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이 하야오, 왈칵 마음이 쏟아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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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MBTI&Health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예담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 느낌, 감각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들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 나와서 일상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이렇듯 마음이란 우리 삶에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P12.

 

마음의 실체는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때때로 다양한 모양과 상태를 가진 날씨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날씨와 같다면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도, 눈보라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상태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폭풍우, 천둥, 번개, 안개, , 소나기 전부 포함해야 날씨가 되는 것입니다. 눈부시게 햇빛이 비치면 그런 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1년 내내 햇빛이 쏟아진다면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땅이 메마르고 농작물이제대로 자라지 못해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되겠지요. 그런데도 우리의 생각은 한가지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P15.

 

이 책은 일본의 칼 융 학파 정신분석자로서 분석심리학을 일본에 최초로 소개한 가와이 하야오의 연재 글을 엮어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갈등, 그리고 인간관계의 문제를 기술하고 있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있어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간의 문제로, 혹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탐색하는 등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독자에게 책은 마치 활자 너머의 가와이 하야오가 직접 마주해 건네주는 이야기로 다가와, 상담에 대한 간접 경험을 제공한다.

한편, 책 중후반 즈음에는 저자가 꿈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서술되는데, 요컨대 확고한 과학주의자였던 저자는 학업과정 중 지도교수와 수없이 논쟁을 거치기도 했으나, 자신의 꿈에 대한 분석을 받으며 꿈이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과정에서 꿈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매료되고 소명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저자 뿐 아니라 분석심리학을 확대 및 공고화시킨 칼 융 그 자신 또한 목사인 부친과 신경장애를 앓았던 모친의 사이에서 집안의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리고 기묘하고 끔찍한 꿈들로 인해 신경쇠약을 앓으며 학창시절 학업을 잠시 쉴 정도로 고독하고 불안했던 그가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내부의 문제들을 해소해 간 것을 상기한다면,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갈등과 고민, 불안, 정신세계, 무의식 등의 요소를 이해 수 있을 때 자기를 인식해 통합된 인격을 갖추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융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달성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권한다. 자기 인식은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이다. 이는 중요한 구분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실현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적인 완성을 원해서 순식간에 완전히 자기를 실현한 사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끊임없는 수련과 지속적인 노력, 최고의 책임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람의 인생에서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융 심리학 입문E-book, 문예출판사, P77.

 

비록 저자가 직접적으로 융의 정신분석학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원형, 무의식(집단 무의식), 개성화 등 의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는 있지 않으나, 결국 융이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했던, 개인의 개성화를 통한 자기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충분히 유의미한 가치를 제공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만 25년 가까이 살아오며 대인관계에 있어 갈등상황에 대한 불안, 거절민감성이 적지 않게 자리했던 편인 내게 실패나 좌절로 끝난 대인관계는 마음 한켠에 늘 아쉽게 자리해 왔는데 다음 문장을 통해 내가 대인관계에서 범했던 본질적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제공해 준 바 있는데, 바로 평가와 같은 인지적 과정을 배제한 채 그저 들어주어야한다는 점이 그러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대인관계에서 상대의 고민을 들으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도와주어야겠다는 문제와 더불어 오해하고 있는 부분, 모르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가르쳐주고 정정해 주어야겠다는 생각- 어쩌면 상대에게는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는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대학시절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문학(국어교육)과 상담이라는 두 전공을 모두 살려 학교현장에서 교육자로, 상담자로 자리하고자 학업을 지속하며 준비 중인 내게, 가와이 하야오의 이 책은 결국 개인적인 대인관계의 고민을 해소해 주는 상담자가 되기도 했고 앞으로 상담을 지속하려는 젊은이에게 수퍼바이저의 기능까지 제공해 주었다.

개개인의 독자마다, 처한 상황이나 환경 및 심리적 문제, 배경지식, 독서 동기 등에 따라 이 책을 펼치는 심경은 다르겠으나, 독자들 개개인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웃으로, 내담자의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격려를 보내는 상담자로, 상담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수퍼바이저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책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들어준다는 느낌으로 이해하면 상하관계의 입장이 됩니다. 상담은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 즉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이나 부모가 학생과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이 어른이고 위에 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르쳐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하는 사람이 상담 받는 사람과 같은 위치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말에 귀 기울여야 진정한 관계가 싹틉니다.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 찾기 힘듭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가르쳐줄 수 있지만 인생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독할 정도로 서로가 다른 개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 222-223.

