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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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게시물은  민음북클럽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민음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우리는 매순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이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자기자신을 관찰하는 데서 오기도 한다.’

-배철현,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38.

 

2015 Grand Master Class 생각수업 당시 광운대에서 김대식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연에서 삶은 의미있어야 하는가?’는 화두를 제시하시며, 삶의 의미-즉 삶의기능과 목표를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 현재에만 치우쳐 근시안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미래의 ’ -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시안적 안목에 대해 이야기 하신 바 있다.

바로 이 거시안적 안목을 확대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김대식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최재천 선생님께서 지식의 융합, ‘통섭統攝을 강조하신 바 있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문이과가 통합되는 등 인문사회학과 과학의 경계지우기가 강조돠고 있다. 이 책 뇌과학자의 저서는 딱딱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무색할만큼 다양한 인문사회 서적과 문학을 통해 품은 질문과 생각의 단상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항존적인 가치를 담은 고전들이 다수 제시되어 있다.

 

 

 

 

저에게는 다음 밀레니엄까지 전해주고 싶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적인 질서, 정확성, 시적 사고력, 그러나 동시에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력에 대한 경험이 내표되어 있는 문학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하버드대학교 강연(1985)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77.

 

성서, 일리아스, 미메시스, SF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자기서사’(*자기서사란 문학치료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문학작품이 각각 다른 작품서사를 지니고 있듯, 개개인도 자신만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의 유형과 수준이 나뉘어져 있어 자기서사를 진단하는 도구도 있는데 문학치료와 자기서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정운채 교수님의 연구를 위주로 건국대 서사와 문학치료연구소에서 출판/발행된 책이나 논문을 보는 것이 좋다.)에 따라 특히 마음에 남는 대목이나 인상깊은 작품은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기에 한 발짝 성장할 수 있었던 모세의 이야기’, 알렉산드로스 황제와 다리우스 대왕을 통해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에서 좋은 사람을 고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 ‘비극이 아닌 희극을 통해 삶과 진리에 다가가는 경로를 모색한 움베르토 에코, 로마의 멸망으로부터 비롯된 삶의 혼란에 대한 해답을 진정한 신국,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라보는 현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용서의 문제, 그리고 호메로스의일리아스에서 세부적이고 고정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고민과 깊은 내면을 표현해 진실을 그려내는 미메시스 계열의 작품들의 차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차별과 폭력의 이야기들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모세는 신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40년 동안의 사막 생활은 모세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모세가 본 가시떨기나무는 실제로 불에 연소되지 않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선이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가시떨기나무에서 들려온 소리는 신의 소리이자 모세 내면의 목소리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42.

 

 

 

 

우리는 왜 중세를 이해해야 하는가? 문명이 다시 야만으로 쇠퇴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리는 세상. 2017년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중세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03.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15.

 

 

호메로스는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존재하는 사실만을 표현하지만 창세기에서의 미메시스는 깊은 해석을 통해 진실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진실의 차이.

 

아브라함의 영혼은 절망적인 번역과 희망에 찬 기대 사이에서 찢기고 있다. 그의 말없는 복종은 중층적이며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문제가 많은 심리적 상황은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호메로스 주인공들의 운명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그들은 매일 아침 그것이 마치 그들의 삶의 첫날인것처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들의 감정은 강렬하나 단순하며 즉각 표현된다.

-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44-245.

 

유대인카프카가 숨진 지 십년 후, 옆 집 의사, 친구, 스승이던 독일 유대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직장과 집에서 쫓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역겨운 벌레가 되어버린 그것들은 살충제에 의해 학살당한다.

(중략)

우리 모두의 영원한 변신.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과 폭행과 차별을 저지르는 또 하나의 우리 모습을,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82.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비극들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다. 박승찬 교수님을 비롯한 중세 전문가들이 중세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바라보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말로 중세의 그 찬란하고도 한편으로 어두운 모습을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위안부 피해자분들과 군함도......,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 이 모두가 질문성찰이 부재했기에, 폭력과 차별에 대한 경계가 없었기에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자칫 이 역사가 반복되는 상황이 생길까 우려스럽다.

