우리는 지면을 밀어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시합이아니라, 그저 달리기다. 우린 그냥 몸이 공기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 손원평, 아몬드, 249-250.

 

 

 

여기서부터는 아주 다른 얘기다. 새롭고, 알 수 없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일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 손원평, 아몬드, 258-259.

 

 

 

 

 

 

 

 

by papyros 2017. 4. 4. 00:32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민음북클럽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민음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우리는 매순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이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자기자신을 관찰하는 데서 오기도 한다.’

-배철현,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38.

 

2015 Grand Master Class 생각수업 당시 광운대에서 김대식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연에서 삶은 의미있어야 하는가?’는 화두를 제시하시며, 삶의 의미-즉 삶의기능과 목표를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 현재에만 치우쳐 근시안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미래의 ’ -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시안적 안목에 대해 이야기 하신 바 있다.

바로 이 거시안적 안목을 확대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김대식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최재천 선생님께서 지식의 융합, ‘통섭統攝을 강조하신 바 있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문이과가 통합되는 등 인문사회학과 과학의 경계지우기가 강조돠고 있다. 이 책 뇌과학자의 저서는 딱딱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무색할만큼 다양한 인문사회 서적과 문학을 통해 품은 질문과 생각의 단상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항존적인 가치를 담은 고전들이 다수 제시되어 있다.

 

 

 

 

저에게는 다음 밀레니엄까지 전해주고 싶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적인 질서, 정확성, 시적 사고력, 그러나 동시에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력에 대한 경험이 내표되어 있는 문학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하버드대학교 강연(1985)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77.

 

성서, 일리아스, 미메시스, SF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자기서사’(*자기서사란 문학치료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문학작품이 각각 다른 작품서사를 지니고 있듯, 개개인도 자신만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의 유형과 수준이 나뉘어져 있어 자기서사를 진단하는 도구도 있는데 문학치료와 자기서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정운채 교수님의 연구를 위주로 건국대 서사와 문학치료연구소에서 출판/발행된 책이나 논문을 보는 것이 좋다.)에 따라 특히 마음에 남는 대목이나 인상깊은 작품은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기에 한 발짝 성장할 수 있었던 모세의 이야기’, 알렉산드로스 황제와 다리우스 대왕을 통해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에서 좋은 사람을 고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 ‘비극이 아닌 희극을 통해 삶과 진리에 다가가는 경로를 모색한 움베르토 에코, 로마의 멸망으로부터 비롯된 삶의 혼란에 대한 해답을 진정한 신국,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라보는 현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용서의 문제, 그리고 호메로스의일리아스에서 세부적이고 고정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고민과 깊은 내면을 표현해 진실을 그려내는 미메시스 계열의 작품들의 차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차별과 폭력의 이야기들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모세는 신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40년 동안의 사막 생활은 모세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모세가 본 가시떨기나무는 실제로 불에 연소되지 않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선이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가시떨기나무에서 들려온 소리는 신의 소리이자 모세 내면의 목소리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42.

 

 

 

 

우리는 왜 중세를 이해해야 하는가? 문명이 다시 야만으로 쇠퇴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리는 세상. 2017년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중세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03.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15.

 

 

호메로스는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존재하는 사실만을 표현하지만 창세기에서의 미메시스는 깊은 해석을 통해 진실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진실의 차이.

 

아브라함의 영혼은 절망적인 번역과 희망에 찬 기대 사이에서 찢기고 있다. 그의 말없는 복종은 중층적이며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문제가 많은 심리적 상황은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호메로스 주인공들의 운명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그들은 매일 아침 그것이 마치 그들의 삶의 첫날인것처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들의 감정은 강렬하나 단순하며 즉각 표현된다.

-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44-245.

 

유대인카프카가 숨진 지 십년 후, 옆 집 의사, 친구, 스승이던 독일 유대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직장과 집에서 쫓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역겨운 벌레가 되어버린 그것들은 살충제에 의해 학살당한다.

(중략)

우리 모두의 영원한 변신.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과 폭행과 차별을 저지르는 또 하나의 우리 모습을,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82.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비극들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다. 박승찬 교수님을 비롯한 중세 전문가들이 중세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바라보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말로 중세의 그 찬란하고도 한편으로 어두운 모습을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위안부 피해자분들과 군함도......,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 이 모두가 질문성찰이 부재했기에, 폭력과 차별에 대한 경계가 없었기에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자칫 이 역사가 반복되는 상황이 생길까 우려스럽다.

아베 정권의 극우적 성향과 반성없는 태도, 마치 유대인들을 배척했듯 이민자 배척 정책을 벌이는 트럼프,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진실과 정의가 너무나도 멀어보였던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과 폐단.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개개인 모두가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의문을 품고 있는 일에 계속해 질문을 던지며 숙고해야한다. 이러한 숙고와 성찰의 과정이 따를 때에만 사회, 나아가 지구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권력을 쌓고 부를 축적하거나, 자국의 이익 -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에만 매몰된다면, 질문이 없는 반복적이며 기계식 훈련과 같은 교육환경이 지속된다면 인간 내면의 항존적인 가치들 - 사랑, 평화, 정의, 자유 등 -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이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고 사회의 오류를 비판할 때 삶이, 인류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성찰과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을 읽은 후 자기 나름의(자기 내면에 깊이 지니고 있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김대식 선생님의 질문을 읽고 던져버리는 수동적 독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능동적 독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능동적 독서, 질문하기를 잊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그 모범과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있는 책이다.

 

 

세상과 자신의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전능한 호모데우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주 최고의 힘을 가졌지만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신.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는 신.

그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21.

 

 

 

 

by papyros 2017. 3. 30.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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