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말이야, 저 별처럼 한결같이 살고 싶어. 길 잃은 누군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 말이야."
"그게 바로 선생님이네. 혜정이는 천직을 잘 찾은 것 같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28쪽.
최근 '빈빈책방'이라는 인문사회서적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대해 알게되어 출판사의 책을 찾아보다가, 최강문 작가님의 『다시, 광장』 이라는 책을 접한 뒤,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기실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최인훈 작가의 소설, 『광장』이었다. 책에 대한 깊은 정보 없이 제목과 역사소설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읽게 된 작품이다보니 처음에는 『광장』을 패러디한 소설이려나?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작품의 중간에도 최인훈의 『광장』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긴 한다. 뒤에서 후술토록 하겠다.)
작품은 1984년부터 1997년 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신군부의 독재가 이어지던 1984년, 대학생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한복판을 살아간 당시의 20대 청년들. 84년 대학 신입생이 된 인석, 혜정, 용우, 수홍, 현태. 그들 모두는 2010년대의 20대로서 대학생활을 해 온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대학생으로서 청년기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했고, 사회문제에 깊이있게 고민했으며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옳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20대였다. 특히 작품의 초반부에 나는 그들 중에서도 국어교사를 목표로 하는 혜정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교직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있는 혜정과 같이, 나도 중학시절부터 평생 국어교사를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할텐데, 어떻게하면 좋은 책을 잘 고를 수 있을까요?
혜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춘길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독서 모임을 해봐. 주기적으로 만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음 책을 무엇으로 정할지 서로 의논도 하고. 그러면 정말 도움이 될 거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3쪽.
친구들이 춘길 선배의 추천으로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는 대목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유년시절부터 책을 즐겨읽어왔고, 대학 시절 가장 먼저 들었던 동아리가 대학 연합 독서토론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1980년대의 20대들도 2010년대의 20대와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지식과 생각, 가치,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서모임을 지속했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광장』 등 … 우리도 학창시절 성장 과정에서 당대 사회현실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수없이 공부해 온 작품들을, 작품 속 친구들 또한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바로 보기 위해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필적이 닮았다? 유태인이다? 그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아?"
"맞아 수홍아.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진상을 계속 은폐하기만 했대. 법원도 군부의 편을 들어 거짓을 지키기 위해 진범 스파이를 무죄 석방하기까지 했어. 그러자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6쪽.
"넌 책도 다양하게 읽는구나. 교양서적하며, 소설책도 많이 있고. 최인훈의 『광장』, 나도 있는데. 이데 올로기가 뭐라고 그렇게 남과 북이 아닌 제 3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소설 읽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 결국에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좇아 푸른 바다로 투신하잖아.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율도국을 찾아 떠난 홍길동 이야기도 생각나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곳이잖아? 멀리 있을 이상향이 아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9쪽.
"아, 그런 이야기도 나왔어? 비록 소설 형식이기는 하지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었던 셈이야. 청계천 알지? 지금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그곳이 60년대 말까지 난쟁이라고 표현된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살았던 곳이었어. 70년대 초 개발 바람이 일면서 정부에서 다 쫓아냈지. 그래서 그들이 간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 지금의 성남시. 소설에도 나오잖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42쪽.
그러나 MT장소에서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중 그들을 의심하던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북한서적 아니냐, 혹은 막스 베버를 마르크스로 착각하는 형사의 이야기... 이 시대의 20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유롭고 편안한 가운데 독서모임을 하는 것과 달리 80년대의 청년들에게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수한 독서모임이 '운동권'이나 '간첩'으로 의심받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은 나름의 변화나 내적 갈등들을 겪으며 그들 삶의 경로는 각각 변하게 된다.
인석은 한국대(서울대의 소설 속 명칭) 사회학과를 다니는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던지며 운동권의 선두에 앞장서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종국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법대생인 용우는 더욱 철저히 권력을 지키고 힘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 사법시험에 매진해 검사가 되고, 혜정은 교사가 되었으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해직되기까지 한다. 현태는 옥상에서 사고를 당한 후 장애를 지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진실을 좇는 기자가 되었으며, 수홍은 안기부(국정원)에 입사했으나 그럼에도 친구들을 저버리지 못한다.
각기 처한 상황과 선택은 다르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각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니고 격동의 80년대에 대응해왔다. 자신을 내던지고 독재정권에 열정적으로 투쟁한 인석이나, 전교조에 가입하는 등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혜정과 비교하면 용우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용우마저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한 청년으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서른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내가, 2010년대가 아닌 그 당대의 대학생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인석이나 혜정같은 용기도, 그렇다고 용우나 수홍처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두려운 나는 이 작품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인 90년대생의 나로서는 살아가보지 않은 80년대 청춘들이 겪은 고뇌의 깊이와 선택에 대해 감히 함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그저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었으며,(스무살에서 12년이 지난 후에도 3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하다.) 운동권으로 학생운동을 해왔다고 해서 , 노조에 가입했다고 해서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정치검사나 안기부 직원이라 하여 극우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모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청년들은 각자 자기만의 신념과 가치로 삶을 살아내고 버텨왔을 뿐이다.
"학생운동?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 않더라구. 군사독재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가진 자는 더욱 갖게 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은 더욱 굶주리는 그런 구조를 깨닫고 나서는 그냥 눈 감고, 귀 먹고 벙어리로 살 수가 없더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난 세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 94쪽.
"오빠야가 출세해가 돈 벌면 안되나?"
"물론 그렇게 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당장 이 동네 이웃들은? 나 혼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벽을 허물어서 다 함께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야."
"나는 오빠야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꼭 생각해주어야 되나?"
"인옥아, 난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이 학생 운동의 목표이고, 또 민주화운동의 지향점이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62쪽.
"세상이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지만, 돈과 권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잖아요. 그 친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거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서령씨도 풍물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가요?"
"풍물을 하면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아요. 더없이 기쁘죠. 게다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요? 용우씨야말로 인생의 목표가 무언지 묻고 싶네요."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91쪽.
이 소설은 정치적 신념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고뇌와 선택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며 동시에 90년대생인 내가 80년대 독재정권 시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유의미했다. 교과서, 책,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80년대 독재정권 시절과 현대사회의 역사에 대해 배워왔으나 교과서의 한 줄로 접해온 것이나, 다른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청년들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그만큼 흥미롭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또한 청년들이 실존인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품이 생생했으며 가독성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의 청년들은 바로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세대이자, 정치인들의 모습이리라 여긴다.
