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문장읽기 4주차 - 「삼포 가는 길, 객지客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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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넷째 주, 단편집돼지꿈의 마지막에 수록된 삼포 가는 길, 객지客地를 읽어내려갔다. 삼포 가는 길은 국어/문학 교과서의 정전(正典)으로서, 주지하듯이 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상실한 민중들의 애환을 그리며 그들 간의 유대와 연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객지客地는 간척지 현장에서 일용노동자들이 겪는 애환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의 노동쟁의를 벌이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삼포 가는 길(1973) 에서는 고향을 상실해 어느 곳에서든 정착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영달이 등장한다. 영달은 고향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자신의 고향 삼포로 돌아가려는 정씨를 만나 이와 동행하게 되고, 정씨와 영달은 삼포로 돌아가려는 여로에서 백화를 만나게 된다. 정씨와 영달이 서울식당 부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백화를 잡지 않은 것은 그 짧은 시간 동행하며 느낀 동류의식과 연대감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공사장 노동자, 노무자, 술집 작부 등으로 모두 직업도 다르고 연배도 성별도 다르지만 그들이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근거는 셋 모두 그 방식은 다르지만 저마다 고달픈 삶의 애환을 지니며 고향을 상실하고 떠돌아 다녀야 일을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소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에게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가명으로만 자신을 소개하던 백화가 고작 스물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술집 작부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일을 정씨와 영달에게 고백하며 삶을 공유할 뿐 아니라 이별에 앞서 정씨와 영달에게만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유의미한 부분인데, 산업화 시대에 고향을 상실할 만큼 극단의 처지까지 내몰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휩쓸려 사람을 불신하며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중히 여기며 목적으로 대하는 물 밑의 연대를 통한 사랑의 윤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와 영달은 그녀가 서울식당이라는 주점에서 도망친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녀가 술집 작부로 일 해온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러한 신분이나 처지로 인해 그녀 자체를 격하시킨 적이 없으며 그들이 가진 돈을 들여 표와 삼립빵 두 개, 그리고 계란을 전해주기까지 한다.

또한 과거 술집 갈매기집에 처음 팔려 가 군 감옥에 수용된 군 죄수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등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은 앞서 읽었던몰개월의 새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될 군 장병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미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삼포 가는 길의 결말부에서 영달과 백화와 마찬가지로, 결국 정씨마저도 산업화로 인해 고향 삼포를 상실함으로써 마지막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려 공허함을 느끼게 하지만, 정씨와 영달이 같은 처지에서 경험하는 동류의식, 그리고 백화와 나눈 이간적 유대와 교류는 결국 몰개월의 새가 그러했듯이 소외되고 희생된 민중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존재의 자기증명이었던 것이다. 백화가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것도, 그리고 정씨가 마지막까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마음의 정처를 잃지 않고자 갈구했던 것도 결국 존재의 근원을 향한 깊은 갈망이라 할 수 있겠다.

(나선욱,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2-42쪽 참조.)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째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

- 삼포 가는 길, P240.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 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대.”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 삼포 가는 길, P241-242.

객지客地(1971)는 간척지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노동자들이 노동쟁의를 벌이게 되는 과정을 상술하고 있는 중편소설이다. 객지客地공장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지니고 있는야근과 달리 노동쟁의에서 성공적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객지客地야근과 같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으며 기계같이 일해야만 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야근의 노동자들이 기능공으로서 숙련된 기술이 있어 쉽게 해고 할 수 없는 존재인 반면, 객지客地의 노동자들은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라는 점에서 그 위치가 더욱 불안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는 점에서 죽음정치적 노동의 속성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삼포 가는 길에서 정씨와 영달, 백화가 그러했듯 고향을 상실하고(떠나) 객지客地에서 일해야만 하는 현실로 인해 노동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행동을 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소설은 회사 측, 즉 자본가 측의 회유에 넘어가 감독조로서 회사측에 협력하는 인물, 패배의식으로 인해 떡밥이 되는 인물들 등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의 존재방식을 택하는 이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국 이미 요구조건을 이행해 휴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쟁의에 참가한 이들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떡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지 않겠냐는 명목 하에 국회의원들이 도착하기 전날 저녁까지 내려오라는 회사 측의 권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내려가게 되며 결국 동혁 혼자 남는다. 내려간 이후 상황이 소설 속에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회사 측의 계획대로 국회의원들의 방문에는 보여주기식으로 치장 된 이후 점진적으로 다시 노임과 휴가시간을 줄여나가 쟁의가 실패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혁은 강렬한 희망이 솟구침을 느낀다는 것으로 결말이 끝나는데, 비록 쟁의에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회사측의 회유에 넘어가며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모습이 비관적으로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꼭 내일이 아니어도 좋다.’며 전망과 희망을 제시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나선욱,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48-56쪽 참조.)