 

 

 

 

 

by papyros 2017. 1. 18. 23:01

손끝으로 문장읽기 5주차 필사, 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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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서 있는 201611월 한 달 동안 함께한 작품은 황석영의 돼지꿈단편집이었다. 단편집에 수록된 철길,종노,돼지꿈,몰개월의 새,밀살,야근,,삼포가는 길,객지9편의 작품들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깊이있게 탐독하다보니 벌써 4주가 다 지나가 11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기실 소설가 황석영을 처음 접한 건 학창시절이었다. 교과서 수록 작품으로서 널리 알려진 삼포가는 길아우를 위하여, 그리고 모랫말 아이들정도가 그를 알게 된 최초의 작품들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출간된 바리데기정도로. 그렇게 그냥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된,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소설가 정도로만 여겼다. 재수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국문학을 전공했으나, 학부생 시절 역시 작가 황석영에 대한 인식적 지평이 크게 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저 40년대에 출생한 작가로 197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삼포가는 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산업화 시대 소시민들의 비극과 소시민들 사이의 유대를 그려내고자 한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소설가 황석영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15, 대학원에 진학 후 나병철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서였다.몰개월의 새라는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고, 죽음정치적 노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내몰려진’(내쳐진) 상황에서도 개인 들 간의 유대와 연대, 사랑의 윤리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며 전망을 획득해 나가고 있었다.

몰개월의 새를 통해 소설가 황석영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던 때문이었을까, 손끝으로 문장읽기 필사모임 책들 중, 황석영의 단편집을 보자마자 다른 작품들보다도 황석영의 작품들을 깊이 탐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단편집 한 권을 모두 완독한 지금, 그가 왜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진실로 알 것 같다. 군인, 노동자, 농민 , 기지촌여성 등 70년대 당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살펴보지 않고서는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들이 삶에 천착하였고, 심지어 그 삶이란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바이기에, 황석영의 문학을 접하는 독자들이 활자 이면에 담긴 민중들의 애환과 소망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겪어낸 전후세대이며 방북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리고 유격동의 산업화시기를 겪었던 소설가 황석영은 규율화된 권력에 의해 배제/소외를 겪었으며 이를 소설에서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물밑의 연대와 유대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와 전망을 제시한다.

시대를 반영하고,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소망하는 문학의 책무가 이 지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황석영의 문학은 2016년 가을, 작금의 한구 사회에도 깊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여긴다. 동일을 지닌 사람들 뿐 아니라, ‘비동일성을 지닌 사람들 간 계급, 인종, 성별 등에서 차이가 있는 사람들 간 그 차이를 넘어 트랜스내셔널의 관점에서 사랑의 윤리를 통한 공동체적 연대가 모색 될 때, 어두운 현실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도모될 것이다.

이번 민음사 필사 모임은, 내게 삶에서 정말 존경할 만한 작가를 한 명 더 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기존에 출간한 여러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집필할 여러 작품들을 계속해서 탐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출간될 자서전을 집필하실 계획이라고 작년의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계신데 아직 출간이 되진 않은 듯 하지만 꼭 탐독하고 싶다. 또한 청년들에게 권하는해질무렵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다.

작품이 작가 자신을 드러내듯이, 내가 읽은 작품들도,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작품들도 모두 나 자신을,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여긴다. 황석영의 작품들도 앞으로 펼쳐질 20대 후반, 30……평생의 삶에서 가치관과 인격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문학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by papyros 2016. 11. 30. 23:18

금태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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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창비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신간평가단 활동의 일환으로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도 하프야. 아버지가 한국인이었어. 하프란 중간, 혹은 반반이란 뜻은 아닌 거 같아. 샌드위치 두 개 중 하나는 치즈, 하나는 야채 하는 식으로 구별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벽에 가만히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 행동이나 생각 같은 걸 하프로 나눌 수 있을까?“

 

-P149.

 

신부 한 사람은 시눌룩축제 기간에 들어와 몇 년간 정착했다. 신부는 대학 바로 옆에 붙은 빌리지에 살았다. 우리는 대학 정문 건너편 나무집을 본부로 두고 있었다.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가 신부의 꾐에 넘어갔다. 공짜로 밥도 주고 한글도 가르쳐준다고 했다. 젠장, 우리 같은 코피노는 아주 불쌍하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다.