다만 결말부가 조금 아쉬웠는데, 작품의 인물소개글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뒷이야기나 자세한 고민, 반전 등이 작품 속에 담겨있지 않았다. 때문에 97년에 이어 98년부터 2020년까지를 다룬 후속 권이 나오지 않을까 추정하는데, 이 청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과연 그들의 우정은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 궁금증이 앞선다. 계속되는 내용이 기대되는 한편 마음에 남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오래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잘들 한번 찾아보세요.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 모습일 수도 있고,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브리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롤린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예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1막 제4장」, 『심판』, 열린책들, 2020.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개미』를 통해 한국 사회에는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작가이며 작품의 팬층이 두터울 정도이지만, 유년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나는 그의 소설 『개미』를 읽다가 미처 완독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라는 작품 역시 청소년기에 구입 후 미처 완독하지 못한 채 내 방 책장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대학 시절 잠시나마 법학 부전공을 할까 생각하며 법학개론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나름 법과 정치, 정의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바, 『심판』이라는 작품 제목은 나를 매료시켰다. 표지 디자인 또한 파란색에 디케의 눈을 그린 작품의 표지도 매혹적이였으며,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의 저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는 다소간의 걱정거리였다. 내가 과연 이 작가의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작품은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인 ‘아나톨’이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워댄 결과 폐암 수술 중 수술이 잘못되어 코마상태에 빠지며 시작한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아나톨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의 상황을 수용하면서,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사인 ‘카롤린’과 검사 베르트랑 사이에 놓여 그의 마지막 생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설정을 통해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묘사된 것처럼 동양, 우리네 설화 속에도 사후세계에 이르러 여러 관문을 거치고 업보(業報)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상상력이 존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집단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장에서 판사 ‘가브리엘’의 법봉 아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아나톨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한다.
‘아나톨 제 삶이요? 음…… 저는 꽤 좋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아내에게 충실했죠. 그리고 좋은 가장이었어요. 사람들한테 지갑도 잘 열었고요. 일요일마다 미사에 가는 가톨릭 신자였고, 윗사람과 동료에게 인정받는 좋은 직업인이었죠.’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2막 제2장」, 『심판』, 열린책들, 2020.
특히 지상에서 판사였던 아나톨이 이제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사후세계의 판관에게 심판받고 있는 상황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후의 심판 기준은 지상에서의 기준처럼 그가 가정에 충실했으며 인심이 좋았는지, 판사로서 이룬 직업적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상의 기준과 다른 사후의 기준은 그가 아나톨 피숑으로 살기 이전, 그의 앞선 생들이 살아가며 이루지 못한 삶의 지향점들을 충분히 이루었는가에 있다. 즉 그에겐 그의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고유한 ‘카르마’가 존재하는데 아나톨 피숑이 스스로 그의 카르마와 삶의 지향점을 선택했으나 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2막 제1장」, 『심판』, 열린책들, 2020.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꿈을 배신했어요.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손가락으로 아나톨을 가리키며)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전혀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2막 제2장」, 『심판』, 열린책들, 2020.
심리학에서 흔히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유명한 유전과 환경 논쟁이 유명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유전과 환경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삶의 자국을 남기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있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통해 결정된 선택들만이 유전과 환경(카르마)를 극복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아나톨 피숑이 지난 생애의 끝에서, 자신이 선택한 ‘배우’라는 꿈과 운명의 배우자를 좇아 가지 않고, 예술인으로서의 삶보다는 ‘판사’로서의 삶을 택한 것을 우리는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비록 신의 의도에는 어긋난 선택일지 모르나, 소명(召命)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후세계의 심판대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검사측의 논리와 판사의 구형이유보다는 아나톨의 수호천사이자 그의 변호사를 자처했던 카롤린의 논리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가 한 선택들은 수백만의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재판장님. 단 한 번도 잘못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자만이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2막 제4장」, 『심판』, 열린책들, 202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말미, 아나톨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달픔과 지난함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삶의 형’이 구형되었음에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고 사후세계의 판관으로 남기를 원한다. 사실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나톨은 알콜중독자 부모에게 태어나 학대를 이겨내고 법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내세를 선택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삶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나톨의 선택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사후세계의 판사를 역임해왔던 가브리엘은 이제는 다시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고 싶다며 아나톨을 대신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자처한다.
아나톨과 가브리엘의 모습은 죽음 그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우리 내면의 양면성이 두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드라마 우리에게 내생이 있다면, 다시금 사람으로 태어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과, 지상에서의 삶을 다시 영위하기에는 너무나도 두렵고 힘든 양가감정.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면의 여러 갈래들 중,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올곧이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유전의 영향이든, 환경(카르마)의 영향이든, 혹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이 선택한 자유의지든. 나름의 당위성을 지니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충실히 살아왔다면 아나톨처럼 사후 심판의 순간에서 내가 만들어온 삶의 결(존재의 서정성)을 인정해주고 뒤에서 지지해 온 수호천사의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것을 선택하기도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어떤 모험도 하지않는 삶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그 어떤 인물도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심지어 아제미앙 교수까지도.) 카롤린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서 늘 완전무결한 판결을 내려온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에. 무수한 선택의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에.
나는 앞으로의 생에서 아나톨처럼 자신이 믿는 가치를 향해 올곧이 나아가는 한편 가브리엘처럼 지금까지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필요할 경우 누군가를 대신해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기실 내가 만 스물여덟 평생을 들여 지금껏 추구해 온 ‘교사’라는 삶의 목표가 과연 내가 선택한 카르마의 강렬한 영향일지, 혹은 카르마를 거스름에도 불구하고 내 고유한 이성이 발현한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일지 이 지상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까짓것 무슨 상관이랴. 내가 믿는 ‘올바른’ 방향이 있다면 언젠가 천상의 누군가는 날 변호해 주리라 믿어본다.
‘당신이 모험을 계속할 마음이 생기게 만들려는 거예요. 당신의 영혼은 젊다는 걸 기억해요. 어린아이 같죠. 그 영혼이 너무 비좁은 껍질 속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하게 내버려 둬야 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1막 제8장」, 『심판』, 열린책들, 2020.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 이 짧고도 강렬한 작품은 작품을 읽는 시간보다 이 작품을 곱씹고 자기만의 메시지로 체화하는 시간이 훨씬 걸리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작품을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과 행동 동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한편, 「옮긴이의 말」에서 표현된 것처럼 아나톨 피숑의 수술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료계 인력부족 문제, 연로한 환자를 위해 안락사를 자처한 간호사에게는 중형을 내리는 반면 살인자는 방면한 사법계의 정의문제, 아나톨의 자녀들을 통해 드러나는 데이트폭력과 청년세대 문제, 바칼로레아의 권위와 목적 상실 등 교육부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등 프랑스 사회 의료계, 교육계, 사법계의 문제를 위트 있게 지적하고 있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 역시 쉽게 한국 사회의 의료, 교육, 사법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의대 설립과 관련한 의료계 파업. 지방쪽 의료계 인력부족, 수능으로 인한 입시위주의 교육제도, 성폭력 범죄자의 12년 형으로 인한 출소문제와 대책마련, 사법계의 공정성 등……,)
이처럼 이 작품은 문학작품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본연의 요소인 작품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서도 실은 그 이후 생각의 과정을 오래 머금게 하는 작품이기에, 나는 이 작품을 수작(秀作)으로 꼽고 싶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작품들(『고양이』, 『기억』, 『잠』, 『나무』 등)을 더 읽고싶다는 생각이 든 만큼,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와의 제대로 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될 책이 될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정용준 작가님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를 3주간에 걸쳐 읽어내었다. 이미 지난주에 완독을 했기에, 작품의 의미를 곱씹어보고자 이번 주차에는 「작가의 말」과 이제니 시인의 「추천의 말」을 마지막으로 읽어내려가는 한편 민음사 인스타그램 에서 개최했던 문학대축제 영상을 뒤늦게 나마 찾아 영상을 보았다.