누구나 객지 나올 땐, 그렇게 시작한다네. 나도 머슴살일 해봤다구. 부농이나 호농이나 매한가지야. 소작붙이 해 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질세. 토지 수득세, 수리비, 공과금, 뭐 어쩌구 하는 터에 곡가는 형편없이 싸지, 거기다 어디 땅 파먹는 놈들이 한둘인가. 식구 작은 집에서도 쉴 틈 없이 부업으로 잔푼벌이를 해야 되네. 땅을 더 사야지, 자기 땅을 말이야. 부농도 별 수는 없지. 농번기 핑계로 우리네 같은 뜨내기들이 붙어 있긴 하지만 오래 못 가. 인근의 품팔이 농군들이 많거든. 그 사람들도 얼마 안 가 우리네처럼 대처로 꺼질 게 뻔하단 말일세. 날품팔이를 해야 할 촌놈들이 많으니, 아무려나 대처엘 가든 공사판엘 가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 객지客地, P309.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구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불만을 터뜨려 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 객지客地, P344.

 

그는 바위를 등지고 함바를 향해 앉았는데, 독산을 내려가는 인부들의 모습이 몇 명씩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제방이 보였고, 그 너머로 무한하게 펼쳐진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숙부가 타고 있던 이민선이 바다 바깥을 다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그는 혼자서 다짐했다.

- 객지客地, P377-378.

결국 삼포 가는 길객지客地는 두 작품 모두 산업화(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고향을 잃고, 타관을 전전하며 하루를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인물들의 처지를 형상화해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결국 삼포 가는 길은 정씨마저도 고향을 잃음으로써, 그리고객지客地는 회사 측의 회유에 못 이겨 산을 내려가 쟁의에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비관적으로 제시되는 듯 보이나, 그러한 비관적 결말 이면에는 물밑의 연대와 유대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자리함을 제시하여,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by papyros 2016. 11. 23. 23:58

손끝으로 문장읽기 3주차 - 밀살密殺, 야근夜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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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셋째 주, 단편집돼지꿈밀살密殺, 야근夜勤, 세편의 수록작을 읽어 내려갔다. 세 작품 모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는데, 밀살密殺에서는 생존을 위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가축()을 도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시민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으며, 야근夜勤에서는 노동3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1970년대 공장노동자들의 소작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 간의 문제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또한 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수행해야만 했던 군인들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밀살密殺의 경우 야밤을 틈타 소를 키울 정도로 제법 살림이 넉넉한 집의 소를 훔쳐내어 도축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소를 기둥에 묶고, 도망치고자 발버둥치는 소를 도축하는 모습이 소설 안에 끔찍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암소를 도축한 후 보니 그 안에 미처 세상 빛을 보지 못한 한 생명(송아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비록 동물이지만 아내의 해산이 코앞인데도 어린 생명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산등성이를 올라가는데, 기실 새끼를 밴 암소를 도축하는 과정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방도가 없다는 그들을 둘러싼 현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이구, 이런 등신 좀 보소. 얀마, 읍내선 고기가 필요하다니께, 고기가.”