신부는 나를 처음 보던 날, 성당에 가면 먹을 게 많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몇 끼 먹니?” 웃음을 참아야 했다. 나는 십대에 참치맛을 알았다.

-P11.

 혼혈인, 특히 미국이나 유럽계 등 백인혼혈이 아닌 동아시아계나 흑인과의 혼혈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작품 속 신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단일민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미디어의 영향이 더해져 코피노와 같은 동아시아계 혼혈아들은 버림받은 존재로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들이라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인에게 그들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비동일성을 지닌 존재로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틀 내부에서 소외/배제되어 있다. 작품 중반 누나의 집에 한인회 구성원들이 초대되었을 때 잠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인 블로그 및 여러 사회단체에서 코피노 아빠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하며 코피노 아빠 찾기운동을 벌이는 것 또한 배제/소외된 타자를 양산하고 방치한 데 대한 책임을 묻는 일환으로 여겨진다.

 기실 한국문학사에서 혼혈인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1930-1940년대 한국 문학에서도 혼혈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그린 소설이 있는데, 혼혈인을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시킨 작가가 바로 염상섭이다. 염상섭은 그의 소설 해방의 아들(1946)에서 준식/마쓰노와 같은 혼혈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순수한 혈통의 조선인을 찾는 데 두고 있다. 염상섭의 여타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양옥집, 만세전의 혼혈소녀 일녀 정자, 사랑과 죄, 숙박기등 다수의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혼혈인의 문제가 드러나는데, 혼혈인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한 자성을 소설 속에 담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실패한 까닭은 해방의 아들에서 홍규로 인해 준식/마쓰노가 결국 아버지 쪽을 따르는 것으로 떳떳함을 추구하며 가부장적 논리를 선택하는 등 혈통적 민족주의에 국한하여 혼혈인을 바라본 바, 민족주의적 동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같은 혼혈혼종의 문제에 천착한 김남천이나 김사량은 염상섭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1939)는 트랜스내셔널의 위치에서 주체성을 회복하여 민족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혼혈인 하루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를 부인하고 있는데, 아버지 한베에가 조선인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나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인하는 것은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에서 준식/마쓰노가 그러했듯 한쪽을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하루오가 조선인인 ’(남선생/미나미)을 조센징이라고 놀리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그러나 내(남선생/미나미)가 하루오에게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이며 내면의 사랑을 끌어내고자 하며 선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자, 하루오는 자신이 부정하고 지워내고자 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또한 그 역시 ’(남선생/미나미)의 애정에 남선생이라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화답하게 된다. 즉 남선생(미나미)과 하루오는 염상섭의 소설에서 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혼혈인의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극복하는데, 이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를 드러내며 타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남선생이 자신을 미나미로 소개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던 것도, 하루오가 어머니를 부정해 왔던 것도 결국 자기 내부에서 겪는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의 차이를 통합하고 수용하기 어려웠던 까닭인데, 결국 하루오가 남선생에 의해 혼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남선생이 지니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차이 또한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이자적(二者的) 관계 하에서 상호간의 울림과 사랑을 통해 윤리적, 인격적 관계를 모색해 나가는 모습이 남선생과 하루오의 관계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나병철,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현대문학이론연구54, 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참조.)

 금태현의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이라는 소설 또한 혼혈 문제에 있어 김사량이 추구한 바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하퍼 킴(Harper Kim)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새아버지와 결혼해 살고 있어 부모님 모두와 이별한 코피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혈통적 민족주의의 논리 안에서 하퍼 킴(Harper Kim)과 같은 코피노들을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하퍼는 그저 부모님 모두와 단절되었을 뿐이다.

 

가장 소중한 건 뭐지. 다리를 책상 위에 얹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선풍기가 회전하며 미지근한 바람을 흩뿌렸다.

구글 계정에서 수익을 뽑아내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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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말하는 가족, 일본에 사는 엄마도 생각났다. 엄마치곤 참 정이 안 가는 존재다. 비자도 문제없고 일년간 유효하다는 항공권도 이메일로 도착해 있다. 일주일 동안 엄마를 만나서 뭐하겠나. 아들의 목표를 듣고 나면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황당하고 소박해서.