「작가의 말」은 소설을 쓴 작가 정용준의 메세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여운때문인지 왠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 소년이 들려주는 후일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용준 작가님의 전작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언어장애'를 겪는 인물들이 많다고 하는데, 정용준 작가는 왜 이를 '질문'으로 삼았을까. 일전에 마음에 남는 문장으로 남아 필사했듯이 우리모두는 어느정도 말더듬이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단 표면적으로 말을 더듬는 걸 넘어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타인들에게 얼마나 깊이, 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는 걸까.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우리는 보기에 조금 튀는 거고. 너도 나중에 더듬지 않게 되면 알게 될 거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75쪽.
작품의 소년 또한 선택했듯이 '글쓰기'는 '말하기'와 비슷하면서도 직접 언어화하고 발화하기에는 너무 힘겹고 아픈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전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책을 좋아하고 조금씩이나마 글을 쓰기를 좋아했던 나도 내 안에 품어내고 있는 그 모든 생각을 정연히 언어화하여 전달하기엔 대범치 못해서, 부족한 사람이어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더 선호해오지 않았나 싶다.
너 글 잘 쓴다. 글쓰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 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아무튼 글쓰기도 마찬가지야.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다음 다음 음도 나오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문장도 문장도 없지. 그러니까 첫 문장은 많은 문장들 중 첫 번째가 아니라 앞으로 나오게 될 글들의 생명체의 머리 머리 머리 같은 기능을 담당하지. 글을 고치는 과정도 비슷해. 좋지 않은 문장을 조금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바꾸고 구조와 순서를 고민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게 노력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거든. 그래서 말더듬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단어를 단어를 알아야 하고 습득해야 해. 실패한 단어를 대체할 단어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거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야.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해. 그런데 24번. 네가 쓴 글을 보니까 괜찮아. 재능이 재능이 있어.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5-116쪽
작품 속 열 네살 소년의 모습은 이미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와 많이 닮아있는 그 소년.. 아마 소년을 통해 자기 내면의 소년을 발견한 독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여긴다. (심지어는 작가님 본인 조차도) 그런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년을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계피 맛 사탕을 쥐어주는 할머니, 돈까스를 사주는 친절하고 따뜻한 이모, 자신과 닮아있는 친구들, 글을 잘쓴다고 이야기해주는 작가 형 - 이들 같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년에게 상처를 입힌 그 어른들을 용서하는 방식으로든 혹은 복수심을 키워나가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던 어른들의 그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순간, 내 안의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폭력적인 아저씨에게 매여있는 엄마의 사정도, 할머니(어머니)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던 스프링 언어교정원 원장님도,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더듬는 이모도.... 그들 모두가 내 마음의 한 자리에서 자연스레 이해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성장한 우리에게 이제는 둘리의 고길동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것처럼)
작품을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 무언가가 남아있는 이 기분은.. 북토크에서 등장한 한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이 '비판적 독서'의 대상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겪어내며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작품으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서평을 갈무리해 본다.
소년이, 내가,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과 만나온 사람이 비단 '한 여름밤의 꿈'이나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 품어야 할 강렬한 무엇인가로 남기를 소망한다.
그는 어른이 됐다.
언제, 어떻게, 왜, 어른이 되는지 궁금했던 그는
마침내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욕했던 모든 어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막연히 알 것 같았다.
(중략)
감정. 얼굴. 이름. 일기. 날과 달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단어들.
진짜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고 얼굴이 되고 이름이 되어 살아 움직였어.
가짜가 아니었어. 뻥이 아니었다고.
- 정용준, 「작가의 말」,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61-163쪽.
어느덧 정용준 작가님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은지 3주가 지났고, 작품을 완독했다. 사실 책의 지면이 그리 길지 않아 충분히 하루에 완독할 수 있는 길이였지만,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읽기' 프로그램을 위해 3주간에 걸쳐 조금씩 끊어 읽으며 더욱 오래 소년과 함께하면서 아이를 바라보고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 유의미했다.
발표를 '망쳤다'고 생각한 소년이 '스프링 언어교정원'에 나가지 않게 되자 교정원의 사람들은 소년의 부재(不才)로 인해 그를 그리워한다. 그만큼 언어교정원에서 소년이 스스로를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교정원의 사람들은 이미 소년을 공동체 안의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특히 소년의 발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까지 표현한다.
소년도 스프링(언어교정원)에 나가지 않는 사이, 그에게 영향을 준 스프링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 할머니, 이모, 노트, 하이, 원장에 이르기까지-을 그리워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한다.
얼음의 나라처럼 지금 이 말을 그대로 얼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할 때마다 더듬지 않은 말을 따뜻한 말에 녹여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술 취하지 않은 엄마의 다정한 말도 얼리고 이모가 내게 해 줬던 모든 말도 얼리고 할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말도 얼리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그 아들을 만나면 다 들려주고 싶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얼리고 싶다. 이모에게 하고 싶은 말도 얼리고 싶다. 할머니에게는 할머니의 아들 역할을 한 연극배우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괜찮아요. 용서해요. 그렇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훌륭한 연극배우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까지 여유롭게 닦아 주면서. 노트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이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스프링 사람들 모두에게 다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원장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 해 줘야 할 말이 있다. 할머니가 준 계피 맛 사탕이 이제 딱 두 개 남았다. 그중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이 사탕은 도대체 어디에서 파는 걸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 한 달 전에 슈퍼에 가서 할머니가 준 계피 맛 사탕을 보여 주고 같은 걸 달라고 했는데 슈퍼 주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팔지 않는다고 했다. 엄청 오래된 사탕 같다고. 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걱정도 해 줬다. 백 년쯤 된 사탕일까? 유통기한이 하루 지나 먹으면 병에 걸리는 그런 불량 식품일까? 병에 걸리면 그것도 좋겠다. 병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사탕을 빨았다. 빨 때마다 쓰고 달콤해지는 입안. 줄어들 때마다 조금씩 나는 잠에 빠져든다. 자장자장 재워 주는 맛이다. 어둠 속에서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이 내 머리를 만지는 것 같다. 만져 줬으면 좋겠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8-119쪽.
이 지점에서 '관계 속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연으로 엮여진 가족보다도 오히려 깊이있게 내면이 맞닿은, 내면과 감정의 선을 이해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 특히 경찰서에서 진술하는 소년을 보호해주기 위해 스프링의 모든 이들이 합심해 나설 때 그 사랑과 애정의 힘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노트에 쓰는 겁니다. 생각하는 것. 관찰한 것. 느낀 점.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것들 모두 쓰게 합니다. 때론 시나 소설처럼 문학적인 상상력 같은 것들까지 쓰게 하죠. 그러니까 그건 일기장이 아니라 마음을 언어로 옮기는 연습장 같은 거예요. 언어를 풍성하게 하고 말을 잘하기 위함이죠. 교정원 사람들은 다 그런 노트를 쓰고 있어요.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38쪽.