칼잡이도 신마이를 달랬다.

이 사람아, 워쩔 거여? 대처로 나갈 터일즉슨 쐬가 있겠어, 양식이 있는가. 이삭이나 영글면 헹편 필래나 했더니만…… 요 짓으로 이력이 났지만, 자넨 딱 한 번뿐여, 알겄나?”

여편네 배때지를 봐서라두…… 허긴 그럴 도리밖에 없구만이라우.”

밀살密殺, P129.

세 사람은 몇 번이나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잠 깬 참새들이 아직은 어두운 숲 속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늘에 새벽빛이 가득했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칼잡이가 불쑥 말했다.

자네 대처엘 가서 살아보면 안다니께.”

칼잡이는 지게 멜빵을 추켜올리고서 신마이 쪽을 바라보았다.

예서야 사는 게 그저 해 뜨고, 해 지면 하루지마는…… 게서는 하루에 억만 겁을 사는 셈인디.”

조수가 끼어들었다.

살 방도가 많다는 얘기라우? 아니면 당최 없응께 질다는 말이오?”

쌀려면 못할 짓이 없고 잉? 못 헐 짓 허자니 목숨이 질다는 이약이랑게.”

밀살密殺, P139.

거 꼴사나운 놈, 버리고 가더라고.”

송아지 말여요? 냅두슈. 지집아덜처럼 왜 그런다요?”

조수의 말에 칼잡이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래두 재수가 없을 거 같어.”

재수가 이 판국에 워딨대여. 염라대왕도 먹어야 대왕인디.”

갑시다 얼릉. 워쩐지 상스런 생각이 드누먼요. 마누라가 몸을 풀었을지도 모르겠네.”

신마이의 말에 조수가 발끈했다.

이런 지미 붙을…… 어떤 놈, 새끼 없는 중 아나. 줄줄이 딸린 게 새끼여. 낳고 먹고 죽고 하는 것이 자그마치 일곱이다 말여.”

밀살密殺, P139-140.

한편 야근夜勤(1973)의 경우 공장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직공들은 공장의 부당한 근로조건과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기계를 동시에 멈추는 노동쟁의를 계획하게 된다. 노동쟁의 과정에서 한 사내가 죽게 되는데, 공장 측은 이 죽음을 쟁의와 관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기도 하고, 십오 번 기계의 공원이 공장의 임직원에게 많은 도움을 얻고 있는 터라 혼자 기계를 멈추지 않고 쟁의 사실을 공장 측에 보고하는 등 다른 직공들을 배반하는 등 쟁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중요한 점은 한 개인의 배반을 귀책하기보다는 한명의 직공의 죽음 즉 쟁의과정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나약해진 공원(배반한 직공)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하며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그들의 기계적인 삶, 부당한 노동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낸다.

(나선욱, 황석영 소설의 민중상 연구 : 70년대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6-60쪽 참조.)

결국 이 작품은 19701113일 전태일이 부당한 근로기준법의 변화를 요구하며 분신한 이후 이 작품이 발표된 1973년까지도 부당한 근로기준법이 제시되고 공장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현실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연대의식을 기반으로 한 포용과 용서, 책임 있는 태도를 통해 부조리하고 어려운 현실을 변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며, 실제로 파업에 승리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여자는 아교칠을 마치고 일어났다. 어떤 여공은 못 세게 박는 일을 그쳤고, 또 다른 여공은 페이퍼질을 그쳤다. 여자는 이 년 동안이나 합판의 네 귀퉁이에 아교칠을 하는 똑같은 일만 해왔었다. 그 여자가 자기의 뜻대로 일손을 멈추고 일어섰을 때, 그제야 여자는 그 풀칠의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야근夜勤, P149.

가족을 만나자구 그런다며?”

죽은 사람과 쟁의를 관련시키지 말자는 거야.”

납품반장이 침울하게 말했고, 기능공이 거들었다.

가족을 꼬이려는 수작일걸.”