-P61.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나는 또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어쩌다 사진 몇장, 메시지 몇 번 보내는 걸 자식과의 유대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엄마를. 더는 찾을 필요 없는 나의 엄마를.

-P80.

 

 SNS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지만 하퍼의 성장과정에서 그를 진정으로 지원하고 격려해 주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이는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하퍼와 같은 코피노 아동들 곁에서 함께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방을 구했으며,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대했고, JTV 박사장은 그에게 샤부(마약) 배달을 시키는 등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시킨 샤부(마약) 운반건을 약점 삼아 그를 협박까지 한다.

 

을 벌어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숙식을 해결하고 몰래 돈을 훔쳐내는가 하면, 유투브 계정에 올릴 만한 자극적인 영상을 훔쳐 자신이 찍은 영상처럼 포장해 가능한 많은 조회수를 얻어야만 한다. 즉 하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을 벌기 위해 이해관계 하에서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해 온 것으로서, 하퍼는 박사장에게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하퍼 또한 을 벌기 위해 타자/대상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습관대로 영상을 훔치는 데 주력했다. 훔치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에 당장 돈이 되는 흐름을 만들 수 없었다. 망고스퀘어에 남녀가 모여 불놀이를 하는 모습을 찍어 내 계정에 올리고 일주일동안 들락거려봤다. 서른명 정도가 불놀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년 내내 30도가 넘는 망고스퀘어에서 횃불을 목덜미 뒤로 돌리다 입에서 뿜어내는 불놀이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훨씬 더 뜨겁고 재미있는 게 필요했다. 사이트를 떠도는 뜨거운 작품들을 뒤져야 했다. 이따금 마르코 폴로 누나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접속을 차단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막아버리면 외롭고, 열어두면 귀찮은 상황에 부딪혔다.

-P17-18.

나는 박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예의 바른 사람이 어째서 나한테는 하인 대하듯 했던 걸까. 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잘못한 것 같았다.

-P86

 

블로그에 아침 풍경을 담고 글을 올렸다. 나의 일상은 돈으로 연결하기 힘들었다. 유명한 사람의 움직임은 곧 돈이었다. 호날두가 변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공을 찬 뒤 가면을 벗으면 200만명이 금세 모여든다. 필리핀의 섬을 하루 한군데씩 여행하면 20년이 걸린다. 내가 만일 20년이 걸리는 여행을 하면서 보홀섬에 초콜릿 힐이 있다는 등, 카가얀 데오로에 델몬트 농장이 있다는 등 글과 사진을 올린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거지로 전락할지 모른다. 다시 과거처럼 망고스퀘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명운을 건 뜀박질을 더는 원치 않는다.

-P90.

 

, 이제 생각났어. 숨겨둔 담배 얘기 말인데, 그런 건 천천히 찾을수록 더 값어치가 있는 거야. 필요할 때 딱 끄집어내면 더욱 좋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공유한, 숨겨둔 담배 같은 거 말이야.”

박사장은 귀엣말로 샤부라고 속삭였다.

                                                                                                                                                     -P97.

박사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망고스퀘어를 오고 가는 여자애들을 박사장의 가게인 JTV로 안내하는가 하면, 시키는 대로 샤부를 배달했다. 나는 박사장의 부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짧은 기간 박사장과 거래한 일들이 나의 십대 시절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P165.

 세부의 화려한 밤문화를 형성하는 중심에 놓인 망고스퀘어를 활보해 왔으면서도, 하퍼는 그곳에 소속되고 있지 못했다. 늘 그를 동정하거나, 이용하는 사람, 혹은 일시적인 쾌락의 대상이 되는 이들과 잘못된 관계를 맺어왔으며, 하퍼와 사랑과 신뢰 하에 진실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 하퍼의 삶에 등장한 누나베렌이라는 두 여성은 최초의 유대관계를 맺는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 대학가 복사집 일을 하다가 삶에 지쳐 세부에 자리 잡게 된 누나는 하퍼가 자신의 집에 살아도 된다고 선뜻 제안한다. 종기가 난 등을 발견하고 병원에 동행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가 하면, 그를 위해 정성 어린 요리를 해 주기도 한다. 또한 한국인 손님에 가이드로 일할 수 있게끔 기회도 마련해 준다. 하퍼에게 누나는 어머니가 해주지 못한 충분한 사랑과 애착을 전해주는 인물이었다. 단절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누나와의 관계를 통해 메꿔진다.