용서와 복수. 작품의 초반부터 조금씩 생각나게 하지만 마지막에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이 화두는 과연 양립이 가능한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하고싶으면서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애증)의 마음. 심리학에서는 이를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양가감정을 조금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작품속 소년처럼 '신뢰로운', '신뢰할 수 있는' , '좋은' 이들을 만나고,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수단(매개체)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년과 같이 '글쓰기'가 될 수도, 반 고흐의 '그림이' 될 수도,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이 될 수도, 그리고 헤르만 헤세처럼 글쓰기와 그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다.
한 생애를 살면서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우리네 마음 자리를,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매개물과 더불어 이를 알아 줄 사람들이 주변에 자리한다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자리한다면 - 그것이 바로 내면의 외상을 극복하고 한 차원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주차에 작가의 말과 더불어 생각을 좀 더 정제하여 작품을 전반적으로 정리해 내면화하고 싶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도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그런데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163페이지 내외의 짧은 소설인 정용준 작가님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말을 더듬는 열네살 소년 '나'는 스프링 언어교정원에서 만난 한 친구의 말 -국어선생님께 복수하라는- 의 개연성이나 타당성도 제대로 검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소외감을 겪고 있다. 열네살 소년이 지닌 그 소외감의 무게가 크면 얼마나 크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는데, 기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는 상처가 가장 무거운 법이다.
소년처럼, 원장 또한 시계를 제대로 못하는 어린 시절의 그를 답답해하며 모욕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부자(父子)의 모습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어머니가 있었던 가족 환경 속에서 받은 상처를 소년에게 담담히 풀어낸다. 어른이 된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이해하는 모습까지 보이지만, 아직은 열네살 중학생에 불과한 소년이 상처를 가하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까지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부모들이란 그렇단다. 잘해 주다가도 때리고 사랑하는 말로도 상처를 주곤 하지.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다 그러려니 해. 그리고 미워해.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97쪽.
소년은 말을 더듬는 그를 연민하는 엄마와 더불어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 엄마의 전 애인이 함께하는 상황 그 자체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특히 소년은 엄마의 전 애인으로부터 '나약한' 아이이자 '어머니의 근심(걱정)거리' 정도로만 치부되며 심지어 학교에서는 친구 한 명 없는 외롭고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아이로 여겨지는데, 이 때문에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삶에는 큰 희망이나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라든가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기 어려운데다가 심지어 왕십리역에서 진행한 스피치까지 망치고 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구를 죽이려는 게 아니고 누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복수의 마음인가, 도와주려는 마음인가.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떤 날엔 엄마에게 그 약을 주고 싶기도 하고 어떤 날엔 엄마의 애인에게 그 약을 주고 싶기도 하다. 어떤 날엔 선생에게, 어떤 날엔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먹이고 싶기도 하니까. 그리고 어떤 날.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날. 그냥 살고 있는 것뿐인데 엄청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엔 차라리 내가 먹고 싶기도 하다. 어떤 친구가 물었다.
넌 왜 사냐? 쓸모없고 말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늘 괴롭힘만 당하잖아. 왜 살아? 친구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말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내 삶이 너무 쓸모없고 괴로워 보여 차라리 죽지 뭐 하러 사는지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01쪽.
그만하자. 끝났다. 다 끝났어. 무엇을 기대했을까. 난는 속고 또 속는 바보처럼 이번에도 속았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위해 노력해 줬던 사람들. 진심으로 대해주고 마음 아파해 줬던 사람들. 그들을 배신했다는 생각과 그들이 실망했다는 생각이 마음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다. 나 외엔 누구도 날 비난할 수 없다. 나를 이해한다고? 아니, 누구도 나처럼 살지 않았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07쪽.
결국 왕십리역에서 스피치 사건을 망친 이후로 좌절감을 겪은 소년은 스프링 언어교정원에까지 나가지 않게 되고야 말지만.. 기실 답은 소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예감하고 있다. 이미 소년 내부에는 그 자신만의 가치가, 그 자신만의 힘이 있다. 아직 그것을 소년 자신이 찾지 못했을 뿐이다.
때문에 소년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해나갈, 작품의 후반부가 더욱 기대된다.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우리는 보기에 조금 튀는 거고. 너도 나중에 더듬지 않게 되면 알게 될 거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75쪽.
너 글 잘 쓴다. 글쓰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 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아무튼 글쓰기도 마찬가지야. 첫 음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다음 다음 음도 나오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다음 문장도 문장도 문장도 없지. 그러니까 첫 문장은 많은 문장들 중 첫 번째가 아니라 앞으로 나오게 될 글들의 생명체의 머리 머리 머리 같은 기능을 담당하지. 글을 고치는 과정도 비슷해. 좋지 않은 문장을 조금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바꾸고 구조와 순서를 고민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말을 더듬지 않게 노력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거든. 그래서 말더듬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단어를 단어를 알아야 하고 습득해야 해. 실패한 단어를 대체할 단어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거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야.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해. 그런데 24번. 네가 쓴 글을 보니까 괜찮아. 재능이 재능이 있어.
[독립북클러버 9기- 청춘의책탑] 8회차(9기 3회차)-「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모임 후기
한성희,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개정증보판), 메이븐, 2020.
2020.07.18. 土
'청춘의 책탑’ 독서모임 9회차 리뷰(9기 3회차)
with yes24 독립 북클러버
어느덧 9기 3회차(9회차)를 맞이한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입니다. 5월에 채널예스 인터뷰를 했던 것도 바로 엊그제같은데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 어느덧 7월말이 되었고, 8월을 하루 앞두고 있네요. 북클러버 활동을 해오면서 늘 '책'을 매개로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고 다채로운 논의를 할 수 있어 즐겁기만 합니다. 7월 도서로 <청춘의 책탑>에서 함께 읽은 책은 Yes24 북클럽 (E-book) 에도 등재되어있는 책으로, 한성희 작가님의『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개정증보판) 입니다. 상담전문가인 저자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전하는 편지형식으로 구성된 에세이인 이 책은 20대후반-30대 초반으로 구성된 저희 <청춘의 책탑> 멤버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위안을 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도 자리해 다채로운 모임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광교중앙역 인근 아브뉴프랑의 <스트릿 츄러스>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요, 달달한 츄러스와 커피를 마시며 의미있고 풍요로운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모임 후엔 맛난 시카고피자를 저녁으로 함께 먹었답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많은 모임이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에 유의하며 모임을 진행하였답니다:)
그럼 본격적인 후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1.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심리학을 주제로 여러 생각할 거리가 주어지는 에세이이자,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추천했습니다.
- 책에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자기표상과 대인표상을 통해 내적 작동모델을 이루고 그것이 중요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반복된다는 대상관계이론에 대해 흥미를 지니게 되었고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어졌습니다.
- 책에 대한 첫정신과 의사인 어머니가 갓 30을 지나고 결혼을 한 30대 딸에게 전하는 편지글의 형식이다보니 문체면에서 가독성이 좋았고, 독자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독자가 내담자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로 책을 통해 위안/위로가 되고 정서적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자아로 커 나가려면 누구나 자기 대상을 가져야 하는데,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그 기능을 해 주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자기대상이 꼭 인격체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충일감을 제공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고 지켜 주는 안전판이 되어 견고하고 통합된 자기cohsieve self로 기능하도록 해 준다면 가치관, 취미, 활동, 직업, 모두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91쪽.)