틀림없어. 무슨 얘기 할 게 있으면 우릴 통해서 전하라구 그래.”

직장은 초록색 운동모자를 벗어서 바닥에 깔고 앉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그 친구가 우리하구 관련이 없나. 그리구, 우리에게 노조가 어디있어?”

노조는 언제나 말끔한 사무실 저 높다란 곳에 있었다.

뭐라구, 가족이 늘었어? 너무 많이 낳았단 말이지. 우리두 실력을 행사할 체면이 서는가. 자네, 우리가 위에 있었다는 걸 언제 알았나. 그럼 그전대루 모른 척하든지, 자네 자신들이 노력해 보는 길밖에 없네. 우리는 자네들 같은 노무자는 이미 아니니까. 허어 살기가 어떻다구…… 그건 여기 모든 기업의 전반적인 조건이야. 그러면 우리들의 노조는 어디 있습니까. 이봐, 자네는 집이 좀 헐었다구 그걸 두드려 부수구야 새 집을 짓는다구 생각하나. 시간가는 대루 수리를 해야지.

그건 집이구…… 이건 사람 얘깁니다.

야근夜勤, P153.

애초에 원자재부터 파손될 위험이 있는 물건이 작업 과정에서 상한 것이 어째서 공원들의 책임인가 하는 게 그들의 최초의 물음이었다. 당연히 원자재를 들여온 쪽일 것이었다. 아니면 바다 건너편의 책임이었다. 도급제에 관한 물음도 그랬다. 법정 노동 시간은 여덟 시간인데,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배가 임금에 의해서 두 시간을 추가할 수 있다는 선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본 노임은 싸고, 도급제로 바꿔놓으니까 실상은 몇 푼을 더 벌어보려고 남은 시간을 뺏기는 셈이었다.

우리두 잠을 자구 쉬어야 다시 일을 하지. 그러니 시간 계산을 하구 휴일두 노임을 붙여달란 거지. 기계에두 기름을 쳐주는데 말이야. 여기, 일요일에 놀아본 사람 있어?”

야근夜勤, P155.

직장은 주먹을 쥐고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여럿이 모이면 책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친구의 죽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동등한 이익, 불행을 함께 나눠서 감수하는 용기, 하는 모든 것들은 비겁하고 나약해진 친구에게까지도 끝까지 책임을 요구하고 보여주어야만 했다.

야근夜勤, P16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1970)은 베트남전에서 미국군의 대리노동자로서 신체적 훼손(죽음)을 전제로 미국의 전쟁을 대리하는 한국군의 죽음정치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듯이, 한국군은 이념(이데올로기)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베트남전에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기실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위치는 미국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위치인 동시에, 베트남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월남인들에게 한국군은 월남인들의 자연스런 삶과 일상을 파괴하는 파괴자이자 가해자이다.

우리는 산개해서 마을을 지나갔다. 주민들이 뒷문을 살짝 열어젖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적의가 깃든 시선을 던졌다. 노인들은 음흉스러워 보였고, 아이들은 교활해 보였으며, 여인네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고, 남자들은 모두들 밤에는 게릴라로 변하는 적인 것 같았다. 그들의 고요한 마을에 침입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여긴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 P197-198.

땀구멍들이 모두 막혀버릴 것 같았다. 남의 땅, 남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는 뭐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냐. 도피로 차단된 일곱 마리의 쥐새끼였다.

, P205.

그러나 월남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적대자이자 이방인인 한국군은 미군에게도 환영받는 존재로 자리하지는 못한다. 한국군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사수한 을 손쉽게 파괴하고 마는 미합중국 군대의,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모습과 세계의 도처에서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중위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미군에게 있어 한국군은 그저 미군이 수행해야 할 군사노동을 대리해 주며,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쉽게 져버려도 되는 대상일 뿐이다. 결국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은 이러한 한국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 소설은 베트남이라는 타국에서, 타국의 전쟁을 대신해 싸워야 하는 중간국으로서의 한국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위치에 있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소외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뭐 하는 겁니까?”