 

누나만이 내 몸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콘도로 반찬 재료를 가져와 요리해주었다. 동태도 구워 먹나요? 하고 물었더니 한참 동안 웃었다. 이건 메로구이라는 거야, 누나가 말했다.

메로는 기름기가 많았다. 살이 두툼하면서 잘 갈라졌다. 잔뼈라곤 없어서 토막 난 메로의 원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름이 빠져나오면서 기운을 잃은 내 몸을 메로구이가 보충해준다고 누나가 말했다.

-P27.

 

누나는 국수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았다. 잘게 썬 김치, 볶은 양파는 기본으로 들어갔다. 호박, 상추, , 깨소금, 참기름을 국수에 섞었다. 뭐가 빠졌지, 하며 냉장고에서 다진 소고기를 듬뿍 넣었다.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겸손을 행사할 줄도 알았다. “별로 맛없지. 초장을 좀 더 넣을까?” 뭐 하나 더 넣지 않아도 먹어본 국수 중에 가장 맛있었다. 칭찬을 휘둘러 주고 싶을 정도로.

-P60.

 

 한편 박사장이 돈을 받아내야 한다며 잡아오라고 명령한 베렌에게는 누나에게 느낀 모성애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박사장이 보여 준 미인대회 영상을 통해 처음 이성적 매력을 느끼고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여자와 사귀고 싶다는 욕망을 떠올리게 된다면, 막탈리사이에서 베렌의 어머니를 만나고 일본에서 베렌과 함께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과 존중, 연대에 기초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하퍼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면, 일본에서 만나 들려준 베렌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기고백은 이성에 대한 욕망에서 나아가 상호 환경과 차이에 대한 공감과 존중으로 변모한다. 하퍼가 하프’, 즉 혼혈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비동일적존재로 여겨지며 한국인들에 단절되었고 부모님 두분과 모두 헤어짐을 겪어 단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렌 또한 부모님 사이가 틀어져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부친의 단절을 겪었으며, 줄곧 농장을 운영하며 집안을 유지해 왔으나 엄마가 염소나 돼지 등 가축들을 팔아 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가축들이 사라지자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한 바 있다. 더욱이 베렌이 JTV에서 일하다 한 손님에게 돈을 받은 일 때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의 의혹을 받게 되어 구금상태에 처한 적이 있는데 , 의혹을 벗고 풀려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일을 도와준 댓가로 재판에서 승소해 받은 돈의 50%를 요구하는 박사장으로 인해 곤란에 처하게 된다. 하퍼가 베렌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또한 결국 돈 때문이다. 베렌 역시 하퍼 만큼이나 내몰려진상태에 놓여 있었다.

 비록 베렌이 하퍼가 박사장과 맺은 관계로 인해 의혹을 품고 그를 거부하려 하지만, 베렌은 결국 하퍼가 보이는 진심에 화답해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의 일본 여행이 중요한 점은 베렌 뿐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 또한 회복되기 때문인데, 하퍼는 비로소 자신 뿐 아니라 어머니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리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새아버지(할아버지)와 단절되어 있었고 힘겹게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김사량의 소설에서 남선생과 하루오가 선물의 관계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일본 여행을 기점으로 하퍼와 베렌의 관계가 재설정된다. 혼혈인으로서 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지며 배제되어왔고 단절되어 누군가와 진실한 교류를 나누어 보지 못한 하퍼가 마찬가지로 단절상실을 경험했으나 이로부터 도망치고 저항하고자 하는 베렌의 삶을 통해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이제 누군가에게 동정이나 연민, 이용당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타인의 것을 훔쳐 돈을 버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아야 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진실로 삶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하퍼는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시켜 준 베렌에게 사랑해라고 고백하며, 그녀와 미래를 함께하고 가족을 구성해 이제는 신뢰와 유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지니게 된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소리, 물안개가 가득한 호수의 입김, 조용히 서 있는 숲속의 나무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이 모습이 무람없는 내 삶의 출발이다. 나를 투영한 영상이다. 베끼지 않은 진짜 계정이다. 내 채널이다.