- 저자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보니 아무래도 ‘엄마’로서의 자신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 사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기대가 많이 드러났기 때문인 듯 합니다.
2.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에서 인상깊었던 내용과 구절을 나누어 주세요.
-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저자가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아 온 과정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그 내용에 깊이 공감되어 마음 한 켠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애잔함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9기 1회차(7회차) 모임 때 읽었던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라는 단편이 다시 생각나는 부분이었는데, 워킹맘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과정들이 눈앞에 그려져 무언가 안타까웠어요..다시금 사회 구조의 본질을 생각하게끔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나도 능력 있는 의사,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친구, 괜찮은 며느리, 좋은 딸, 훌륭한 상사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딘가에는 꼭 빈틈이 생겼고 문제가 발생했다. 병원 일이 무사히 넘어가나 싶으면 네가 속을 썩였고, 네가 잘한다 싶으면 갑자기 친정에 문제가 생겼고, 친정이 조용하다 싶으면 시가에 일이 생겼지. 그러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특히나 네가 어렸을 때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에 푸념이라도 할라치면 사람을은 그랬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일한다고 고생이에요. 집에서 아이나 키우지." (23-24쪽.)
- 저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저자의 언어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저희 어머니가 워킹맘이셔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책의 프롤로그에 '만약 너를 낳지 않았더라면 더 큰 성공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분명 허했을 것이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사실 이 문장은 저자에게 있어 딸을 낳아 키운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내용이겠지만, 사실상 딸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폭력적인 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마흔이 넘어, 쉰이 넘어, 예순이 넘어서 더 아름다워지는 너를 보고 싶다.' (320쪽) 같은 문장도 사실 어머니가 또 딸에게 바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적어놓은 것 같아요. 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의 독립을 수용한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털어놓지 못하는 저자의 심리가 곳곳에 엿보였어요. '스무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나의 공적이다'(317쪽.)같은 문장도 타인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 슬픔과 애도과정에 대한 문장이 마음에 많이 남았는데, 우리의 눈물은 각자가 내부에 지니고있는 '미해결과제'가 아직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직 자신이 완전히 수용하고 처리하지 못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치유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너무 빨리 강제로 그 미해결과제를 억압한 채 어른이 되게끔 만드는 것 같습니다.
눈물은 내면의 아이가 아프다고 보내는 신호다. 기쁠 때도 울지만 슬플 때 더 많은 눈물이 나는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아픔 때문이다. 애도는 상실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병적인 슬픔과는 다른 정상적인 슬픔이다. 그리고 애도 과정이란 상실된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다. 상실한 대상을 계속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그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회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31쪽.)
- 모임을 하는 우리 모두가 사실 완벽주의를 어느정도 지니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완벽주의가 분명히 우월추구와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분명히 어느정도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서 완벽주의에 대한 문장에 많이 공감했어요. 대학 때에 이어 대학원에서까지 학점을 내려놓지 못하는 현실에 스스로 씁쓸합니다.
완벽한 작품을 내려다가 졸작을 내는 역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수나 결점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과도한 요구를 받아 온 경우가 많다. 이들은 대개 성취 지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면서 자신이 완벽하게 무언가를 수행했을 때만 사랑과 인정을 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자신이 잘못했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들은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키우게 된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기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압박한다. 결국 완벽주의자는 이룰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항상 '루저Loser'로 남겨지는구나. (138쪽)
3.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에 대한 전체적인 총평
- 내 삶이랑 맞닿아 있는 공감되는 이야기들.
- 상투적인 표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표현들이 많아 포근했던 책
- 상투적인 이야기 – 그럼에도 술술 읽혔던 –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야기
- 독자로서 읽었지만, 상담자로서 상담장면에서 활용하고 싶은 효용성이 많았던 책
3개월 동안 독립 북클러버 9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이번 기수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로 2020년 상반기를 보낸 근래, 소중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좋은 책을 읽고 나누는 의미를 다시한 번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기수에 다시 함께하길 기원하면서
저희 <청춘의 책탑> 모임은 꾸준히 성장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춘의 책탑의 다음 모임 도서는,
[이희영 , 『페인트』 , 창비, 2019. ] 입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더불어 청소년에 대한 시각을 다시금 새롭게 정립하게 해줄 책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지난주, 책을 배송받고서 시일이 조금 지난 후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들었다. 책의 표지부터가 무언가 시선을 끌었는데 아마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표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푸른 색감의 표지를 넘겨 보았다. 책 소개 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책은 말을 더듬는 소년 '나'가 등장한다. 새로 다니게 된 언어 교정원에서 가장 발음하기 힘든 단어가 '무연'이었다는 이유로 언어 교정원의 집단상담 시간에 '무연'이라는 별칭(가칭)을 부여받은 '나'는 열네살 소년인데, 책의 초반부에 소년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년의 내면묘사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으레 열네살 소년이 그렇듯 사랑 받고 싶어하며 타인(또래집단)과 관계맺고 싶은 욕구가 큰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그 욕구를 거절/거부당한 경험이 많아 내면의 상처가 깊은 아이였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나는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속지 않겠다. 기억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바보 멍청이 이 똥 같은 놈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과거의 난 그랬다. 잘해 주기만 하면 돌맹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9쪽.
내일이면 모른 척 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다 그렇잖아. 그러니까 당하면 안 된다. 그땐 진짜 끝나는 거야. 끝 (중략)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기대지도 말자.
하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쏟아지려 해 껍질을 벗기고 사탕을 입에 넣어 쭉쭉 빨았다. 왜 늙은 사람들은 계피를 좋아하는 걸까? 나도 늙으면 이런 맛을 좋아하게 될까?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22쪽.
나도 유년시절 또래집단에 더욱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싶어하는 소심하고 내향적인 아이였던으며 유년기부터 청년기인 지금까지 사람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에 그만큼 상처받은 경험이 많아서인지 소년의 내면에 차곡차곡히 쌓아올려진 상처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을 함부로 믿거나 신뢰하고 정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에 소년의 내면에 깊이 몰입되었다.
특히 소년의 학교생활 중 국어교사에 대한 묘사는 나 자신을 매우 성찰하게끔 만든 요소였는데, 국어교사 이기승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대부분의 어른들과 학교는 소년에게 '읽기'를 강요하는 무리한 환경적 요인에 해당했다.
난독증을 겪는 학생들이나 학습부진이 있는 학생들은 고려했으면서도 '읽기'가 때로 어떤 학생들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있게 헤아리지 못했고 교사로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 지점이었다.
읽어.
책을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에겐 눈이 있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다.
종이에 적힌 문장은 부끄러움이 많아 종이에 달라붙어 있는 건데 그걸 억지로 뜯어내 말로 하는 건 옷을 벗기는 것처럼 수치를 주는 짓이다. 그런데도 학교는 읽기가 무슨 인간이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라도 되는 양 학생들에게 읽기를 시킨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34쪽.
160 페이지 남짓의 짧은 소설 속 주인공... 16년 전 열네살의 내 모습을 한켠에 떠올려보며.. 이 소년을 통해 나는 그 때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앞으로 남은 페이지들에 대한 설렘어린 기대를 가져보면서, 이 책을 다 읽었을 땐 소년도 나도 한층 더 성장해 있기를 진실로 바란다.