아베 정권의 극우적 성향과 반성없는 태도, 마치 유대인들을 배척했듯 이민자 배척 정책을 벌이는 트럼프,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진실과 정의가 너무나도 멀어보였던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과 폐단.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개개인 모두가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의문을 품고 있는 일에 계속해 질문을 던지며 숙고해야한다. 이러한 숙고와 성찰의 과정이 따를 때에만 사회, 나아가 지구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권력을 쌓고 부를 축적하거나, 자국의 이익 -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에만 매몰된다면, 질문이 없는 반복적이며 기계식 훈련과 같은 교육환경이 지속된다면 인간 내면의 항존적인 가치들 - 사랑, 평화, 정의, 자유 등 -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이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고 사회의 오류를 비판할 때 삶이, 인류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성찰과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을 읽은 후 자기 나름의(자기 내면에 깊이 지니고 있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김대식 선생님의 질문을 읽고 던져버리는 수동적 독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능동적 독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능동적 독서, 질문하기를 잊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그 모범과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있는 책이다.

 

 

세상과 자신의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전능한 호모데우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주 최고의 힘을 가졌지만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신.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는 신.

그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21.

 

 

 

 

by papyros 2017. 3. 30. 00:32

밑줄긋고 생각잇기 5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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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민음북클럽 밑줄긋고 생각잇기모임도 마지막 주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주인 이번 5주차에는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사랑의 변주곡, 꽃잎1, 이렇게 세 편의 시가 특히 마음에 남았다.

 사랑의 변주곡은 그 서두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언뜻 제목을 보면 강렬한, 뜨거운 사랑에 관한 시로 오인할지 모르나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4 · 19혁명을 지나며 화자가 겪은 내면의 깨달음이 제시되어 있다. 1연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의 끝에서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연에서 제시되는 도시- ‘서울의 등불’-는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에 지나지 않는다. 즉 도시는 돼지우리의 밥찌꺼기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사랑이 발견되는 공간으로서 자리한다. 김수영 자신이 겪은 4 · 19혁명도, 불란서혁명도, 결국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혁명안에는 이데올로기권력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간악한 폭풍과 같은 고된 역경을 이겨내고 열매 맺는 복사씨살구씨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인간애)과 정의正意에 대한 신념이 지니는 힘이, 그 어떤 도시의 크기보다도 더욱 크다는 것을 시인은 4 · 19를 통해 배웠을지 모른다. 즉 이 시는 혁명을 통해 시인이 깨닫고 내면화한 깨달음을 강렬하면서도 담담한 시어로 묘사하는 시로서, 유의미하다. (임홍배 해설 참조. 출처 : http://blog.daum.net/lespaul6/228758)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중략)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중략)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P126-128.

 

 

 

세편의 꽃잎 연작시 중에서는꽃잎1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3연에서 보듯 화자는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보고 임종의 생명같기도 하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다고도 하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다고도 한다. ‘임종이 아닌 생명에 방점을 찍은 것에, 그리고 한 장의 얇은 꽃잎이 바위를 뭉갠다고 표현한 것을 통해 시를 이해해본다면 시인은 이 시에서 꽃잎을 통해 생명력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대한 바위를 뭉갤만한 힘을 지닌 꽃잎혁명의 힘과 같이 어두움과 죽음, 소멸보다는 더 큰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다.

(이광호 평론가 해설 참조. / 출처: http://cafe.daum.net/ryhn1616/IP7w/216)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김수영, 꽃잎1, P132.

 

 

 1968년 발표된은 김수영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정전正典이다. 이 시를 짓고 불과 보름 만에 시인이 타계한 바, 이 시가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그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소망어린 메시지처럼 들린다. 거센 비와 바람에 절망하며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풀의 강한 생명력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꺼지지 않는 촛불의 의미, 올바른 삶에 대한 희망/소망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 P142.