세부로 돌아가 내 삶과 부딪히며 살고 싶다.

-P213.

다다미 방에 앉아,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P169.

 

베렌과 나는 열차 안에서 점심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나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얼마나 정성어리게 싸뒀는지 아직 밥에서 김이 올라왔다. 백미 속에 숨을 쉬는 사람이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찬통에 빨간 김치가 들어 있었다. 젓갈 냄새를 풍기는 바구옹 소스도 주름 잡힌 호일 속에 쌓여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 옆에서 맡았던 젓갈 냄새와 똑같았다. 소금과 올리브유가 발라진 까만 김을 먹으며 베렌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이제껏 길거리에서 먹었던 음식은 모두 사료가 아닌지, 이런 기분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나도 한번쯤 가족이라는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P206.

 

아떼와 로시오는 대문 옆의 약국 아에 쌀자루를 놓고 동네사람들에게 한공기씩 나눠줬다. 약국에서 아이들 손에 사탕을 쥐여주고 있었다. 사탕을 얻어먹던 시절이 생각났다. 얻어먹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P98.

 

사람은 태어나서 젖꼭지부터 물고 인생을 시작하지. 그리고 밥그릇, 술잔, 꽃병 같은 것들을 간직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분청사기를 보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변화무쌍하며 대담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 그릇에 소나무를 음각으로 새겨 넣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P204.

 

 처음으로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베렌을 박사장에게 결코 넘겨줄 수 없는 하퍼는 결국 베렌과 함께 일본에서 세부로 귀국한다. 귀국 직후 마지막 장에서 그가 누나의 집에서 거주하던 시절 가이드일을 했듯이 가이드로서 하퍼의 새로운 삶이 펼쳐진 줄로 알았으나, 기실 그것은 감옥에 있는 하퍼에게 베렌의 동생이 보낸 편지였다.

 ‘필요한 순간에 숨겨둔 담배를 꺼낸다고 했던 박사장의 협박대로, ‘마약운반책이라는 죄목으로 입국심사 중 공항에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부 지방 교정·갱생 센터’(CPDRC)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하퍼는 박사장의 조작으로 인해 체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억울해 하며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베렌과 베렌의 가족이 면회를 오고, 베렌의 남동생이 편지를 써 준다. 교도소에서 열리는 댄스 공연에서 베렌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Dance Again춤을 추고 싶어, 사랑도, 그리고 다시 춤을이라는 노래 가사는 하퍼의 희망을 대변하고 있다. 박 사장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와 같은 사람이 한인회 대표가 되어 교도소에 방문해 연단에 올라 위압적인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하고 서러워 할 법 한데,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기다림을 말하는 태도, 연단에 손을 짚고 서 있는 박사장을 똑바로쳐다 볼 수 있는 것은 하퍼의 변화와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뢰와 유대에 기초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희망이 실현될 날을, 다시 자유가 찾아올 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부 시내 망고스퀘어에서 외곽 언덕으로 밀려난 셈이었다. 갱생의 강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갱생하려면 주는 대로 먹고, 춤을 추며 웃고 난 뒤 돌아서서 울어야 했다. 자식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적게 울었다.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기다림을 익혔다. 지난해 성탄절에 레천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운동장에 시식대를 진열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회적 배려가 찾아왔다. 동료 죄수들이 밥과 레천을 서로 입에 던지며 헐떡거릴 정도로 먹었다. 나는 기다리다 맨 마지막에 먹었다. 기다림이 후천적 천성으로 자리잡아가는 것 같았다. 베렌을 기다렸고, 프러포즈 춤을 기다렸다. 엄마를 기다렸고, 내가 자유를 찾을 날을 기다렸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P251-252.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구가 문득 떠오른다. 베렌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그에게 닥친 시련을 감내하고 겪어낸 이후에는, 유투브에서 영상을 훔쳐 돈을 벌기 급급했던, 동정과 연민의 차별적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어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을 이루어 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퍼가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자신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목적 그 자체로서 자리해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아닐까.

 

 

나는 벌써부터 부활절을 기다렸다.

관례대로 누군가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가길 간절히 희망했다.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P25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에서.

 

 

 

 

 

 

by papyros 2016. 11. 27.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