덧붙여, 몇일 전 정용준 작가님의 북토크가 온라인으로 진행된 바 있는데..당일 참여하지 못해서 책을 완독하기 전에 정용준 작가님의 북토크 영상을 꼭 한번 보고 책을 이어 읽고싶다.
- 본 게시물은 2020년 6월, 영화 개봉 기념 다산북스 출판사 <브릿마리 여기있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다산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다산북스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브릿마리 여기있다>는 그의 첫번째와 두번째 소설인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 연작, <일생일대의 거래>와 같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2020년 6월, 2016년에 출간된 책이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했다. (해외에서는 2019년에 이미 개봉되었다.)
기실 <오베라는 남자> 이후 <베어타운> 사전 서평단을 먼저 참여했으며 최근 함께하고 있는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에서 <우리와 당신들>을 읽어온 만큼, <오베라는 남자>의 출간 후 <베어타운>에 이르러 상당부분 문체가 정돈되고 인물서사와 시의성 면에서 다양한 메세지를 함의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최근작을 먼저 읽어온 바 있다.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경우 이미 전자책으로 도서를 소장해 온바 있으나, 이번 사전 서평단을 통해 종이책과 전자책을 교대로 읽어오면서 완독하게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느낀 바로 그 감정처럼, 나 또한 책의 도입부를 일독할 때만 해도 브릿마리라는 인물에 대해 결코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수동공격성이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할 정도의 강박적 성격, 결벽증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고용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직원을 힘들게 하거나 퇴근조차 시키지 않는 모습들에서 , 브릿마리를 '꼰대'와 같은 인물로 바라보고 젊은 고용센터 직원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릿마리라는 인물의 서사가 소개되고 작품이 전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모되어갔다. 도입부에 너무 쉽게 낙인을 찍어버린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녀가 새삼스럽게 꼭두새벽부터 고용센터에 찾아가고 그토록 직원을 귀찮게 하며 간절히 구직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녀가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 , 그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언니 잉그리드의 사후 부모님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에 대해 인정받으려 부단히 애썼던 브릿마리는 어머니의 장례 이후 사무친 슬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켄트에게 기대며, 처음에는 켄트의 형인 알프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알프와 이별하고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브릿마리를 선택한 켄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집안에서 켄트의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독립시킨 이후 그녀 나이 60대 -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목도한 것은 '켄트의 불륜'이며, 그녀는 결국 크나큰 무망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집을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즉 브릿마리는 일평생을 자신의 욕구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성장시켰으며 또한 남편 '켄트'로부터 수많은 무시 (가령 브릿마리가 일을 하고자 하면 그만한 급여에 해당하는 자금을 자신이 준다며 가사일에 충실하라고 하는 등)를 감내해오며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왔는데, 켄트의 불륜은 그러한 그녀의 노력과 책임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브릿마리 씨, 40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거기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40년 동안 일을 했어요. 살림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제와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한 때는 신경 썼다는 건 안다. 그가 그녀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켄트의 아이들은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라고, 성인들은 브릿마리 같은 여자들을 가리켜 '잔소리꾼'이라고 한다. 가끔 같은 블록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 이사 올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면 브릿마리가 어쩌다 한 번씩 저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나 할머니가 등장하기 마련이었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 브릿마리는 '잔소리꾼'이 되었다. 켄트에게 계속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오니 그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겼다. 그의 인생이 그녀의 인생이 되었다. 그녀는 그런 데 재주가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누구라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법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읽은《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상작인 강화길 작가님의 <음복(飮福)>이나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 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릿마리 역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남편'이나 '자녀'들을 더 우선시하며 자신의 진정한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르그'라는 -거의 폐허와도 같은- 작은 도시의 레크레이션센터 관리직에 취직되는 순간 , 그녀의 삶에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데, 그녀가 켄트와 함께 살며 느꼈던 무망감이나 좌절, 허무함과는 달리 보르그에서는 그녀를 필요로하는 어린아이들이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브릿마리는 오롯한 '존재 가치'를 느끼게 된다. 자기 내면의 고유한 원리원칙과 도덕관념에 의해 행동하는 브릿마리를 혹자는 '강박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르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특히 브릿마리가 '새미, 베가, 오마르' 3남매에 대한 애정을 가꾸어 나가는 부분은 작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서사였는데, '사이코'와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반사회적인 청소년으로 인식되는 새미를 주변의 평가에 의해 바라보지 않고, 커트러리(테이블에 쓰이는 은기류의 총칭, 식사용 기구로서 나이프 세트(Knife Set), 포크(Fork), 스푼(Spoon)을 이름.) 를 바르게 정리하는 면모나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새미의 사연을 듣고 그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바로 브릿마리였다. 그녀가 비록 자신의 기준에 의해 완고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는, 직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내면에는 진정성이 자리해 있었다.
도입부 고용센터 직원에게 연필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표현과 전달에 서툴지언정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어린 마음과 따뜻한 시선이 드러난다.
"이거 받아요." 브릿마리는 연필을 건넨다. 아가씨가 당황스러워하며 연필을 받자 연필깎이 한 쌍도 마저 건넨다. 하나는 파란색이고 하나는 분홍색이다. 그녀는 연필깎이를 턱으로 가리킨 다음 전혀 편견이 없는 태도로 아가씨의 사내 같은 헤어스타일을 턱으로 가리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두 색 다 샀어요."
"당신은 편견이 없잖아요. 날 인간으로 대하잖아요. 어쩌다보니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인간. 어쩌다보니 인간을 태우게 된 휠체어로 대하지 않고." 그녀는 브릿마리의 팔을 토닥이며 덧붙인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브릿. 같은 인간이라서."
"그 사람들한테 커트러리 서랍을 보여주면 되잖아! 너도 신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면 되잖아!"
"고맙습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러한 브릿마리의 진정성에 대해 아이들은 편견 없는 순수한 시선으로 그녀를 수용하는 것으로 답하는데, 아이들은 그녀의 부족한 면모를 채워주며 브릿마리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파이어릿의 동성애에 대해 염려하며 배려하려는 브릿마리에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하는 파이어릿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편견없고 순수한 시각이 브릿마리의 닫혀있고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씩 열여주지 않았나 싶다.
한편 아이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켄트'의 귀환에 따라 , 남편 켄트를 따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따뜻하고 진정어린 사랑을 전해주는 경찰관 '스벤'과 새로운 사랑을 함께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브릿마리의 심리묘사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스벤과의 사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결국 브릿마리가 그 어느집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결말(켄트와도, 스벤과도 함께하지 않는 결말)이 그려진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브릿마리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친언니 잉그리드의 그늘 밑에서, 잉그리드의 사후에는 부모님의 기대를 위해, 결혼 이후에는 켄트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보르그에서는 축구팀 아이들을 위해 늘 누군가를 위하는 삶만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뒤로해 온 삶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적이 없는 것이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 본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반문은 작중 브릿마리에게도, 그리고 이를 읽는 그 너머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축구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한 브릿마리는, 이제 작품 도입부 무망감과 허무함에 휘감겨있는 그녀도 아니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왔던 어린아이도 아니다. 직접 그녀가 나아갈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보르그의 아이들로부터 받은 진정한 '선물'이라 여겨진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브릿마리는 운동복에 과탄산소다를 뿌리고 맹렬하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쏘아붙인다.