장교가 얼구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바나나 숲을 밀어내야겠어. 짐프와 토치커를 지을 걸세. 저 해병이 막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우리는 작전 명령에 따라서 저 탑을 지켰습니다.”

나는 초라하게 서 있는 작은 석탑을 가리켰다.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탑이라구? 나는 저런 물건에 관해서 명령받은 일이 없는데.”

아직 통고되지 않은 겁니다. 아군은 월남군에게 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인민해방전선은 저것을 빼앗아 옮겨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으나, 불교와 주민들의 관계참모들의 심리적인 판단이며 마을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말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깨끗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누구의 것인가. 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불교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단순한 서양 친구는 으흥,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가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버려야지. 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네. 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장교는 자기가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전형임을 내세우고, 탑에 대한 견해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안다.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 P212-213.

(안남일,황석영 소설과 베트남전쟁,한국학연구11,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268-273쪽 참조.)

(이승우, 황석영 중단편 소설 연구 : 소설집 客地를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30-33쪽 참조.)

(김명희,황석영의 베트남 전쟁 소설 연구,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0-16쪽 참조.)

 결국 앞서 돼지꿈, 몰개월의 새, 종노,철길이 그러했듯이 이번 11월 셋째 주에 읽은 세 편의 작품 또한 결국 1970년대 현실 속에서 노동자, 농민(소시민), 군인들이 겪었던 삶의 비극과 애환을 잘 형상화해내고 있었다. 황석영 문학이 지닌 리얼리즘의 강력한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by papyros 2016. 11. 16. 17:01

손끝으로 문장읽기 2주차 - 「철길」, 「종노」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11월의 첫 주, 어느덧 겨울이라 느껴질 만큼 부쩍 추워진 가을날, 황석영 작가님의 철길, 종노를 읽어내려갔다.

두 작품 모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는데 앞서 돼지꿈이나 몰개월의 새와 마찬가지로 70년대 사회 소시민의 모습을 잘 형상화 해내고 있다.

1976년 발표된 철길의 경우 군인계급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대대장을 살해한 죄로 사령부로 호송되는 죄수는 이미 결혼해 부인과 아내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대대장을 쏘아버리게 된 자세한 이유는 작품 내에서 발견하기 힘들지만, 인질극을 벌이며 병장에게 남은 총탄을 헤아리게 하는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내, 애새끼, 휴가증, 고향편지, 부쳐온 떡, 아까 지나간 기차등은 군인으로서가 아닌 정을 지닌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요소이다. 즉 그를 호송하는 하사나 병장과 마찬가지로 인간적 유대를 갈망하는 개인이다. ‘철조망, 군번, 계급장, 영창, 중령의 속옷등은 신체의 훼손을 전제로 하는 죽음정치적 속성을 지닌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떠오르게 한다. 병장이 상급자를 죽인 이유에 대해 묻자 돈짝만한 계급장을 쐈는데 ……그게 사람이잖아.’라는 답변을 한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에서 이해된다. 즉 죄수는 죽음정치적 속성을 지닌 군인이라는 신분과 군대조직에 환멸감을 느꼈으며, 이에 그를 둘러싼 군대조직이라는 현실적 환경에 대한 분노와 회의를 표출한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죄수와 그를 호송하던 말년 병장 간의 유대관계이다. 두 사람 모두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군인신분이며 집에 돌아가고 싶은공통적인 소망을 지녀왔다. 즉 죄수와 병장과 같은 인물은 명령에 복종하거나 비판의식을 상실한 인물들이 아니다.

(박진만, 「1970년대 황석영 중단편 소설 연구 : 주요인물의 전형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8쪽-40쪽 참조.)

 즉 군인계급이 지니고 있는 죽음정치적 속성에 대한 환멸과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군대라는 조직이 모습을 숨긴 채 은밀한 영역에서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지배하는 비가시적 미시권력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듯 군인계급의 규율화된 권력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전망은 개개인과의 유대 관계존재론적 고민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먼 곳에서 디젤 기관차의 경적 소리가 짧게 한 번 그리고 길게 들려왔다.