 

 

 

5주간 읽어온 김수영 시인의 시선 거대한 뿌리를 마무리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번 독서는 제대로 독서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그저 1960년대 모더니즘 시인으로 현실참여적 시를 많이 써온 시인으로만,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시인 김수영을 알고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지닌 실존에 대한 철학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려면 먼저 김수영의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평전 등을 읽어야 하며, 김수영 시세계에 영향을 준 철학자-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최하림 시인이 저술한 김수영 평전,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이해를 선행한 후 거대한 뿌리의 시 한 편 한편을 이해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만큼, 오래 두고 고심하며 읽어야 그 빛을 발하는 시집이라 생각한다.

 

 

 

 

 

 

알랭 바디우의행복의 형이상학의 경우, ‘저자 인터뷰글과 옮긴이의 말’(행복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다)를 읽고 나름대로 5주간 읽어온 내용을 회상하며 정리해 보았다.

결국 행복은 소극적 의미의 만족과 다른, 보다 능동적이며 실존적 차원의 가치인데, 지난 주차의 4장에서 분명히 보았듯, 이 행복이 주체의 차원에서 실현되려면 행복이 지니는 가능성영향력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하며, 공동체 내의 행복이란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정언명령으로 삼을 만한 규율을 실천적으로/실존적으로 선택하며 새로운 규율을 통해 공동체를 변화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만족이 아닌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철학 안에서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야 하는 이유의 답은 바로 현 사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싶다. 특정 개인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닌,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다수에 의해 합의된정언명령,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실천되는 자리일 때 비로소 당면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고 사회/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앞서 거대한 뿌리에서 살펴보았던 김수영 시인의 메시지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행복은 단순히 불행의 부정일 수 없으며, 삶의 선물이나 증여는 만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삶의 선물을 받으려면 반드시 상당한 각오를 해야만 하며,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실존적 선택입니다.

                                                                                                 -행복의 형이상학, P173.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은 오직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동물적 차원에 머무른다. 반면 행복은 진리를 구성하는 주체를 위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분명히 만족과 구별된다.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 자체에서 오는 개별적 욕구와 달리, 어떤 공유된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인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82.

 

 

 

 

 

  분석가 담론에서 바디우 철학의 주체는 진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자가 아니라 사건과 그 이후 나타나는 진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상의 자리에 선다. 심지어 철학마저도 그 자체의 진리를 보유하는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다수의 진리가 철학의 성립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주인 기표의 사라짐, 해방, 즉 모두가 모두와 평등해지며 결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는 철학의 전달과 토론이다. 이런 여정을 거쳐 수정된 철학에서, 행복은 플라톤에게 그랬던 것과는 달리 철학자만이 독점하는 정동이 아니다. 바디우의 뒤집힌 플라톤주의에서 행복은 주체들 간에 평등하게 분유될 수 있는 정동이자 민주주의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가치이며, 바디우가 말하는 그대로 주체가 될 가능성은 인간 동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행복의 형이상학, P195-196.

 

 

 

 

  행복이란 변화를 받아들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기존의 방향과 다른 삶이 있음을 확신할 때 얻을 수 있는 정동임을 가리킨다. 행복은 언제나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며, 이 발명을 통해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집단과 그 집단에서 작동하는 규율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집단 속에서 규율이란 또한 자유이며 자신의 규율을 지탱하기 위한 의지이기도 하다.

-행복의 형이상학, P198.