베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머뭇거린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브릿마리가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어른들과 달리 온몸으로 손을 흔든다. 아침이 보르그에 찾아오지만 태양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시간, 난생 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자제하며 지평선 위에서 공손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햇살이 지붕 위로 쏟아지자 파란 문이 달린 하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칼 구스타프 융(Carl J. Jung)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self)'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방향성이며 최종 목적지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실현과정' , '개성화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특히 중년기에 '자기'의 변화 국면을 맞이하며, 자기 내부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작품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추구하는 개성화과정과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지는데, 브릿마리의 자기실현(개성화)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한편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통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이나, 끈끈한 가족애의 경우는 <브릿마리 여기있다>를 발판으로 하여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더욱 확대된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이 작품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세계를 더욱 확대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오베라는 남자>부터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일생일대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고 다시금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브릿마리의 이후 행보는 어떠할지, 프레드릭 베크만은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인물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게 된다.
특히 영화가 개봉된 만큼,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영화로는 어떻게 구현했는가를 비교하며 작품의 여운을 오래 지니고 싶다.
약 470 페이지에 걸친 브릿마리의 서사를 통해 그녀의 내면에 더욱 깊이 다가가 브릿마리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될 인물들 역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서사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 본 게시물은 창비사전서평단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유원> 가제본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창비 측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성장소설. ‘성장’이란 내게 어떤것일까. 입사식 소설, 이니에이션 소설, 통과제의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성장소설’에는 흔히 소년/소녀나 청년 초기의 인물들이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내가 중학시절부터 애착을 지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데미안』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스쳐지나가듯 『데미안』이 언급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으며 또한 유원에게도 『데미안』은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 아마 작가님에게도 그러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는 ‘성장’과 관련된 작품서사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년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애정을 지니고 있는『해리포터』 외에도,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은 내 삶에 진정한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 사전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미 서른이 된 마당에 20대의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지만, 아직도 ‘성장’의 화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나의 내면이,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 같은 작품과 유사하게, 『유원』의 주인공인 유원도 언뜻 평범해 보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인 유원이 고작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12년 전, 집에 불이났을 때 언니가 유원을 구하기 위해 11층 아래로 던진 덕에 길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유원을 구한 덕에 유원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열일곱이던 언니‘예정’은 동생을 구하고서 본인은 결국 불길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언니와 같은 나이의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유원의 뒤에는 늘 그 사건이 맴돌았다.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서 나온 언니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거실을 보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현관 쪽으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욕실로 들어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이불에 물을 부어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내 방 창문을 열어 베란다 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와 얇은 합판으로 분리되어 있던 내 방의 베란다까지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신고한 것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파트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11층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을 것이다. 언니는 수건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사람들은 검게 치솟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생존자를 보고 탄식했다. 불길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까지 덮쳐 오고 있었을 것이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31쪽.
특히 집에 불이났던 그 사건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유원이 성장한 이후에도 늘 유원이 12년 전 겪은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유원은 암묵적으로 ‘불쌍한 아이’이자,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유원의 삶에 ‘당위성’으로 작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책임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픔을,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슬퍼해야 한다는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또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통해 평생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인데, 유원에게는 그러한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의무’와 ‘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심지어 진로마저도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길 등이 제시되는데,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나는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우친 것처럼. 나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눈빛과 목소리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도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83쪽.
중학교 때부터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학원에 갔다. 엄마 아빠가 강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기 주도 학습이 불가능한 나 같은 애는 엄격한 학원에 가야 성적이 오른다는 것을 좀 일찍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00쪽.
이처럼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워야 마땅할 청소년기에 유원에게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감은 결국 유원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예정의 오랜 친구인 ‘신아언니’인데, 기실 유원은 신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며 무엇보다 유원에 대한 신아의 지나친 걱정과 과보호가 관계를 지배하다보니, 유원과 신아의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바람직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유원은 아직까지도 사고 당시에 대한 반복적인 꿈을 꾸는 등 유년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PTSD를 겪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유원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과 더불어 진정한 관계가 결여 되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마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서 나를 움켜쥐려는 불길이 돋아나고 있었다. 화염 너머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지펴지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 방에서 엄마 아빠가 잠든 방으로, 혹은 내 꿈에서 십이 년 전 나와 언니가 잠든 거실로 아무렇게나 옮겨붙는 불길을 나는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아는 꿈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서야 꺼지는 꿈.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14쪽.
특히 유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원에게는 자신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숨지고 말았던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친 ‘신씨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늘 무언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신씨 아저씨의 모습이 유원에게는 불편하게 비추어진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6쪽.
작품 속에서 유원의 삶과 내면을 변화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수현’인데, 수현은 학급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친구이며 동시에 옥상 마스터키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서글서글한 학생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또한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한 면면이 드러나는데, 수현과의 관계속에서 유원은 삶에서 최초로 ‘평범한 우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유원과 유원의 가족을 포함하여, 외상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이 ‘평범성’에 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평범치 않은 고통을 맞이했기에, 옆에서 건네주는 말 한 마디,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너무 붉어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넋을 잃게 만들었다. 만약 상처를 받아 취약해져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위로를 받거나, 혹은 이걸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69-70쪽.
내 방에는 정말 별게 없었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덮자마자 잠이 몰려오는 마법 같은 푹신한 극세사 이불, 정도. 수현은 많은 아이들의 방을 구경했겠지. 내 방은 평균은 될까. 그 이하일까. 다른 애들은 친구 방에서 뭘 하고 놀지. 커다란 앨범에 있는 유치원 졸업 사진 같은 걸 보면서 깔깔 웃나. 너는 이런 책을 읽고 컸구나. 우리 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 있어. 너도 『데미안』 읽었니, 그러면서? 아니면 새로 나온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세상에 똑같은 색깔의 립은 없어. 이것저것 발라 보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거나.
나도 수현의 집을, 수현의 방을 보고 싶었다. 왠지 수현의 방에는 구경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릴 때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잔뜩 있고, 서랍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이, 책상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수현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캘린더에는 친구 누구의 생일, 특별한 모임 날짜들이 체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94-95쪽.
주목할 만한 점은, 수현의 서사가 드러난 이후부터인데, 수현이 사실 유원을 구한 금정동의 호인이자 용감한 시민으로 평가받는 신의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유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수현과 유원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가온다.
전술한 바 있듯 사실 유원과는 대조적으로 학교 내에서 반장을 맡으며 학급 아이들의 신망을 받기도 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그 어떤 구김살이나 그늘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수현에게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리한다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년이 넘게 유원의 가정에 기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도 했으니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 등이 교차하는 수현의 내면은 열일곱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결코 통합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그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그러나 수현이 결국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유원에게 공언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은 유원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Blos(1979)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이차적 개별화 과정 (secondary ndividuation process)’으로서, 유아기 시절 경험한 일차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나아가 부모와의 의존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심리적·정서적 독립을 이루는 데 발달 과제가 있는데, 수현은 이를 충분히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 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2-183쪽.
