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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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민음북클럽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민음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우리는 매순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ㅔ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이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자기자신을 관찰하는 데서 오기도 한다.’
-배철현,『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38쪽.
2015 Grand Master Class 생각수업 당시 광운대에서 김대식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연에서 ‘삶은 의미있어야 하는가?’는 화두를 제시하시며, 삶의 의미-즉 삶의기능과 목표를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 현재에만 치우쳐 근시안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미래의 ‘나’ -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시안적 안목’ 에 대해 이야기 하신 바 있다.
바로 이 ‘거시안적 안목’을 확대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김대식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도 제시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최재천 선생님께서 지식의 융합, ‘통섭統攝’을 강조하신 바 있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문이과가 통합되는 등 인문사회학과 과학의 경계지우기가 강조돠고 있다. 이 책 ‘뇌과학자의 저서’는 딱딱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무색할만큼 다양한 인문사회 서적과 문학을 통해 품은 질문과 생각의 단상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항존적인 가치를 담은 ‘고전’들이 다수 제시되어 있다.
“저에게는 다음 밀레니엄까지 전해주고 싶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적인 질서, 정확성, 시적 사고력, 그러나 동시에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력에 대한 경험이 내표되어 있는 문학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하버드대학교 강연(1985)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77쪽.
성서, 일리아스, 미메시스, SF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자기서사’(*자기서사란 ‘문학치료’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문학작품이 각각 다른 작품서사를 지니고 있듯, 개개인도 자신만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의 유형과 수준이 나뉘어져 있어 자기서사를 진단하는 도구도 있는데 문학치료와 자기서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故 정운채 교수님의 연구를 위주로 건국대 서사와 문학치료연구소에서 출판/발행된 책이나 논문을 보는 것이 좋다.)에 따라 특히 마음에 남는 대목이나 인상깊은 작품은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기에 한 발짝 성장할 수 있었던 ‘모세의 이야기’, 알렉산드로스 황제와 다리우스 대왕을 통해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에서 ‘좋은 사람’을 고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 ‘비극’이 아닌 ‘희극’을 통해 삶과 진리에 다가가는 경로를 모색한 움베르토 에코, 로마의 멸망으로부터 비롯된 삶의 혼란에 대한 해답을 ‘진정한 신국,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라보는 현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용서’의 문제, 그리고 호메로스의『일리아스』에서 세부적이고 고정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고민과 깊은 내면을 표현해 ‘진실’을 그려내는 미메시스 계열의 작품들의 차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차별과 폭력의 이야기들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모세는 신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40년 동안의 사막 생활은 모세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모세가 본 가시떨기나무는 실제로 불에 연소되지 않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선이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가시떨기나무에서 들려온 소리는 신의 소리이자 모세 내면의 목소리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42쪽.
우리는 왜 중세를 이해해야 하는가? 문명이 다시 야만으로 쇠퇴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리는 세상. 2017년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중세’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03쪽.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15쪽.
호메로스는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존재하는 사실만을 표현하지만 「창세기」에서의 미메시스는 깊은 해석을 통해 진실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진실의 차이.
아브라함의 영혼은 절망적인 번역과 희망에 찬 기대 사이에서 찢기고 있다. 그의 말없는 복종은 중층적이며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문제가 많은 심리적 상황은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호메로스 주인공들의 운명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그들은 매일 아침 그것이 마치 그들의 삶의 첫날인것처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들의 감정은 강렬하나 단순하며 즉각 표현된다.
-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에서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44-245쪽.
유대인카프카가 숨진 지 십년 후, 옆 집 의사, 친구, 스승이던 독일 유대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직장과 집에서 쫓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역겨운 벌레’가 되어버린 ‘그것들’은 살충제에 의해 학살당한다.
(중략)
우리 모두의 영원한 변신.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과 폭행과 차별을 저지르는 또 하나의 우리 모습을,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282쪽.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비극들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다. 박승찬 교수님을 비롯한 중세 전문가들이 중세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바라보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말로 중세의 그 찬란하고도 한편으로 어두운 모습을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위안부 피해자분들과 군함도......,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 이 모두가 ‘질문’과 ‘성찰’이 부재했기에, 폭력과 차별에 대한 경계가 없었기에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자칫 이 역사가 반복되는 상황이 생길까 우려스럽다.
아베 정권의 극우적 성향과 반성없는 태도, 마치 유대인들을 배척했듯 이민자 배척 정책을 벌이는 트럼프,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진실과 정의가 너무나도 멀어보였던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과 폐단.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개개인 모두가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의문을 품고 있는 일에 계속해 질문을 던지며 숙고해야한다. 이러한 숙고와 성찰의 과정이 따를 때에만 사회, 나아가 지구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권력을 쌓고 부를 축적하거나, 자국의 이익 -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에만 매몰된다면, 질문이 없는 반복적이며 기계식 훈련과 같은 교육환경이 지속된다면 인간 내면의 항존적인 가치들 - 사랑, 평화, 정의, 자유 등 -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이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고 사회의 오류를 비판할 때 삶이, 인류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성찰과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책’을 읽은 후 자기 나름의(자기 내면에 깊이 지니고 있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김대식 선생님의 질문을 읽고 던져버리는 ‘수동적 독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능동적 독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능동적 독서, 질문하기를 잊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그 모범과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있는 책이다.
세상과 자신의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전능한 호모데우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주 최고의 힘을 가졌지만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신.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는 신.
그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 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21쪽.