 

 

 

  5주간 행복의 형이상학독서를 하며 문장의 면면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철학자나 철학도가 아닌 이상, 어쩌면 이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처음 책을 접할 때는 정말 너무 난해 하여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는데, 어느 순간-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자 생각했더니 전체적인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끊임없이 실존적 사유와 선택을 해나간다면 행복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더욱 깊이 고민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y papyros 2017. 2. 15. 23:10

밑줄긋고 생각잇기 4주차 - 거대한 뿌리, 행복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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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주차에는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한국문학사까지 세 편의 시가 인상적이었다. 세 편의 시를 통해, 시인 김수영이 지니고 있었던 시대의식과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964년 발표된 시이다. 생소한 시이며 일전에 접한 적이 없는 시이지만, 6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첫 연은 6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뿌리가 가라앉고 이 가슴의 동계도, 기침도, 한기도, 가족들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생명마저 이미 맡기어진 죽음의 가치가 지배하는 질서의 세상 속에서 화자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투쟁하는 방법으로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한 마디 을 내뱉기 조심스럽고 두렵기까지 한 시대상황에서, 화자는 자유로이 발언할 수 없다. 때문에, 화자는 무언의 말을 택한다. 4연을 보면 이 무언의 말하늘의 빛이자 물의 빛’, ‘우연의 빛’, ‘우연의 말로 표현된다. 이에는 긍정적인 속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말이며 죽음에 섬기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겨울의 말이자 의 말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무언의 말은 곧 시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소신있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를 지어 자신의 가치와 생각, 신념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발표되면 이는 세상이 함께 공유하는 작품이기에 더 이상 내 말이 아니게 된다. 결국 이 시는 김수영의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시인의 이러한 소명은 미시권력은 전짓불 뒤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진술을 요구하는 감시장치의 요소가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었던 60년대 시대상황과 연결된다. 이청준이 이러한 시대상황에 대해 메타픽션으로 대응했다면, 김수영은 권력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언어를 통해 시대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시는 김수영 시의 의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시인으로서의 자기희생을 내포하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김수영, , P103-10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교과서에 수록되어 중등교육에서 이미 오랜 시간 교수-학습 되어 온 정전[正典에 속한다. 시대현실에는 강력히 비판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자기고백적인 시로 잘 알려져 있는데, 금번에 재독하면서 눈에 띄었던 점은 학창시절 배우고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연에서 당대 문제시되었던 사회문제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2연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소설가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는그릇된 현실에 대해, ‘언론의 자유수호와 월남파병 반대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시인으로서의 슬픈 천명을 자각했던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와도 같은 가치를 향유하고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

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중에서, P111-113.

 

 

이 한국문학사에서 시적 화자는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겪으며 이어 내려오는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오늘날 이 시대에는 김동인이나 박승희 같은 작가들과 같이 헌신적인 작가도, 또 김유정 같이 직접 낮은 자리에서 체험하고 골몰하며 작품을 집필하는- 자기를 희생하며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찾기 드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감수하며 자기만의 글을 써내려가는 충실한 글쟁이들이 모여 이 한국문학사가 이루어졌으므로 비웃을 대상이 아님을, 화자는 강조하고 있다. 즉 오늘날 이 한국문학사또한 거대한 뿌리의 전통 안에서 그 잠재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이경수 공저, 2016년 젊은평론가상 수상 작품집, 지만지, 2016. 참조)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고민해왔다

김동인, 박승희같은 이들처럼 사재를 털어놓고

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

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

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

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

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신현대문학사의 시를 깨알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

될 수만 있다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한 글씨보다 더

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시기의

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핑 출판사의 일을 하는 이 무의식 대중을 웃지 마라

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

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

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

저들의 무서운 방탕을 웃지 마라

이 무서운 낭비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

 

-김수영, 이 한국문학사중에서, P114-115.

 

 