아버지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선언한 수현의 모습을 통해 유원의 내면에도 변화의 씨앗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 준 댓가로 지나치게 부모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언행이 부담스러움을 용기있게 고백하는 한편, 신아언니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직접 이야기하고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으로 인해, 유원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니 예정과 유원은 다른 인격체이며,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유원의 내부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진솔성과 용기가 유원에게도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그늘이, 그 불행한 사건이 ‘내 탓’, ‘내 잘못’이 아님을, 그것은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아주는 신뢰로운 관계 안에서,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통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24쪽.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5-196쪽.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9쪽.
문득 세월호 유가족분들, 4.3 및 5.18 희생자의 가족분들 및 여타 사고와 국가적 문제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분들께‘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이를 직면하여,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PTSD와 관련해 지나친 죄책감을 직면한 유원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당위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인식하였으며 이제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원이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진실한 개인’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바,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자신이 선택한 삶만을 지향하며, 유원이 그 자체의 빛깔을 드러내기를 진실로 바란다.
안녕하세요. 독립 북클러버 1기와 4기에 이어, 9기에도 함께하게 된 독서모임<청춘의 책탑>입니다어느덧 5월 31일인데, 우선 이번 리뷰를 쓰기 앞서 너무나 과분하겓 채널예스 5월호에 저희 모임의 인터뷰가 실리는 영광스런 기회를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려 펭수가 표지사진!! 이라 기뻤습니다.)
참, 이번 9기에는 멤버가 한 명 추가되었는데요, 본래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친구들 셋이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참여해 왔는데, 다른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나 우정을 쌓아 온 모임장의 친한 친구가 새로 합류하면서, 91~94년생이 다 모여 완전한 90년대 초반생의 독서모임이 되기도 했고 모임에도 새로운 활력이 생겼답니다. 인원이 한명 추가된 것 만으로도 더욱 다채로운 의견들이 쏟아졌으며, '책'을 통한 관계의 이어짐의 의미를 재발견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매년 문학동네에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고는 있지만 특히 올해 작품집은 SNS를 통해 여성서사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은 만큼, 사회문제를 작품에 반영해낸 최근 문학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되나 궁금함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도서를 선정하게 되었답니다.
특히 이번 모임은 죽전역 인근에 소재한<제이플라워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단편선이라는 특징점이 있기도 했으나 모든 작품이 그 나름대로 의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게 많아서 , 여유를 지니고 모든 작품에 대해 천천히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꽃을 피웠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모임 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싶었던 이유와 책의 첫인상을 나누어 주세요.
-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매년 나오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어야겠다고 생각지도 못하다가 '여성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쇼코의 미소>로 알려진 최은영 작가님과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알려진 장류진 작가님의 각각의 작품들을 이미 읽어왔기에 더더욱 해당 작가님들의 글이 궁금해졌습니다.
- 저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정말 좋아해서, 매년 읽어왔고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년에 비해 여성서사가 더욱 넓은 지평과 인식으로 확대된 점이 눈에 띄었답니다. 사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는 대상의 의미가 딱히 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길 작가님이 대상을 받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장류진 작가님의 <연수>의 경우 창비에서 사전서평단으로 먼저 접하고 낭독회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반가움이 들었고 다시 읽어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집에 몇권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있지만 미처 다 완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아무래도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따로 있다보니 신진작가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소수자의 서사를, 특히 현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옮긴 좋은 문학이 있다는 데 대해 매우 기뻤고 동시에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도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2.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각 단편에 대한 단평 (인상깊은 내용과 구절 중심으로)
1) 강화길, 음복(飮福)
- 작품을 다 읽고, 처음드는 느낌은 이건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평소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건 정말 - 주인공을 따라 상황을 이해해야 이 작품이 진정한 스릴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공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사랑이란 뭘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씁니다.작가의 서사구성능력이 정말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 뭐랄까, 생각을 많이하게 된 작품이고..... 많이 신박했어요. 계급을 깨부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인데 그 때문에 더욱 소름돋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 다른 먼 곳이 아닌, 우리 집안의 바로 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서 너무도 깊게 몰입되었어요. 사실 책 속에서 제일 답답한 건 고모도 , 할머니도 아니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성인데, 현실도 그렇거든요. 여성들에게만 너무나 많은 부담을 지우고 이걸 문제시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 '네가 날 이해해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깊게 와 닿았어요. 사실 장녀라서 어머니에게 가장 유대되어 있고 그렇기에 어머니의 심리적 고충을 듣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기에 남동생이 몰라도 되는, 몰라서 편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저는 많이 알고있고 심리적으로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 저뿐 아니라 많은 여성, 맏딸들이 겪는 고충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처음으로 나는 고모가 짜증나지 않았다. 그 대화, 한 명은 계속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쾌활하게 웃는 그 기괴한 대화가 이들 사이에 아주 여러 번 반복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어요. 사실 저는 인터넷에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쓰는데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SNS에도 회의적인 부분이 분명 있는데,글쓰는 행위를 통해 사유하고 표현하는 의미에 대해 이 작품을 통해 많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 이 작품은 '용산 참사'의 주인공이 에둘러 쓴 글이잖아요.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의 =용산참사에 대한 트라우마와 부채의식이 공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용산참사 시절 고등학생이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예로 세월호를 생각해보면 , 우리 모두 '세월호 사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들은 사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동의 아픔과 PTSD를 겪었잖아요. 주인공을 통해 그런 부분이 형상화되어있어서 감정적으로 많이 슬펐던 작품입니다.
- 무엇보다 여성들 간의 연대성을 단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인상깊었어요. 이미 여성으로서 어려운 길을 걸어보았기에 더욱 더 그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을 치르게 될 학생과 강사가 동일시되는 느낌이었달까요. 사실 TVN 드라마<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채송화 같은 인물이 특별해 보이며 이상향이 되는 것도 송화는 송화 그자체로 빛나는데, 여성으로서의 한계 따위 없는데 -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남아있지요.
- 앞으로의 현실에 대해 이 작품 속 강사님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엿보였는데 그 점에서 무언가 씁쓸했어요.
3) 김봉곤, 그런 생활
- 퀴어문학을 너무 많이 접해서인가, 또 퀴어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 작가의 일기장을 읽은 느낌이었어요. 수필 같은 소설이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이 작품은 일상성과 특수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고 여겨지는데, 퀴어의 정체성-아웃팅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퀴어문학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어머니나 연인과의 관계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다름이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 퀴어문학에 대해 그동안 선입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퀴어라고 해서 그 관계까지 특별/특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저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4)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가장 충격적인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통해 시각을 확대해 준 작품이었어요.
- 동생과의 대화가 인상에 많이 남아요. "내는 그냥 행복하고 싶더라. 언니야도 안 그렇나?" 어떤 선택을 하든 여성 혼자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당연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 희진이 이야기한 '도덕적 우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뜻 어렵기도 하고... 많은 곱씹음이 필요하지만 마치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물었듯, 더 큰 선이 무엇인지 - 딜레마 상황은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 임신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중략) "…… 임신중지가 언제나 예외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써내려갔습니다. "……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 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