들리냐? 기차가 들어오구 있어.”

죄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쪽문을 조금 더 열고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신호등에 불이 켜졌다.”

결국은 잡힌다.”

저 기차를 우선 타구 봐야겠군.”

집에 갈 테냐?”

가는 데까지 간다.”

병장이 말했다.

나두…… 집에는 가구 싶다.”

                                            - 철길, P93-94.

 

잠깐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기차 소리를 듣구 애들 생각을 했어. 언제나……놓치기만 했다.”

이윽고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탁가닥 탁 탁가닥 타, 하면서 선로의 연결 부분에 걸리는 바퀴 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죄수는 벽에 기대앉아 그 소리가 아주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다시 빗소리만이 창고의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 철길, P95-96.

종노의 경우 70년대 산업화가 한창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백암이라는 한 농촌마을에서 웃전 노릇을 하며 소작을 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어 훗집에 살게 하며 필요 시 마다 소작인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조그마한 농촌마을 소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소작인들은 조선시대에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타조법(打租法)으로 지대를 낼 뿐만 아니라 서방님, 아씨, 나리……로 주인집 사람들을 호칭하는 등 마치 종, 노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동이 노인의 차남 규호와, 서씨의 장남은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이해하고 비판하며 백암을 떠나는 인물로 등장한다. 자본과 토지의 부재로 인해 주인집을 마치 상전처럼 모시는 것을 오랜 관행처럼 여겨 온 동이 노인은 장남 규철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아파트를 짓기 위해 훗집을 허물고 훗집에 거주하는 소작인 절반 이사을 내칠 것이라 예고하는 주인집에 결정에 항의를 표하는 서씨의 장남에게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규철을 말리며 이 순간 차남 규호가 집을 나가며 했던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라는 마지막 말을 상기한다.

종노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며 산업화가 가속되던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도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종과 노비와 같은 위치로 자처할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애환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삶의 주체로서 자리한다는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웃집 사람들 여전하죠?”

서씨는 다시 말을 잃고 우물쭈물했고, 아들이 말했다.

내일이 추석이라구 어머니가 일 도우러 가셨으니, 아무 때나 툭하면 하인으로 데려다 부려먹는 거지. 뭐 달라진 게 있겠습니까.”

그 집이 여기선 상전인데 어떡하겠냐.”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서방님, 아씨, 나리…….”

땅이 없는 탓이다.”

서씨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그대로 일 년 만에 보는 자식 앞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 그래두 여기선 느이 동생들이 배 곯은 적은 없다.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 적두 있지만 대처보다야 한결 낫지. 아직은 시골이 어수룩하더라. 나두 열 마지기 농사여. 요새느느 정말 사추리에서 찬 바람이 나도록 일을 한단다.”

아들은 도시살이에 간만 부풀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까짓 열 마지기에 지대는 얼마나 바치구요?”

역시 서씨는 담배만 피우는데 아들이 말했다.

반반이죠? 도둑놈들 같으니…… 아무리 빈손이라지만 농구에 비료에 영농비 몽땅 들이고 식구들 노임까지 들여서 지어놓으면 손가락에 흙덩이 한번 대어보지 않은 놈들이 가져가잖아요. 그러니 다시 말짱 헛것이지요.”

반타작은 옛날부터 원래 법이 그렇다는 걸 모르니.”

어느 옛날요…….”

왜정 때…… 아니 그전에두 그랬다더라. , 땅 가진 사람들두 속이 썩을 게다. 뭐 남는 게 없겠더라.”

그건 가진 놈들 사정이구요. 반반이 대체 뭐예요. 제 앞가림두 못하면서 남의 걱정을 해요. 참 답답해서.”

                                                                                                                                                 - 「종, P120-121.

by papyros 2016. 11. 9. 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