 알랭 바디우의행복의 형이상학의 경우, 마지막 장인 행복의 정동에 관해 읽어 내려갔다. 전반적인 내용이 난해해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부분을 생각한다면, 결국 철학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즉 실존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진리를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진리의 실존은 원칙, 규범, 경험으로 삼을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가치있는 것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가야 한다. 즉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처럼 철학에도 일종의 정언명령이 기대되는 것이다. 즉 철학적 질문을 통해 시대를 진단하고, 이에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진리를 탐색 및 구축하고, 이렇게 구축한 진리를 통해 참된 삶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실존적 경험이 자리할 때, 철학을 통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연명령(이념)을 구축하여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이가 비로소 철학(적 사유)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 예비교사로서 나는 교과교육만큼이나 학습자들이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에 대해 고민한 후 가치관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주체적으로 확립하고 자신이 확립한 올바른 가치관에 걸맞게 인격을 갖출 수 있도록 인격교육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할을 철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철학을 통해 자기 나름의 진리를 발견해 자발적으로 자신이 평생을 지니고 살아갈 만한 정동을 삼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때문에 학교현장에서는 개별 교과안에 철학적 질문과 고민을 녹여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김수영 시선과,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을 잠시 연관 지어 본다면......., 아마도 김수영 시인의 정동은 자유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대의 문제를 비판하고 그 본질을 회복해 한 국가의 개개인 모두가, 그 사회가 비로소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김수영 시인은 바로 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선의 이데아, 진리를 대중들에게 공유한 것이다.

 

 

 

참된 삶은 이념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것, 이를테면 결과적인 통합의 표지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완전한 삶을 향한 최초의 열망을 되찾게 되며, 완전한 삶의 열망은 단지 이념과 진리로 표명될 뿐 아니라, 완성된 삶, 곧 진리에 관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거친 삶이라는 개념으로도 표명된다.

-행복의 형이상학, P112-113.

 

플라톤은 이데아의 철학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에게 이 경험을 전달할 필요성은 대체로 경험 자체의 내용 바깥에 있다. 이는 플라톤이 철학자는 정치가나 교육자가 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이유이다. 선의 이데아로 이끌릴 때, 철학자에게는 오직 하나의 이데아만이 있을 뿐이며, 바로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진리의 경험 바깥에서 오는 이러한 전달의 필요성은 플라톤에게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요청이다. 진리의 경험은 사회의 일반적인 조직이라는 층위에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경험을 전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지배적 의견의 영향 아래 놓인다.

-행복의 형이상학, P127-128.

 

내게 철학은 진리들이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하는 사유의 교과(discipline, 훈육), 곧 단독적인 교과이다. 그로 인해 철학은 명령과 삶의 통찰로 향하게 된다. 통찰이란 어떤 것인가? 개별 인간에게 가치가 있으며 진정한 삶을 전달하고 그의 실존을 방향 짓는 것은 이러한 진리들로부터 시작된다.

(중략)

철학은 진리들의 실존을 제시하는 삶에서 진리들의 실존을 하나의 원칙으로, 규범으로, 경험으로 삼는 삶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무엇을 부여하는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가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은 경험의 혼란에 정리를 제시하며, 따라서 방향을 이끌어 낸다. 혼란에서 정향(定向)으로 옮겨 가는 이 상승은 전형적인 철학의 활동이며 철학의 고유한 교육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4-145.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엄하면서도 강렬한 삶, 엄격하게 동물적인 특질들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정동을, 실제적 행복의 정동을 나타내는 삶이란? 나는 철학이 참된 삶을 내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그 구상과명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는 철학 자체의 내부에 있는 참된 삶을 알려야 한다. 그저 외부적인 명령이 아니라 칸트적 명령으로서 말이다. 이것은 삶에 겪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내재적으로 나타내고 보여 주는 정동의 관할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내가 매우 선호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불멸의 삶을 살라.”는 정식이 있다. 이런 정동에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지복”, 파스칼에게는 기쁨”, 니체에게는 초인”,베르그송에게는 신성함”, 칸트에게는 존경…… 나는 참된 삶의 정동이 있다고 믿으며, 이에 가장 단순한 이름인 행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5-146.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보다 행복하다고 믿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부자보다, 향락을 즐기는 사람보다, 참주보다, 그 누구보다 더. 플라톤은 그치지 않고 이 문제를 재론하며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증명을 제시한다. 오직 이념의 표지 아래 사는 자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며, 바로 그가 모든 사람들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확하다. 철학자는 삶의 내부에서 무엇이 참된 삶인지 알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리라는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P147.

 

by papyros 2017. 2. 8. 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